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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20권[1]
[오관산 서운사 화상] 五冠山 瑞雲寺
앙산仰山 혜적慧寂 선사의 법을 이었다. 선사의 휘는 순지順之요, 속성은 박朴씨이며, 패강(浿江:大同江) 사람이다.
조부 때부터 가업이 융성하여 대대로 변방의 장수로서 충성스럽고 근엄하다는 명성이 향리에 퍼졌고, 어머니 소昭씨는 유순하고 모범이 되어 어머니로서의 위의가 구족하고 좋은 명성이 이웃에 자자했다.
태기가 있을 때에 가끔 길상吉祥한 꿈을 꾸었고, 탄생할 때에는 이상한 상서가 있었으니, 옛 현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또 나타난 것이다.
죽마竹馬놀이를 할 때에 벌써 우거(牛車:대승)의 기량이 있어 무릇 장난을 하면 항상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하였고, 열 살이 되자 학문을 좋아하고 애써서 입을 열면 큰 뜻을 읊어 청운靑雲을 능가하는 기개를 보였다.
이치를 열어 현현한 진리를 이야기할 때에는 거울이 마주 비치는 것 같았다.
약관이 되자 도의 싹이 일어나서 시끄러운 곳에 있기를 싫어하고 고요한 환경에 왕래하기를 좋아하더니, 마침내 양친에게 출가할 뜻을 밝혔다.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허락하니, 오대산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이어 속리산에 가서 구족계를 받은 뒤에는 행行은 결초結草 비구니와 같고, 마음 씀은 호아護鵝 비구니에 견줄 만하였다.
이어 공악公岳에 갔다가 갑자기 신인神人의 설법 요청을 받으니, 산이 궁궐로 변화해 마치 도솔천과 같았다. 설법하여 기연에 응하니, 순식간 모든 것이 없어져 버렸다.
만일 덕이 지극하고 행이 원만한 이가 아니면 그 어찌 이럴 수 있으랴?
대중大中 12년에 이르러 사사로이 서원을 세워 중국中國에 가기를 원하여 사신을 따라 바다를 건널 때, 한 척의 배를 타고 만 겹의 파도를 넘는데도 조금도 두려운 생각이 없이 까닥 않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
마침내 앙산 혜적 화상에게 가서 정성스럽게 발 앞에 절을 하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니, 화상이 관대히 웃으면서 말했다.
“온 것이 어찌 그리 늦었으며, 인연이 어찌 그리 늦었는가?
뜻한 바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머물러라.”
선사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현현한 종지를 물으니,
마치 안회顔回가 공자 곁에 있던 것 같고,
가섭이 부처님 앞에 있는 것같이 하니,
그때에 모였던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건부乾符 초엽에 송악군松岳君의 여자 단월檀越인 원창元昌 왕후와 그의 아들 위무威武 대왕이 오관산五冠山 용엄사龍嚴寺를 희사하여 곧 거기 가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서운사瑞雲寺라 한다.
선사는 언젠가 형상을 표현하여 법을 나타내어 무리들에게 진리를 증득하는 데에 빠르고 더딤이 있음을 말했다. 이 가운데 네 쌍의 여덟 모습이 있었다.
○, 이 모습은 열반으로 의지를 삼는 형상이라 하고, 또는 불성을 다스리는 형상이라고도 하나니, 뭇 중생과 여러 성인들이 모두가 이 형상에 의지하고 있다.
형상은 비록 다르지 않으나 미혹과 깨달음은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다.
이 형상을 아는 이는 성인이라 하고, 이 형상에 미혹한 이는 범부라 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인도에서 설법할 때 대중에게 이 형상을 나타내어 보이니, 마치 달이 자리 위에 뜬 것 같았는데, 그 설법 소리만 들리고, 그의 형상은 볼 수 없었다.
그 무리 가운데 한 장자가 있었으니, 제바提婆라 하였다.
대중에게 이르기를,
“이 상서를 알겠는가?” 하니,
대중이 대답하기를,
“성인이 아니거니, 어찌 능히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제바는 마음 바탕이 미리부터 고요해졌으므로 그 형상을 보자마자 잠잠히 깨닫고 대중에게 말했다.
“지금의 이 상서는 스승께서 불성佛性을 나타낸 것이요, 스승의 몸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무상無相 삼매는 그 형상이 보름달 같은데, 이것이 불성의 뜻이니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스승이 자리 위에 본래의 몸을 나타내고 게송을 읊었다.
몸으로 보름달 모습 나타내어
여러 부처님의 바탕을 드러내니
설법은 그 형체가 없는지라
말하는 것, 성聲도 색色도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월륜상月輪相을 갖고 질문해 온다면 형상 중심에 우牛 자를 넣어 대답하라.
