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온다
아버지의 그림자로
저녁이 성큼 온다
고단했던 하루
돌이키면 은혜뿐
이제 고른 숨 쉬며 눕자
여직 보지 못한
빛이 오라고
40대 여성이 ‘이태원 클래스의 OST 시작’이라는 노래를 듣고 싶어 했다. 음악치료사가 열심히 준비해 왔지만 그녀는 결국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투병 중에 좋아했다는 그 노래, ‘다시 시작해’라는 가사가 좋았을까?
우리 모두는 다시 ‘시작’해야 할 존재이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시작해야할 숨겨진 시간을 생각하면, 저녁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노을이 아름답게 보일 것이며, 노을빛에 물든 자신도 꽤 괜찮아 보일 것이다. 헛걸음인지 알았는데 옆 병실의 할머니가 이미자 노래를 좋아한단다. ‘섬마을 선생님, 동백아가씨’등 가락에 맞추어 셋째 아들과 박수를 치며 좋아하시더니, 어느 순간 아들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흐른다. 급기야 40대 중년의 아들이 소년처럼 엄마의 볼을 비비면서 흐느낀다. 할머니가 다음에는 막내아들이 있을 때 꼭 와달라고 거듭 부탁을 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다음 주에 막내아들과 함께 노래하자고 말하며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다음 주에 계실까요?” 음악치료사가 묻는다. 벌써 10년 이상 호스피스 환자를 경험한터라 그도 잘 알고 있기에 하는 질문이다. 누군가에겐 시간은 속절없이 너무나 짧다.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르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자와 시간을 주관하는 분의 차이다. 우리의 시간 속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때, 그 시간 우리는 영원을 경험한다. 저녁을 맞이하는 마음은 각자가 다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내용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아침이 기다리고 있기에 저녁이 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 날, 새 빛을 맞이하는 그 날이 죽음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산 소망이 되어야 한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야 한다. 아직 그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죽음보다 더 큰 사랑을 주시라고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그 사랑은 말씀 속에 있고, 말씀을 먹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보혈의 피가 된다. 은혜의 시간은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시간이다. 오늘도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롬 14:8)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산 소망을 두고 저녁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곧 저녁이 온다. 영롱한 빛의 사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