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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 예수의 사역
E. 굶주린 백성을 먹이심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 이 사역은 엘리사의 사역과 관계됨
성경을 읽어보니까 좀 황당하다.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말씀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있고 요한복음에도 있고,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구약에 보면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다.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라고 말하는데, 그 능력의 선지자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때 엘리사가 따라가면서 나에게 갑절의 은혜를 달라고 해서 두루마기를 얻어 입은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 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했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런데 엘리사의 사적 가운데 꼭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었는데, 먹고 나서 남은 부스러기가 많이 남았다는 이런 기사가 열왕기 4장에 나온다.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엘리사를 상기하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습관이 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그들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유사한 사람이 오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 엘리사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 모세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새로 온 엘리사가 아닐까? 새로 온 다윗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건을 4복음서에서 다 취급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일도 물론 많았겠지만 복음서에서 취급하고 있는 사건들은 모두 이런 연관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엉뚱한 이야기를 해봐야 모를 것이다. 이미 벌써 알고 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건들만을 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엘리사의 사건과 관계가 된 것이다.
엘리사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오면 우리 민족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사가 온다는 것은 메시아가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 같은 사람이 오면 메시아가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단순하고 쉽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왜 예수를 그렇게 많이 따라다녔는가?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예수님이 단순히 병을 고친다는 것만이 아니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겠느냐,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이런 생각으로 따라다닌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다.
1. 세상은 배고픈 곳임
여기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해가 저물고 배가 고팠다고 했다. 이것은 배고픈 세상, 굶주린 세상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우리도 몇날 며칠 따라다니다 보면 배가 고플 것이다. 당연히 있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세상은 이렇게 배가 고프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배고픈 것이 어디에는 없겠는가? 다 있겠지만 세상은 굶주린 곳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1-1. 먹을 것을 먹지 못했으므로
왜 세상은 굶주리고 있는가? 그것은 먹을 것을 못 먹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먹을 것을 못 먹어서 배고픈 것이다.
1-2.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양식을 버렸음으로
무엇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 것인가? 모든 생물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양식이 있다. 개는 개에게 정해준 것이 있고, 소는 소에게 정해준 것이 있고, 식물은 식물에게 정해준 것이 있다. 모든 생물은 자기 먹을 양식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는 땅 속에 혀를 박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음식을 먹어야 산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으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다 정해져 있는 것을 먹으면 살도록 되어 있는데, 사람은 정해진 것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풀도 살고 모든 생물이 다 사는데 사람만 정해진 것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밥을 먹으니까 동물로서는 산다. 하나님이 목적하는 인간은 동물적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을 표현할 하나님과 협력할 인간을 찾고 있다. 그 인간으로서는 배고프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 많이 먹어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모두가 난리다. 이것은 북한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다. 북한에서는 굶어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배불러서 사건이 생긴 것이다. 지금 다이어트를 한다고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른다.
인간은 먹을 것을 먹지 못했다. 인동물적 인간은 먹을 것을 많이 먹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는 인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인간으로서는 먹을 것을 못 먹었다. 하나님께서 정해준신 양식을 버렸다. 동산에서 네가 임의로 먹어라는 것을 안 먹고, 기어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다. 안 먹어도 죽지만 못 먹을 것을 먹어도 죽는 것이 아닌가? 안 먹어도 굶어 죽지만 못 먹을 것을 먹으면 바로 죽는다. 정녕 죽으리라.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못 먹을 것을 먹었다는 뜻이다. 안 먹어서 굶어 죽으면 적어도 열흘을 살지만 못 먹을 것을 먹으면 당장 죽는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정해주신 양식을 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1-3. 사탄이 유혹하는 양식을 먹음으로
사탄이 유혹하는 양식을 먹었다. 그러니까 당장 죽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당장 죽을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독을 안 먹더라도 영양가가 없는 것을 먹으면 헛배만 부르다. 칼로리가 없으니까 배만 잔뜩 부르다. 헛배만 부른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자만심이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헛배만 부르다면 그것은 자만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담은 그렇게 된 사람이니까 그렇다.
⑴ 안식을 잃음(만족이 없음으로)
그래서 안식을 잃게 된 것이다. 안식을 잃었다는 말은 만족이 없다는 말이다. 안식은 만족이다. 엿새 동안에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족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니까 너희도 만족해라. 이런 뜻이다. 결국 먹을 것을 못 먹고 엉뚱한 것을 먹었으니까 만족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뭘 먹으려고만 한다. 단백질이 필요한 아이들이 단백질을 못 먹으면 고창병이라고 해서 헛배가 부르는 데, 무엇이든 주워 먹는다. 배가 막 터지려는 데도 먹는다. 왜냐하면 들어올 것이 안 들어왔기 때문이다. 만족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만족하라고 쥐도 잡아 먹이고 개구리도 잡아 먹이고 그랬다.
사람이 왜 안식이 없는가? 만족이 없어서 그렇다. 만족이 없는 이유는 먹을 것을 안 먹고 못 먹을 것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법을 찾게 된다. 뭘 먹을 것인가를 찾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답이 없기 때문에 답을 찾는 것이다. 먹을 것만 딱 있으면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먹어야 되나, 저것을 먹어야 되나하고, 약이 없으니까 이것을 해야 되나, 저것을 해야 되나하고 찾는다.
문둥병은 옛날에 약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에 약을 찾는다. 찾다 찾다가 안 되어서 오죽하면 사람을 잡아먹으면 낫는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병환자 촌을 가려면 무서워하곤 했다. 신동에 나병환자 촌이 있다. 거기에 사람들이 가려면 무서워했다. 거기에 가면 사람 잡아 먹는다는 소리가 나니까 그랬다. 오죽 방법이 없으면 그랬겠는가?
⑵ 종교적 갈증이 일어남(방법을 찾음)
① 가인과 아벨이 종교를 만듦
가인과 아벨이 종교라는 방법을 만들었다. 이 방법을 만들었으나 결국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오죽하면 죽였겠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래도 자기 동생인데 오죽하면 죽였겠는가? 문둥이가 병을 나으려고 오죽하면 사람을 잡아먹겠는가? 하다하다 안 되니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 번 제사를 드리다가 그것이 안 되니까 그랬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가인이 아무리 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니까 이렇게라도 하면 응답하지 않을까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분노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종교를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생각했지만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되니까 결국 살인을 하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적 전쟁, 중동의 화약고에서 싸움이 자꾸 일어나려고 한다. 거기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지역이다.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유태인과 이슬람이 대결하던 것이 묘하게도 기독교와 이슬람이 대결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옛날 십자군의 전쟁도 그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결국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종교적인 전쟁은 끝이 없다.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은 다 끝이 나는데 종교 전쟁은 끝이 안 난다. 이것은 알고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전쟁이다. 어느 한 쪽이 죽어야 한다.
② 네피림이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행함
그리고 네피림이 생겼다. 이것은 자기 생각대로 했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 봤다. 종교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것을 열심히 해보다가 결국 사람을 죽였다. 그 다음에는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 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각기 제가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창6:2)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봤다는 뜻이다. 천사까지 왔으니까 그렇다. 사람이 천사와 결혼하고, 천사가 사람과 결혼하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것이 아닌가? 내 속에 만일 천사의 기질이 있다면 나는 만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의 인간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천사도 마찬가지로 만일 사람을 얻는다면 더 이상의 길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네피림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해본 것의 극치를 이야기한다. 생각에 좋을 대로 끝까지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③ 바벨에서 야망을 쌓음
그렇게 하고서도 안 되어서 그 다음에는 바벨로 갔다. 여기서는 야망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도덕적인 야망도 있고, 진리에 대한 야망도 있으며, 야망이라는 것은 많다. 예술에 대한 야망도 있고 온갖 야망이 다 있다.
-. 도덕적 야망을 쌓음(쌓일수록 불안해짐)
여기에는 두 가지만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인간다워지려면 도덕적(道德的)이어야 한다. 그래서 도덕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쌓으면 쌓을수록 불안한 것이다. 쌓을수록 편안해져야 하는데, 쌓을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도덕적 야망이다. 왜냐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되려니까 그렇다. 끝이 없다. 돈을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처럼, 명예를 가지면 더 가지려 하는 것처럼, 도덕도 이상하게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또 더 갖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쌓을수록 불안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쌓아 가면 쌓아갈수록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더 불안해지고 불안해진다.
-. 진리의 야망을 쌓음(알아 갈수록 모호해짐)
진리에 대한 야망도 그렇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불안해지고 허망해지고 황당해진다. 그러니까 적당히 알 때가 좋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더 초과해서 알려고 생각하면 그 다음부터는 황당해진다고 한다. 수학(數學)을 하는 사람들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황당해진다고 한다. 하나 더하기 둘하면 셋이니까 쉽고 명백한데, 수학이 자꾸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황당한 것이 된다고 한다. 그것으로 먹고 살 사람이 아니면 너무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진리가 다 그렇다. 철학(哲學)이 처음에 출발할 때는 좀 단순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황당해져서 이제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게 되었다. 어디까지 왔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그렇게 바꿔지고 있다. 알수록 자꾸 모호해지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이 무한한 것이 아니다. 이 해골 안에 들어있는 것인데 이것이 무한한 우주를 어떻게 다 알겠는가? 모든 것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바가지는 바가지이지 아무리 좋은 것이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박 하나밖에 더 되겠는가? 적당하게 아는 것이 좋다. 너무 많이 알려하면 어렵다. 알수록 모호해진다.
바벨이 이 야망을 쌓다가 무너졌다. 무너져서 혼잡해졌다. 서로 언어를 못 알아듣게 되었다. 말을 못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은 황당해졌다는 말이다. 황당해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돼버렸다. 높이 올라가려고 할수록 높이 올라간 사람끼리는 말이 안 통한다. 초등학교 때는 잘 통한다. 유치원 때 제일 잘 통한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말이 안 통한다. 우리나라에 친한 친구인 두 사람이 대통령을 했는데, 꼭대기 올라가니까 둘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상대방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서로 못 알아듣는다. 야망이라는 것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모호해지고 외로워지고 불안해진다.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참된 양식이 아니다.
