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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론 제6권
앞에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의 두 가지 분위(分位)에 관하여 말하였다.
4.5. 선위(善位)의 심소의 양상(1)
그러면 선위(善位)의 심소의 양상은 어떠한가?1)
게송(『유식삼십송』의 제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심소는 신(信)ㆍ참(慚)ㆍ괴(愧)와
무탐(無貪) 등 세 가지 선근2)과
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과
행사(行捨) 및 불해(不害)이다.
논하여 말한다.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과 함께하는 것을 선심소라고 이름한다.
신(信)ㆍ참(慚) 심소 등 반드시 열한 가지가 있다.
[신(信)심소]
무엇을 ‘신(信)심소’3)라고 하는가?
참으로 존재함[實]과 덕(德) 및 능력[能]을 깊이 인정하고 좋아하며 원하여 심왕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으로 삼고,
불신(不信)을 다스리고 선(善)을 좋아함을 업으로 삼는다.
그런데 신(信)심소를 구별하면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참으로 존재함을 믿는 것이니, 일체법의 참다운 현상[事]과 본질[理]에 대해서 깊이 믿어 인정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삼보의 진실되고 청정한 덕을 깊이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에 대하여 힘이 있어서 능히 얻고 능히 성취한다4)고 깊이 믿어서 희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선을 닦고 증득함을 즐기고 좋아한다.
[문] 인정하는 것은 승해(勝解)이니, 이것은 믿음의 원인이다.
좋아하여 원한다는 것은 욕구[欲]이니, 곧 믿음의 결과이다.
이 신심소를 확실히 말하면 자상이 어떠한가?5)
[답] 어찌 적절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심왕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으로 한다.
[문] 이것은 아직 그 심왕이 청정함을 알지 못한다.
만약 청정한 것이 곧 심왕이라고 말하면, 마땅히 심소가 아니어야 한다.6)
만약 심왕을 청정하게 한다고 말하면, 참(慚)심소 등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심왕과 함께하는 청정법이라고 말하면 역시 비판을 받는다.
[답] 이것은 자성이 매우 맑아서, 능히 심왕 등을 청정하게 한다.
심왕이 뛰어나기 때문에 심정(心淨)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물을 맑히는 구슬[水淸珠]이 능히 탁한 물을 청정하게 하는 것과 같다.
참(慚)심소 등은 선(善)이지만, 청정을 자상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정하게 함을 자상으로 한다.7) 그것에 혼동되는 과실이 없다.
또한 모든 잡염법은 각기 따로 자상이 있다.
오직 불신만이 있어서, 자상이 혼탁하고 또한 능히 다른 심왕과 심소도 혼탁하게 한다.
매우 더러운 물건은 스스로도 더럽고 다른 것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신(信) 심소는 바로 그것에 뒤집어 배대한 것이기 때문에 청정함을 자상으로 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
신심소는 즐기고 좋아함을 자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마땅히 세 가지 성품에 통해야 하고, 자체[體]가 곧 욕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고제와 집제는 신심소의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한다.9)
다음과 같은 국집된 견해가 있다.10)
신심소는 수순함을 자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마땅히 세 가지 성품에 통해야 하고, 곧 승해ㆍ욕(欲) 심소가 되어야 한다.11)
만약 분명히 지녀서 수순하다면 승해심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즐겨서 수순하다면, 욕심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둘의 자체에서 떠나서는 수순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라. 심왕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신(信)심소이다.
[참(慚)심소]
무엇을 ‘참(慚)심소’12)라고 하는가?
자신과 법의 힘에 의지해서 현인(賢人)13)과 선법(善法)14)을 받들고 존중함을 체성으로 삼고,
무참(無慚)을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자신과 법을 존귀하게 여기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현인과 선법을 받들고 존중하며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서, 무참을 다스리고 여러 악행을 멈추게 한다.
[괴(愧)심소]
무엇을 ‘괴(愧)심소’15)라고 하는가?