牛, 이 모습은 소가 인초忍草를 먹는 형상이라고도 하며, 또는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형상이라고도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경에서 말하기를,
“설산에 인욕忍辱이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醍醐를 낸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중생이 대열반大涅槃의 법을 듣거나 물어 배우면 불성을 본다” 하였으니,
풀은 묘한 법에다 견주었고, 소는 뛰어난 근기에다 견주었고, 제호는 부처에다 견주었다. 그렇다면 소가 풀을 먹으면 제호를 내고, 사람이 법을 알면 정각正覺을 이룬다. 그러므로 소가 인초를 먹는 형상이라고도 하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형상이라고도 하느니라.
○奔, 이 모습은 3승乘이 공함을 구하는 형상이니,
무슨 까닭인가?
3승들은 진공眞空이란 말을 들으면 있다는 생각으로 찾으려 하므로 진공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상 밑에다 ‘우牛’ 자 셋을 쓰는 것이다.
만일 이 형상을 갖고 묻는 이가 있다면, 차츰차츰 성품을 보아 성불하리라고 대답하리라.
[○*牛], 이 모습은 드러난 대지에 있는 흰 소의 형상이니, 드러난 대지라 함은 불지佛地 또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 흰 소라 함은 법신法身을 이루는 묘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소가 원상 안에 들어 있음을 표시한 것이다.
묻는다.
“어째서 둥근 달 모습 옆에다 세 짐승을 붙였으며, 달 가운데다 우牛 자를 붙여서 대답하였는가?”
답한다.
“달 아래 세 짐승은 3승乘을 뜻하는 것이요, 달 복판의 한 마리의 소는 1승乘을 뜻한다. 그러므로 권승權乘을 들어 진실로 깨달아 들어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묻는다.
“먼저는 달 복판에 우牛 자를 쓴 것을 말하고서,
‘소가 인초忍草를 먹는 형상이다’ 했는데,
어째서 또 달 복판에 우 자를 쓴 것은 드러난 대지에 있는 흰 소라고 하는가?
두 곳에서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우 자인데, 어째서 설명하는 글이 같지 않은가?”
답한다.
“설명하는 글은 다르나 형상과 소는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면 어째서 두 곳에서 같은 형상과 같은 소를 나타내는가?”
“비록 형상과 소는 다르지 않으나 견성의 빠르고 더딘 것이 같지 않으므로 두 곳에 같은 형상과 같은 소를 나타낸 것이다.”
“만일 견성의 빠르고 더딘 것이 각각 다름을 논한다면 인초忍草를 먹는 소와, 드러난 대지 위의 소 중에 어느 것이 빠르고 어느 것이 더딘가?”
“인초를 먹는 소는 화엄회상華嚴會上에서 진실한 성품을 활짝 깨치는 도리를 밝히는 소이므로 빠르고, 드러난 대지 위의 흰 소는 법화회상法華會上에서 3승을 모아 1승으로 돌아가는 도리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설명하는 글은 다르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은 같다.
그러기에 같은 형상과 같은 소를 들어서 이치와 지혜가 다르지 않음을 밝힐 뿐, 그 근본이 전적으로 같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牛○, 이 모습은 결과에 계합하게 원인을 닦는 형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비록 정각正覺을 이루기는 하나 중생들의 행에 걸림이 없고, 지혜는 부처의 경지와 같으나 행行이 이 지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행하던 자취를 따라 행한다” 한 것이 이 형상이다.
누군가가 이 형상으로 질문을 한다면, 다시 달의 형상 가운데 만卍 자를 넣은 형상으로써 대답하리라.
[○*卍], 이 모습은 인因도 과果도 모두가 원만한 형상이다.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위에서는 달 위에다 우牛 자를 붙이고, 이제는 달 복판에다 만卍 자를 붙여서 대답하는가?”
답한다.
“달 위에다 우 자를 붙인 것은 과果에 계합하게 원인을 닦는 형상이다. 달 가운데 만 자는 인과 과가 원만한 형상이니, 인因을 들어서 과果가 나타난다는 뜻으로 대답했느니라.”
○牛, 이 모습은 공空을 구하여 부지런히 행하는 형상이니, 문 앞의 초암草庵에서 보살이 공의 이치를 구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3아승기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서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한다” 하였나니,
이렇게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기 때문에 이 모습으로 표현하였느니라. 누군가가 이 형상의 뜻을 묻는다면 달 둘레 복판에 왕王 자를 붙여서 대답하리라.
[○*王], 이 모습은 실제實際를 차츰차츰 증득하는 형상이니,
무슨 까닭인가?
어떤 보살이 여러 겁劫 동안 수행하여 4마魔의 도적을 무찔러 비로소 무루無漏의 참 지혜를 얻고 불지佛地로 깨달아 들어가 다시는 남은 습성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성왕聖王이 뭇 도적들을 항복시켜서 나라를 안녕케 하여야 다시는 도적들의 원성에 시달림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아래의 두 쌍과 네 형상은 허虛를 보내 실實을 가리키는 것이다.
