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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신명기를 보겠습니다. 지난 번에 모세 5경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5경이라는 표현에 익숙한데, 신학계에서는 4경, 6경, 9경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어디까지를 한 단락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5경이라는 표현을 친숙하게 받아들입니다. 신명기는 5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먼저 책의 제목인 신명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를 신은 하나님, 명은 명령, 기는 기록한 책으로 이해합니다. 즉 신명기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할 때의 ‘신’자는 귀신 신자가 아닙니다. ‘납 신’자입니다. 되풀이한다, 반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신명기를 자세히 보시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나와 있는 말씀이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에 나오는데 신명기 5장에도 나옵니다. 신명기를 자세히 보시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나와 있던 말씀들이나 사건들이 재기술된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앞서 기록된 것을 반복하여 쓴 것입니다. 그래서 납 신자를 씁니다. 되풀이 하여 기록한 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죠? 한번 기록한 것을 왜 굳이 반복해서 또 한번 기록하고 있죠? 왜 이미 나와있던 것을 신명기에 또 기록하게 되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출애굽 1세대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1세대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2세대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왜 반복해서 기록하였지 라고 질문할 때 가장 분명한 대답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받는 대상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말씀을 받는 대상이 출애굽 1세대입니다. 그 1세대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1세대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의 청중은 출애굽 2세대입니다. 여기서 출애굽 2세대는 출애굽을 할 때 20세 미만의 사람이었거나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출애굽 2세대에게 모세가 죽기 전에 선포했던 유언적인 설교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라고 하는 것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기록된 말씀을 반복한 겁니다. 왜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였는가, 말씀을 듣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유언적인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 신명기인데 모세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이 무엇이었을까요? 신명기의 주제는 실패한 조상을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신명기의 주제입니다. 출애굽 2세대는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당하는 사건을 목도했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힘있게 걸어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실패한 것을 출애굽 2세대는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출애굽 2세대에게 조상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그들을 본받지 말라, 하나님의 명령에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삶을 살아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명기가 말하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의 주제는 실패한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인데 신명기 1장부터 34장까지를 쭉 읽어보시면 신명기를 장악하고 있는 분위기가 매우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실패한 조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데 분위기는 출애굽 2세대가 1세대의 실패를 본받을 것 같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끊임없이 출애굽 2세대는 실패한 조상을 본받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지만 출애굽 2세대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누구의 삶을 보고 배웠습니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을 보고 배운 겁니다.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 여정에서 죽임을 당했죠. 레위기 이야기 했을 때도 얘기 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한 것은 거룩의 위계질서입니다. 아버지의 순종을 자녀가 보고 배워야 하는데 도리어 출애굽 2세대는 1세대의 불순종을 보고 배운 겁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1세대의 불순종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2세대가 어렸을때부터 보고 배운 것이 1세대의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주제와 달리 신명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2세대들도 1세대의 실패를 반복할 것 같은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신명기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 이것을 신명기 신학이라고 하는데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바꿔 얘기하면 인과응보적인 사고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고 불순종하는 자는 벌을 받습니다. 결국 뿌린대로 거둔다는 겁니다. 이런 신명기 신학이 가장 상세하게 나와 있는 곳이 신명기 28장입니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을 지배했던 신학적인 사고가 인과응보입니다. 신명기 신학입니다. 이것이 뒤집어지는 본문이 욥기입니다. 욥기를 보시면 하나님께 옳다 인정 받은 의로운 신앙인 욥이 고난을 받습니다.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고 많은 재물이 사라져버립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욥의 몰골과 처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거야, 욥의 세 친구의 전형적인 주장의 근거가 인과응보입니다. 욥이 지금 처해있는 현실을 보세요. 10명의 자녀가 죽임당했습니다. 욥의 많은 재물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욥의 온몸에 악창이 퍼져서 기와나 돌로 자기 몸을 긁고 있습니다. 욥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면 하나님께 극단적인 심판을 받고 있는 겁니다. 신명기 신학에 근거해 보면 이런 심판이 욥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뭐가 전제되어야 하죠? 불순종이 누적되었을 때, 불순종의 결과 심판이 오는 거잖아요. 욥의 세친구들은 전형적으로 인과응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적 사고를 가지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욥의 세 친구의 주장입니다. 여기에 반박하는 것이 욥의 주장입니다. 욥은 자기가 죄를 범해서 이런 고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롭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로운 삶을 살아가다가 고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면서 죄악으로 충만한 이 땅에서 미움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이 욥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신학 사상이 신명기 신학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신명기 28장입니다. 신명기 신학은 인과응보적인 관점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하는 겁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신학적 사고가 신명기 신학이었는데 인간의 삶에는 이 신학으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이 있습니다. 