세간의 힘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함을 체성으로 삼고,
무괴(無愧)를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세간에서 꾸짖고 싫어하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고,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무괴를 다스리고 여러 악업을 멈추게 한다.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이 둘의 공통된 양상이다. 따라서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16)에서 가정적으로 자체[體]로 삼는다.17)
만약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고집해서 둘을 별개의 양상으로 삼으면,18) 참(慚)ㆍ괴(愧) 심소의 자체가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면 곧 이 두 법은 상응하지 않아야 한다.19) 수(受)ㆍ상(想) 심소 등에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과 타인에 기다림으로써 둘의 개별적인 양상을 건립한다고 말하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그러면 문득 성스러운 가르침20)에 위배된다.
만약 참(慚)ㆍ괴(愧) 심소가 참된 것으로서 개별적으로 일어난다고 인정하면, 다시 논서에서 열 가지는 착한 마음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21)에 위배된다.
[문] (현인과 선법을) 존중하며 (악과 잡염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는 것이 만약 둘의 개별적인 양상이라고 말하면, 인식대상이 다르므로22) 함께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둘의 과실이 이미 같은데, 어째서 치우쳐서 힐책하는가?23)
[답] 누가 두 법의 인식대상이 다르다고 말했는가?
[문]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인가?
[답] 착한 심왕이 일어날 때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선을 받들어 존중하고 악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는 뜻이 있다.
따라서 참(慚)ㆍ괴(愧) 심소는 모두 착한 마음에 두루하여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다.
[문] 어째서 우리에게도 역시 이러한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그대는 참ㆍ괴 심소는 자상이 같다고 집착하는데, 어떤 논리로써 능히 앞에서 시설한 비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자타(自他)를 돌아본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법을 자기[自]라고 이름하고, 세간을 다른 것[他]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곧 이 가운데에서 선을 받들고 악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이익되거나 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또는 다른 것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24)
[무탐(無貪) 등]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무탐(無貪) 등’이라고 한 데서 ‘등(等)’은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를 가리킨다.
이 셋을 근(根)이라고 이름한 것은 선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세 가지 불선근을 가까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무탐(無貪)심소]
무엇이 ‘무탐(無貪)심소’25)인가?
윤회의 삶[有]26)과 그 원인[有具]27)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탐착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무진(無瞋)심소]
무엇이 ‘무진(無瞋)심소’28)인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苦具]에 대해서 성내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성냄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착한 심왕이 일어날 때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윤회의 삶[有] 등29)에 대해서 탐착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다.
윤회의 삶 등에 상대해서[觀]30) 건립한다. 반드시 그것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31)
앞에서 참(慚)ㆍ괴(愧) 심소를 선ㆍ악에 상대해서 건립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두 가지(무탐ㆍ무진)는 모두 착한 마음에 두루한다.
[무치(無癡)심소]
무엇이 ‘무치(無癡)심소’32)인가?
모든 본체[理]와 현상[事]에 대해서 명료하게 이해함을 체성으로 삼고, 우치함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3)
무치심소는 혜(慧)를 체성으로 한다.
『집론』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과보[報]ㆍ가르침[敎]ㆍ증득[證]ㆍ지혜[智]를 결택함을 자체로 한다”34)고 한다.
생득의 지혜[生得]ㆍ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에 순차적으로 같다고 말한다.35) 모두 결택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지혜이지만 선품(善品)에 뛰어난 능력[功能]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번뇌심소 중의 여러 견해[見]와 같기 때문에36) 다시 별도로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7)
무치심소가 곧 혜(慧)는 아니고 별도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 바로 무명에 상대하여 무탐ㆍ무진 심소처럼 선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논서에서 말하기를 “큰 자비는 무진ㆍ무치 심소에 포함되고, 근(根)38)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39)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논서에서 무치심소는 혜(慧)를 체성으로 한다고 말하면, 큰 자비[大悲]는 힘[力]40) 등처럼 혜근(慧根) 등의 근(根:22근)에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만약 무치심소는 별도의 체성이 없다고 말하면, 불해(不害)심소 등과 같이 자체가 있는 것[實物]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면 문득 논서에서 “열한 가지 선의 심소 중에서 셋41)은 세속유(世俗有)이고, 나머지는 모두 참으로 존재하는 것[實]이다”42)라고 말한 것에 위배된다.43)
그런데 『집론』에서 무치가 혜(慧)를 자체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44) 그것(무치)의 원인과 결과를 들어서 이것(무치)의 자성을 나타낸 것이다.45)
인가함[忍]46)과 좋아함[樂]47)으로써 신(信)심소의 자체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이치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탐ㆍ진ㆍ치 심소는 6식과 상응하고, 바로 번뇌에 포함되며, 악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불선근(不善根)으로 건립한다.
