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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5권
6. 변수면품(辯隨眠品) ①
6.2. 98수면의 제문분별(諸門分別)[1]
1) 변행(遍行)과 비변행(非遍行)
① 11변행혹(遍行惑)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바로 변행(遍行)이며, 몇 가지가 변행이 아닌 것인가?58)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온갖 견(見)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不共)의 무명은
자계ㆍ자지에 변행한다.
이 중에서 두 가지 견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는 능히 상계도 반연하며
득(得)을 제외한 그 밖의 수행(隨行)도
역시 바로 변행에 포섭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수면의 힘만이 능히 변행한다. 그렇지만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일체의 수면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니,
이를테면 오로지 온갖 견(見)과 의(疑)와, 이와 상응(相應)하는 무명과 [상응하지 않고 자력으로 일어나는] 불공(不共)의 무명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그 밖의 탐 등은 변행하는 것이 아니다.
즉 ‘견’에 일곱 가지의 ‘견’이 있고, ‘의’에 두 가지의 ‘의’가 있으며, [무명에] 상응무명과 그러한 불공무명을 포함하여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열한 가지가 되는 것이다.59)
이와 같은 열한 가지는 온갖 계(界)와 지(地) 중에서 각기 자계(自界)와 자지(自地)의 5부에 대해 두루 작용[遍行]한다.
즉 자계ㆍ자지의 5부의 법을 두루 반연하여 수면을 두루 수증하며, [5부의] 염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되니,60)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 법]만을 ‘변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바야흐로 이를 [3]계에 근거하여 설하면, [98수면 중] 서른세 가지가 바로 변행혹(遍行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61)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불공무명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여시설자(如是說者)는 서로 뒤섞이는 것[相雜]을 일컬어 ‘공(共)’이라고 하였는데, ‘공’이 아니기 때문에(다시 말해 서로 뒤섞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공’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이는 바로 그 밖의 다른 수면과 비교할 때 각기 다르다는 뜻으로, 예컨대 계경에서 ‘불공불승(不共佛僧)’이라고 설한 것과 같으니, 이는 바로 불ㆍ승의 2보(寶)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은] 함께 작용[共行]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무명’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그 밖의 다른 수면과 서로 뒤섞여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두루 미치는 것[普]을 일컬어 ‘공(共)’이라고 하였는데―이는 바로 ‘변(遍)’의 뜻이다―,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불공’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니, 온갖 수면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온갖 수면 중에만 변행이 존재하는 것인가?
오로지 이것만이 온갖 유루법을 두루 반연하려고 하는 의요(意樂)이자 별도의 세력 없이도 견고하기 때문에, 능히 원인이 되어 5부의 번뇌를 두루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견멸소단과 견도소단의 수면은 오로지 유루의 일부 소연만을 능히 반연할 뿐으로, 별도의 세력을 가질지라도 견고하지 않아 능히 5부의 번뇌를 두루 낳는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앞의 2부 중에만 변행의 수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행수면은 세 가지의 ‘두루한다[遍]’는 뜻을 갖추고 있으니, 이를테면 5부의 법을 두루 반연하며, [그럼으로써] 수면을 두루 수증하며, 아울러 능히 [5부의] 염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62)
[또한] 이것과 상응하는 법(심ㆍ심소)은 두 가지의 ‘두루한다’는 뜻을 갖추고 있으니, 이를테면 앞의 세 가지 뜻 중에서 다만 ‘수면을 수증한다’는 사실을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구유(俱有)하는 법(이를테면 ‘득’이나 ‘생’ 등의 4상)은 한 가지의 ‘두루한다’는 뜻을 갖추고 있으니, 이를테면 다만 [5부의] 염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변행혹이 능히 5부의 법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살가야견(薩迦耶見, 즉 유신견)으로서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은 무엇을 관찰할 때 끊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만약 견고소단이라고 한다면, 탐 등도 역시 마땅히 5부[의 법]을 반연으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견고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견취(見取)로서 견멸ㆍ견도소단을 반연하는 것, [다시 말해] 능히 무루의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친미혹(親迷惑)은 멸제와 도제에 대해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견멸ㆍ견도소단이듯이,63)
이와 마찬가지로 유신견(有身見) 역시 친미혹으로서 멸제와 도제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관찰할 때 끊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혹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차별의 인연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견멸ㆍ견도소단의 견취는 요컨대 경계대상이 되는 소연을 변지(遍知)함으로써 끊어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유신견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한다.
