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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2권
21.5. 중음연(中陰緣)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중유(中有 : 中陰)에 대해서는 많은 이름이 있다.
혹은 중유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건달박(健達縛)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구유(求有)라 하기도 하고, 혹은 의성(意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 어떤 것을 중유라고 말하는가?
[답] 사유(死有)의 뒤에 있고 생유(生有)의 앞에 있으면서 두 가지 유(有)의 중간에서 자체(自體)로 일어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문] 무슨 까닭에 중유를 건달박이라고 하는가?
[답] 그것은 냄새를 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오직 욕계(欲界)의 중유(中有)에만 소속된 것이다.
[문] 무슨 까닭에 중유를 구유(求有)라고 말하는가?
[답] 여섯 처소의 문(門)에서 생유(生有)를 구하기 때문이다.
[문] 무슨 까닭에 중유를 또 의성(意成)이라고 말하는가?
[답] 뜻을 따라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른바 모든 유정들은 혹 뜻을 좇아 나기도 하고, 혹은 업을 따라 나기도 하며, 혹은 이숙(異熟)을 좇아 나기도 하고[이숙의 옛 이름은 과보(果報)라고 함] 혹은 음욕을 따라 태어나기도 한다.
뜻을 좇아 난다고 한 것은 겁초(劫初)의 사람과 온갖 중유(中有)와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와 아울러 변화하는 몸을 말하는 것이다.
업을 따라 태어난다는 것은 모뜬 지옥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계경(契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옥의 유정(有情)들은 업에 얽매어 있어 모면하거나 벗어날 수 없고 업을 말미암아 태어날 뿐 의요(意樂)들 말미암지는 못한다.’
이숙을 쫓아 태어난다고 한 것은 모든 새들과 귀신 따위를 말하는 것으로 저들은 이숙의 세력이 가볍고 건전하기 때문에 능히 허공을 날아다니며 혹은 벽이나 어떤 장애물에도 걸림이 없다.
음욕을 따라 태어난다고 한 것은 욕계의 여섯 하늘과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냐. 모든 중유의 몸은 뜻을 따라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의행(意行)을 타기 때문에 의성(意成)이라고 말한다.
[옛 이름은 중음(中陰)이라고 한다.]
또 『바사론(婆沙論)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문] 증유는 모든 감각기관을 다 갖추고 있는가, 갖추고 있지 못한가?
[답] 온갖 중유소 모든 감각기관을 다 잦추고 있으니, 처음 받은 이숙(異熟)은 반드시 원만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갖추고 있지 않다고도 말하는데, 그것은 마치 도장을 가지고 물체에 찍으면 그 형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이 중유는 나아갈 세계가 본래부터 있기 때문에 감각기관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고도 말한다.
이 가운데 맨 처음 말한 것이 이치에 가장 잘 맞는 것이니, 이른바 중유는 육처(六處)의 문에 위치하여 태어날 곳을 두루 찾기 때문에 감각기관은 반드시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것은 눈 등을 말한 것이요, 남자와 여자의 근은 제외된다.
색계(色界)의 중유(中有)는 저 남녀의 근이 없기 때문이며,
욕계의 중유는 또한 그것이 일정하지 않다.
장차 난생(卵生)과 태생(胎生) 두 종류의 생(生)을 받을 사람은 중유의 위치 에 머물러 있을 적에는 남자와 여자의 근이 있지만 알이나 태속에 이르르면 갖추지 못할 경우가 있나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난생이나 태생의 생을 받을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문] 온갖 갈래의 세계 중에 중유의 행상(行相)은 어떠한가?
[답] 지옥의 중유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가타(伽他 : 偈頌)로 말하였다.
지옥에 떨어질 적에는
발은 위로 하고 머리는 아래로 돌아가나니
모든 선인(仙人)들이 열반[寂]을 좋아하여
고행(苦行) 닦는 것을 비방하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하늘의 중유는 다 발을 아래로 하고 머리를 위로 한다.
마치 사람이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을 때 화살이 위로 올라가서 여섯 갈래 세계에 가는 것과 같은데
다른 갈래 세계의 중유는 다 측면으로 다니나니, 그것은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서 갈 곳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또 벽 위에 날아다니는 신선을 그릴 적에 온몸이 측면으로 다니면서 장차 태어날 곳을 찾는 것과 같다.
[문] 중유의 행상은 다 이와 같은가?