牛[○*人], 이 모습은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는 교敎를 버리는 형상이니,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승의 평등한 법에 의하여 잘 연구하고 잘 해석하면 실로 잘못 아는 일이 없겠지만, 자기의 이지理智를 알지 못하면 온전히 다른 사람의 말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이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 형상의 뜻을 묻는다면 머리 위의 우牛 자를 떨어 버리고 대답하리라.
[○*人], 이 모습은 근본을 알아 근원에 돌아가는 형상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정신을 돌이켜 공空의 굴窟에 머무르고/ 조복하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난 뒤에/ 드러난 땅에 초연히 앉으면/ 음(陰:五陰)의 정체를 알아 반열반般涅槃에 든다”고 한 것이 이 형상이다.
묻는다.
“무슨 까닭에 머리 위의 우牛 자만 없애 버리고 복판의 인人 자는 버리지 않는가?”
답한다.
“복판의 인 자는 이지理智를 표현하고, 머리 위의 우는 사람의 생각과 견해를 비유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록 교법에 의하여 3장藏을 분석해 알아도 자기의 이지가 드러나지 않으면모두가 상해想解, 즉 생각과 견해인 것이다. 이 상해가 나지 않아야 이지가 나타나니, 그러므로 머리 위의 우 자를 떼어 버리고 복판의 인 자는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병病만을 제거할 뿐 그 법은 제거하지 않는다’ 한 것이다.”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범부가 교법에 의하여 법法 배우기를 허락하지 않는가?”
답한다.
“만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교법에 의존한들 어찌 식심識心을 쓰겠는가?
그러나 범부들이 교법에 의존하는 것은 이익이 없다.”
묻는다.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3장藏의 경전은 쓸모가 있는 것인가?”
답한다.
“교법에 의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법에 의하여 상해를 일으키는 일이 허망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비록 시방여래의 12부경의 청정하고 미묘한 진리를 항하의 모래같이 많이 기억한다 하여도 다만 희론戱論만 더할 뿐이다’ 하신 것이다.
법에 의하여 상해를 일으키는 것은 이익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묻는다.
“어찌하여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교법을 들은 이는 모두가 성과聖果를 이루리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터럭 하나만한 선善이라도 행하기만 하면 곧 부처의 경지에 머무른다’ 하였는가?”
답한다.
“상근上根의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교법에 의하여 단박에 깨달아 이지가 곧 나타나서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믿고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만일 하근下根의 사람을 기준으로 본다면 상해를 깨닫지 못해서 이익이 없을 것이니,
이러한 하근의 사람이 교법에 의해 종자를 익혀 후세後世를 기다린다면 누가 이익이 없다고 하겠는가?
교법을 듣기만 하여도 성과를 이루고, 터럭 하나만한 선을 행하여도 부처의 경지에 머무르는데, 하물며 경전을 널리 배우고 또 법문 듣기를 청하는 일이겠는가?”
牛, 이 모습은 머리에 미혹되어 그림자에 흘리는 형상이니,
무슨 까닭인가?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처와 정토淨土를 알지 못하고, 다른 세계의 부처와 정토만을 믿어 일심으로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를 뵙고 법을 구하기 위해 선행을 부지런히 쌓고, 부처님의 명호와 정토의 명호를 부지런히 외운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그것을 표시한다.
보지寶志 공이 비웃어 말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흡사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 같다” 하였나니,
이것이 바로 그 형상이다.
어떤 사람이 이 형상을 뜻으로써 묻는다면 동그라미 옆의 우 자를 없애 버리라고 대답하리라.
[○*人], 이 모습은 그림자를 물리치고, 머리를 바로 아는 형상이다.
묻는다.
“어찌하여 동그라미 밑의 우 자만을 버리고 복판의 인 자는 버리지 않는가?”
답한다.
“중생들이 참 지혜가 열리지 않고 ‘참 공[眞空]’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오로지 다른 세계의 정토와 부처만을 구하여 그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를 뵙고 법을 들으려 한다. 만일 중생들이 광채를 돌이키고 지혜를 일으켜 참 공과 자기의 부처와 정토를 깨닫는다면 일시에 다 함께 나타나서 마음 밖의 정토와 부처를 구하지 않게 되리라. 그러므로 동그라미 속의 인 자는 제하지 않고 원상 옆의 우 자만을 버리는 것이다.”
묻는다.
“어떤 것이 자기의 부처이며, 자기의 정토인가?”
답한다.
“중생이 참 지혜를 일으켜 참 공을 깨달으면 참 지혜 그대로가 부처요, 참 공 그대로가 정토이다.
만일 이렇게 깨달아 알면 어디에서 다른 부처와 다른 정토를 구하랴?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들음[聞]을 가지고 부처님을 수지하려 하기보다 어찌하여 스스로가 듣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가?’ 하였느니라.”