⑶ 방법은 많으나 주림이 채워지지 않음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주림은 채워지지 않는다. 방법만 많지 채워지지 않는다. 약은 많은데 병은 안 낫는 것과 똑같다. 문둥병 고치는 약은 이제 간단하게 되었다. 어느 병보다 쉽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너무너무 어려운 병이었다. 옛날에는 결핵이 쉽고 문둥병이 더 어려웠는데, 지금은 나병은 쉽고 결핵은 1년 정도 약을 먹어야 되니까 쉬운 것이 아니다.
① 모두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함으로 채워질 수 없음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가 없다. 왜 방법이 그렇게 많은데도 안 채워지나?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다. 될 것을 바라봐야 되는데 안 될 것을 바라보면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참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갔으면 우리도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할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도 잘못 갔으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한다. 우리가 될 수 없는 길을 갔으니까 그러면 끝이 안 난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그를 따르게 됐기 때문에 천만다행이다. 그것은 못할 사람이 없다. 내가 억지로 가서 못을 박을 수 없지만 못을 박으면 죽는 것이야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예수를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② 배고프니까 평화를 유지하지 못함
그리고 배가 고프면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일단은 먹어야 되니까 안 먹으면 싸움이 난다. 어쩔 수 없다. 사흘 굶어서 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하듯이 담 넘어 갈 때 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더 심해지면 전쟁이 난다. 배고프면 모든 것이 다 안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일단 먹고 뭐가 있는 것이니까 먹은 것이 없으면 다른 것은 다 끝나는 것이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많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못 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양식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소용이 없다.
배고프면 싸움이 난다. 이것은 만족이 없으면 싸움이 난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만족 없는 사람은 어디든 가서 지나가는 개라도 발로 한번 차고 싶다. 자기와 아무 관계없지만 괜히 한번 발로 차버리고 가고 싶다. 불만스러우면, 만족이 없으면 그렇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싸울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을 모르고 말 한마디 어떻게 했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불만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나는 모르고 그 사람에게 좋은 말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한테는 굉장히 거슬려서 원수 대하듯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불만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하려면 무조건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족한 상태인지 불만스러운 상태인지를 보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좋은 말도 만족이 없는 사람한데 하면 나쁜 말이 돼버린다. 상대방 말을 안 들어보고 상대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 말이 잠언에 있다.
만족하지 못하면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 지금 세계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쪽이 기울어져서 불만이 생기면 전쟁이 난다. 항상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불만이 많은 아이들이 있는 학교는 매일 아이들이 싸운다고 한다. 싸워서 보건실에 매일 터져서 온다. 그런데 집안에 문제없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장난은 심해도 별로 싸우지는 않는다. 결사적으로 할 일이 없다. 죽어도 좋다 할 일이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볼 일이다. 너무 배고프면 안 된다. 하여간 밥 먹는 문제부터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다른 것도 다 좋지만 밥 안 먹고는 교회도 못나온다. 배고프면 찬송도 못한다. 일단 먹는 것부터 해결해야 될 것 같다.
사탄의 말을 듣다보면 결국에는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먹으니까 그렇다. 예를 들어 답이 없다고 종교를 만들어 본다든가 답이 없다고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본다든가 답이 없다고 야망을 쌓아본다든지 다 해도 이것이 만족이 안 된다. 결국은 싸움이 생긴다.
2.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합당한 양식이 있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만족을 주는 양식이 있다.
2-1.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공급 됨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것이 공급됐다. 여기에 있는 말이 그것이다. 양식을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한테나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다는 의미다.
⑴ 예수께서는 굶주린 백성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하게 여기셨음
예수께서는 굶주린 백성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먹을 물질적 양식이 없는 것인데, 예수님이 볼 때는 목자 없는 양 같이 보였다. 갈 길을 잃고 있는, 인도자가 없는 양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그것을 불쌍하게 여겼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것도 불쌍한 일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다 굶어죽는 상황은 아니니까 목자 없는 것이 불쌍한 것이다. 우리는 양 같아서 곁길로 갔다. 사람이 각자가 다 영리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목자 없는 양은 갈 곳을 모르는 것처럼 인생도 목자 없는 양은 갈 곳을 모른다. 갈 곳을 모르는 것이 불쌍한 것이고 배고픈 것이다.
⑵ 마을로 내려가서 각자 먹게 하지 않으셨음(마을에는 참 양식이 없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을로 내려가서 사 먹도록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일종의 도전(挑戰)이다. 그런데 마을에는 참 양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상식적으로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많은 돈을 들여서 다 사 먹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 200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의 하루 임금이 1데나리온이니까 노동자 200명이 일하는 임금이다. 그런데 마을로 내려가서 사 먹으라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결했는데 왜 그런가? 마을에는 양식이 없다는 뜻이다. 육신적인 양식은 마을에 있지만 지금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사람들한테 참 양식은 마을에는 없다. 우리가 마을에 가서 이 양식을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찾으려고 마을에 가면 안 된다. 거기에는 그 양식이 없다. 서문시장에 가면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지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있는 곳에 가서 찾아야지 없는 곳에 가서 찾아서는 아무리 찾아도 안 된다. 마을에 가서는 이 양식을 못 찾는다. 우리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마을에 가서 양식은 찾지 못한다.
⑶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분배하라 하셨음
(보리떡은 부활생명을, 물고기는 세상을 이긴 생명을 상징함)
여기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나왔는데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 했더니 먹었다고 한다.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보리떡은 겨울을 지나서 열리는 것이니까 부활생명이다. 물고기는 세상을 이긴 생명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 살지만 물고기 안에는 짠 성분이 없다. 짠물이 들어오면 죽을 텐데 참 묘하게 만들어놔서 짠물에 살아도 안 짜도록 만들어 놨다. 멍청한 해삼 같은 것은 짜지만 제대로 고기처럼 생긴 것은 짠 것이 별로 없다. 세상을 이긴 것이다. 바다를 이긴 것이다. 짠 것을 이긴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⑷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음
(주님의 공급은 신성한 넘침으로 확장됨)
이것을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가 가득했다. 이치로 생각하면 안 맞다. 물고기는 혹시 뼈다귀가 있으니까 남을 수 있지만 떡은 다 먹어버리는데 어떻게 남겠는가? 물고기 뼈다귀가 12광주리 남았다면 모르지만 다 배불리 먹고 떡과 물고기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하니까 이치로 생각하면 안 맞는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공급하심, 신성한 양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공급은 신성하고 넘쳐서 확장된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조그마한 것을 가졌는데 그것을 나누니까 계속 분배했는데 오히려 남았더라는 말이다.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될 방법이 없다. 어떻게 먹으면 먹을수록 없어지지 어떻게 남겠는가?
그런데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진다는 논리가 있다. 사랑도 양식(糧食)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한다. 사랑을 못 받은 아이들은 만족이 없다. 음식이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사랑도 음식이고 칭찬도 음식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칭찬해주면 참 좋아하고 만족하는 것을 보면 칭찬도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만족하니까 그것도 양식이다. 우리에게 일차적인 만족은 먹는 음식에서 온다. 먹고 만족하기 때문에 그것은 양식이다. 사랑은 먹고 만족하기 때문에 양식이다. 칭찬은 먹고 만족하기 때문에 양식이다. 꾸지람하는 것은 양식(만족)을 뺏아가버리는 것이니까 배고프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신성한 양식은 먹으면 먹을수록 남는다, 좋은 것, 하늘에 속한 것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이 남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떡이 남은 것은 내가 안 해봤기 때문에 모르겠는데, 확실히 남은 것은 볼 수 있다. 사랑은 나눌수록 많아진다. 칭찬은 줄수록 더 만족해지고 넘쳐간다. 복음은 갈수록 더 확장되어 간다. 이런 것은 우리가 그냥 알 수 있다. 모르는 것은 놔두고 아는 것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모르는 것은 어차피 모른다.
2-2. 주님 안에서는 배고플수록 더욱 풍성한 공급이 있음(사단의 말을 듣다가 배고프면 싸움이 일어나고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배고프면 더욱 풍성한 양식을 공급 받게 됨)
주님 안에서는 배고플수록 더 풍성한 공급이 있다. 세상에서는 물질적인 양식이 없으면 전쟁이 일어난다. 앞으로 마지막 전쟁도 식량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해석을 한다. 사해(死海)밑에 엄청난 뭐가 깔려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구상에 식량이 메마를 날이 오게 될 텐데 그것이 엄청난 비료가 되어서 양식을 증산(增産)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차지하려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마지막 전쟁은 식량 전쟁이다. 각 나라마다 자기 나라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생명산업(生命産業)이라고 해서 돈이 안 되도 육성해야 된다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도 농업이 그런 문제이다. 지금은 우리가 지어먹는 것보다 사다먹는 것이 훨씬 싸지만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양식을 못 사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농지(農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은 양식이 없으면 싸움이 벌어지지만 주님 안에서는 배고플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그러니까 세계가 다른 세계다. 사탄을 말을 듣다가 배고프면 싸움이 일어난다. 사탄의 말을 듣고 살다보면 우리가 만족이 없으면 싸운다. 물질적인 만족이 없으면 싸우게 되고, 정신적 만족이 없으면 싸우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듣다보면 배고플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이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세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다.