[답] 꼭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친 이의 말에 의하면
만약 지옥에서 죽어 다시 지옥에 태어날 때 반드시 머리는 아래로 하고 발은 위로 하여 다니는 것은 아니며,
만약 천상에서 죽어 다시 하늘 세계에 태어날 때에도 반드시 발은 아래로 하고 머리는 위로 하여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만약 지옥에서 죽어 인간 세계에 태어날 경우 마땅히 머리를 위로 하여 올라 갈 것이요,
만약 하늘 세계에서 죽어 인간 세계에 태어날 경우는 마땅히 머리가 아래로 갈 것이며,
귀신과 방생(傍生 : 畜生) 두 세계의 중유(中有)는 살고 있는 곳을 따른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또 논(論)에 의한다.
“[문] 중유는 태어날 때부터 옷이 있는가?
[답] 색계(色界)의 중유는 모두 다 옷이 있으나, 색계에는 부끄러워함이 많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바로 법신(法身)의 의복이니, 저 법신이 훌륭한 의복을 갖춘 것과 같이 생신(生身)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저 중유는 항상 옷을 갖추고 있다.
욕계(欲界)의 중유는 대부분 옷이 없으니, 욕계의 세계에는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라나 오직 보살과 청정한 필추니(苾芻尼 : 비구니)로서 받는 중유만은 제외되나니, 항상 최상의 절묘한 의복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로서의 중유도 옷은 없고 오직 백정(白淨)의 비구니 등으로서 받는 중유만이 항상 옷을 갖추고 있다.’
[문] 무슨 인연으로 보살로서의 중유는 옷이 없고 백정의 비구에게만 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백정의 비구니는 일찍이 의복을 사방 스님들에게 보시했기 때문에 저 중유 는 항상 의복이 있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보살이 과거생(過去生)에 사방 스님들에게 보시한 미묘한 의복과 백정(白淨)의 비구니 등에게 보시한 의복을 부수어 작은 먼지가 되게 한다 하더라도 비유가 되지 못할 터이데,
어째서 보살로서의 중유는 옷이 없고 백정의 비구니에게만 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그것은 저들의 원력이 보살과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백정 비구니는 옷을 사방 스님들께 받들어 보시하고 나서 곧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는 생(生)마다 항상 의복을 입고 나아가 중유에 이르더라도 몸을 드러내지 않기들 원하나이다’라고 했으니,
태어나는 곳마다 향상 의복이 풍부하며 그들이 최후의 몸으로 받는 중유도 항상 의복이 있어서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갔다가 나아가 출태(出胎)할 때까지 옷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
가령 저와 같은 몸을 점차로 자라나서 뒤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나서도 문득 다섯 가지 옷을 마련하고 바른 수행을 부지런히 닦아서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며, 마침내는 뒤에 열반(涅槃)할 때에 이르러서도 곧 이 옷으로 시선을 싸서 화장(火葬)하느니라.
보살은 과거 삼무수겁(三無數劫) 동안 닦았던 갖가지로 특별하게 뛰어난 선행이 모두 무상보리(無上菩提)로 회향(廻向)하여 모든 유정(有情 : 衆生)들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때문에 이 행원(行願)으로 말미암아 비복 상호(相好)가 나타나더라도 옷은 없는 것이다. 원력에 다름이 있다고 해서 꼭 힐난할 것은 못된다.”
또 논(論)에 의한다.
“[문] 중유의 위치에서도 단식(段食)의 힘을 벌어야 하는가?
[답] 색계의 중유는 단식에 의지하지 않지만 욕계의 중유는 꼭 단식에 의지해야 한다.
[문] 욕계 중유의 단식은 어떤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욕계의 중유는 음식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곧 그 음식을 먹고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곧 그 물을 마시나니,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살아간다.’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 하면 중유는 매우 많아서 이루 다 구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니, 계경(契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자루에서 갱미(粳米) 등을 쏟아서 가마솥에 부으면 그 쌀의 수효는 지 극히 조밀(稠密)하겠으나 다섯 갈래 세계의 유정들이 받는 중유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면 그 수량이 이보다 더 조밀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수용하는 온갖 음식은 일체 세간에 있는 음식을 가지고 오직 개에게만 공급한다 하더라도 저 한 종류의 중유조차 오히려 다 구제할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다른 중유까지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또 중유의 몸은 지극히 마세하고 가볍고 미묘하므로 거칠고 무거운 음식을 받으면 몸이 마땅히 파괴되어 흩어질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하느니라.