이 밑으로 다시 네 짝과 다섯 모습[四對五相]이 있다.
○, 이 모습은 함函을 들어뚜껑을 찾는 형상이라 하고, 또는 반달이 둥글기를 기다리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반달을 더 그려 대답하리라.
이는 묻는 이가 함을 들어 뚜껑을 찾기에 답하는 이가 뚜껑으로 함에 씌운다 한 것이다.
이는 함과 뚜껑이 서로 맞았으므로 보름달이 둥실 나타난 것이다.
둥근 모습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다.
○, 이 모습은 옥玉을 가지고 계합을 찾는 형상이니,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달 복판에 아무것이나 붙여서 대답하리라.
그 이유는 묻는 자가 옥을 가지고 계합을 찾았으므로 대답하는 이는 구슬을 알아보고 얼른 손을 놓기 때문이다.
[○*ㄙ], 이 모습은 갈고리가 끈에 들어간 형상이니,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아무 쪽에나 인 자를 붙여서 대답하리라.
그 이유는, 묻는 이가 갈고리가 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보배로운 그릇을 이루었다고 대답하느니라.
[○*佛], 이 모습은 이미 보배로운 그릇을 이룬 형상이다.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또 둥근 달 복판에다 토土 자를 붙여서 대답하리라.
[○*土], 이 모습은 현현玄玄한 인印의 뜻에 계합하는 형상이니, 종전의 여러 가지로 나타난 형상을 멀리 뛰어넘어 다시는 교의敎意에 속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경지를 눈앞에 보여 주어도 전혀 보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3조祖가 말하기를,
“털끝만치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로 어긋난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현현하게 아는 이가 없는 것도 아니니, 누가 이런 형상을 알겠는가?
만일 그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가만히 알아서 마치 자기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것 같고, 제바提婆가 용수龍樹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마주 보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파인巴人이 백설곡白雪曲을 듣는 것 같고, 추자(鶖子:舍利弗)가 정명淨名의 법회에 든 것 같으리라.
가령 후학後學들 중에 근기가 영리한 자라면 이로 인해 활짝 깨닫기를,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쪼고 쪼이는 것이 동시인 듯하겠지만,
성정이 둔한 이는 배워도 깨닫기 어려운 것이 마치 소경이 물체를 보는 것 같아서 더욱 알기 어려우니라.
선사가 어느 때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을 말하였으니, 세 번이란 다음과 같다.
“세 번의 성불이란 무슨 뜻인가?
첫째는 증리성불證理成佛이요,
둘째는 행만성불行滿成佛이요,
셋째는 시현성불示顯成佛이다.”
증리성불證理成佛이라 함은, 선지식의 말 끝에서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마음 바탕에 본래의 한 물건도 없음을 활짝 깨닫는 것이니, 이것이 성불이다. 만행萬行을 차례로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리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正覺을 이룬다” 하였고,
또 옛사람은 말하기를,
“불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이키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증리성불은, 안에서 체성體性을 말한다면 한 물건도 없지만 3신身을 통틀어 말한다면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없지 않다. 비록 세 사람이 있으나 지금 당장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으므로 부처가 되었다 하는데, 그 공은 문수에게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수는 부처님들의 어머니이다” 하니,
이 뜻은 부처님들이 문수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이다.
문수라 함은 실지實智인데, 모든 부처님이 그 실지에 의하여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에 문수를 부처님들의 어머니라 한다.
행만성불行滿成佛이라 함은, 비록 진리의 근원을 끝까지 규명하였지만, 다시 보현普賢의 행원行願을 따라 보살의 도를 두루 닦아 수행이 골고루 갖추어지고 지혜와 자비가 원만해지기 때문에 행만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행하여 이른 곳은 곧 본래 온 곳이다” 하였으니,
그러기에 행할 바가 이미 원만하여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본래의 곳이라 함은 곧 이치[理]이다.
이 행만성불의 증득한 이치가 앞의 증리성불의 이치와 다르지 않나니, 비록 이치는 다르지 않으나 행의 원인으로 결과에 이르므로 행만성불이라 한다. 이 행만성불 안에서 과덕果德을 말한다면, 다만 보현행普賢行으로써 불도를 이루는 것뿐이다.
3신身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있나니, 비록 세 사람이 있으나 지금에는 행이 원만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만을 취했으므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공이 보현에게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이다” 하였나니,
이른바 부처님들이 보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이라 하는 것은 곧 만행萬行이니, 모든 부처님들이 그 만행으로 인하여 보리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라 하는 것이다.