혹은 다시 유신견이 소연(고ㆍ집제)을 변지할 때 끊어지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견취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64)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방안은 [유부의] 종의에서 볼 때 모두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제시한 바는 이치상 옳지 않다.
이치상으로는 필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지만, [유신견과 탐, 유신견과 견취는] 그 뜻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처음에 예증한 바는
“탐 등도 역시 마땅히 5부[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오로지 견고소단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먼저 이 같은 사실을 언급하고서 반대로 유신견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이치상 역시 마땅히 5부에 모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예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럴 경우] 탐 등도 역시 마땅히 1찰나[一念]에 단박에 5부의 법을 반연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유신견은 1찰나 중에 단박에 5부의 법을 반연하여 수(受) 내지 식(識)을 나[我]나 나의 것[我所]이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이치상 마땅히 1찰나의 유신견 자체가 5부로 나누어진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탐 등은 모두 바로 자상혹(自相惑)이기 때문에 1찰나에 2부의 법을 단박에 반연하는 일도 없거늘, 하물며 능히 5부의 법을 반연할 것인가?
따라서 [이러한] 예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예증한
“견멸ㆍ견도소단의 견취와 마찬가지로 유신견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다 같이 친미혹(親迷惑)으로서 멸제와 도제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역시 견멸ㆍ견도소단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살가야견은 그것(즉 멸제와 도제)을 비방하는 견해를 능히 예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소연의 경계를 한정짓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유신견은 요컨대 먼저 멸제와 도제를 비방하는 견해를 예찬하고 나서 비로소 ‘나[我]’로 계탁하는 것이 아니며, 역시 또한 경계대상을 한정짓는 인연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견취는 반드시 능히 멸제와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을 먼저 예찬하고 나서 그것이 제일(第一)이라고 계탁할 뿐더러 소연의 경계를 한정짓는 인연이 된다. 이렇듯 [견취는] 그 뜻이 이미 다르기 때문에 [유신견의] 예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신견은 고제를 관찰할 때 소연을 변지(遍知)함으로써 완전히 영단(永斷)되지만, 견취는 그렇지 않으니, 여기에는 소연(所緣)이나 행해(行解)가 같지 않다는 등의 별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3계의 견고소단의 제온(諸蘊)은 비아(非我)이며, 나아가 수소단의 제온은 비아이듯이, 그 상(相)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고제를 관찰할 때 아견이 일어나는 일은 없으며, 관찰된 고제를 반연하여 아견은 모두 제거된다.
그러나 뛰어난 것이라고 계탁하는 견해(즉 열등한 법을 뛰어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견취)는 그렇지 않으니, 소법(少法, 大法 즉 뛰어난 법의 반대)에 대해 그 밖의 다른 소법을 관찰하여 뛰어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유신견에 수행(隨行)하는 견취는 비록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거칠기[麤] 때문에 유신견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견고소단이다.
그러나 수도소단의 법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멸제와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에 수행하는 견취는 비록 역시 그 같은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자(유신견에 수행하는 견취)와 비교해 보면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즐거움[樂]과 청정함[淨]의 행해(行解)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멸제와 도제를 [관찰하기를] 원하지 않는 무명에 의해 인기된 사견을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비록 고제를 관찰하는 단계에서 소연을 변지 하였을지라도, 요컨대 소연이 영원히 끊어질 때 비로소 그것도 끊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견취는 유신견처럼 오로지 고제를 관찰할 때 완전히 영단(永斷)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앞에서] 논설한 끊어짐[斷]이 차별된다(다시 말해 ‘유신견은 고제를 관찰할 때 소연을 변지함으로써 완전히 영단되지만, 견취는 그렇지 않다’)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혹은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을 반연하는 견취에는 각기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제와 집제를 관찰하거나 멸제와 도제를 관찰하는 것 중의 한 가지에 따라 끊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견멸ㆍ견도소단의 법에 대해 결과로서의 상태[果分]가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바로 견고소단이지만,
원인으로서의 상태[因分]가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바로 견집소단이다.