도리어 불의한 세상, 거짓 충만한 세상에서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모든 고난이 불순종의 결과이거나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롭게 살아가다가 고난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신명기를 마무리하면서 신약에 가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돌로 쳐죽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빌라도에게 압박을 가했고 결국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허용을 합니다. 빌라도라고 하는 정치 권력과 산헤드린이라는 종교권력이 힘을 모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가보시면 스데반을 죽일 때 산헤드린이 자기들이 판결을 내리고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입니다. 이 재판을 주관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죽일 때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처형하는 것을 주도하지 않았나, 왜 굳이 빌라도에게 압박을 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했는가, 스데반처럼 자신들이 사형을 언도하고 성밖에 끌어내어 투석형으로 죽이면 되지 않았을까, 굳이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산헤드린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이용한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폭로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게 되면 많은 이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왜요? 예수가 그들의 치부를 폭로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예수를 제거하고 예수를 따르던 추종자들도 한 순간에 잠잠케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겁니다. 그 모색의 결과 그들이 찾아낸 것이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서 예수를 죽이는 겁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어떤 말씀이 있냐면 “나무에 매어 달려 죽은 자들은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은 자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살아있는 사람을 나무에 매어 달려 죽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체 안에 큰 죄를 범했을 경우 이 사람을 보통 투석형으로 죽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보통 돌을 던져 죽였을까요? 정결법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정결법에 근거하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부정한 겁니다. 피는 몸 안에 있어야죠. 몸 안에 피가 있으면 정결한데, 그피가 몸 밖으로 나오면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을 때려 죽인다고 했을 때 내가 사람을 때리다가 그 사람의 피가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데 그때 내가 그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나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신체접촉을 하지 않고 정결법을 지키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처형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바로 멀리서 돌을 던져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투석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큰 죄를 범한 사람을 투석형으로 먼저 죽입니다. 그 다음에 죽은 그 사람의 시체를 해가 지기 전까지 나무에 매어 달아 두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국가적으로 큰 죄를 범한 사람을 참수한 후에 그 사람의 목을 성벽에 달아두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원래 살아있는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을 먼저 죽이고 그 사람의 시체를 해가 지기 전까지 나무에 매어 달아 놓음으로 이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한 겁니다. 이 말씀을 종교지도자들이 악용한 겁니다. 그래서 로마의 힘을 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게 되면,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에 근거해 보면 예수는 왜 죽게 된 겁니까?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게 된거죠. 그렇다면 왜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겁니다. 첫째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난동을 부렸다, 둘째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안식일법, 음식 정결법을 위반했다, 셋째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들과 소통했다, 넷째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람한 말을 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저주하여 죽이셨다 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으면 그 예수를 여전히 따르고 추종하는 자들도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을 가능성이 높죠? 이것을 종교 지도자들이 이용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투석형으로 자기들이 죽이지 않고 나무에 매달아 예수를 죽임으로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죽음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였고 이를 통하여 예수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까지도 한순간에 잠잠케 만들려고 한 것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의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초대 교회인들을 강하게 핍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말리엘 문화에서 율법을 공부했던 바울 입장에서는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자인 겁니다. 신명기 21장 23절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은 것이 확실한 예수를 구원자니, 메시아니 부르며 사람들이 믿고 추종하고 있으니 바울 입장에서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래서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 이전에 초대 교회를 왜 핍박했는가를 이야기 해주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명기 34장에 보면 모세가 죽습니다.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굉장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경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비신화화 시킵니다. 만약 모세가 죽은 후에 그의 시체를 어딘가에 안장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엄청나게 그 무덤을 꾸몄을 겁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모세의 무덤에 와서 모세에게 지혜를 구하면서 모세를 우상화했을 겁니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입니다. 그 놋뱀을 히스기야 왕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없애셨는가, 구약과 신약의 원본을 다 없애셨는가 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냐면 “이것이 예수님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이다”라고 하면 그거 하나 만져보려고 안달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런데 만약 모세의 무덤이 있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을 우상화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우상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시고 하나님만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중요한 특징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비신화화 시킨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것도 쓰고 다윗이 불륜을 저지르고 우리야를 죽인 것도 쓰고, 그것을 통해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모범만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어떤 순종을 보였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우리들도 그 믿음의 인물들을 따라가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강조점입니다. 여기까지 짧게 5경을 마무리 하고 다음에는 역사서 공부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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