한 부처님에 두 보살이라 함은, 이치의 비로자나毘盧遮那와 지혜의 문수文殊와 행行의 보현普賢이니, 이치와 지혜와 행, 세 사람은 한 몸[三人同體]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또 한 부처님과 두 보살은 서로가 주인과 손이 되니, 본체의 위없음으로는 비로자나가 주인이요, 성품을 보는 지혜의 공덕으로는 문수가 주인이요, 만행의 복력福力으로는 보현이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통현李通玄이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들 모두가 문수ㆍ보현 두 보살을 통해 부처의 보리를 이루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들의 큰아들과 작은아들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세 사람이 서로 주인과 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현성불示顯成佛이라 함은, 앞에서와 같이 이치를 증득하여 행이 원만하고, 스스로의 행으로 부처를 이루는 일이 이미 끝났으므로 이제 중생을 위하여 부처 이루는 모습을 시현하여 여덟 가지 모습[八相]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다.
여덟 가지 모습이라 함은,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오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고,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도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 등 여덟 가지 모습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현성불이라 하나니, 이 여덟 가지 모습의 성불은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고, 진신眞身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셨으며 열반도 없다” 하였으니,
본원本願의 힘 때문에 자재自在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경은 보신과 화신 가운데서 참 부처를 말한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내가 성불한 뒤로 이미 한량없는 겁이 지났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석가여래께서는 이미 한량없는 겁 전에 행이 원만한 대각을 이루셨으나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는 모습을 나타내어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이 석가부처님께서는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 가운데서 넷째 부처님이시니,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천 부처님과 현재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과 미래 성수겁星宿劫의 천 부처님, 이와 같이 세 겁 동안에 여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셔서 중생을 교화하시고 차례차례 수기授記 주시기를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게 하셨다. 교전敎典을 보고 옛사람의 자취를 두루 살피어 한 사람이 성불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세 번 성불하는 도리를 알 것이다.
바라건대 부처의 지위를 연마하려는 이는 대략 제전(蹄筌:문자, 방편)을 살핀 뒤에 다시 먼저의 부처와 나중의 부처가 다 같은 길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길을 가는데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 같은 길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기록해 두노라.
선사는 언젠가 3편篇의 법을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이요,
둘째는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이요,
셋째는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이다.
1.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
넓은 들판에 해통該通이라는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대중에게 말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여 삼계를 헤매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지혜로운 이가 참 교법을 연설하는 것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단박에 깨달아 문득 정각을 이루었다면, 차례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돈증실제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설산雪山에 인욕초忍辱草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바로 제호醍醐를 낸다’ 한 것이 이 뜻이니라.”
이때 대중 가운데 지통智通이라는 은사隱士가 있다가 선인에게 말했다.
“뭇 중생에게는 원래 성품의 바탕이 있음을 진실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체지자一切智者께서 참 교법을 말씀하신 뜻은 한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참 교법을 다 같이 듣고서도 깨닫거나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인이 은사에게 말했다.
“중생이 비록 본래부터의 청정하고 뚜렷이 밝은 본체를 가지고 있으나 근본을 등지고 끝을 쫓으면서 여러 겁과 여러 시간을 보내면서 별별 몸을 받아 근기와 성품이 같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참 교법을 같이 들어도 깨닫고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다. 이것은 지혜로운 이가 참 교법을 말씀하여 생긴 재앙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마치 맑고 밝은 해를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같이, 지혜의 마음이 없는 이는 끝내 보지 못한다’ 한 것이니라.
은사가 다시 선인에게 말했다.
“고명하신 지도를 자세히 살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보건대, 지혜로운 이가 설법하는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니,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고 지혜로움은 본래 각각 다른데, 설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인이 다시 은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주의하여 들어라. 내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본래 깨달았던 것이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도 영원히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참됨을 깨달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니, 이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참된 교법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참된 교법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영리함과 둔함을 가리리오.
그러므로 어떤 중생이 둔하다면 거듭거듭 참된 교법을 들어도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만일 영리한 중생이라면 참된 교법을 잠깐 듣더라도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게 되나니, 이것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한다.
어디에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갈림이 있으랴?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은 차이가 없고, 오직 근기에 영리함과 둔함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만을 위해서 설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어미 닭이 알들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많은 알이 깨어나서 껍질을 벗어나는데 깨어나지 않는 것도 있는 것과 같다.
어찌 어미 닭이 많은 알을 사랑하되, 깨어나지 않는 알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깨어나고 깨어나지 않는 것은, 다만 알의 성품에 있고, 어미 닭이 알을 품어서 생긴 재앙이 아닌 것이다.
온갖 지혜를 가진 이도 그와 같아서 대중을 위하여 참 교법을 연설해 주면, 근기가 영리한 이는 단번에 깨닫지만 근기가 둔한 이는 깨닫지 못한다.
지혜를 가진 이는 근기가 영리한 이만을 사랑하고 근기가 둔한 이는 사랑하지 않나니, 이는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근기에 있을 뿐 지혜로운 이가 설교해서 생긴 재앙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들은 법은 남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방편에 의해야 되는 줄을 알 수 있으리라.