⑴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하면 배고플수록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서 배고프면 더욱 만족해 짐(마5:6, 엡3:8)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면, 도덕적인 면이든지 진리의 면이든지 물질적인 면이든지 명예든지 어떤 면으로든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배고플수록 싸움이 생긴다. 세상에서는 많이 바라볼수록 더욱 배고픔이 생기는 것 같다. 선을 좀 낮게 하면 좀 더 쉽고 선을 높여 놓을수록 더욱 배고프다. 사람들이 좋은 말 하려면 눈높이를 낮춰라, 위만 쳐다보지 말고 밑을 내려다보고 다니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힘들다는 것이다. 자기 능력보다 높이 생각하면 안 되니까 조금 밑을 내려다보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알고 보면 지혜이다. 사람 사는 것이 조금 낮게 내려다보면 쉬운데 조금 높게 올려다보면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다 그런 것이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이 보면(올려다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고, 조금 내려 보면 사람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꾸 배가 고파진다. 점점 배고파진다. 돈 있는 사람이 더 허덕인다. 이상하다. 돈 없는 사람이 돈에 대해서 허덕일 것 같지만 안 그렇다. 돈이 있는 사람이 더 허덕인다. 먹을수록 배고프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이 또 있다. 내가 만원 있을 때는 내 위에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다. 2만원, 3만원 있는 사람 밖에는 안 보인다. 별로 갈증이 안 생기고 불만이 안 생긴다. 내가 10억쯤 있으면 그때부터는 100억 있는 사람이 부럽다. 그러니까 배가 확 고파버려 더 불만이 생긴다. 시골에 살 때는 별로 몰랐는데 도시에 와 보니까 불만이 생길 수가 있다. 시골은 다 비슷비슷하게 산다.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크게 욕심내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도시에 오면 비까번쩍한 것이 많이 있다. 갑자기 자기가 상대적으로 가난해져 버린다. 그래서 사람이 정신이 확 돌아서 도적질도 하고 싸움도 하는 것이다.
⑴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하면 배고플수록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서 배고프면 더욱 만족해 짐(마5:6, 엡3:8, )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결국 배고플수록 싸움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같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그 사람같이 되려고 하면, 배고플수록 더욱 만족해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마5:6)라고 했다. 가난해질수록 이상하게 배가 부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가난해질수록 배가 부르다. 시편을 읽어 보면 얼마나 가나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른다. “내 영혼이 주리고 목마르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갈급하고”(시42:1)와 같은 것을 보면 그 사람 어찌 사나? 저렇게 해서 인생 무슨 맛으로 사나?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이다. 그 배고픈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배고픈 것을 누가 노래하겠는가? 참 이상한 세계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하면 배고프고 싸움이 생기지만,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 배가 고프기는 고픈데 더욱 만족해진다. 만족이 없는 경우에는 내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딱 맞는 대답이다. 진짜로 100점짜리이다.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 배고플수록 만족해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는 알고 보면 다 가난한 사람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오는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다 가난한 사람 이야기이다. 부유한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3. 예수님은 참 양식임(만족임)(요6:51-57)
예수님은 참 양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이 참 양식이라는 말은 참 만족이라는 말이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영생이라는 말이 만족할 것이라는 뜻이다. 영생이면 만족이다. 영생하면 또 다른 것을 찾겠는가? 영생하면 됐지 또 다른 것을 찾겠는가? 영생은 영원한 만족이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그래서 그 떡을 좀 달라고 하니까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했다. 뭐 그런 떡이 다 있느냐? 그럼 나도 좀 먹자고 했더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했다. 그래서 억장이 무너져서 모두 가버렸다. 뭔가 될 것 같다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하니까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서 다 떠나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더라고 요한복음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물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6:67)하고 물었던 것이다. 다 가버리고 없으니까.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래도 아주 똑똑한 말을 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라고 했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래서 열둘이 남은 것 같다. 물론 그 전에도 열두 사도를 임명했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따라다니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열둘만 꼭 되었을까? 그것을 이치로 생각해보면 이래서 결국은 그래도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한 사람이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경험으로 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많이 있지만 그래도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는 이런 사람만 우리 교회 남아 있는 것 같다. 결국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예수님은 참 양식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참 양식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참 양식인가 물었더니 내 살이 양식이다. 내 피가 음료다. 이렇게 말했다. 이 배경은 이런데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이한 양식을 먹은 백성들이다.
3-1. 유월절의 양식, 광야의 양식, 가나안 땅의 양식이심
유월절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가나안 땅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크게 말해서 3단계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⑴ 바로(사단)에게서 해방됨으로 (유월절 그리스도)
유월절의 양식! 이것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에 양고기를 먹고 애굽을 나왔다. 그 사람들이 양고기를 먹는 것은 보통 우리가 먹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양고기를 먹었는데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개고기를 먹었는데 해방이 됐다면 개고기는 우리에게 대단하고 특별한 음식이 된다. 누군가가 와서 오늘 밤에 전부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으면 해방이 된다고 하여 먹었더니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가 개고기를 먹을 때 보통 생각을 갖고 먹겠느냐는 그런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양고기를 먹으라고 해서 먹었더니 다음날 아침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이 양고기의 문제는 보통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다.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바로에게서 해방된 양식, 이것을 먹은 사람들이다.
⑵ 하나님께 은혜를 입음으로(만나와 생수 그리스도)
그리고 광야에 와서는 어떻게 했는가? 농사도 못 짓고, 사막이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당장에 먹을 것이 필요하고 마실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거기서 만나와 생수를 40년간 먹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참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를 먹었기 때문에 살았을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들이 다시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가지고 와서 먹었겠는가? 아니면 거기에서 농사를 지어서 먹었겠는가? 우리가 모르지만 하여간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었으니까 살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니고 자기 자식들에게 한 말이다. 지금도 유대인 회당에서 랍비가 나와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데, 우리가 생각해 보면 만나와 생수라는 것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생수는 혹시 모르지만 만나가 어떻게 내려오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분명히 이 양식을 먹어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광야의 양식을 먹어 본 사람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먹어 봤다, 은혜를 입어 봤다는 말이다. 도저히 될 수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것과 같지 않겠는가. 내게 절체절명의 시간이 왔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것이 왔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죽게 됐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왔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광야에서 40년간 하늘에서 매일 같이 이 양식이 내려와서 먹었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것이다. 반석이 깨져서 물이 나왔다고 해석해도 그것이 좀 부족하지 않겠는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자기가 은혜를 입은 것이니까 만나와 생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이다. 은혜를 입어 본 사람이다. 은혜를 먹어본 사람들이다.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일생에서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만나와 생수를 먹어본 사람들이다.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본 사람. 내가 그때 은혜를 입었지, 그때 은혜를 입었구나. 이런 사람은 만나와 생수를 먹어본 사람들이다. 은혜를 입은 것이니까.
⑶ 인격의 소출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성막 그리스도)
그 다음은 가나안 땅에 가서 양식을 먹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면 가나안 땅에 가서 농사를 지어서 먹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경작을 해서 비로소 인격의 소출을 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은혜를 통해서 살았다. 순전히 은혜로만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가서는 땅을 경작해서 소출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의 소출이다. 그런데 이 소출의 의미가 왜 중요한가? 광야에서 만나를 가지고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가지고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은혜는 무진장 받았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넘치는 찬양하니까 예배가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려면 무언가 내놓을 것이 있어야 된다. 공짜로 찬양만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떡도 내놔야 되고 무엇인가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로만 감사하지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답답하지 않겠는가. 정말 감사를 표현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다. 옛날 우리 찬송가에 ‘몸 밖에 드릴 것이 없어 이 몸 바칩니다.’는 노래가 다 있었다. 은혜를 입었는데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내 놓을 것이 없다. 이것이 참 답답한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인데, 광야에서는 은혜는 입었지만 섬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섬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은혜만 입으면 되지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진짜 은혜를 입었으면서 섬기지 않으면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가나안의 양식은 섬길 수 있는 양식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그 땅에 이르거든 그 땅의 소출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그 땅의 소출로. 그 땅의 소출로. 그 말이 신명기 같은데 보면 자꾸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 섬길 수 있는 그런 만족이 왔다는 것이다.
유월절의 만족! 광야의 만족! 가나안 땅의 만족! 이 만족은 인생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만족이라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인생의 길을 살려면 이렇게 돼야 된다. 정상적인 인생의 길을 걸어가려면 이렇게 만족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니까 특이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3-2.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심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유월절 양도 먹어본 일도 없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본 일도 없고, 가나안 땅의 양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본 일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다. 이 영생하는 양식 속에는 만나와 생수와 유월절 양과 인격의 소출이 다 들어 있다.
⑴ 구속이며 구속자이심 (고전1:30 엡1:7)
그래서 예수님은 구속이시고 구속자다. 나를 원위치로 되 물려 준 사람이다. 그분 자신이 원위치에 있는 분이고 또 우리를 원위치로 되돌려준 분이다. Redemption한 분이다. 구속하신 분이다.
사람은 왜 만족이 없었던가? 제자리로 못 돌아와서 만족이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까 자기 자리에 안 있기 때문에 남의 자리에 있으니까 배고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고팠다. 우리가 원 위치로 돌아오면, 주 예수 안에서 본 위치로 돌아오면, 사람이 비로소 안정이 된다. 안식이 된다. 밥 먹고 나면 위장이 편안해 지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밥 안 먹으면 속이 편안하지 않은 것을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나는 5시간이 지나서 밥을 안 먹으면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전쟁이 나서 괴로워진다. 그때 딱 뭘 먹으면 조용해진다. 위장에 평화가 온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왜 부글부글 끓었나? 그것은 먹을 것이 안 들어와 제자리에 못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구속받은 자리에 딱 가면 사람이 안정이 된다. 내 인생이 여기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그때그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내가 안식에 이르게 된다.
스님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안 하겠는가. 내가 잘 모르지만 그런 어떤 평안을 찾으려고 하니까 자꾸 헛것을 버려라, 헛것을 버려라고 하는 것 같다. 헛것 때문에 배가 아프니까 자꾸 버려라, 버려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평안에 이르려고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진짜로 평안하려면 내가 구속된 자리에 와야 평안하다. 사람이 제 위치에 안 있고서는 무슨 방법을 써도 평안할 수 없다. 임시적으로는 조금 평안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내 위치에 돌아올 때 그때 비로소 평안해진다.
