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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이승만(1)-공적과 과오
지난 6월28일, 한때 앙숙이거나 라이벌 관계였던 전직 대통령 5명의 아들들이 뜻을 같이 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이승만(1975~1965)의 양아들 이인수,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 김대중의 아들 김홍업이다.
이들은 아버지들의 반목과 라이벌 관계를 씼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 사후 약 60년 동안 '건국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어 왔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놓고 진영 간 평가가 엇갈리면서 기념관 건립 시도가 매번 좌절됐고, 과거 행적에 대한 일각의 폄훼·왜곡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일에 이 전 대통령의 정적(政敵)이라 불렸던 죽산 '조봉암(1898~1959ㅣ) 기념사업회'의 주대환 부회장을 비롯해 4·19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이영일 3선 국회의원, 전직 운동권, 진보 정치인 출신 등 다양한 정파·배경의 인사들이 두루 참여해 국민 통합의 의미가 극대화됐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이승만처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그만큼 이승만은 한국의 극변의 시대를 살아왔고, 좌파들의 펌훼와 왜곡이 심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한때 이승만을 비난했다가 '이승만 기념관' 사업에 동참한 인사들처럼,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공과를 재평가하면서 우호적으로 바뀌거나 극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 이승만의 공적
이춘근 박사(유튜브 이춘근 TV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4대 정신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협정 및 기독교 입국론으로 정리했다.
좋은 제도가 좋은 국가를 만들 듯이 당시 이승만의 탁월한 선택이 오늘날의 선진한국을 이룬 기초가 된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위대한 '건국 대통령'이다.
남정욱 교수는『이승만 깨기』에서 이승만의 공적 3가지는 첫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건국, 둘째 국제공산주의와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한 것, 셋째 후일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력이 된 의무교육 제도를 확립하여 교육혁명을 달성한 점을 꼽고 있다.
「중앙일보」(2011.4.17)는 좌우합작을 거부하여 한국의 공산화를 막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 농지개혁 성공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이승만은 법령이 제대로 준비되기 전에 행정명령으로 농지개혁을 밀어붙여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좌파들은 사유재산제를 부인하는 북한 공산주의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성공적으로 간주하고 이승만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 공산주의의 무상분배는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에 불과하며, 그것도 나중에는 집단농장식으로 운영되면서 생산성이 떨어져, 농민들의 삶은 물론 인민 전체가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말았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농지상환액이 영세 소작농에게는 과중해 농민 생활이 향상되기는커녕 부채가 늘어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농지개혁에도 자작농이 자립할 수 없었던 것은 나라의 영토가 워낙 좁아 농지에 비해 농민이 많았기 때문이고, 농업 또한 개인의 능력이나 자연 재해 유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 농지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은 아니다.
비록 농민들은 영세했지만 일제 강점기 소작농에 비하면 훨씬 그 지위가 개선되었다.
농민들의 농지상환 부담은 미군정이 제시한 금액보다도 낮았고, 일제시대 소작으로 냈던 것과 비교해도 작았다.
농민들은 자신이 지은 양곡으로 자녀를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1945 ~ 1955년 사이에 중고등학생이 8.4배 늘었고 대학생이 9.9배 늘었는데, 여기에 연유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칭송한 사람은 놀랍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남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왜 한국이 성공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옛날 지도자들이 실책을 더러 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씩은 다 했다.
자유당 시대를 독재시대,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은 됐지만 암흑시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 '토지개혁'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도 국가독립, 안정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체제를 지켜냈다"(이장규,『대통령의 경제학』, 기파랑).
2003년 한국의 한 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물었다.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브라질의 경제는 사회개혁 없이 심각한 불균형성장을 해왔던 것이 문제지요."
이처럼 농지개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백만 명의 군대를 가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겨우 4만 명의 군대로 시작한 마오쩌둥에게 패배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농지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햔다.
