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재래시장 구석 바닥, 단골이다
목욕탕 의자가 의자이고 의자가 밥상이고
의자와 상은 옮겨놓는 곳이 상석이다
있든 없든 늙든 젊든 할 것 없다
다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노천목욕탕 같다
메뉴는 한 가지, 한 가지도 많다
응어리 풀 듯 반죽을 밀고
뿌리내리듯 각각의 가락을 뽑아 하모니를 맞추는 국수다발
큰 솥에 대량으로 넣고 퍼내고 넣고 퍼내고
일손과 국수다발, 손발이 척척 맞다
한결같은 세월이 리드미컬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칼칼한 바닥에 뜨겁게 내린 뿌리
그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내 속이 든든하다
그곳에 가면 햇살 든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조는 꿀잠이 있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순간의 완성된 한칼이 있다
<시작 노트>
시장-보기를 시장-되기로 바꾼다. 마음을 바꾸자 시장과 나 자신이 동일시된다. 함께 삶의 현장에 동참한다. 피의 질서에 따르면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람-되기에 가까워지는지 가슴이 따뜻해진다.
첫댓글 박봉희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올립니다.
낙법
거의 죽은 나무
이끼 낀 나뭇가지에 꽃이 폈다
나무야,
나무에게로 돌아가라
제 안의 검은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제 영정에 망각의 꽃을 바친
나무는
나무에게로 돌아가서
나무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시집 『복숭아 꽃에도 복숭아꽃이 보이고』에서
목욕탕 그 의자에 앉아 칼 국수를 기다리는 풍경들이 정답게 느껴집니다
있든 없든 늙든 젊든 한가지 메뉴 칼 국수이니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시로 잘 나타내셨네요
밀가루 반죽이 하모니 맞추듯 순간 솥으로 들어가면
이것 저것 더 넣어 펄펄 끍는 칼국수를 퍼내는
가장 흔하게 먹는 칼 국수
순간의 완성된 칼 국수를 먹고
노근한 지금
옛날 햇살의 따스함 속에
담벼락에서 조는 꿀 잠을 저절로 소환될만 합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재래 그리고 시장의 한 구석, 그것도 바닥이 이 시의 배경이다. 이런 질적인 시간과 장소에 대한 발견은 국수를 만드는 과정으로서 내러티브로 인해 읽기의 재미와 의미를 더한다. 노천목욕탕 같은 저잣거리에 들러 나는 국수를 먹는다. 한결같은 세월에 한결같은 목구멍으로 국수는 잘도 넘어간다. 칼국수 한 그릇만으로도 이미 내 속은 든든하다. 저자猪鮓에서 갖게 되는 이 넉넉한 마음은 햇살 든 담벼락에 앉아 조는 다디단 잠에서 그 절정을 드러내 보인다. 박봉희의 시선은 정작 순간의 칼에 있다. 국수를 써는 정신의 단칼은 고통과 죽음, 아니 소생의 기쁨에 있다. 칼sword과 (신의) 말word이 결연 관계라면, 시의 검劍과 법法은 어디에 있는가. ‘~되기becoming’다. 하모니와 리듬에 저간의 응어리가 풀리고 실낱 같은 희망도 희망이라면, 무無의 순간에 완성되는 시는 도(刀,道)에 가깝다. ‘시장-되기’는 가장 낮은 시장의 구석과 바닥에서, 시간의 기원과 흐름에서 발현되는 강도intensity와 차이에 있다. 시와 시인들의 장場인 시장과, 시인-되기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찰나멸찰나생의 영원한 현재, 사건의 새로움이, 거기 있다.
"칼칼한 바닥에 뜨겁게 내린 뿌리
그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내 속이 든든하다"
* * *
"칼칼한 바닥에 뜨겁게 내린 뿌리" "실낱같은 희망"이라 정의를 내린 '칼국수'는 과연 어떤 맛일까요? 한칼 베어물고 싶군요!ㅎㅎ
재래시장 구석, 단골, 목욕탕 의자, 큰 솥 등 시어의 넉넉함 속에 칼국수 한그릇 놓입니다! 구수한 정경에서 묻어나는 세월을 발견하고 움내린 희망은, 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품게 되는 순간의 희열 아닐까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