그러나 만약 오로지 그러한 [견취를] 진실의 깨달음[眞實覺]이라고 주장하여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그 같은 원인으로서의 상태와 결과로서의 상태[가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것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이든 그것(見苦와 見集)과 함께 끊어진다.
따라서 견취의 끊어짐은 유신견의 경우와 같지 않은 것이다.
만약 유신견과 계금취와 견취가 5부의 법을 단박에 반연하는 것[頓緣]을 일컬어 변행이라고 한다면, 변행은 오직 이것만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즉 여기에 아견이 작용하고 있을 경우, 여기에는 반드시 아애(我愛)와 아만(我慢)도 일어난다고 해야 하며,
만약 여기에 청정하다거나 수승하다고 하는 견해(즉 견취)가 작용하고 있을 경우, 여기에는 필시 마땅히 희구(希求, 즉 애탐)와 잘난 체함[高擧, 즉 慢]도 [일어난다고] 해야 한다.
그러한즉 ‘애’와 ‘만’도 역시 마땅히 변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65)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비록 [‘애’와 ‘만’이] ‘견’의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두 종류는 한정된 법만을 반연[分限緣]하기 때문이다.66)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변행혹은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뿐이다.
② 9상연혹(上緣惑)
앞에서 열한 가지의 변행혹은 온갖 계(界)ㆍ지(地) 중에서 각기 자계(自界)와 자지(自地)의 5부의 법에 대해 능히 두루 작용[遍行]한다고 설하였는데,
타계(他界)와 타지(他地)의 [5부의 법에 대해서도] 두루 작용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같은 [타계ㆍ타지의 법에 대해서도 두루 작용하는 수면과] 구별하기 위해 [본송에서] ‘자계ㆍ자지’라고 말하였다.
타계ㆍ타지의 법에 대해 두루 작용하는 수면도 역시 존재하니, 이를테면 열한 가지 변행혹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 종류는 역시 또한 능히 위[上]의 법도 반연하는 것이다.67)
여기서 ‘위’라고 하는 말은 바로 상계(上界)ㆍ상지(上地)를 의미하며, 아울러 어떠한 경우에도 아래(즉 하계ㆍ하지)의 법을 반연하는 수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하계ㆍ하지의 법을 반연할 경우, 마땅히 변지의 계(界, 근거)가 허물어지게 되지만,68) 상계ㆍ상지의 경계는 뛰어나기 때문에 [하계ㆍ하지의] 소연이 되더라도 이러한 과실은 없는 것이다.
바야흐로 욕계의 견고소단의 사견(邪見)으로서 색ㆍ무색계의 고과(苦果, 즉 무상ㆍ고ㆍ무아ㆍ공의 고제)를 비방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견취(見取)로서 그러한 사견을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계금취(戒禁取)로서 그같이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참된]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과,
의(疑)로서 [그러한 고과에 대해] 유예(猶豫)를 품는 것과,
무명(無明)으로서 [색ㆍ무색계의] 견집소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상연혹)이다.
나아가 색계의 그것이 무색계의 법을 반연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와 반대가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69)
그리고 지(地)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계(界)에 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온갖 계ㆍ지[의 번뇌]가 [상계ㆍ상지의 법을 반연하는 것에는] 결정코 차이가 있다.
즉 욕계 내지 제4정려는 상계ㆍ상지의 법을 반연하여 두루 작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3무색정 중에서는 상계를 반연하는 일이 없으며,
유정지(有頂地)에서는 두 가지(즉 상계ㆍ상지) 모두를 반연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70)
나아가 비록 수면이 자계ㆍ자지와 상계ㆍ상지의 법을 모두 반연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치상 어떠한 경우에도 자계ㆍ자지와 상계ㆍ상지를 단박에 반연[頓緣]하는 일은 없으니,
자지 중의 온갖 경계대상은 바로 소연의 경계가 될 뿐더러 역시 또한 수면에 의해 [증장되지만], 상지 중의 온갖 경계대상은 바로 소연의 경계는 될지라도 수면에 의해 [증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찰나의 번뇌가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수면처(隨眠處)가 되기도 하고 수면처가 되지 않기도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며, 상응법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71)
그렇다면 상계ㆍ상지의 경우에는 반드시 단박에 반연하는 것인가?