월남이 월맹에게 패망한 것도 농지개혁 실패를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꼽는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갑오경장(또는 갑오개혁. 1894~96의 신분제 철폐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운동)으로도 폐지 못한 양반 계층이 사라졌고, 반봉건적 토지 소유제를 타파하고 농민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이후 이루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고도성장도 이승만의 교육혁명과 농지개혁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승만이 없었다면 지금 한반도는 김정은 독재치하에서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만일 이승만만 있고 박정희가 없었다면 한국(남한)은 지금 필리핀 정도의 중진국 수준-일인당 GDP 2905달러, 한국의 1/10 이하-에 머물러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한국에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탁월한 두 지도자를 주신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원전 개발
이승만의 다른 업적으로는 원전 개발과 고급 인재 양성을 들 수 있다.
전력을 전적으로 북한에 의지하던 남한은 6∙25전쟁이후 북한은 일방적으로 남한으로 가는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1956년 이승만은 에너지 전문가인 워커 시슬러 박사의 조언으로 원자력 에너지에 눈을 뜨게 된다.
“석탄은 땅에서 캐내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몇 년 뒤에 써먹을 수 있는 거요.”
“한 20년쯤 걸립니다.”
이후 이승만은 1956년부터 시작하여 8차에 걸쳐 150명의 유학생을 양성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에 불과하던 당시에 일인당 유학비 6000달러를 투자하여 인재를 양성한 흐, 1959년에 국내 최초로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한 것이 한국 원전사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76년에 국내 최초의 원전 고리 1호기가 가동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세계적으로 안전성과 가성비가 뛰어났는데, 지난 5년 동안 문재인 전 대통령의 원전 홀대로 원전사업이 초토화되었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
◇ 의무교육 실시와 대학교육 강조
이승만은 또한 국민 의무교육 실시에 더하여 대학교육 확충과 미래 고급 인재양성을 위해 국비 장학생을 대거 파송했다.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교육열로 이승만 정부는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입했다.
그것은 나중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공업화에 필요한 우수한 노동력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퍼센트에 이르렀지만 이승만이 하야한 시기에는 20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리고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은 3.1배, 대학생은 12배의 수적 증가를 보였다.
6∙25 전쟁의 참화를 거치는 동안에도 대학 교육은 피난지인 부산의 천막 교실에서 계속되었다.
그에 따라 해방 직후 19개교에 불과했던 대학이 1960년에는 63개교로 크게 늘어나고, 대학생 숫자도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승만은 6∙25전쟁 때 주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의 징집을 연기하거나 면제하여 전쟁 후 대한민국 재건의 초석으로 삼는 선견지명을 보였다.
자신이 양성한 대학생에 의해 4∙19학생의거로 하야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대학생들의 그러한 결기를 칭찬했다.
◇ 고급인재 양성
해외 유학도 적극 장려했다.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매년 평균 600명 이상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승만 집권기에 돋보인 것은 군 엘리트 양성이었다. 국군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10만 명에서 65만 명으로 급격히 성장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았으며 군 엘리트 양성을 위해 매년 1000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교육을 받았다.
박정희 준장도 이때 미국 유학을 갔는데(1954.6), 천국 같은 미국에 비해 지옥 같은 한국의 가난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유학을 통해 1950년대에 첨단무기를 다룰 기술을 배운 부사관이 10000명 이상이 되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1960~1970년대에 숙련공으로 국가 산업화에 기여했다.
◇ 이승만에 대한 비판
그런데 비판자들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비전, 이를 초지일관 추구하고 관철한 탁월한 혜안과 선택, 성공적 농지개혁과 교육혁명의 공은 무시하고, 이승만은 민중의 염원인 통일을 고려하거나 더 나은 사회-사회주의-를 지향하지도 않고, 개인의 권력욕에 빠져 미군정청과 친일파의 도움으로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을 고착시켰고, 독재정치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비난한다.
