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1)
최 화 웅
한처음 빛의 낮과 어둠의 밤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모든 것이 태어날 때 이레 동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다 이루어졌다. 저녁은 늦은 낮과 이른 밤사이의 하루가 시작하는 때다. 오늘도 해가 진 뒤로 컴컴해지기 전에 남아 있는 빛살이 서서히 어둠에 묻혀 옷을 갈아입는다. 그 때가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이다. 하루의 저물음과 기울어짐이 또 다른 하루의 출발이다. 저녁은 창조의 공간이다. 저녁이 되어야 해가 지고 밤이 시작된다. 밤은 왜 어두울까? 저녁 산책길에서 어둠이 스미는 박모(薄暮)의 조각들을 주워 담으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대지를 천천히 밟는다. 짙고 푸른 어둠이 ‘모든 것을 다 끊고 혼자일 수 있는 고독력’으로 서성인다. 까마득한 우주에 안긴 캠퍼스가 무한하다. 멀리 박모의 어스름을 머금은 숲속 건물에서 하나 둘 등불의 반란이 시작된다. 어둠에 잠겨드는 사방에 버려진 유령들이 내 몸에 기어올라 차례로 허물을 벗는다.
산 밑 대학촌으로 이사하면서 저녁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이사를 오면서 책을 기증한 도서관에서 우대회원증을 보내왔다. 그 일을 계기로 한결 가까워진 감정이 생겨 저녁 산책을 다닌다. 김장배추가 잘 자라는 텃밭을 지나 쪽문을 통해 돌계단을 오르면 무지개길이다. 건너편에 건축관과 10.16 기념관, 그 옆으로 전설의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인문관의 지붕선이 금정산의 부드러운 능선과 나란히 달린다. 하늘 아래 절묘한 조화다. 산책은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걸을 때도 있다. 완만한 경사가 계속되는 무지개길 따라 바위에 뿌리를 박은 삼나무, 팔손이, 굴참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숲 속 벤치에 앉으면 새소리와 물소리가 정겹다. 무지개길에는 마을길과 수녀원, 산성로와 맞닿은 야생동물의 통로 같은 쪽문과 개구멍이 너더댓 곳이나 된다. 그 쪽문들은 40여 년 전 시위 때 비상통로로 드나들었던 길이기도 하다. 문득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다. 어둠이 깃든 캠퍼스에는 절집 같은 고요가 내리고 나무숲 사이로 비치는 불빛이 먼 추억의 등불이 되어 옛 그리움에 서서이게 한다. 무지개길의 반환점은 제2 사범관이다. 숲속의 하얀 돔이 옛사랑 순점이를 떠올리게 하는 사범관 2층 독어교육과 유리창에 붙어 선 ‘Ich Liebe Dich'라는 인사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대학촌에 사는 덕분에 문만 열면 젊음의 열기를 호흡할 수 있다. 캠퍼스를 포위하다시피한 아파트 주변에 산성로와 온천천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있으나 나는 아득히 잊혀져가던 굽잇길, 무지개길을 따라 걷는다. 그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동안 소원했던 모교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다. 무지개길을 걸으면 고향 가는 길에 접어든 것처럼 푸근하다. 그 길은 자동차와 행인의 통행이 뜸하고 한적하다. 연구실과 도서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잊혀 가던 추억이 널려있다. 어둠 속을 스치는 학생들의 아련한 실루엣도 향기롭다. 이 길은 젊은 날 사랑을 회상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스토리텔링의 길이다. 나는 무지개길을 걸으면서 훗날 이 길이 청량산 자락의 ‘퇴계 예던길’과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 교토의 ‘데트가쿠노미치’ 못지않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캠퍼스에는 덩치 큰 건물들도 여럿 있다. 마치 신도시의 신축 상가 같은 느낌이다. 부산대학교 캠퍼스는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넓고 크다고 한다. 그러나 교세가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결핍과 갈증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학창시절부터 대학캠퍼스에는 우거진 숲과 석조건물이 조화를 이루기를 원했다. 대학이 고전적인 품위와 학구적인 분위기, 그리고 시류와 유행을 벗어난 여인과 같은 고고한 순결함과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 본관인 인문관이 가진 선(線)과 외양을 중심축으로 전체 캠퍼스가 하나의 조형미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급조된 관급공사처럼 높고 크게 세워진 군인막사 같은 건축물들이 전체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파란 하늘과 금정산이 만들어놓은 그 아름다운 스카이라인마저 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몇 채 안 되는 석조건물은 난개발에 밀려 초라하다. ‘용이 사는 시내’, 미리내를 사이에 두고 본관과 별관이 들어선 박물관은 낮은 목소리로 수난과 망각의 시간의 이야기한다. 미리네 계곡에는 본래 넙적바우들이 즐비했었다. 그러나 개교 이후 그 넙적바우들을 건축 재료로 쓰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훼손되었다. 학교 측은 미리내계곡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연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나는 이 계곡을 지날 때마다 “과연 어떤 힘이 이 커다란 넙적바우를 옮겨다 놓았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미리내계곡이 신비롭다, 지반과는 성격이 다른 넙적바우가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널려있는 모습이 지난 자연환경을 말해준다. 지질학계는 큰 바위덩어리가 계곡에 쌓인 것은 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빙하에 의한 운반, 즉 암괴류(巖塊流)로 보는 것이다. 캠퍼스 주변에는 빙하기의 흔적으로 보이는 화석지형이 마치 거대한 자연사박물관을 이룬다. 이곳의 암괴류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여태껏 원시 그대로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졸 졸”하는지 “돌 돌”하는지 귀 기울여 보라.