반드시 단박에 반연하는 것은 아니며, 혹 어느 때에는 개별적으로, 혹 어느 때에는 전체적으로 반연한다.
(다시 말해 혹 어떤 경우 오로지 1계만을 반연하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 2계를 함께 반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유신견과 변집견은 어떠한 이유에서 상계ㆍ상지의 법을 반연하지 않는 것인가?
타계ㆍ타지의 법을 반연하여 그것을 아(我, 나)ㆍ아소(我所, 나의 것)라고 주장하거나, 단멸ㆍ상주하는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계ㆍ이러한 지 가운데에 태어나 타계ㆍ타지의 온(蘊)을 ‘나’로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두 가지의 ‘나’(즉 이러한 계ㆍ지의 ‘나’와 타계ㆍ타지의 ‘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는 주장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나의 것’이라는 주장도 이루어질 수 없으니, ‘나의 것’이라는 주장은 반드시 아집(我執)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변집견은 유신견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72) 역시 타계ㆍ타지의 법을 반연한다는 사실은 인정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열한 가지 변행혹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오로지 아홉 가지만이 상계ㆍ상지의 법을 반연한다는 이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해는 ‘애(愛)’의 힘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유집수(有執受)를 취하여 자기의 존재[己有]라고 여기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바로 관찰[現見]되는 법을 경계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필시 상계ㆍ상지의 법을 반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욕계 중에 태어나 [색계의] 대범천을 반연하여 유정(즉 ‘나’)이라거나 상주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일으킬 경우, 이것은 어떠한 ‘견’에 포섭되는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마땅히 이러한 두 가지는 ‘견’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다만 유신견과 변집견에 의해 인기된 사지(邪智)일 뿐이다.73) 즉 직접적으로 바로 관찰되는 온(蘊)에 대해서만 그것을 ‘나’라거나 ‘상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뿐으로, 직접적으로 바로 관찰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추리[比]하여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 태어난 이는
“나는 바로 대범천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을 뿐더러 역시 또한
“대범천은 바로 나의 것이다”고 주장하여 말하지도 않기 때문에 유신견이 아니다.
또한 유신견을 갖지 않기 때문에 변집견도 역시 갖지 않으니, 변집견은 반드시 유신견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견’의 경우, 이와 같은 행상을 짓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바로 유신견과 변집견에 의해 인기된 사지(邪智)일 뿐이다.
③ 변행과 그 수행법(隨行法)
그렇다면 변행은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의] 수면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무엇이 또한 변행인가?
[이러한 열한 가지 수면과] 아울러 그 수행법(隨行法)도 변행이다.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변행수면과 아울러 그것에 수행하는 수(受) 등과 생(生) 등의 법도 모두 변행에 포섭되니, 동일한 결과[同一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행법 중에서 오로지 온갖 득(得)은 제외되니, 획득하게 하는 것[得]과 획득된 것[所得]은 동일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74)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변행인과 [변행]수면은 서로에 대해 4구(句)의 차별을 모두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75)
2) 유루연(有漏緣)과 무루연(無漏緣)
① 6무루연혹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유루를 반연하는 것이며, 몇 가지가 무루를 반연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멸ㆍ견도소단의
사견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 무명의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반연한다.
이 중에 멸제를 반연하는 것은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하며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6지와 9지의 그것을 반연하니
대치는 다르지만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탐ㆍ진ㆍ만과 두 가지 취(取)는
다 같이 무루를 반연하지 않으니
[무루는] 마땅히 떠난 것이고, 경계에 대해 원한이 없으며
고요하고 청정하고 뛰어난 성질이기 때문이다.76)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멸ㆍ견도소단의 각기 세 가지, 즉 사견(邪見)과 의(疑)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이나 불공의 무명 등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반연한다.77)
즉 견멸ㆍ견도소단의 두 가지 사견과 두 가지 ‘의’와, 상응무명―그것의 불공을 포섭하여―에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도합 여섯 가지가 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여섯 종류는 온갖 계(界)ㆍ지(地) 중에서 능히 멸제와 도제를 반연하기 때문에 ‘무루를 반연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수면은 유루를 반연한다”고 하는 사실은 굳이 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무루연의 수면은 각각의 지(地)에서 각기 몇 가지 지의 멸제와 도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인가?