이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설립을 위한 '정읍 발언'(1946.6) 이전에 북한에서는 이미 중앙정부 체제의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1946.2)는 사실은 간과하는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비판자들은, 미국의 일본에 대한 핵 폭탄 투하(1945.8.7과 8.9), 이를 기회로 소련의 스탈린은 일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북한을 침략하여 점령하고(1945.8.8), 이후 남한과의 일체의 소통도 없이 김일성(김성주)을 북한의 대표로 지명하여 북한에 일방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것(1946.2)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만일 이승만이 좌우합작 정부를 주장한 남로당의 박헌영이나 김구처럼 국제적 감각이 없어서 감상적 민족주의와 통일지상주의를 내세워 좌우합작 정부 설립에 찬성했다면, 지금의 한국은 김정은의 통치 아래서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좌파들의 온갖 비난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거부하고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로 설립한 것이야 말로 한국에게는 축복 중의 축복이다.
2차 대전 후 전 세계 신생국 140여 국가 중에서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국가주도의 수출지향형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선진국으로 우뚝 선 나라는 한국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자들이 과(過)라고 평가하는 것도 개헌 외에는 사실이 왜곡되었거나 과장되었거나 날조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느 좌파 교사는「오마이 뉴스」(2021.8.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승만의 과는 알겠는데 공은 뭐가 있나요?. . . ."
그는 한 초등학생이 요약정리한 '이승만 관련 노트'를 소개한다.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반탁운동, 정읍 발언, 제주 4.3, 여순 사건, 반민특위 해산, 한강철교 폭파, 보도연맹 사건,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진보당 사건, 3∙15 부정 선거, 4∙19 혁명 등. 교과서 속 이승만과 관련된 사건이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얼마나 세뇌교육을 잘 시켰길래 한 초등학생이 좌파들이 폄훼하는 이승만의 과를 잘도 열거해 놓은 것이다.
◇ 이승만 당시의 국내외 정세
이승만은 해방 직후 혼돈의 와중 속에서 민주주의 해양국가를 따르는 탁월한 혜안과 결단력을 갖추었다. 그것은 기독교로의 회심과 국제정치학 덕분이었다.
이춘근 박사는 '한국인에게 국제정치학은 필수'라고 강조한다.
조그만 한반도는 세계 최대 강대국인 러시아, 중공, 일본 및 미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국제 감각이 없으면 생존하기 힘들다.
북한처럼 북∙중∙러의 사회주의 대륙국가를 따를 것인가, 한국처럼 한∙미∙일의 민주주의 해양국가를 따를 것인가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이승만은 고종 폐위운동에 가담한 역모죄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과 성경을 통해 기독교로 회심 후 선교사들이 넣어준 자료들을 통해 서양 문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쓴「독립정신』(1904. 츨판은 1910년 미국에서 이루어짐)을 통해 이승만은 한반도에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나라가 들어서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과 국제정치학 박사로서의 뛰어난 혜안으로 이승만은 해방 후 민족통일이란 명분으로 좌우합작 정부를 주장한 좌파들이나 중도우파의 속임수나 무지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미국은 물론 미군정청도 공산주의에 대해 잘 몰라서 좌우합작 정부를 거부하는 이승만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소련을 봉쇄하는 트루만 독터린(1946.3) 남로당의 위조지폐 사건(1946.5)으로 인해 공산주의의 실상을 깨닫고 이승만의 우파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태평양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 1923년 3월호(제31호)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실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킨 레닌에 의해 1918년 소비에트 공산당이 탄생되어 러시아를 비롯한 전세계가 붉게 물들어가며 공산주의를 환호하고 공산주의를 통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을 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무조건 비판만 하지 않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정확히 밝혔다.
공산주의가 부당한 5가지 이유는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게으른 가난뱅이가 늘어난다), 자본가를 없애자(상공업 발달이 정지된다), 지식계급을 없애자(모든 사람이 우매해 진다), 종교를 혁파하자(덕과 의가 없어진다), 정부와 군대를 없애고 소련만 믿으면 된다 이다.