‘중유는 냄새만 맡을 뿐 거친 성질의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허물은 없다.’
이른바 복이 있는 사람은 청정한 꽃ㆍ과일ㆍ음식 등의 가볍고 묘한 향기를 흠향(歆饗)함으로써 스스로 살아가고, 만약 복이 없는 사람은 똥이나 그밖에 더럽고 냄새나고 썩은 음식 따위의 가볍고 미세한 향기를 흠향함으로써 스스로 살아 간다.
또 그들이 먹는 향기는 지극히 적다. 그러나 중유는 아무리 많아도 두루 다 수용할 수가 있다.
또 논에 의하면 세존(世尊)께서 경전을 인용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 가지 일이 화합해야 어머니의 태(胎)에 들어갈 수 있다.
부모에게 모두 염심(染心)이 있어 화합하고 어머니의 몸이 잘 조절되어 적당한 상태라서 병이 없으면, 이 때에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앞에 나타나 있게 된다.
이 건달박은 그 때에 두 마음을 가지고 전전(展轉)하여 앞에 나타나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 숨어버린다.
여기에서 ‘세 가지 일이 화합한다’는 것은,
첫째 부모가 서로 사랑하여 화합하는 것이요,
둘째 그때 어머니의 몸이 잘 조절되어 알맞아야 히는 것이며,
셋째 그때 건달박이 그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모두 염심(染心)이 있어 화합한다’는 것은 이른바 부모가 다 함께 음 욕의 탐냄을 일으켜서 서로 화합하는 것을 말하고,
그 때에 ‘어머니의 몸이 잘 조절되어 알맞은 상태’라는 것은 어머니가 탐욕을 일으켜 몸과 마음이 즐겁고 기뻐하는 것을 몸이 잘 조절되어 알맞은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계율을 잡 지키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탐욕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혼탁(渾濁)해진다.
마치 봄과 여름에 물이 혼탁하게 흐르는 것처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몸의 혼탁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배가 깨끗하여 바람ㆍ열ㆍ담(痰)이 서로 핍박하여 단절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병이 없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아홉 달, 혹은 열 달 동안 태 속의 아이를 잘 보호하여 그 아이로 하여금 손상하여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때‘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모든 어머니의 몸에 더럽고 악한 일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니, 날마다 달마다 향상 핏물이 흘러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지나치게 많으면 습기가 많기 때문에 태들 이룩하지 못하고,
이것이 만약 너무 적으면 건조하기 때문에 또한 태를 이룩하지 못한다.
만약 이 핏물이 그리 적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아 건조하지도 않고 습(濕)하지도 않으면 비로소 태를 이룰 수 있으니, 그것을 ‘이 때’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중유(中有)가 태 속에 들아갈 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어머니의 핏물은 최후의 때에 두 방울이 남아 있고 아버지의 정액은 최후에 한 방울이 남아 있어 그것이 서로 어울려 뒤섞이고 화합해야 비로소 태를 이룰 수 있다.
‘건달박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고 한 것은 이른바 곧 중유가 이곳에 나타나 그 앞에 있는 것이요, 다른 곳에 있지 않아서 앞도 아니요 뒤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 건달박이 그 때에 두 마음을 가지고 전전하여 앞에 나타나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 숨는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건달박이 장차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그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애정과 분노의 두 마음이 번갈아 나타나 일어나고서야 비로소 태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만약 남자의 중유가 장차 태 속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정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분노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또 논에 의하면 이러하다.
“[문] 중유는 어느 곳에서 어머니의 태 속으로 들어가는가?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중유는 걸림이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곳을 따라 곧 태에 들어간다.’
[문] 만약 중유의 몸이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어떻게 이 어머니의 태 속에 의지 하여 머무는가?
[답] 업(業)의 힘에 구속되기 때문에 이것을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다.
유정(有情)의 업력(業力)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장애하는 물건이 없는데 장애가 있게 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이것에 대하여 마땅히 힐난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중유가 태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나오는 문을 쫓아 들어간다. 이는 애욕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뒤에 태어난 아이가 형이 된다. 왜냐 하면 먼저 태 속에 들어간 것이 반드시 나중에 나오기 때문이다.
[문] 보살의 중유는 어느 곳을 따라 태 속에 들어가는가?