⑵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만족이 되심 (롬1:4)
그리고 예수님이 왜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되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사람 같은 사람이 없어서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사람을 자기의 심중에 두고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려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항상 불만스러웠다.
하나님이 불만스러운 상태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벽력이 나면 땅위에서 아무리 땅을 골라놔도 소용이 없다. 한 바퀴 돌아 버리면 싹 쓸려 나가 버린다.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류의 평화는 없다. 하나님이 만족해야 하늘이 고요하고 좋아져야 된다.
추운날도 햇볕이 쨍쨍 쬐면 안 춥다. 일광욕을 하려고 옷을 벗고 있는데 추운 날, 기온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뜨겁게 내 몸을 쬐니까 추운 줄을 몰랐다. 그래서 북극이나 남극에서도 햇볕이 있으니까 사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하늘이 고요해지면 하늘이 따뜻해지면 땅은 저절로 따뜻해지고 좋아진다. 그러나 하늘이 시끄럽기 시작하면 땅에서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했다. 왜? 구속이 없고 구속 받은 인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족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까 하나님이 만족하셨다. 이는 내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더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셨다. 바로 이런 사람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보니까 우리가 편안해진다. 우리도 알고 보면 지금까지는 헤매고 돌아다녔지만 무엇 때문에 헤맸던가? 바로 그 사람을 찾기 위해 헤맸던 것이다.
결국은 ‘내가 누구 인가?’하는 것이다. 불교 TV를 보면 항상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찾고 있다. 참 나, 진아(眞我)를 찾으려고 앉아 있는 것이다. 절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온갖 것을 하는 이유가 전부 자기를 찾으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모르니까 방황하고 있다는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안에 와서 보면 나는 누구인가? 아주 간단하다. 그분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는 찾는데 답을 들어보면 또 모호하다. 나는 누구냐 했으면 나는 누구다 하면 되는데 나는 누구다가 아니고 애매하고 모호한 말을 한다. 무아(無我), 무상(無想),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좀 무식한 사람들은 알아듣기가 어렵다. 자기들은 알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것보다 아주 쉬운 말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면 여러분들은 다 안다. 여러분은 도를 닦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보고 그냥 아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이사람이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 사람이 바로 나구나. 우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바로 딱 그릴 수 있다. 그림으로 그리라고 종이를 주고, 너는 누구냐고 하면 여러분은 모두 똑같이 그려놓을 것이다. 십자가를 그려놓고 거기에 ‘나’라고 딱 써놓을 것이다.
그림으로 그리는 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다. 말은 아무리 잘해도 그 말에 모순도 있고 부족함도 있지만 그림으로 그리면 확실하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여러분은 글로 쓰려고 하지 말고 그림으로 딱 그리면 된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 하는 질문에 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다비장을 하는 것도 자기가 이것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고 다비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말을 하는데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알아듣지 못하면 딱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서 이것이 나다.
그것을 보고 나면 내가 안정이 된다. 더 이상 방황이 없다. 그것을 모를 때는 내가 무엇인가 하고 방황을 하는데 종교적인 방황도 심한 방황이다. 종교에 들어가면 안식이 올 줄 알고 모두 가는데, 사실을 좀 더 차원이 다른 방황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방황과 조금 차원이 다른 모양이 다른 방황을 한다. 방황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종교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기도하다가 무릎이 나간 사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만족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참 만족은 예수 안에 있다. 하나님도 보시고 만족하시고 사람도 보면 만족한다. 만족이라 하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안정이 된다. 만족은 안 할지 모르지만 안정은 된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성전 안에 놓는 열 두덩이 떡인 진설병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떡이다.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이 먹는다. 사람도 먹고 하나님도 먹는 함께 먹는 양식이다. 생명나무 열매는 아마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양식이다.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사람도 만족한 그런 양식이다. 이런 양식은 지금까지 없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사람이 괴롭고, 사람이 만족하면 하나님이 괴로운 그런 양식만 있었지 하나님도 좋다하고 사람도 좋다하는 그런 양식은 없었다. 공통분모!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쓸 수 있는 그런 양식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보니까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사람도 만족한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가실 때 하나님은 보시고 만족 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보면 불안하다. 옛날에는 그거 좋다고 생각 했는데 아니다 그거 불안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물위를 걸어가면 신기하지만 불안한 것이다.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또 내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내가 따라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또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때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족하는 그런 양식이 못됐던 것 같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족하는 양식이 됐다.
⑶ 만민에게 분배되심 (롬1;16,17)
나는 영생하는 양식이다. 이것은 만민에게 분배되는 양식이 됐다. 어떤 특이한 사람만 먹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값없이 받는 것이다.
그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인생! 그 운명은 누구에게나 다 분배될 수 있는 양식이다. 어떤 사람이 거기에 해당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슨 노력을 통해서 이것을 얻겠는가. 노력을 통해서 얻는다면 실력 없는 사람은 못 얻는다. 힘없는 사람은 못 얻는다. 이것은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냥 공평하게 분배되는 양식이다. 만민에게 분배될 수 있는 양식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양식은 어느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알고 전해야 된다. 저 사람 부자인데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저 사람 지식이 많은데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전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전쟁을 안 해야 된다. 그런 사람은 전쟁하러 갔다가 잘못하면 총탄에 맞아 죽는다. 어떤 사람을 봐도 똑같아야 된다. 누구를 봐도 다 똑 같아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복음이 그러니까 복음 안에서 사람을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세상의 뭘 가지고 보면 다 다르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다 다르지만 복음 안에서 보면 다 똑같다. 십자가 안에서 보면 다 똑같다. 하나도 안 틀리다. 우리가 나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가는가? 십자가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고 복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인데 다 똑같이 보여야지 다르게 보이면 안 된다. 만민에게 분배되는 양식이다.
예수님은 모든 양식의 실재다. 지금까지 유월절 양식, 광야의 양식, 가나안 양식, 물질적이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양식의 실재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양식도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정신적인 양식도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영적인 양식도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사람만 만족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만족해야 된다. 그래야 참 만족이 된다. 이렇게 참 만족을 주는 양식은 예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나 공자님을 볼 때 참 존경스러운 분인데 하나님이 만족할 수 있는가? 이것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보고 만족하다고 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는 확실하게 만족하게 생각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참 양식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봐도 더 이상의 사람은 없다.
예수님이 석가모니만큼 심오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모른다. 공자님만큼 위대하시겠는가? 그런지 아닌지 우리는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석가모니나 공자님만큼 못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 겨우 3년반 정도 사역을 했기 때문에 남겨 놓은 것이 별로 없다. 반면에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는 유산이 굉장히 많다. 이렇게 비교해서 본다면 예수님은 형편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만족이시고 사람의 만족으로서는 예수님만한 사람이 더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분 안에서 만족이 안 되면 어디 가서 만족이 되겠냐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분 안에서 만족이 안 되면 누구를 보고 만족을 하시겠냐는 것이다. 우리도 이분을 보고 만족하지 않으면 누구를 보고 만족하겠냐는 것이다.
만일 내가 공자님을 보고 만족하면 정말 나는 힘들게 된다. 지금부터 힘이 들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공자님을 보고 만족하면 내가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족하는 양식이니까. 석가모니를 보고 내가 만족하게 여긴다면 그때부터 나는 정말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만족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나는 그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 만족하는 이제부터 갈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방황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다. 오늘부터 끝나게 된다. 아무것도 더 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만족한 양식이다.
예수는 모든 양식의 실재이시다. 동산의 생명나무 열매이시고, 성전의 진설병(떡)이라고 할 수 있고, 광야의 만나라고 할 수 있고,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수라고 할 수 있고, 만민이 먹어도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먹어도 온 인류가 다 먹어도 만유가 다 먹어도 먹고 남은 것이 항상 열두 광주리에 넘치는 분이다.
먹을수록 만족하고 나눌수록 확산되는 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양식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먹는다는 것은,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만족인지 모른다.
더 이상의 다른 양식이 없다. 어디에 가도 헤매지 않을 방법은 없다. 어차피 내가 해야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노력으로 가야되기 때문에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면 볼수록 더 어려운 것이다. 석가모니를 바라보면 더 어렵다. 공자님을 바라봤으면 더 어렵다. 내가 서울대학을 가려고 하니까 어렵다. 경북대학 가는 것보다 어렵다. 또 경북대학 가려고 하니까 어렵다. 시골에 있는 대학을 가려고 하면 쉽다. 결국 내 눈이 높으니까 어려운 것이다. 내가 더 위대한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끝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이것은 완결된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고, 더 이상 헤맬 것도 없고, 더 이상 방황할 것도 없고, 더 이상 노력할 것도 없다. 더 이상의 양식은 없다. 이렇게 인생을 만족하게 하는 양식은 없다. 먹을수록 만족한다. 그리고 이것을 나눌수록 더욱더 확산된다. 그리고 내가 나누어 줄수록 더욱 만족이 된다. 이상하다. 내가 그분을 먹고 그분을 누리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면 나눠준 것만큼 더 만족해진다. 이런 양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육신의 양식과는 다른 양식이다. 쌀이나 빵과는 다른 양식이다. 물질적인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인 것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먹을수록 만족하신 그리스도, 나눌수록 확산되는 그리스도만 말할 수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무엇을 먹어도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인생을 주님께서 부르셔서 먹을수록 만족하고 나눌수록 확산되는 신기한 생명, 신기한 양식, 영생의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눈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귀를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입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모든 만족의 만족이 되시고 당신으로 인해서 사는 삶이 만족하도록 축복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처럼 오늘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축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셔서 우리가 먹고 남고 열두 광주리에 항상 채워지는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 굶주린 백성을 먹이심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 이 사역은 엘리사의 사역과 관계됨
성경을 읽어보니까 좀 황당하다.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말씀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있고 요한복음에도 있고,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구약에 보면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다.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라고 말하는데, 그 능력의 선지자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때 엘리사가 따라가면서 나에게 갑절의 은혜를 달라고 해서 두루마기를 얻어 입은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 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했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런데 엘리사의 사적 가운데 꼭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었는데, 먹고 나서 남은 부스러기가 많이 남았다는 이런 기사가 열왕기 4장에 나온다.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엘리사를 상기하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습관이 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그들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유사한 사람이 오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 엘리사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 모세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새로 온 엘리사가 아닐까? 새로 온 다윗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건을 4복음서에서 다 취급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일도 물론 많았겠지만 복음서에서 취급하고 있는 사건들은 모두 이런 연관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엉뚱한 이야기를 해봐야 모를 것이다. 이미 벌써 알고 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건들만을 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엘리사의 사건과 관계가 된 것이다.