멸제(滅諦)를 반연하는 온갖 수면(즉 사견ㆍ의ㆍ무명)은 자지(自地)의 멸제만을 반연하는 것으로,78)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멸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오로지 욕계 제행(諸行)의 택멸(擇滅)만을 반연하며,79) 나아가 유정지(有頂地)의 멸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오로지 유정지의 제행의 택멸만을 반연한다.
그리고 도제(道諦)를 반연하는 온갖 수면은 6지(地)와 9지의 도제를 반연한다. 즉 욕계에 계속되는 도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오로지 6지의 법지품(法智品)의 도제만을 반연하니, 욕계의 혹(惑)을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상계(上界)의] 혹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든 온갖 법지품을 모두 다 능히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80)
또한 색ㆍ무색계의 8지에 존재하는 도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각기 오로지 9지의 유지품(類智品)의 도제만을 반연하니, 자지를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능히 그 밖의 다른 [욕계의] 혹을 대치하는 것이든 온갖 유지품을 모두 다 능히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81)
어떠한 이유에서 고제를 비방하고 집제를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욕계에 계속되는 것은 능히 9지를 반연하고, 초정려에 계속되는 것은 능히 8지를 반연하며,
나아가 유정지에 계속되는 것은 오로지 그 지(즉 유정지)만을 반연하는 것임에도,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9지 중에서 각기 오로지 자지(自地)의 멸제만을 반연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를테면 만약 어떤 법으로서 이러한 지(地)의 애(愛)에 의해 윤택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지의 유신견은 그것을 아ㆍ아소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제법의 멸(滅)은 다시 이러한 지의 견멸소단의 사견의 소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설의 뜻을 말하면 [이러하다]. 만약 어떤 제행이 이러한 지(地)의 아애와 아견의 소연이 되었다면(다시 말해 제행을 소연으로 삼아 이러한 지의 아애와 아견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이러한 지의 행(行)에 탐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지의 행이 멸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경우, 바로 이러한 지의 사견을 일으켜 [그러한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상계의 행 가운데에는 하계에 대한 탐착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하계의 사견이 그러한 [상계의]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비록 [상하의] 계ㆍ지는 서로에 대해 인과가 격절(隔絶)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9지의 고ㆍ집제는 전전하며 서로를 견인할 뿐더러, 또한 생인(生因)과 의인(依因)과 입인(立因)으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에,82) 어떤 한 지의 사견도 여러 [지의] 멸제를 반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서로를 견인하거나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될 만한 이치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할 뿐이다.
즉 선지(善智)가 일어나면 [자지와 타지의] 경계를 깨닫게 되므로 이치상 여러 지에 존재하는 제행의 멸을 단박에 반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온갖 사견은 경계에 미혹하여 일어날 뿐더러 완고한 집착으로 인해 [상ㆍ하지가] 격절되어 [여러 지에 존재하는 제행의 멸을] 모두 반연하지 못하는 것이다.83)
어떠한 이유에서 사견이 고ㆍ집제와 멸제를 반연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상계ㆍ상지와] 통하고, 오로지 차별된다고 하면서, 도제를 반연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84)
대치는 다르지만 서로에 대해 원인(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85) 이를테면 소연이 되는 도제는 비록 온갖 지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전전상속(相屬)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가 되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사견은 6지와 9지의 그것(도제)을 모두 반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지(諸地)의] 멸제는 서로의 원인이 되지 않기 [ 때문에, 이를 비방하는 사견은]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할 뿐이다.
법지품과 유지품의 도제 역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므로 하계와 상계의 사견은, 예컨대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사견이 온갖 지(地)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마땅히 법지품과 유지품의 도제를 다 같이 능히 반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8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6지(地)의 법지품의 도제도 마땅히 욕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위의 5지(중간정과 4근본정) 중의 법지품의 도제는 욕계의 법을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미지지(未至地)의 도제 역시 [욕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상지에 계속되는 수면은 욕계의 법을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욕계를 대치하는 것(즉 법지) 역시 [욕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사견은 오로지 [법지(法智)]인(忍)에 의해 대치되기 때문이다.