[답] 오른쪽 옆구리로 해서 들어간다. 태 속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바로 알고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음욕으로 사랑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오는 문을 따라 들어간다. 그것은 모든 알로 태어나거나 태로 태어나는 법이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문] 윤왕(輪王 : 轉輪聖王)과 독각(獨覺)은 먼저 중유의 자리에서 어느 곳을 따라 태 속에 들어가는가?
[답] 오른쪽 옆구리를 따라 들어간다. 태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바로 알고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라고 생각할 뿐 음욕의 애욕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오는 문을 따라 들어간다. 알로 태어나거나 태로 태어냐는 모든 중생의 법이 반드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은 복과 지혜가 지극히 많고 뛰어나가 때문에 장차 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뒤바뀐 생각이 없으므로 음욕의 애욕을 일으키지 않는다.
전륜왕과 독각은 비록 복과 지혜가 있다 해도 그다지 증상(增上)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장차 태 안에 들어가려 할 때엔 아무리 거꾸로 된 생각이 없다 해도 역시 음욕의 애욕을 일으키나니, 그런 까닭에 태에 들어갈 때에는 꼭 나오는 문을 따라 들어간다.’
또 그 논에서 『시설론(施設論)』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만약 저 부모의 복업은 증상되어 있어도 자식의 복업이 하열(下劣)하면 태에 들어갈 수 없고,
만약 부모의 복업이 하열하고 잃으면 자식의 복업이 뛰어나더라도 태에 들어갈 수 없다.
반드시 부모와 자식 세 사람의 복업이 동등해야 비로소 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문] 만약 부귀한 남자가 가난하고 천한 여자와 교합(交合)하거나 혹 부귀한 여인이 가난하고 천한 남자와 교합한다면 어떤 중유(中有)가 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
[답] 부귀한 남자가 가난하고 천한 여인과 교합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서 하열(下劣)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그 여인에 대해서는 존귀하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며,
부귀한 여인이 가난하고 천한 남자와 교합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서 하열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그 남자에 대해서는 존귀하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가난하고 천한 남자가 부귀한 여인과 교합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서 존귀하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그 여인에 대해서는 하열 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가난하고 천한 여인이 부귀한 남자와 교합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서는 존귀하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그 남자에 대해서는 하열하다는 생각을 낸다.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장차 태위(胎位)에 들어갈 때에도 마땅히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러므로 태 안에 들어갈 때에는 다 평등해야 하는 이치가 있느니라.”
또 논에 의하면 이러하다.
‘[문] 중유가 마세(微細)하여 장벽(牆壁)ㆍ산ㆍ언덕ㆍ나무 등 모든 것이 다 걸림이 될 수 없다면 여기와 저기의 중유는 서로 장애가 되는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와 저기의 중유도 또한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서로 몸을 부딪칠 때에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지와 저기의 중유도 서로서로에겐 장애가 된다. 그것은 서로 만날 때에 이것과 저것이 전전하면서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중유는 장애가 없다고 말했는가?
[답] 다른 것에 대하여 장애가 없다는 것이지 중유끼리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문] 이 증유와 저 증유 사이에 모두 장애가 있는가?
[답] 저희들끼리 서로 장애한다는 것이지 다른 종류에 대하여 장애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지옥의 중유는 다만 지옥의 중유에 장애가 되고
나아가 하늘의 중유는 다만 하늘의 중유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말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열한 것이 뛰어난 것에 장애들 받나니, 거칠고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뛰어난 것은 하열한 것에 장애를 받지 않나나 미세하고 가볍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옥의 중유는 나머지 다섯 중유에 장애를 받고,
방생(傍生 : 畜生)의 중유는 나머지 네 중유에 장애를 받으며,
귀신 세계의 중유는 나머지 세 중유에 장애를 받고,
사람 세계의 중유는 나머지 두 중유에 장애를 받으며,
하늘 세계의 증유는 오직 하늘 세계의 중유에게만 장애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열일곱 가지 중음유(中陰有)의 법이 있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명성[係念]하 여 적멸의 도[寂減道]를 수행하라.
만약 하늘이나 또는 사람이 이 도를 생각하면 마침내 염라왕(閻羅王) 사자(使者)의 가해(加害)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들이 그 열일곱 가지 중음유인가?