엘리사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오면 우리 민족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사가 온다는 것은 메시아가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 같은 사람이 오면 메시아가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단순하고 쉽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왜 예수를 그렇게 많이 따라다녔는가?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예수님이 단순히 병을 고친다는 것만이 아니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겠느냐,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이런 생각으로 따라다닌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다.
1. 세상은 배고픈 곳임
여기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해가 저물고 배가 고팠다고 했다. 이것은 배고픈 세상, 굶주린 세상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우리도 몇날 며칠 따라다니다 보면 배가 고플 것이다. 당연히 있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세상은 이렇게 배가 고프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배고픈 것이 어디에는 없겠는가? 다 있겠지만 세상은 굶주린 곳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1-1. 먹을 것을 먹지 못했으므로
왜 세상은 굶주리고 있는가? 그것은 먹을 것을 못 먹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먹을 것을 못 먹어서 배고픈 것이다.
1-2.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양식을 버렸음으로
무엇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 것인가? 모든 생물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양식이 있다. 개는 개에게 정해준 것이 있고, 소는 소에게 정해준 것이 있고, 식물은 식물에게 정해준 것이 있다. 모든 생물은 자기 먹을 양식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는 땅 속에 혀를 박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음식을 먹어야 산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으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다 정해져 있는 것을 먹으면 살도록 되어 있는데, 사람은 정해진 것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풀도 살고 모든 생물이 다 사는데 사람만 정해진 것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밥을 먹으니까 동물로서는 산다. 하나님이 목적하는 인간은 동물적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을 표현할 하나님과 협력할 인간을 찾고 있다. 그 인간으로서는 배고프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 많이 먹어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모두가 난리다. 이것은 북한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다. 북한에서는 굶어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배불러서 사건이 생긴 것이다. 지금 다이어트를 한다고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른다.
인간은 먹을 것을 먹지 못했다. 인동물적 인간은 먹을 것을 많이 먹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는 인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인간으로서는 먹을 것을 못 먹었다. 하나님께서 정해준신 양식을 버렸다. 동산에서 네가 임의로 먹어라는 것을 안 먹고, 기어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다. 안 먹어도 죽지만 못 먹을 것을 먹어도 죽는 것이 아닌가? 안 먹어도 굶어 죽지만 못 먹을 것을 먹으면 바로 죽는다. 정녕 죽으리라.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못 먹을 것을 먹었다는 뜻이다. 안 먹어서 굶어 죽으면 적어도 열흘을 살지만 못 먹을 것을 먹으면 당장 죽는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정해주신 양식을 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1-3. 사탄이 유혹하는 양식을 먹음으로
사탄이 유혹하는 양식을 먹었다. 그러니까 당장 죽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당장 죽을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독을 안 먹더라도 영양가가 없는 것을 먹으면 헛배만 부르다. 칼로리가 없으니까 배만 잔뜩 부르다. 헛배만 부른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자만심이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헛배만 부르다면 그것은 자만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담은 그렇게 된 사람이니까 그렇다.
⑴ 안식을 잃음(만족이 없음으로)
그래서 안식을 잃게 된 것이다. 안식을 잃었다는 말은 만족이 없다는 말이다. 안식은 만족이다. 엿새 동안에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하나님이 쉬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족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니까 너희도 만족해라. 이런 뜻이다. 결국 먹을 것을 못 먹고 엉뚱한 것을 먹었으니까 만족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뭘 먹으려고만 한다. 단백질이 필요한 아이들이 단백질을 못 먹으면 고창병이라고 해서 헛배가 부르는 데, 무엇이든 주워 먹는다. 배가 막 터지려는 데도 먹는다. 왜냐하면 들어올 것이 안 들어왔기 때문이다. 만족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만족하라고 쥐도 잡아 먹이고 개구리도 잡아 먹이고 그랬다.
사람이 왜 안식이 없는가? 만족이 없어서 그렇다. 만족이 없는 이유는 먹을 것을 안 먹고 못 먹을 것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법을 찾게 된다. 뭘 먹을 것인가를 찾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답이 없기 때문에 답을 찾는 것이다. 먹을 것만 딱 있으면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먹어야 되나, 저것을 먹어야 되나하고, 약이 없으니까 이것을 해야 되나, 저것을 해야 되나하고 찾는다.
문둥병은 옛날에 약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에 약을 찾는다. 찾다 찾다가 안 되어서 오죽하면 사람을 잡아먹으면 낫는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병환자 촌을 가려면 무서워하곤 했다. 신동에 나병환자 촌이 있다. 거기에 사람들이 가려면 무서워했다. 거기에 가면 사람 잡아 먹는다는 소리가 나니까 그랬다. 오죽 방법이 없으면 그랬겠는가?
⑵ 종교적 갈증이 일어남(방법을 찾음)
① 가인과 아벨이 종교를 만듦
가인과 아벨이 종교라는 방법을 만들었다. 이 방법을 만들었으나 결국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오죽하면 죽였겠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래도 자기 동생인데 오죽하면 죽였겠는가? 문둥이가 병을 나으려고 오죽하면 사람을 잡아먹겠는가? 하다하다 안 되니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 번 제사를 드리다가 그것이 안 되니까 그랬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가인이 아무리 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니까 이렇게라도 하면 응답하지 않을까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분노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종교를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생각했지만 그것으로 만족이 안 되니까 결국 살인을 하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적 전쟁, 중동의 화약고에서 싸움이 자꾸 일어나려고 한다. 거기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지역이다.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유태인과 이슬람이 대결하던 것이 묘하게도 기독교와 이슬람이 대결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옛날 십자군의 전쟁도 그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결국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종교적인 전쟁은 끝이 없다.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은 다 끝이 나는데 종교 전쟁은 끝이 안 난다. 이것은 알고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전쟁이다. 어느 한 쪽이 죽어야 한다.
② 네피림이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행함
그리고 네피림이 생겼다. 이것은 자기 생각대로 했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 봤다. 종교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것을 열심히 해보다가 결국 사람을 죽였다. 그 다음에는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 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각기 제가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창6:2)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봤다는 뜻이다. 천사까지 왔으니까 그렇다. 사람이 천사와 결혼하고, 천사가 사람과 결혼하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것이 아닌가? 내 속에 만일 천사의 기질이 있다면 나는 만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의 인간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천사도 마찬가지로 만일 사람을 얻는다면 더 이상의 길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네피림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해본 것의 극치를 이야기한다. 생각에 좋을 대로 끝까지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③ 바벨에서 야망을 쌓음
그렇게 하고서도 안 되어서 그 다음에는 바벨로 갔다. 여기서는 야망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도덕적인 야망도 있고, 진리에 대한 야망도 있으며, 야망이라는 것은 많다. 예술에 대한 야망도 있고 온갖 야망이 다 있다.
-. 도덕적 야망을 쌓음(쌓일수록 불안해짐)
여기에는 두 가지만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인간다워지려면 도덕적(道德的)이어야 한다. 그래서 도덕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쌓으면 쌓을수록 불안한 것이다. 쌓을수록 편안해져야 하는데, 쌓을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도덕적 야망이다. 왜냐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되려니까 그렇다. 끝이 없다. 돈을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처럼, 명예를 가지면 더 가지려 하는 것처럼, 도덕도 이상하게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또 더 갖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쌓을수록 불안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쌓아 가면 쌓아갈수록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더 불안해지고 불안해진다.
-. 진리의 야망을 쌓음(알아 갈수록 모호해짐)
진리에 대한 야망도 그렇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불안해지고 허망해지고 황당해진다. 그러니까 적당히 알 때가 좋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더 초과해서 알려고 생각하면 그 다음부터는 황당해진다고 한다. 수학(數學)을 하는 사람들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황당해진다고 한다. 하나 더하기 둘하면 셋이니까 쉽고 명백한데, 수학이 자꾸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황당한 것이 된다고 한다. 그것으로 먹고 살 사람이 아니면 너무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진리가 다 그렇다. 철학(哲學)이 처음에 출발할 때는 좀 단순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황당해져서 이제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게 되었다. 어디까지 왔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그렇게 바꿔지고 있다. 알수록 자꾸 모호해지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이 무한한 것이 아니다. 이 해골 안에 들어있는 것인데 이것이 무한한 우주를 어떻게 다 알겠는가? 모든 것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바가지는 바가지이지 아무리 좋은 것이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박 하나밖에 더 되겠는가? 적당하게 아는 것이 좋다. 너무 많이 알려하면 어렵다. 알수록 모호해진다.
바벨이 이 야망을 쌓다가 무너졌다. 무너져서 혼잡해졌다. 서로 언어를 못 알아듣게 되었다. 말을 못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은 황당해졌다는 말이다. 황당해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돼버렸다. 높이 올라가려고 할수록 높이 올라간 사람끼리는 말이 안 통한다. 초등학교 때는 잘 통한다. 유치원 때 제일 잘 통한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말이 안 통한다. 우리나라에 친한 친구인 두 사람이 대통령을 했는데, 꼭대기 올라가니까 둘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상대방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서로 못 알아듣는다. 야망이라는 것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모호해지고 외로워지고 불안해진다.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참된 양식이 아니다.