지혜로운 이가 항상 법을 설하는데,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학인에게 있지, 지혜로운 이의 설법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은사가 물었다.
“영리한 근기는 참 교법을 들으면 당장에 지혜가 생겨 성품의 바닥을 활짝 깨닫는다는데,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는 지혜로 문수를 비추는 경지이니라.”
“문수의 지혜로 비추는 경지는 어떠합니까?”
“문수의 지혜로 비춤은 성품에 있느니라.”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라.”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지혜로 비춤은 증득하는 사람이요, 성품의 바탕은 증득할 법이니라. 그러므로 능能과 소所의 차이는 없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 지각 없는 반야로 형상 없는 진제眞諦를 증득한다’ 하였으니,
지혜와 성품은 같지 않느니라. 또 증득하는 지혜로써 지각없 는 경지를 비추되, 증득할 성품의 바탕은 본체가 없으므로 능과 소가 있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혜가 진여의 경지를 다하면 능ㆍ소가 모두 없어진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다른 비춤이 없느니라.”
지통 은사가 선인의 말을 듣고, 고명한 지도를 받들자, 의심의 그물이 활짝 트였다.
그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이미 지통智通에게 견성見性의 법을 말했다. 만약 중행衆行을 말한다면 이렇지는 않느니라.”
이때 이 대중 가운데 행통行通이라는 유자遊子가 있었는데, 선인에게 물었다.
“견성은 그렇다 치고, 중행은 어떠합니까?”
선인이 유자에게 말했다.
“어떤 중생이 갑자기 참 교법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활짝 본 뒤에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 지혜를 닦기 때문에 중행이라 부르느니라.”
유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내가 일찍이 선인의 설법을 듣건대,갑자기 참 교법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활짝 깨달으면 지혜로 문수를 비춘다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선인의 말씀을 듣건대, 성품의 바탕을 활짝 깨닫고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와 이타의 자비 지혜를 행하므로 중행이라 한다 하시니, 이러한 행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러한 행을 행하는 사람은 보현의 지위에 해당하느니라.”
유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보현 대사大士는 어떤 지위에 속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원인인 5위位에 의지하여 결과의 지위에로 나아간다. 비록 지위에 이르렀으나 결코 이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느니라. 또한 중행衆行을 행할 때에 세 등급의 보현을 이루느니라.”
유자가 다시 물었다.
“원인의 지위로부터 결과의 지위에 이르기까지에서 어떤 것을 세 등급의 보현이라 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첫째는 출전보현出纏普賢이요,
둘째는 입전보현入纏普賢이요,
셋째는 과후보현果後普賢이니라.”
유자가 물었다.
“이 세 등급의 보현에서 수승함과 열등함의 이치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 세 가지 보현의 수승함과 열등함의 등급은 그 이치가 같지 않으니, 이른바 출전보현은 성품을 본 뒤에 중행을 행할 때, 눈앞의 만 가지 경계를 대하면 언뜻 일어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이미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환화幻化의 경계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으나 끊는 지혜가 있다’ 하였느니라.”
유자가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증득하는 지혜를 일으키면 끊어야 할 장애가 완전히 없다’ 한 이치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만일 증득하는 지혜를 일으키면 끊어야 할 장애가 완전히 없다 한 것은 문수가 미혹을 끊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문수가 성품을 상대할 때에 본체 안에는 다른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으나 끊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 것은 보현이 미혹을 끊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보현이 여러 지위를 섭렵할 때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길은 같지 않다.
이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길을 알지 못하면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이치를 놓고 다투게 된다.”
유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의 미혹을 끊는 일은 이미 그런 줄 알았지만, 보현의 미혹 끊는 일을 말한다면 그것은 현행現行을 끊는 것입니까, 습기習氣를 끊는 것입니까?”
“보현의 지위로 말하면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겠지만 보현이 지위에 의탁하여 미혹을 끊는 것은 습기번뇌에 해당하느니라.”
“현행과 습기가 어떠한 것이기에 보현은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고 오직 습기의 장애만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범부는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되 앞뒤의 경계를 알지 못해서 업을 짓나니, 이것이 현행이다.
지혜로운 이는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되 경계가 허망한 줄을 알아서 앞 경계에 걸리지 않나니, 이것은 습기이기 때문이다.
보현은 성품을 본 뒤에 만행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행의 미혹은 전혀 없고, 습기의 장애만 있다.
만일에 끊을 습기가 없다면 참기 어려운 일을 참을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 자비와 지혜로써 성불하는 법이 없다면 행하기 어려운 행을 행할 필요가 어디에 있으랴?
비록 자비와 지혜, 두 문을 행하나 짓는 바는 본체에 의해서 행을 이루나니, 그
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짓는 바 모두 성품에 의지하여 공덕의 숲을 닦아 이룬다. 마침내 적멸에 나아갈 뜻은 없고 오직 중생을 제도할 생각뿐이다.
