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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함으로 증살된 비극의 영창대군 광해군 5년(1613) 4월 좌변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이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은상(銀商) 강도살해사건의 범인 박응서(朴應犀)를 체포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얼마 후 박치의(朴治毅)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도 모두 잡혔는데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박치인(朴致仁), 이경준(李耕準), 김평손(金平孫) 등 하나같이 명문대가 집안의 서자들로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출셋길이 막힌 처지를 비관하다 의기투합해 자칭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사생계를 조직해 어울려 다니다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거칠게 없었던 이이첨 등이 집요하게 광해군을 다그쳐 마침내 광해군 5년 5월 30일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 밖 어느 민가에 구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강화부사는 계축옥사 조작에 일조했던 정항이었고 위리안치된 영창대군의 감시책임자인 수직무장(守直武將)은 임해군 때 일개 수장으로 있다가 직접 임해군을 목 졸라 죽인 이정표(李廷彪)였다. 영창대군이 병사했다는 거짓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어린 막내 동생에 대한 연민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이제는 인목왕후와 철천지원수가 된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자리에 계속 앉혀놓을 수가 없었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광해군 10년(1618) 1월 후궁격인 서궁(西宮)으로 강등시킨 뒤 유폐시켰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다시 복위는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난 뒤였다. 피붙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제주에 유배되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친어머니 노씨 부인과,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고서 절에 의탁한 덕분에 살아남았던 조카 한 명, 그리고 친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작성자 아솜 |
영창대군 답사길목 일죽면에서 본 500년 된 느티나무 푸른잎이 온동네를 덮을 때 다시찾기로 했다.
첫댓글 고생많으십니다. 왕릉답사하셔서 후손들에게 좋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교육자료를 주시느라 고생많으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관심 분야였는데 펼쳐 볼 기회가 온것입니다, 모두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