⑶ 방법은 많으나 주림이 채워지지 않음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주림은 채워지지 않는다. 방법만 많지 채워지지 않는다. 약은 많은데 병은 안 낫는 것과 똑같다. 문둥병 고치는 약은 이제 간단하게 되었다. 어느 병보다 쉽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너무너무 어려운 병이었다. 옛날에는 결핵이 쉽고 문둥병이 더 어려웠는데, 지금은 나병은 쉽고 결핵은 1년 정도 약을 먹어야 되니까 쉬운 것이 아니다.
① 모두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함으로 채워질 수 없음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가 없다. 왜 방법이 그렇게 많은데도 안 채워지나?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다. 될 것을 바라봐야 되는데 안 될 것을 바라보면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참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갔으면 우리도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할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도 잘못 갔으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한다. 우리가 될 수 없는 길을 갔으니까 그러면 끝이 안 난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그를 따르게 됐기 때문에 천만다행이다. 그것은 못할 사람이 없다. 내가 억지로 가서 못을 박을 수 없지만 못을 박으면 죽는 것이야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예수를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② 배고프니까 평화를 유지하지 못함
그리고 배가 고프면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일단은 먹어야 되니까 안 먹으면 싸움이 난다. 어쩔 수 없다. 사흘 굶어서 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하듯이 담 넘어 갈 때 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더 심해지면 전쟁이 난다. 배고프면 모든 것이 다 안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일단 먹고 뭐가 있는 것이니까 먹은 것이 없으면 다른 것은 다 끝나는 것이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많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못 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양식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소용이 없다.
배고프면 싸움이 난다. 이것은 만족이 없으면 싸움이 난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만족 없는 사람은 어디든 가서 지나가는 개라도 발로 한번 차고 싶다. 자기와 아무 관계없지만 괜히 한번 발로 차버리고 가고 싶다. 불만스러우면, 만족이 없으면 그렇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싸울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을 모르고 말 한마디 어떻게 했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불만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나는 모르고 그 사람에게 좋은 말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한테는 굉장히 거슬려서 원수 대하듯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불만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하려면 무조건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족한 상태인지 불만스러운 상태인지를 보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좋은 말도 만족이 없는 사람한데 하면 나쁜 말이 돼버린다. 상대방 말을 안 들어보고 상대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 말이 잠언에 있다.
만족하지 못하면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 지금 세계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쪽이 기울어져서 불만이 생기면 전쟁이 난다. 항상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불만이 많은 아이들이 있는 학교는 매일 아이들이 싸운다고 한다. 싸워서 보건실에 매일 터져서 온다. 그런데 집안에 문제없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장난은 심해도 별로 싸우지는 않는다. 결사적으로 할 일이 없다. 죽어도 좋다 할 일이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볼 일이다. 너무 배고프면 안 된다. 하여간 밥 먹는 문제부터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다른 것도 다 좋지만 밥 안 먹고는 교회도 못나온다. 배고프면 찬송도 못한다. 일단 먹는 것부터 해결해야 될 것 같다.
사탄의 말을 듣다보면 결국에는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먹으니까 그렇다. 예를 들어 답이 없다고 종교를 만들어 본다든가 답이 없다고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해본다든가 답이 없다고 야망을 쌓아본다든지 다 해도 이것이 만족이 안 된다. 결국은 싸움이 생긴다.
2.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합당한 양식이 있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만족을 주는 양식이 있다.
2-1.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공급 됨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것이 공급됐다. 여기에 있는 말이 그것이다. 양식을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한테나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다는 의미다.
⑴ 예수께서는 굶주린 백성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하게 여기셨음
예수께서는 굶주린 백성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먹을 물질적 양식이 없는 것인데, 예수님이 볼 때는 목자 없는 양 같이 보였다. 갈 길을 잃고 있는, 인도자가 없는 양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그것을 불쌍하게 여겼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것도 불쌍한 일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다 굶어죽는 상황은 아니니까 목자 없는 것이 불쌍한 것이다. 우리는 양 같아서 곁길로 갔다. 사람이 각자가 다 영리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목자 없는 양은 갈 곳을 모르는 것처럼 인생도 목자 없는 양은 갈 곳을 모른다. 갈 곳을 모르는 것이 불쌍한 것이고 배고픈 것이다.
⑵ 마을로 내려가서 각자 먹게 하지 않으셨음(마을에는 참 양식이 없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을로 내려가서 사 먹도록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일종의 도전(挑戰)이다. 그런데 마을에는 참 양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상식적으로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많은 돈을 들여서 다 사 먹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 200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의 하루 임금이 1데나리온이니까 노동자 200명이 일하는 임금이다. 그런데 마을로 내려가서 사 먹으라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결했는데 왜 그런가? 마을에는 양식이 없다는 뜻이다. 육신적인 양식은 마을에 있지만 지금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사람들한테 참 양식은 마을에는 없다. 우리가 마을에 가서 이 양식을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찾으려고 마을에 가면 안 된다. 거기에는 그 양식이 없다. 서문시장에 가면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지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있는 곳에 가서 찾아야지 없는 곳에 가서 찾아서는 아무리 찾아도 안 된다. 마을에 가서는 이 양식을 못 찾는다. 우리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마을에 가서 양식은 찾지 못한다.
⑶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분배하라 하셨음
(보리떡은 부활생명을, 물고기는 세상을 이긴 생명을 상징함)
여기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나왔는데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 했더니 먹었다고 한다.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보리떡은 겨울을 지나서 열리는 것이니까 부활생명이다. 물고기는 세상을 이긴 생명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 살지만 물고기 안에는 짠 성분이 없다. 짠물이 들어오면 죽을 텐데 참 묘하게 만들어놔서 짠물에 살아도 안 짜도록 만들어 놨다. 멍청한 해삼 같은 것은 짜지만 제대로 고기처럼 생긴 것은 짠 것이 별로 없다. 세상을 이긴 것이다. 바다를 이긴 것이다. 짠 것을 이긴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⑷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음
(주님의 공급은 신성한 넘침으로 확장됨)
이것을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가 가득했다. 이치로 생각하면 안 맞다. 물고기는 혹시 뼈다귀가 있으니까 남을 수 있지만 떡은 다 먹어버리는데 어떻게 남겠는가? 물고기 뼈다귀가 12광주리 남았다면 모르지만 다 배불리 먹고 떡과 물고기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하니까 이치로 생각하면 안 맞는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공급하심, 신성한 양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공급은 신성하고 넘쳐서 확장된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조그마한 것을 가졌는데 그것을 나누니까 계속 분배했는데 오히려 남았더라는 말이다.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될 방법이 없다. 어떻게 먹으면 먹을수록 없어지지 어떻게 남겠는가?
그런데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진다는 논리가 있다. 사랑도 양식(糧食)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한다. 사랑을 못 받은 아이들은 만족이 없다. 음식이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사랑도 음식이고 칭찬도 음식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칭찬해주면 참 좋아하고 만족하는 것을 보면 칭찬도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만족하니까 그것도 양식이다. 우리에게 일차적인 만족은 먹는 음식에서 온다. 먹고 만족하기 때문에 그것은 양식이다. 사랑은 먹고 만족하기 때문에 양식이다. 칭찬은 먹고 만족하기 때문에 양식이다. 꾸지람하는 것은 양식(만족)을 뺏아가버리는 것이니까 배고프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신성한 양식은 먹으면 먹을수록 남는다, 좋은 것, 하늘에 속한 것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이 남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떡이 남은 것은 내가 안 해봤기 때문에 모르겠는데, 확실히 남은 것은 볼 수 있다. 사랑은 나눌수록 많아진다. 칭찬은 줄수록 더 만족해지고 넘쳐간다. 복음은 갈수록 더 확장되어 간다. 이런 것은 우리가 그냥 알 수 있다. 모르는 것은 놔두고 아는 것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모르는 것은 어차피 모른다.
2-2. 주님 안에서는 배고플수록 더욱 풍성한 공급이 있음(사단의 말을 듣다가 배고프면 싸움이 일어나고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배고프면 더욱 풍성한 양식을 공급 받게 됨)
주님 안에서는 배고플수록 더 풍성한 공급이 있다. 세상에서는 물질적인 양식이 없으면 전쟁이 일어난다. 앞으로 마지막 전쟁도 식량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해석을 한다. 사해(死海)밑에 엄청난 뭐가 깔려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구상에 식량이 메마를 날이 오게 될 텐데 그것이 엄청난 비료가 되어서 양식을 증산(增産)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차지하려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마지막 전쟁은 식량 전쟁이다. 각 나라마다 자기 나라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생명산업(生命産業)이라고 해서 돈이 안 되도 육성해야 된다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도 농업이 그런 문제이다. 지금은 우리가 지어먹는 것보다 사다먹는 것이 훨씬 싸지만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양식을 못 사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농지(農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은 양식이 없으면 싸움이 벌어지지만 주님 안에서는 배고플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그러니까 세계가 다른 세계다. 사탄을 말을 듣다가 배고프면 싸움이 일어난다. 사탄의 말을 듣고 살다보면 우리가 만족이 없으면 싸운다. 물질적인 만족이 없으면 싸우게 되고, 정신적 만족이 없으면 싸우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듣다보면 배고플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이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세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다.