자비를 행하니 자비가 광대해지고 지혜를 쓰니 지혜가 더욱 깊어진다.
남을 이롭게 하며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을 작은 성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라.
이것으로써 출전보현은 자비와 지혜를 두루 행하나 본체에 의해 수행하여 이루는 것임을 알 것이다.
또 자세히 보현의 중행을 말하자면 항포行布와 원융圓融으로 가지런히 나타나고,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일을 모두 갖추었고, 자기를 이롭게 하고[自利] 남을 이롭게 하는 일[利他]을 함께 닦으며 지문智門과 비문悲門이 나란히 이루어진 것이다.
행을 말할 적에 큰 작용이 일어나니, 일어났다 하면 반드시 온전히 진여요, 참된 행상을 말할 적에는 지위에 의해서 미혹은 끊는 법이 없지 않으니, 지위가 높아지면 습기는 차츰 옅어지고, 행이 넓으면 자비와 지혜는 더욱 깊어지니, 10주住로부터 10지地에 이르면 출전보리가 이미 원만해진 것이다.
입전보현入纏普賢이라 함은,
일체 중생에 대하여 동류대비同類大悲를 가진 이는 앞의 출전보현出纏普賢의 지위에서 자비와 지혜를 널리 행하고, 자리와 이타의 행을 행하는 까닭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공이 없지 않다.
비록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공일지라도 출전의 법을 이미 만족한 뒤에는 출전 후에 근심 없는 곳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4생生 6취趣에서 대비를 널리 행하고 같이 끊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입전보현이라 한다.
이렇게 입전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덕과 앞에서 출전出纏하여 행을 이루는 공, 이 두 마음의 공이 가지런히 행동하기 때문에 등각等覺이라 하고,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기 때문에 등각이라 하고,
출전과 입전에 집착하지 않고 대지와 대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묘각妙覺이라 하느니라.
비록 자비와 지혜와 입전과 출전에 집착하지 않으나 과덕果德을 말하면 취하지 않는 행이 없고 거두지 않는 지위가 없느니라.
과후보현果後普賢이라 함은 변행삼매遍行三昧를 이르는 말이니, 이른바 묘각의 지위에서 출전의 대비와 대지를 취하지 않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도리어 출전과 입전의 대지와 대비를 향하여 역逆ㆍ순順ㆍ종縱ㆍ횡橫으로 모든 지위의 중생들 가운데서 같은 마음과 같은 종류가 된다.
또 어느 일정한 지위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마음대로 하여 널리 대비를 지으며, 모든 종류 가운데서 어느 지위도 결코 받지 않고, 짓는 것과 받는 것에서 짓지 않고 받지 않는 까닭에 과후보현이라 한다.
만일 이 사람의 행하는 바를 일정하게 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의 행하는 곳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세 등급의 보현이라 함은,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행의 수승함과 열등함에 의하여 대강 세 등급의 보현으로 나눈 것이다.
이른바 한 사람이라 함은, 처음에 실제를 활짝 증득하는 것은 문수요, 지금 인연을 따라 행을 행할 때를 보현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 한다. 이는 안으로 증득함과 겉으로 교화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만일 안으로 증득함과 겉으로 교화함이 같지 않다면문수와 보현은 두 사람이요,
만일 증득하는 이와 증득되는 대상, 그리고 여러 행이 같지 않음을 통틀어 취한다면 세 사람이 된다.
이는 대교(大敎:화엄)의 뜻이기도 하다.
『화엄경』 제목에서 대방광大方廣이라 함은 말씀하신 법이니 곧 비로자나요,
불佛이라 함은 증득하는 사람이니 문수요, 화엄華嚴이라 함은 인연을 따르는 행이니 곧 보현이다.
그리하여 한 부처님에 세 보살이니, 곧 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일 보현의 행을 행하려는 이는 먼저 진리를 끝까지 궁구한 뒤에 인연을 따르는 행을 행하여서 지금의 행과 옛 어른의 자취가 부합되게 하여야 하나니,
마치 옛말에 문을 닫고는 수레를 만들고, 문을 열고는 수레바퀴를 꿰어 맞춘다는 것과 같다.
2.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
이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설법했다.
“어떤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삼계三界를 윤회하다가 3승乘의 점교漸敎를 듣고 3승의 법을 깨달았다 하자. 삼계의 환란 때문에 3승의 사람이 있게 된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참 교법[眞敎]을 듣고는 돌이켜 묘한 지혜를 이루어 실제實際의 경지를 끝까지 증득하기 때문에 점증실제漸證實際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 앞의 세 가지 수레는 방편의 법이니 드러난 땅의 흰 소라야 비로소 진실한 증득임을 밝힌다’ 하였으니, 바로 이 뜻이니라.”