또한 색ㆍ무색계의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 역시 법지품(즉 욕계)의 도제를 반연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법지품의 도제도 색ㆍ무색계의 수면을 대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법지는 그러한 [욕계의 사견을] 전부 대치하는 것이 아니니, 고ㆍ집의 법지품(고법지와 집법지)은 그것의 대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색ㆍ무색계의 [사견을] 모두 대치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한 [상계의] 견소단을 능히 대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87)
즉 초품(初品)의 법지(고법지)는 그러한 [상계의] 초품의 번뇌를 능히 대치하지 못하니, 이것에 의해 대치되지 않기 때문으로, 법지품은 그러한 [상계의 사견의] 소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색ㆍ무색계의 사견은 능히 9지의 유지품(類智品)을 모두 반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유지품은 상(上) 2계 중에 존재하는 온갖 번뇌를 모두 능히 대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2정려지 등의 유지품의 도제 역시 능히 초정려지 등의 번뇌의 대치도가 되지 않으며, 초정려 등도 역시 [색ㆍ무색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니, 양쪽으로 따져 보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도제를 반연하는 3계의 수면은 고(苦)ㆍ집(集)ㆍ멸지인(滅智忍)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이치상 마땅히 하계와 상계의 6지와 9지의 도제를 모두 반연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의 그물[過網]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모두 존재하지 않으니,
법지와 유지를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며,
법지품과 유지품이 대치하는 [번뇌의]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며,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서로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법지품의 도제(즉 도법지)는 다 같이 바로 욕계 중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緣道諦惑]’을 대치하는 종류이지만, 이와 동일한 종류의 도도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고 서로를 반연하기 때문에, 설혹 대치는 그렇지 않다고(동일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역시 욕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소연이 된다.
그러나 유지품의 도제(즉 도류지)는 법지품의 그것과 비록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대치하는 갈래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반연하지 않으며, 따라서 욕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색ㆍ무색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 역시 마땅히 색ㆍ무색계의 번뇌(수혹)를 대치하는 법지품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허물을 이미 막은 셈이다.
즉 여기에 비록 능히 상계의 일부의 번뇌(수혹)를 대치하고 역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는 일부 법지품의 도제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대치하는 갈래[門]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유지품과 더불어 서로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상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지품의 도제는 9지 중에서 동일한 종류로서 전전하여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될 뿐더러 또한 서로를 반연하고 대치하는 [번뇌의]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비록 대치는 그렇지 않다고(동일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모두는 상(上) 8지 중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한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6지와 9지의 그것을 반연한다”고 하는 사실은] 이치상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② 탐 등이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이유
어떠한 이유에서 ‘탐’과 ‘진’과 ‘만’과 두 가지 취견(取見, 즉 계금취와 견취)은 무루단(無漏斷)이면서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것인가?88)
진실의 해탈을 흔구(欣求)하는 모든 이는 결정코 마땅히 탐번뇌를 사리(捨離)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탐번뇌가] 무루를 반연한다면, 그것은 선법에 대한 욕망[善法欲]이 열반이나 성도를 희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해탈을 흔구하는 자는 마땅히 이러한 탐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탐번뇌가 무루를 반연한다면,] 멸ㆍ도제도 마땅히 끊어져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이탐(離貪)의 경계를 설하여 ‘끊어졌다[斷]’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설하기를,
“그대가 만약 능히 색에 대한 탐을 끊는다면, 색도 역시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탐의 경계에 대한 과실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탐에서 떠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탐이 무루를 반연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마땅히 멸ㆍ도제에 대한 과실을 관찰할 때 비로소 탐에서 떠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관찰은 청정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것으로] 능히 번뇌[惑]를 다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탐의 경계에 대한 공덕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탐은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탐이 무루를 반연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멸(滅)ㆍ정(靜) 등의 행상으로 무루를 관찰할 때 탐은 마땅히 증장해야 할 것이다.89)
그러니 어떻게 이러한 관찰에 의해 온갖 번뇌를 능히 다할 수 있을 것인가?