⑴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하면 배고플수록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서 배고프면 더욱 만족해 짐(마5:6, 엡3:8)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면, 도덕적인 면이든지 진리의 면이든지 물질적인 면이든지 명예든지 어떤 면으로든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배고플수록 싸움이 생긴다. 세상에서는 많이 바라볼수록 더욱 배고픔이 생기는 것 같다. 선을 좀 낮게 하면 좀 더 쉽고 선을 높여 놓을수록 더욱 배고프다. 사람들이 좋은 말 하려면 눈높이를 낮춰라, 위만 쳐다보지 말고 밑을 내려다보고 다니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힘들다는 것이다. 자기 능력보다 높이 생각하면 안 되니까 조금 밑을 내려다보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알고 보면 지혜이다. 사람 사는 것이 조금 낮게 내려다보면 쉬운데 조금 높게 올려다보면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다 그런 것이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이 보면(올려다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고, 조금 내려 보면 사람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꾸 배가 고파진다. 점점 배고파진다. 돈 있는 사람이 더 허덕인다. 이상하다. 돈 없는 사람이 돈에 대해서 허덕일 것 같지만 안 그렇다. 돈이 있는 사람이 더 허덕인다. 먹을수록 배고프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이 또 있다. 내가 만원 있을 때는 내 위에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다. 2만원, 3만원 있는 사람 밖에는 안 보인다. 별로 갈증이 안 생기고 불만이 안 생긴다. 내가 10억쯤 있으면 그때부터는 100억 있는 사람이 부럽다. 그러니까 배가 확 고파버려 더 불만이 생긴다. 시골에 살 때는 별로 몰랐는데 도시에 와 보니까 불만이 생길 수가 있다. 시골은 다 비슷비슷하게 산다.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크게 욕심내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도시에 오면 비까번쩍한 것이 많이 있다. 갑자기 자기가 상대적으로 가난해져 버린다. 그래서 사람이 정신이 확 돌아서 도적질도 하고 싸움도 하는 것이다.
⑴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하면 배고플수록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서 배고프면 더욱 만족해 짐(마5:6, 엡3:8, )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결국 배고플수록 싸움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같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그 사람같이 되려고 하면, 배고플수록 더욱 만족해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마5:6)라고 했다. 가난해질수록 이상하게 배가 부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가난해질수록 배가 부르다. 시편을 읽어 보면 얼마나 가나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른다. “내 영혼이 주리고 목마르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갈급하고”(시42:1)와 같은 것을 보면 그 사람 어찌 사나? 저렇게 해서 인생 무슨 맛으로 사나?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이다. 그 배고픈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배고픈 것을 누가 노래하겠는가? 참 이상한 세계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하면 배고프고 싸움이 생기지만,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 배가 고프기는 고픈데 더욱 만족해진다. 만족이 없는 경우에는 내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딱 맞는 대답이다. 진짜로 100점짜리이다. 사람 같이 되려고 하면 배고플수록 만족해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는 알고 보면 다 가난한 사람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오는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다 가난한 사람 이야기이다. 부유한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3. 예수님은 참 양식임(만족임)(요6:51-57)
예수님은 참 양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이 참 양식이라는 말은 참 만족이라는 말이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영생이라는 말이 만족할 것이라는 뜻이다. 영생이면 만족이다. 영생하면 또 다른 것을 찾겠는가? 영생하면 됐지 또 다른 것을 찾겠는가? 영생은 영원한 만족이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그래서 그 떡을 좀 달라고 하니까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했다. 뭐 그런 떡이 다 있느냐? 그럼 나도 좀 먹자고 했더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했다. 그래서 억장이 무너져서 모두 가버렸다. 뭔가 될 것 같다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하니까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서 다 떠나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더라고 요한복음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물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6:67)하고 물었던 것이다. 다 가버리고 없으니까.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래도 아주 똑똑한 말을 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라고 했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래서 열둘이 남은 것 같다. 물론 그 전에도 열두 사도를 임명했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따라다니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열둘만 꼭 되었을까? 그것을 이치로 생각해보면 이래서 결국은 그래도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한 사람이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경험으로 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많이 있지만 그래도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는 이런 사람만 우리 교회 남아 있는 것 같다. 결국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예수님은 참 양식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참 양식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참 양식인가 물었더니 내 살이 양식이다. 내 피가 음료다. 이렇게 말했다. 이 배경은 이런데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이한 양식을 먹은 백성들이다.
3-1. 유월절의 양식, 광야의 양식, 가나안 땅의 양식이심
유월절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가나안 땅에서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크게 말해서 3단계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다.
⑴ 바로(사단)에게서 해방됨으로 (유월절 그리스도)
유월절의 양식! 이것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에 양고기를 먹고 애굽을 나왔다. 그 사람들이 양고기를 먹는 것은 보통 우리가 먹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양고기를 먹었는데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개고기를 먹었는데 해방이 됐다면 개고기는 우리에게 대단하고 특별한 음식이 된다. 누군가가 와서 오늘 밤에 전부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으면 해방이 된다고 하여 먹었더니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가 개고기를 먹을 때 보통 생각을 갖고 먹겠느냐는 그런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양고기를 먹으라고 해서 먹었더니 다음날 아침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이 양고기의 문제는 보통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다.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바로에게서 해방된 양식, 이것을 먹은 사람들이다.
⑵ 하나님께 은혜를 입음으로(만나와 생수 그리스도)
그리고 광야에 와서는 어떻게 했는가? 농사도 못 짓고, 사막이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당장에 먹을 것이 필요하고 마실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거기서 만나와 생수를 40년간 먹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참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를 먹었기 때문에 살았을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들이 다시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가지고 와서 먹었겠는가? 아니면 거기에서 농사를 지어서 먹었겠는가? 우리가 모르지만 하여간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었으니까 살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니고 자기 자식들에게 한 말이다. 지금도 유대인 회당에서 랍비가 나와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데, 우리가 생각해 보면 만나와 생수라는 것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생수는 혹시 모르지만 만나가 어떻게 내려오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분명히 이 양식을 먹어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광야의 양식을 먹어 본 사람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먹어 봤다, 은혜를 입어 봤다는 말이다. 도저히 될 수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것과 같지 않겠는가. 내게 절체절명의 시간이 왔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것이 왔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죽게 됐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왔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광야에서 40년간 하늘에서 매일 같이 이 양식이 내려와서 먹었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것이다. 반석이 깨져서 물이 나왔다고 해석해도 그것이 좀 부족하지 않겠는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자기가 은혜를 입은 것이니까 만나와 생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이다. 은혜를 입어 본 사람이다. 은혜를 먹어본 사람들이다.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일생에서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만나와 생수를 먹어본 사람들이다.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본 사람. 내가 그때 은혜를 입었지, 그때 은혜를 입었구나. 이런 사람은 만나와 생수를 먹어본 사람들이다. 은혜를 입은 것이니까.
⑶ 인격의 소출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성막 그리스도)
그 다음은 가나안 땅에 가서 양식을 먹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면 가나안 땅에 가서 농사를 지어서 먹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경작을 해서 비로소 인격의 소출을 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은혜를 통해서 살았다. 순전히 은혜로만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가서는 땅을 경작해서 소출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의 소출이다. 그런데 이 소출의 의미가 왜 중요한가? 광야에서 만나를 가지고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가지고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은혜는 무진장 받았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넘치는 찬양하니까 예배가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려면 무언가 내놓을 것이 있어야 된다. 공짜로 찬양만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떡도 내놔야 되고 무엇인가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로만 감사하지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답답하지 않겠는가. 정말 감사를 표현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다. 옛날 우리 찬송가에 ‘몸 밖에 드릴 것이 없어 이 몸 바칩니다.’는 노래가 다 있었다. 은혜를 입었는데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내 놓을 것이 없다. 이것이 참 답답한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인데, 광야에서는 은혜는 입었지만 섬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섬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은혜만 입으면 되지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진짜 은혜를 입었으면서 섬기지 않으면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가나안의 양식은 섬길 수 있는 양식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그 땅에 이르거든 그 땅의 소출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그 땅의 소출로. 그 땅의 소출로. 그 말이 신명기 같은데 보면 자꾸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 섬길 수 있는 그런 만족이 왔다는 것이다.
유월절의 만족! 광야의 만족! 가나안 땅의 만족! 이 만족은 인생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만족이라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인생의 길을 살려면 이렇게 돼야 된다. 정상적인 인생의 길을 걸어가려면 이렇게 만족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니까 특이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3-2.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심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유월절 양도 먹어본 일도 없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본 일도 없고, 가나안 땅의 양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본 일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이다. 이 영생하는 양식 속에는 만나와 생수와 유월절 양과 인격의 소출이 다 들어 있다.
⑴ 구속이며 구속자이심 (고전1:30 엡1:7)
그래서 예수님은 구속이시고 구속자다. 나를 원위치로 되 물려 준 사람이다. 그분 자신이 원위치에 있는 분이고 또 우리를 원위치로 되돌려준 분이다. Redemption한 분이다. 구속하신 분이다.
사람은 왜 만족이 없었던가? 제자리로 못 돌아와서 만족이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까 자기 자리에 안 있기 때문에 남의 자리에 있으니까 배고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고팠다. 우리가 원 위치로 돌아오면, 주 예수 안에서 본 위치로 돌아오면, 사람이 비로소 안정이 된다. 안식이 된다. 밥 먹고 나면 위장이 편안해 지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밥 안 먹으면 속이 편안하지 않은 것을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나는 5시간이 지나서 밥을 안 먹으면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전쟁이 나서 괴로워진다. 그때 딱 뭘 먹으면 조용해진다. 위장에 평화가 온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왜 부글부글 끓었나? 그것은 먹을 것이 안 들어와 제자리에 못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구속받은 자리에 딱 가면 사람이 안정이 된다. 내 인생이 여기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그때그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내가 안식에 이르게 된다.
스님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안 하겠는가. 내가 잘 모르지만 그런 어떤 평안을 찾으려고 하니까 자꾸 헛것을 버려라, 헛것을 버려라고 하는 것 같다. 헛것 때문에 배가 아프니까 자꾸 버려라, 버려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평안에 이르려고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진짜로 평안하려면 내가 구속된 자리에 와야 평안하다. 사람이 제 위치에 안 있고서는 무슨 방법을 써도 평안할 수 없다. 임시적으로는 조금 평안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내 위치에 돌아올 때 그때 비로소 평안해진다.