지통智通 은사가 선인에게 물었다.
“이 회점증실제廻漸證實際를 얻은 이와 앞에서의 돈증실제頓證實際를 얻은 사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비록 앞에서 3승에 떨어졌으나 3승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온 곳은 까마득히 다르나, 이제는 점교를 돌이켜 실제를 증득했으므로 저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1백 가닥의 개울이 바다에 돌아가서는 1백 가닥의 개울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3승이 1승으로 돌아가면 3승이란 이름은 없어진다’ 했으니,
이것으로써 이 점증실제의 사람이 저 돈증실제의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회점과 돈증이 같은가 다른가를 걱정하지 말고, 인연을 따르는 마음을 스스로 돌려 실제의 이치를 돌이켜 비추어라.”
지통 은사가 참된 말을 깨닫고는 잠자코 아무 말도 없었다.
이때 행통行通 유자遊子가 선인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선인이 말씀하신 바를 듣건대 어떤 중생이 성품의 경지를 활짝 깨달은 뒤,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여러 가지 행을 행하면 중행이라 하는데, 이러한 행을 행하는 이를 보현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회점증실제를 얻은 사람도 여러 가지 행을 행합니까, 여러 가지 행을 행하지 않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여러 가지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회점증실제를 얻는다는 것은 곧 드러난 땅에 있는 흰 소인데, 흰 소는 오락가락하여 드러난 땅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행을 행하는 이가 없지 않다.
이른바 드러난 땅의 흰 소라고 하는 그 드러난 땅은 증득해야 할 법이니 비로자나불이요,
흰 소는 증득하는 사람이니문수보살이요,
흰 소가 움직여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보현보살이다.
보현이 행하는 바가 곧 여러 가지 행이다. 두 편의 대의가 대략 이러하니, 그대들 스스로가 같고 다름을 잘 관찰하라.”
3.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이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만약 어떤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해 삼계를 윤회하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점교를 듣고 믿음과 이해가 점차 생기게 되어 여섯 지위에 의지해 수행하면서 3아승기겁 동안 참기 어려운 일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여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어 비로소 무루無漏의 참 지혜를 얻어 법신이 드러났다면, 그것을 이름하여,
‘믿음의 싹이 일념에 생기게 되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아신다.
이것을 인해 닦으면 오는 세상에 과위를 증득한다 한다.
3대아승기겁에 6바라밀을 오랫동안 닦아서 무루의 종자를 익히어 이루면 비로소 부사의라 부른다’ 한 뜻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지통智通 은사가 선인에게 물었다.
“지금의 이 점증실제를 얻은 이와 아까의 돈오실제를 얻은 사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선인이 은사에게 말했다.
“비록 점漸과 돈頓이 같지 않으나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간다.
어째서 그런가? 냇물이 바다로 돌아가면 완전히 같은 한 맛이 되듯이,
점해漸解가 진원眞源으로 돌아감이 어찌 둘이겠는가?
그러므로 점과 돈은 다르나 진원으로 돌아감에는 다르지[無二] 않은 것이다.”
지통은 선인의 가르침에 다른 견해를 내지 않고 물러나와 침묵했다.
그때 유행遊行하는 행자 행통行通이 선인에게 말했다.
“전편에서는 선인께서 돈증실제 이후에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설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편에서는 점증실제를 밝히셨는데, 점증실제 이후에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선인이 답했다.
“비록 행이 없지 않으나 그 행은 전편에서 밝힌 것과는 같지 않다.
돈증실제頓證實際 이후에 자리[位]에 따라 수행을 할 때, 구속에 들고 남[出纏入纏]과 과위에 오른 뒤의 3등等의 보현행이다.
지금 이 점증실제편이 의미하는 것은 점교방편에 의지해 3아승기겁이 지날 동안 보살행을 수행해야 비로소 무루의 참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무루의 참 지혜로 법신을 드러내는 까닭에 점증실제라 이름한다.
점증실제 이후에 비록 수행이 없지는 않으나 그 수행이 완전히 위의 등급에 의지하는 까닭에 전편에서 밝힌 것과 다른 것이다.”
유행하는 행자가 물었다.
“전에 들은 두 편 가운데 모두 증득하는 사람과 증득되는 법, 그리고 나아가 연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 각각의 이름을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이 편 중에도 증득하는 사람과 증득하는 법과 연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증득하는 이와 증득할 법과 인연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이름이 없지 않나니,
이른바 증득하는 이라 함은 곧 무루의 참 지혜이니 보신불報身佛이요,
증득할 법이라 함은 곧 실제實濟이니 법신불法身佛이요,
수행하는 사람이라 함은 곧 무루의 참 지혜가 과위果位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화신불化身佛이라고도 한다.”
선사가 나이 65세에 입적하니, 시호는 요오了悟 선사요, 탑호는 진원眞原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