첫 번째는
만약 인간 세계에서 죽어 천상(天上)에 태어날 사람이라면 곧 즐거운 모습의 중음을 보나니,
비유하면 마치 흰 털모포가 드리워져 땅에 떨어지려 고 하는 부드럽고 연하고 하얗고 깨끗한 모습과 같은 것을 보거나,
또는 동산 숲과 꽃이 핀 연못을 보고 노래하고 춤추며 장난치고 웃는 소리를 듣거나,
또는 온갖 향내를 맡는 등 일체가 사랑스럽고 즐길 만한 것이다.
한량없이 많은 갖가지 물건들과 어울리고 미세한 접촉을 하다가 곧 전상에 태어난다.
착한 업이기 때문에 천상의 즐거움을 얻고 미소를 머금고 기뻐하여 얼굴 색이 깨끗하다.
친족과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게 울부짖지만 그는 천상의 좋은 모습 때문에 이들이 슬퍼하는 것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임종(臨終)할 때에 다달아 처음으로 즐거운 곳에 태어난다.
그가 받은 하늘 몸의 모습은 마치 인문(印文)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고
그는 하늘의 뛰어난 광경을 보고 곧 그 경계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하늘의 몸을 받나니,
이것을 곧 처음 태어나는 중음유라고 말한다.
두 번째 중음유는
만약 염부제(閻浮提)의 사람이 목숨을 마치고 울단월(鬱單越)에 태어나려 할 경우 미세하고 연한 붉은 모포의 사랑스런 빛깔을 보는 것이다.
그는 곧 탐심(貪心)을 내어 손으로 잡아 가지거나 손을 들어 어루만지되, 마치 허공을 더듬는 것과 같이 한다. 친족들은 그것을 보고 두 손으로 허공을 만진다고 말한다.
또 바람이 불어오되, 만약 병든 사람일 경우 추운 겨울일 때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 추위의 고통을 덜어 주고,
만약 더운 여름일 때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 찌는 듯한 답답함을 덜어 없애서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 준다.
그 기쁜 마음의 인연 때문에 그는 친족들이 애통해 하며 울거나 슬프게 울부짖는 소리들 듣지 못한다.
만약 그 업(業)이 움직이면 그 마음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슬피 우는 그 소리를 들으면 업의 바람에 불리어 다른 곳에 가서 태어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임종 때에 친족들이 슬프게 우는 것은 그에게는 매우 큰 장애가 된다.
만약 그가 방해받지 않으면 울단월에 태어나게 된다.
종간에 차례로 좋은 모습이 나타나는데, 즉 푸른 연꽃이 가득 핀 연못에 거위ㆍ오리ㆍ원앙새 등이 못 안에 가득히 노는 것을 보고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서 그 안에 들어가 유희하게 된다.
어머니의 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는 연꽃 핀 못에서부터 육지로 나와 그의 부모가 욕망에 물들어 화합하는 것을 보고는 그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전도(顚倒)된 견해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의 몸을 보고는 곧 숫거위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는 암거위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만약 남자로 태어날 경우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이 숫거위가 되었다고 보고,
자신이 만약 여인으로 태어날 갱 우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이 암거위의 몸이 되었다고 본다.
자산이 남자로 태어나려 할 때에는 아버지를 장애물로 생각하고 그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끼며,
만약 여인으로 태어나려 할 때에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끼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나니,
이것을 울단월에 태어나는 두 번째 중음유(中陰有)라고 말한다.
세 번째 중음유는
만약 염부제(閻浮提)에서 죽어서 구야니(瞿耶尼)에 태어나려 할 경우 곧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만약 임종하려 할 때엔 어떤 집을 보게 되는데, 그 집은 모두 누런 색으로 된 것이 마치 구름처럼 금빛으로 두루 덮인 것과 같이 보인다.
허공 속에서 누런 방석의 모습을 보고는 손을 들어 어루만지면 친족과 형제들이 말하기를
‘병든 사람이 두 손으로 허공을 더듬는다’고 할 것이다.
이 사람은 장차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 자신의 몸을 소와 같다고 여기고 여러 마리 소떼를 보면 꿈 속에서 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약 남자로 태어나려 할 경우에는 그의 부모가 화합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을 보고서 스스로 사람의 몸이 그 집안에 많이 있는 것을 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되 마치 황소와 같이 보고 그 아버지를 제거하고 그 어머니와 화합하려 하며,
만약 여인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스스로 그 몸을 보되 마치 암소와 같이 보고는 이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황소가 저 암소와는 화합하면서 나는 상대해주지 않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난 뒤에 여인의 몸을 받나니,
이것을 구야니에 태어나는 세 번째 중음유(中陰有)라고 말한다.