이에 더하여 미국에 오래 거주한 이승만은 1920년대에 소련을 방문하여 너무나 못사는 소련 농촌을 보고, ‘평등도 좋지만 이건 아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좌파들은 마국이나 소련에 가보지도 않고 이념적 탁상공론에 현혹되어 과격한 좌파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도 공산당이 있지만 그들이 과격하지 않은 이유는 '여행'을 통해 현실을 보고 이념적 과격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승만은 소련이 폴란드에 처음에는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다가 나중에 우파를 차례로 제거하여 좌파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사실을 예로 들면서 좌우합작을 끝까지 반대했다.
만일 그 당시에 이승만이 좌파들처럼 감상적 민족주의에 집착하고 공산주의에 호의를 베풀어서 좌우합작 정부에 동의했다면 한국(남한)은 지금 김정은 치하에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을 겪고있을 것이다.
2차 대전 후 대부분의 신생국은 소련의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 선전에 속아서 자기들을 속박한 서구 제국주의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도입하여, 지금도 정치적 자유가 없고 경제적으로도 빈곤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주.사.파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북한 아닌가?
만일 주.사.파들 주장대로 이승만이 그 당시에 민족을 내세우고 사회주의 통일정부를 추구했다면 지금은 김정은의 독재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난세에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라는 탁월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한국은 여러 가지 혼란을 겪어왔지만 잘 극복하여 이제는 선진국 대열로 올라선 것이다.
물론 나중에 헌법 개정을 통한 임기 연장이라는 불미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봉건시대-일제속박-민주정부의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단 기간 내에 온전히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2차 대전 후 대부분의 신생국가들, 예를 들어 필리핀,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등이 독재와 쿠데타로 점철된 과정들을 겪었다.
그러므로 유독 한국만이 갑자기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 솟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 주.사.파들의 '내재적 접근'
주.사.파들은 북한의 독재에 대해서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는 내재적 접근으로 그들을 감싼다.
내재적 접근법은 송두율의 전공이다. 독일 철학자이자 좌파인 송두율은 리영희, 한완상, 백낙청, 강만길, 서중석 등과 함께 1980년대 이래 이념적 왜곡으로 한국인의 혼을 빼앗은 자이다.
송두율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크게 등용을 받은 자이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비판과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북한의 공산 전체주의를 합리화해 온 송두율이 한국사회에 확산시킨 가장 큰 '업적'(?)의 하나는 북한 사회를 '보편적 시각'으로 보지 않고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각 즉 '내재적 시각'으로 보게 한 것이다.
내재적 논리는 한완상, 안병욱, 강정구, 이종석 등 한국의 북한 연구가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어 이제는 보편화되었을 정도이다.
송두율은 북한을 보기 위해서는 민족분단 극복문제를 핵심으로 삼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특수성과 건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주체사상의 검토는 곧 남북통일을 위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주.사.파들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세우고 6∙25사변을 통한 적화통일을 막은 이승만과 경제부흥을 이룬 박정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원론적인 외재법 접근법으로 비판한다.
좌파들의 내로남불과 상통하는 주장이다. 즉 내 편이 하면 로맨스이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편이 하면 불륜이자 청산되어야 할 적폐다.
한때 우리가 문재인 좌파들, 특히 조국이나 윤미향 등에게서 신물 나게 겪고 있는 적폐 아닌가?
왜 이중 잣대로 대하는가? 이승만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지 않은 것이 그토록 한이 서릴 정도로 미운가? 만일 그랬다면 지금 당신들은 어떤 세상에 살고있을 것 같은가?
이쯤 되면 좌파들은 이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최근 어느 좌파 중진이 솔직히 고백한 것처럼 '체제 경쟁은 이제 끝났다.' 이제 북한과 남한의 체제를 비교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런데 아직도 주.사.파들은 이런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