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美貌)의 사상(思想)/조연현(趙 演 鉉)
이 지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 된다.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우거진 삼림, 눈부신 각종의 꽃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이해와 애정! 만일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할 것인가. 사람의 미모도 그러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의 하나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충격을 느낀다. 황홀한 즐거움 같기도 하고, 외로운 슬픔
같기도 한 감정의 물결이 인다.
흡사 감동적인 예술을 대했을 때와 같이―이것은 미모도 하나의
예술적인 현상임을 말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창작도 아닌 신의 우연한 은총일 뿐이다.
사람의 육체 중에서 얼굴은 가장 귀중한 부분에 속한다. 그것은 얼굴이 그 사람의 육체 전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관상학은 사람의 얼굴이 그대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 준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육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남보다 아름답게 타고난 미모의 사람들은, 그만큼 신의 은총을 많이 받은
것이 된다.
미모에는 일정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미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관에 근거된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최상의 미모로서 보였을 것이요, 에드워드 8세에겐
심프슨 부인이 지상의 유일한 미모로서 비췄을 것이다. 아무리 코나 입이 비뚤어져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얼굴이 미모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의 의식과
완전히 떠난 미모의 의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모의
의식과 사랑의 의식은 어쩌면 동일한 감정의 두 개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미인을 선발하는 풍습이 있다.
<미스 코리아>니 <미스 아메리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수의 투표에 의해서 미인이 결정된다. 미인의 객관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인을 정말 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수의 의사가 미인이라고 결정한 것이니까 미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미인을 미인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런 경우의 미인이란 정말 미인이 아니라
미인의 유형일 뿐이다. 미 그 자체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미의식을 조절한 미의 개념일 뿐이다. 미는 감동의 대상이지만,
미의 개념은 감동의 대상이 안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스
아메리카나 미스 코리아도 자기의 애인이 주는 몇 만 분지 일의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미모란 객관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관적인 실감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전까지 아름답게 보여지던 얼굴이 별안간에 밉게
보이고 지금까지 밉게 보아 온 얼굴이 어떤 순간부터 별안간에 아름답게 느껴진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우발적인 사건에서 혹은 어떤 경우의 표정 하나로서, 우리는
그전까지 전혀 몰랐던 아름다움이나 미움을 새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미모의 의식이 그 사람의 용모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본질을 결정한다. 이것은, 사람의 얼굴에
대한 미모의 의식은, 그 외형적 조건만으로서 독립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외형적 조건 이외의
다른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얼굴이 인간의 생명의 상징이라면
생명의 구체적인 기질인 그 사람의 정신적 인격, 내면적인 조건은 그 사람과의 특수한 교섭이나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미모가 주관적인 실감이라는 본뜻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된다.
우리는 전차나 버스 속에서 혹은 노상에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퍽 아름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미모는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곧 기억에서 사라지는 미모란 정말 미모가 아니다. 미모는 그것이 하나의 감동이요, 충격이기 때문에 오래 잊혀지지 않는 곳에 그 생명과
가치가 있다. 일생에 두 번밖에 보지 못한 베아트리체를 단테는 일생동안 잊지 못했다. 그와 같은 작용력이 없으면 미모는
아니다. 이와 같은 작용력은 미모의 내면적 조건이 그 외형적
조건으로 표상됨으로서만 가능해진다.
어떠한 미모도 화장을 잘못하거나 그것을 게을리 하면, 그 아름다움은 거세(去勢)된다. 화장은 부족의 보충이요 무질서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자연적인 미를 완전한 창작적인 미로 개변시킨다. 잠자는 사람의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방심에서 오는 의지의 불통일 때문이다. 화장에 의해서
미모가 한층 더 확실해질 수 있다는 것은, 미모는 자연적 현상이기보다는 의지적 형상임을 말한다. 아무리 못난 얼굴도
화장에 의해서 어느 정도 예뻐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불미한 정신의 소유자라도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미모는 하나의 신의 우연한 은총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창조적인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특히 미모에 예민한 여성들은 스스로 자기가
미모이기를 원한다.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도취되었던 <희랍> 신화의 나르시스처럼 자기도 미모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특히 여성들은 자기가 얼마만큼 미모가 될 수 있는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나르시스인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사람을 찾아내느냐 못 찾아내느냐 하는 것만이 자기의 미모를 알게 되는 열쇠가 된다. 자기가 나르시스임을 알려주는 사람을
얻게 된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완성시킨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옳은 미모는 자기 인생의 스스로의 완성 위에
있는 것인가?
▲ 해 설
문학평론가(1920∼1981). 경상남도 함안 출생. 호는 석제(石濟). 46년
김동리(金東里)·서정주(徐廷柱) 등과 함께 우익계 단체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했으며, 문학가동맹측과 민족문학을 둘러싼 논쟁을 전개, 순수문학을 옹호하였음. 55년 《현대문학》을 창간, 주간을 지냄. 주요 저서로는 《문학과 사상》, 《한국현대문학사》, 《한국현대작가론》, 《내가
살아온 한국문단》 등이 있음.
이 글은 중수필(重隨筆)로서, 미모(美貌)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며 "사랑의 의식과 완전히 떠난 미모의 의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주제임. 경수필(輕隨筆)이 작가의 신변적인 체험에서 소재를 찾는 수필이라면, 중수필은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문제에서 소재를 찾는 것이 특징임. 따라서 중수필에서는 작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작가의 철학과
사상만이 보이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