네 번째 중음유는
만약 염부제의 사람이 목숨을 마치고 불바제(弗婆提)의 경계에 태어나려 할 경우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데,
일체가 다 파랗게 허공을 두루 덮은 푸른 모포의 모습을 볼 것이고, 그 집까지도 다 허공과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고 푸른 모포가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손으로 그것을 막으면 친족들이 말하기를 ‘허공을 막는다’고 할 것이다.
그는 목숨을 마치면 그 중음신(中陰身)이 마치 말의 형상과 같다고 볼 것이 다.
그리고 스스로 그 아버지를 부마(䭸馬 : 牝馬)와 같이 보고 그 어머니를 초마(騲馬 : 牝馬)와 같이 볼 것이며,
부모가 교회(交會)하고 애욕에 물들어 서로 화합하는 것을 불 것이다.
만약 남자로 태어날 경우에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나는 꼭 이 초마와 화합할 것이다.〉
만약 여자로 태어날 경우에는 그 자신을 초마의 형상과 같다고 보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저 부마는 무슨 까닭에 나와는 교합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한 뒤에는 곧 여인의 몸을 받나니,
이것을 불바제에 태어나는 네 번째 중음유(中陰身)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 중유유는
만약 울단월(鬱單越)의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큰 업(業)의 마음이 자재로워서 천상에 태어날 경우에는 손으로 허공을 더듬을 것이다.
마치 꿈 속에서 보는 것처럼 좋은 꽃에서 가장 미묘한 향기를 보는데, 제일 미묘한 색깔과 향기가 손에 있으면 그 꽃을 보고 탐욕이 생겨
〈나는 이제 이 나무를 보았으니 내 마땅히 올라가야겠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 뒤에는 곧 큰 나무 위로 올라가고 마침내는 수미산(須彌山) 까지 올라간다.
거기에서 천상 세계의 꽃과 과일이 장엄한 모습을 보고
〈나는 마땅히 돌아다니며 구경하리라〉고 하나니,
이것을 울단월 사람이 하품(下品)의 생을 받는 다섯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 중음유는
만약 울단월 사람이 중업(中業) 때문에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태어나려 할 경우엔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매우 사랑하고 즐길 만한 연꽃이 핀 못에 온갖 벌들이 장엄하고 일체가 다 향기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연꽃에 올라가서 잠시 동안 허공을 타고 날으는데, 마치 꿈 속에서의 일과 같을 것이다.
그러다 그가 천상에 태어나면 이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지급 훌륭한 연꽃이 핀 못에 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울단월 사람이 중품(中品)의 생을 받는 여섯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일곱 번째 중음유란
울단월 사람이 업이 훌륭하기 때문에 삼십삼천의 선법당(善法堂) 등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엔 특수하고 절묘하게 장엄한 승묘당(勝妙堂)을 볼 것이고,
그 사람은 그 때 곧 승당(勝堂)에 올라가 이 궁전에 태어나서 천자가 될 것이다.
이것을 울단윌 사람이 천상에 태어나서 상품(上品)의 생을 받는 일 곱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여덟 번째 중음유란
만약 울단월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은 곧 동산으로서 유희할 수 있는 곳이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사랑할 만하며,
그것에 대한 소리를 들으면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고뇌(苦惱)함이 많지 않고, 그 마음이 혼탁하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곧 허공의 궁전에 오른다.
그는 거기에서 모든 하늘들이 허공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마치 꿈 속에서의 일과 같을 것이다.
삼십삼천(三十三天)은 뛰어나고 절묘하여 사랑할 만하고 온갖 다섯 가지 욕망이 모두 원만하게 갖추어진다.
울단월로부터 죽어 이 하늘에 태어나면
이것을 울단월 사람이 이 하늘에 태어나서 훈습(薰習) 때문에 유희(遊戱)하고 또한 죽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인 여덟 번째 중음유라고 한다.
아홉 번째 중음유란
만약 구야니(瞿耶尼) 사람이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태어나는 데에는 두 가지 업(業)이 있다.
하나는 여업(餘業)이요, 다른 하나는 생업(生業)이니,
이 두 가지 업으로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곧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데,
착한 업 때문에 목숨을 버리려고 할 때에는 가운이 목구멍에서 막히지 않고 맥도 끊어지지 않아 모든 감각기관이 깨끗하다.