[탐의 경계에 대한 과실을 관찰하든 공덕을 관찰하든 탐이 무루를 반연한다고 할 경우] 다 같이 번뇌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생사도 마땅히 다함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탐은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진’은 원망과 해코지의 경계[怨害事]를 반연하여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만, 무루의 경계(즉 멸ㆍ도제)는 원망과 해코지의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원망하거나 해코지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루를 반연하는 경우 진수면은 필시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진수면은 그 상이 거칠고 더럽지만, 모든 무루법은 지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진’이 그것에 대해 작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온갖 만수면은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함[高擧]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고요[寂靜]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무루법은 지극히 고요한 것이기 때문에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마음을 낳지 않는다.
또한 ‘만’을 낳은 자는 “나는 이러한 법을 획득하였다”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능히 무루법의 힘을 반연하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만’이 일어나지 않으니, 무루법은 능히 ‘만’을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가지 취(取)가 만약 능히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정견(正見)의 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무루는 진실되고 청정하며 뛰어난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취’에 이미 전도됨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견소단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취’는 무루연의 번뇌가 아닌 것이다.9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이가 열반을 비방하는 자의 사견 등에 대해 진수면을 일으켰을 경우, 소연(즉 열반을 비방하는 자의 사견 등)으로 헤아려 보건대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니,
허물이 있는 법에 대해 미워하고 등지려는 마음[憎背心]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법도[儀]에 부합할 뿐더러 [그 같은 사견 등은] 마땅히 멀리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때 진에(瞋恚)는 마땅히 견멸소단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멸제의 상(相)에 대해 어리석은 자만이 능히 [열반을] 비방하는 자에 대해 바야흐로 ‘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91)
이를테면 그는 열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참된] 해탈이라 주장하고 나서 참된 해탈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 바야흐로 참지 못하는 마음[不忍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컨대 참된 멸제의 상에 대해 어리석은 자만이 비로소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지극히 미워하고 등지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멸제를 관찰할 때 ‘진’을 끊게 된다.
그렇지만 온갖 유정으로서 참된 멸제의 상에 대해 어리석지 않은 자가 능히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미워하고 등지려는 마음을 낳았다면, 그것은 진수면이 아니라 바로 무탐(無貪) 선근에 포섭된다.
또한 예컨대 뱃속에 많은 병을 지닌 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록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라도 병과 뒤섞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신체를] 쇠퇴시키고 손상시키지만, 뱃속에 병이 없는 자가 먹은 음식은 모두 신체를 이익되게 하지 손상되게 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멸(滅, 즉 열반)이 아닌 것에 대해 그릇되게 ‘이는 바로 멸이다.’라고 하여 탐애(貪愛)를 낳은 자라면, 상속이 더럽기 때문에 [열반을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일으킨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모두 설하여 ‘견멸소단을 반연하는 사견 등의 법에 의해 일어난 진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참다운 진실의 멸에 대해 바로 진실의 멸임을 알아 탐애가 없는 자라면, 상속이 청정하기 때문에 능히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생겨난 미워하고 등지려는 모든 마음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정견에 대해 일으킨 진에라면, 이것은 무엇을 관찰하여야 끊어지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책망해서는 안 될 것이니, 견소단의 진(瞋)은 이치상 필시 선법(즉 무루법)을 반연하는 일이 없기 때문으로, 정견을 반연하는 이러한 진에는 결정코 수소단이다.
그렇지만 이미 진리[諦]를 관찰한 자에게 이것은 더 이상 현행하지 않으니,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을 반연하는 탐’이 이미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무루를 반연하는 ‘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인가?
어찌 이러한 ‘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세간에서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어떤 외도는 말하기를,
“열반 중에서는 온갖 감관[根]이 영원히 소멸하니, 이는 바로 [신체를] 크게 쇠퇴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결정코 이를 흔구(欣求)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애당초 진(瞋)이 아니니, 바로 사견이기 때문이다.
본론(本論)에서도 설하기를,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견멸소단의 사견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이치상으로도 필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일체의 괴로움은 극락처(極樂處)에 이를 때 비로소 그것의 영원한 소멸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극락처란 오로지 진실의 열반으로, 이 같은 ‘극락’이라는 말은 승의(勝義)의 즐거움을 의미한다.
즉 그 외도는 바로 이러한 즐거움의 상을 능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또한 생사의 과실을 능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온갖 존재에 대해 탐착하여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견을 일으켜 열반을 비난하고 부정하였던 것인데, 어찌 이를 멸제를 반연하는 진에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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