⑵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만족이 되심 (롬1:4)
그리고 예수님이 왜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되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사람 같은 사람이 없어서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사람을 자기의 심중에 두고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려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항상 불만스러웠다.
하나님이 불만스러운 상태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벽력이 나면 땅위에서 아무리 땅을 골라놔도 소용이 없다. 한 바퀴 돌아 버리면 싹 쓸려 나가 버린다.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류의 평화는 없다. 하나님이 만족해야 하늘이 고요하고 좋아져야 된다.
추운날도 햇볕이 쨍쨍 쬐면 안 춥다. 일광욕을 하려고 옷을 벗고 있는데 추운 날, 기온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뜨겁게 내 몸을 쬐니까 추운 줄을 몰랐다. 그래서 북극이나 남극에서도 햇볕이 있으니까 사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하늘이 고요해지면 하늘이 따뜻해지면 땅은 저절로 따뜻해지고 좋아진다. 그러나 하늘이 시끄럽기 시작하면 땅에서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했다. 왜? 구속이 없고 구속 받은 인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족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까 하나님이 만족하셨다. 이는 내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더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셨다. 바로 이런 사람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보니까 우리가 편안해진다. 우리도 알고 보면 지금까지는 헤매고 돌아다녔지만 무엇 때문에 헤맸던가? 바로 그 사람을 찾기 위해 헤맸던 것이다.
결국은 ‘내가 누구 인가?’하는 것이다. 불교 TV를 보면 항상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찾고 있다. 참 나, 진아(眞我)를 찾으려고 앉아 있는 것이다. 절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온갖 것을 하는 이유가 전부 자기를 찾으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모르니까 방황하고 있다는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안에 와서 보면 나는 누구인가? 아주 간단하다. 그분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는 찾는데 답을 들어보면 또 모호하다. 나는 누구냐 했으면 나는 누구다 하면 되는데 나는 누구다가 아니고 애매하고 모호한 말을 한다. 무아(無我), 무상(無想),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좀 무식한 사람들은 알아듣기가 어렵다. 자기들은 알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것보다 아주 쉬운 말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면 여러분들은 다 안다. 여러분은 도를 닦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보고 그냥 아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이사람이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 사람이 바로 나구나. 우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바로 딱 그릴 수 있다. 그림으로 그리라고 종이를 주고, 너는 누구냐고 하면 여러분은 모두 똑같이 그려놓을 것이다. 십자가를 그려놓고 거기에 ‘나’라고 딱 써놓을 것이다.
그림으로 그리는 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다. 말은 아무리 잘해도 그 말에 모순도 있고 부족함도 있지만 그림으로 그리면 확실하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여러분은 글로 쓰려고 하지 말고 그림으로 딱 그리면 된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 하는 질문에 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다비장을 하는 것도 자기가 이것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고 다비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말을 하는데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알아듣지 못하면 딱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서 이것이 나다.
그것을 보고 나면 내가 안정이 된다. 더 이상 방황이 없다. 그것을 모를 때는 내가 무엇인가 하고 방황을 하는데 종교적인 방황도 심한 방황이다. 종교에 들어가면 안식이 올 줄 알고 모두 가는데, 사실을 좀 더 차원이 다른 방황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방황과 조금 차원이 다른 모양이 다른 방황을 한다. 방황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종교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기도하다가 무릎이 나간 사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만족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참 만족은 예수 안에 있다. 하나님도 보시고 만족하시고 사람도 보면 만족한다. 만족이라 하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안정이 된다. 만족은 안 할지 모르지만 안정은 된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성전 안에 놓는 열 두덩이 떡인 진설병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떡이다.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이 먹는다. 사람도 먹고 하나님도 먹는 함께 먹는 양식이다. 생명나무 열매는 아마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양식이다.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사람도 만족한 그런 양식이다. 이런 양식은 지금까지 없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사람이 괴롭고, 사람이 만족하면 하나님이 괴로운 그런 양식만 있었지 하나님도 좋다하고 사람도 좋다하는 그런 양식은 없었다. 공통분모!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쓸 수 있는 그런 양식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보니까 하나님도 만족하시고 사람도 만족한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가실 때 하나님은 보시고 만족 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보면 불안하다. 옛날에는 그거 좋다고 생각 했는데 아니다 그거 불안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물위를 걸어가면 신기하지만 불안한 것이다.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또 내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내가 따라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또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때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족하는 그런 양식이 못됐던 것 같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족하는 양식이 됐다.
⑶ 만민에게 분배되심 (롬1;16,17)
나는 영생하는 양식이다. 이것은 만민에게 분배되는 양식이 됐다. 어떤 특이한 사람만 먹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값없이 받는 것이다.
그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인생! 그 운명은 누구에게나 다 분배될 수 있는 양식이다. 어떤 사람이 거기에 해당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슨 노력을 통해서 이것을 얻겠는가. 노력을 통해서 얻는다면 실력 없는 사람은 못 얻는다. 힘없는 사람은 못 얻는다. 이것은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냥 공평하게 분배되는 양식이다. 만민에게 분배될 수 있는 양식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양식은 어느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알고 전해야 된다. 저 사람 부자인데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저 사람 지식이 많은데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전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전쟁을 안 해야 된다. 그런 사람은 전쟁하러 갔다가 잘못하면 총탄에 맞아 죽는다. 어떤 사람을 봐도 똑같아야 된다. 누구를 봐도 다 똑 같아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복음이 그러니까 복음 안에서 사람을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세상의 뭘 가지고 보면 다 다르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다 다르지만 복음 안에서 보면 다 똑같다. 십자가 안에서 보면 다 똑같다. 하나도 안 틀리다. 우리가 나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가는가? 십자가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고 복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인데 다 똑같이 보여야지 다르게 보이면 안 된다. 만민에게 분배되는 양식이다.
예수님은 모든 양식의 실재다. 지금까지 유월절 양식, 광야의 양식, 가나안 양식, 물질적이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양식의 실재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양식도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정신적인 양식도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영적인 양식도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사람만 만족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만족해야 된다. 그래야 참 만족이 된다. 이렇게 참 만족을 주는 양식은 예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나 공자님을 볼 때 참 존경스러운 분인데 하나님이 만족할 수 있는가? 이것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보고 만족하다고 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는 확실하게 만족하게 생각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참 양식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봐도 더 이상의 사람은 없다.
예수님이 석가모니만큼 심오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모른다. 공자님만큼 위대하시겠는가? 그런지 아닌지 우리는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석가모니나 공자님만큼 못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 겨우 3년반 정도 사역을 했기 때문에 남겨 놓은 것이 별로 없다. 반면에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는 유산이 굉장히 많다. 이렇게 비교해서 본다면 예수님은 형편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만족이시고 사람의 만족으로서는 예수님만한 사람이 더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분 안에서 만족이 안 되면 어디 가서 만족이 되겠냐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분 안에서 만족이 안 되면 누구를 보고 만족을 하시겠냐는 것이다. 우리도 이분을 보고 만족하지 않으면 누구를 보고 만족하겠냐는 것이다.
만일 내가 공자님을 보고 만족하면 정말 나는 힘들게 된다. 지금부터 힘이 들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공자님을 보고 만족하면 내가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족하는 양식이니까. 석가모니를 보고 내가 만족하게 여긴다면 그때부터 나는 정말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만족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나는 그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 만족하는 이제부터 갈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방황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다. 오늘부터 끝나게 된다. 아무것도 더 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만족한 양식이다.
예수는 모든 양식의 실재이시다. 동산의 생명나무 열매이시고, 성전의 진설병(떡)이라고 할 수 있고, 광야의 만나라고 할 수 있고,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수라고 할 수 있고, 만민이 먹어도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먹어도 온 인류가 다 먹어도 만유가 다 먹어도 먹고 남은 것이 항상 열두 광주리에 넘치는 분이다.
먹을수록 만족하고 나눌수록 확산되는 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양식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먹는다는 것은,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만족인지 모른다.
더 이상의 다른 양식이 없다. 어디에 가도 헤매지 않을 방법은 없다. 어차피 내가 해야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노력으로 가야되기 때문에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면 볼수록 더 어려운 것이다. 석가모니를 바라보면 더 어렵다. 공자님을 바라봤으면 더 어렵다. 내가 서울대학을 가려고 하니까 어렵다. 경북대학 가는 것보다 어렵다. 또 경북대학 가려고 하니까 어렵다. 시골에 있는 대학을 가려고 하면 쉽다. 결국 내 눈이 높으니까 어려운 것이다. 내가 더 위대한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끝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이것은 완결된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고, 더 이상 헤맬 것도 없고, 더 이상 방황할 것도 없고, 더 이상 노력할 것도 없다. 더 이상의 양식은 없다. 이렇게 인생을 만족하게 하는 양식은 없다. 먹을수록 만족한다. 그리고 이것을 나눌수록 더욱더 확산된다. 그리고 내가 나누어 줄수록 더욱 만족이 된다. 이상하다. 내가 그분을 먹고 그분을 누리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면 나눠준 것만큼 더 만족해진다. 이런 양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육신의 양식과는 다른 양식이다. 쌀이나 빵과는 다른 양식이다. 물질적인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인 것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먹을수록 만족하신 그리스도, 나눌수록 확산되는 그리스도만 말할 수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무엇을 먹어도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인생을 주님께서 부르셔서 먹을수록 만족하고 나눌수록 확산되는 신기한 생명, 신기한 양식, 영생의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눈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귀를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입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모든 만족의 만족이 되시고 당신으로 인해서 사는 삶이 만족하도록 축복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처럼 오늘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축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셔서 우리가 먹고 남고 열두 광주리에 항상 채워지는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