큰 못물도 보게 되는데, 그 물은 온도가 적절한 데다 넘실넘실 흘러서 그를 띄워 저 언덕에 이르게 한다.
이미 저 언덕에 이르러서는 제일 단정하고 갖가지로 장엄한 모든 하늘 여인들이 장난치고 웃으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난 다음 마음으로 친근히 하려고 앞으로 나아가 여인들을 포옹하면 그는 곧 천상에 태어나서 하늘의 쾌락을 누리는데, 마치 꿈 속에서의 일과 같을 것이다.
그 때 중음은 사라져버리나니 이것을 아홉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구야니 사람은 거기에 태어나 상ㆍ중ㆍ하 세 품의 업이 있지만, 광명 등은 동일하고 한 중음의 모든 것이 서로 비슷하여 울단월 사람이 세 가지 차별적인 생을 받는 것과는 같지 않다.]
열 번째 중음유란
만약 불바제(弗婆提) 사람은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죽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업을 보고 혹은 다른 사람의 업을 보며 혹은 전당(殿堂)이 훌륭하게 장엄된 모습을 보고 마음에 기쁨이 생겨 그곳을 가까이하여 그곳의 생(生)을 받고 싶어하게 된다.
그러고는 그 전당 밖에서 온갖 채녀(婇女)들이 여러 사내들과 어울려 노래하며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중음유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나도 이 궁전으로 가서 함께 놀고 싶구나.〉
그리고는 곧 들어가서 대중들과 즐겨 놀면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곧 천상에 태어나나니,
이것을 열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열한 번째 중음유란
모든 아귀(餓鬼) 등이 악업이 이미 다하면 다른 선한 업 을 받는다.
본래 다른 세계에서 지은 선한 업이 마치 부모와 같아서 천상에 태어나고 싶어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만약 아귀의 세계에서 죽어 천상에 태어나려고 하면 아귀의 세계에서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몸을 태우므로 항상 음식을 탐하고 늘 음료수를 생각하곤 하지만,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다시금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본래의 생각은 다 없어지고 일체의 악업이 모두 근접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음식을 보더라도 오직 눈으로 보기만 할 뿐이니,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음식을 보는 것과 같아서 먹을 수는 없다.
그는 천상의 사랑할 만한 것을 보고 곧 달려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곧 천상에 태어나나니,
이것을 열한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열두 번째 중유유라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에 축생의 몸을 받는 것이다.
한량 없이 많은 종류로서 백천억 동안 나고 죽음[生死]의 몸을 받다가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세계에 떨어져서 세간을 흘러다니되 끝이 없다.
그러다 다른 선한 업으로 축생의 세계에서 죽어 두 번째 하늘에 태어나는데, 혹은 사천왕천(四天王天)에 태어나기도 하고, 혹은 삼십삼천(三十三天)에 태어 나가도 한다.
축생의 악한 세계에서 괴로운 과보가 끝나고 장차 그 몸을 해탈하려고 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가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다른 선한 업으로써 어리석은 마음이 업어지고 적어져서 혹 즐거운 곳이 보이게 된다.
그러면 곧 그 세계로 달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꿈에서의 일과 같다. 그곳으로 달려가면 곧 천상에 태어나나니,
이것을 열두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열세 번째 중음유는
지옥의 중생들로서는 천상에 태어나기란 매우 어렵고 희유(希有)한 일이다.
다른 선업의 인연이 있어 그 업이 성숙하게 되면, 이 지옥의 사람은 그 업이 다하기 때문에 장차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지옥으로부터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는 곧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 만약 여라 옥졸(獄卒)들이 그들 가마솥에 던져 넣으면 마치 물거품처럼 사라져서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고,
만약 몽둥이로 때리면 때리자마자 이내 죽어서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며,
만약 철함(鐵函) 속에 가두면 그 속에 넣자마자 곧 죽어서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고,
만약 잿물에 넣으면 들어 가자마자 녹아 섞여져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며,
만약 철몽둥이로 때리면 때리자 마자 곧 죽어버려 사라지고 나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고,
만약 쇠로 된 새들이 쪼아먹고 나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며,
만약 모든 사나운 짐승들이 뜯어먹고 난 뒤에도 끝내 살아나지 못한다.
이 지옥의 사람들은 악한 업이 이미 끝나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또 다시 염라왕의 옥졸을 보지 못하는데,
그것은 마치 등불에 기름과 심지가 다하고 나면 등불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처럼 지옥 세계 중음유의 모습도 나타나지 않는다.