무지개문에서 웅비탑을 지나 곧장 오르면 옛 대학극장이다. 돌로 지어진 대학극장은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공연할 수 있는 4대 대학극장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면을 뜯어고치고 350석 규모의 강당으로 만들어 이름을 ‘10.16 기념관’으로 바꿔 달았다. 그 앞에 세운 부마항쟁 돌비석에서는 지금도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그날의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당시 이곳이 서슬 푸르던 유신독재에 항거한 민주항쟁의 발원지가 된 기운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것이야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높은 기상과 꿈이 인문관에서 용솟음쳐 새벽벌을 밝혔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부마항쟁 발원지 표지석에는 신영복이 “유신 철패 독재 타도,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을 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캠퍼스 산책길은 반세기의 긴 세월이 압축과 복원을 거듭한다. 넉넉한 터 운동장에 대형백화점과 유료주차장을 세우면서 대운동장과 학생회관을 캠퍼스 맨꼭대기로 올린 뜻은 나변(那邊)에 있었을까?
무지개길을 따라 오르면 폐가처럼 숨겨진 정학관(正學館)이 있다. 이 건물은 처음 숲속 명당에 총장공관으로 지어졌다. 그 아래 머릿동판을 이렇게 새겼다. “本建物은 朴正熙大統領閣下의 下賜金으로 建立된 釜山大學校 總長 公館임-1968年 3月 1日 起工 6月 10日 竣工”. 신기석 총장 시절 때 겪은 유신독재시대, 겁박에 질린 당시의 대학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시절 우리는 막걸리와 도토리묵이 있는 산성마을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학교에서 산성으로 난 옛 오솔길은 이제 ‘숲속 산책로’로 번듯해졌다. 도토리묵에 그 진한 산성막걸리를 배불리 마신 날이면 내려오는 산길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돌부리에 채여 신발이 벗겨지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신발을 아예 가방에 넣고 내려왔다. 술이 깬 뒤 신발을 찾는 촌극이 비일비재했다. 여름날 넓적바우 위에서 온몸에 비를 맞으며 야호를 외치던 일도 잦았다. 시간에 쫓겨 넙적바우 위에서 선언문과 격문을 작성하느라 숨 가빴던 추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저녁 산책길에는 멀리서 어둠을 뚫고 오는 불빛 따라 젊은 날의 추억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그렇게 다가오는 저녁은 찬란하다. 새날을 기약하는 저녁 산책길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인생길이다.
첫댓글 저녁 산책길 풍광이 그대로 그려지네요.. 글을 읽으며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 분은 어떤 분이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그 동네로 이사를 잘 가셨네요. 추억이 깃든 곳이라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명금당닙께서도 저희 동네로 오세요.
제가 챙겨드릴께요
저는 글을 잘 쓰시는 분이 제일 부럽습니다...잘 읽었습니다...^^*
새날을 기약하는 저녁 산책은 인생의 길이다..
늘 좋은 글 나눠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추억의 등불을 밝히는 저녁 산책길을 가까이에서 하실 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저도 이 가을 추억이 담긴 곳을 찾아 가보렵니다. 감사합니다. ^*^
금정산은 정말 아름다운 산입니다 근데 요즘은 저희들이 표현하는 길은 고속도로라 부러지요
선생님의 산책길이 계속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잘 읽고 갑니다
참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