홀연히 허공에서 제일 좋은 노래와 춤, 그리고 즐거워 웃는 소리가 들리거나 향기로운 바람이 몸에 닿아 제일의 즐거움을 누리므로 가까이 가서 그곳에 가 태어나고자 하면,
혹은 삼십삼천에 태어나가도 하고 혹은 사천왕천에 태어나기도 하나니,
이것을 열세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열네 번째 중음유라는 것은
만약 인간에서 죽어 다시 인간 세계에 태어나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이와 같은 모습을 보는데, 곧 그는 큰 돌산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 몸 위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 그 사람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저 산이 혹시라도 당장 내 몸 위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에 손을 흔들어 이 산을 막으려고 하면 친척들과 이웃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허공을 잡으려 한다’고 말한다.
이미 이것을 보고 난 뒤엔 또 이 산이 마치 흰 털모포와 같다고 보고 곧 그 모포에 올라가면 그것은 곧 빨간 모포로 보인다.
이렇게 차츰차츰 죽음에 임박해지면 다시 광명을 보게 된다.
또 그 부모가 애욕으로 화합하는 것을 보고는 만약 남자로 태어날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기 자신이 어머니와 교회(交會)하려는 것을 아버지가 방해하여 막는다고 말하며,
만약 여인으로 태어날 사람이라면 스스로 그 몸이 아버지와 교회하려는 것을 어머니가 방해하고 막는다고 말한다.
그 때를 당하여 중음은 곧 괴멸(壞減)하고 생음(生陰)이 차례로 일어나되,
마치 도장을 찍을 때 도장은 무너지고 글자만 나타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인간이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에 태어나는 열네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
열다섯 번째 중음유라는 것은
하늘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하늘에 태어날 사람이면 곧 아무런 고뇌가 없다.
다른 천자들은 목숨을 마칠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세계에 떨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천자(天子)는 자기 자신을 장엄하는 도구를 잃지 않고,
또한 다른 하늘이 그의 본래의 자리에 앉는 일도 없으며,
그는 그 하늘보다 더 훌륭한 하늘의 위치에 앉게 된다.
만약 사천(四天 : 四王天)에서 목숨을 마치면 나중에 삼십삼천에 태어나되, 그 뛰어난 모습을 사랑할 만하니,
이것을 열다섯 번째 중음유(中陰有)가 상속하는 도(道)라고 말한다.
열여섯 번째 중음유와 도가 상속한다는 것은
만약 상천(上天)으로부터 다시 아래 하늘에 태어나려 할 경우, 온갖 연꽃이 피어 있는 동산과 흐르는 못물이 모두 앞에 것만 못함을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모습을 보고 난 뒤에는 굶주리고 목마를 때 괴로워하듯이, 그것 얻기를 바라고 갈망하여 곧 그곳으로 가서 태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같은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두 종류의 중음유(中陰有)가 두 가지 모습으로 태어나나니,
이것을 열여섯 번째 중음유가 상속하는 도라고 말한다.
열일곱 번째 중음유가 상속하는 도라는 것은
만약 불바제(弗婆提)의 사람으로서 구야니(瞿耶尼)에 태어날 사람이면 이와 같은 현상이 있게 될 것이다.
구야니의 사람이 불바제에 태어나려 할 경우엔 또 어떤 현상이 있게 되는가?
이와 같이 두 천하(天下)의 사람이 여기서는 자기에, 저기에서는 여기에 서로 태어나려면 그 모습이 다 동일하다.
그들이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칠흑같이 어두운 굴을 보게 되는데, 그 굴 안에는 붉은 번개빛이 아래로 드리워져 마치 번기와 같은데 혹은 붉은 색이기도 하고 혹은 흰 색이가도 하다.
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손으로 더듬어 잡으면 현재의 중음은 곧 사라지게 된다.
손을 번기에 대고 차츰 그 번기로 연(緣)하여 이 굴 속으로 들어가 중음의 몸을 받으면 생음(生陰)에 가까워진다.
생(生)을 받는 법을 보면 그 또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혹은 두 마라의 소를 보거나, 혹은 두 마리의 말이 애욕으로 교회(交會)하는 것을 보면 곧 애욕의 마음이 생긴다. 이미 애욕의 마음이 생긴 뒤에는 곧 생음을 받나니,
이것을 열일곱 번째 중음유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