그것을 단멸하려면 반드시 공통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다스림에 의한다.
공통적이라는 것은 오직 선(善)의 혜(慧)이다.
개별적인 것이라는 것은 세 가지 근(根)48)이다.
그러므로 무치심소는 반드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1)
이하 선심소(善心所)에 관하여 해설한다.
2)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심소를 세 가지 선근[三善根]의 심소라고 한다.
3)
신(信, śraddhā)심소는 ‘믿음’의 능력이다. 제법의 참다운 도리와 삼보의 덕과 선근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기꺼이 원한다. 염오의 심왕ㆍ심소를 다스려서 청정하게 한다. 마치 탁수(濁水)에 맥반석을 넣으면 정화되듯이 이 믿음심소는 염오심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4)
무위선(無爲善)을 얻고 유위선(有爲善)을 성취하는 것, 또는 세간의 선(善)을 얻고 출세간의 선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5)
외인(外人)의 질문이다. 신(信)심소의 인과는 분명히 하고, 아직 그것의 자상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 자상은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6)
이것은 심왕이지 심소가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7)
논주가 신(信)심소와 참(慚) 등의 심소의 차이점을 회통하여 답변한다.
8)
상좌부 또는 대승의 다른 학파[異師]의 견해를 논파한다.
9)
논주의 논파이다. 즉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신심소는 3성(性)에 통해야 한다. 그것은 세 가지 대상을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심소의 자체는 곧 욕(欲)심소이어야 하고, 신심소에도 악(惡)과 무기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또한 4성제를 믿을 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신심소라고 하면, 고제(苦諦)ㆍ집제(集諦)는 신심소의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10)
대승의 이사(異師) 또는 대중부의 견해이다.
11)
이하 논주의 논파이다.
12)
참(慚, hrī)심소는 ‘제 부끄러움’의 작용을 하는 심소이다. 자신과 법에 의지해서 현선(賢善)을 존경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이다.
13)
범부와 성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현덕(賢德)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14)
모든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선법을 가리킨다.
15)
괴(愧, apatrapā)심소는 ‘남부끄러움’, 즉 타인의 비방을 두려워하고 왕법(王法)의 형벌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이다.
16)
『아비달마잡집론』 제1권(『고려대장경』 16, p.284下:『대정장』 31, p.697中), 『현양성교론』 제1권(『고려대장경』 16, p.56上:『대정장』 31, p.481中).
17)
유식논서에서의 차이점을 회통한다. 과오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참(慚)ㆍ괴(愧)의 공통된 모습[通相]이다. 따라서 『아비달마잡집론』ㆍ『현양성교론』 등에서 가정적으로 둘을 별개의 자체로 삼는다.
18)
다음에 종래의 견해를 비판한다.
19)
참(慚)ㆍ괴(愧) 심소의 두 법은 체일(體一)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반드시 상응하지 않아야 한다.
20)
『유가사지론』 제55권의 내용을 가리킨다.
21)
『유가사지론』 제69권(『고려대장경』 15, p.1122上:『대정장』 30, p.684上).
22)
참(慚)심소의 인식대상[所縁]은 현인과 선법[賢善]이고, 괴(愧)심소의 대상은 포악(暴惡)이다. 이처럼 둘의 인식대상이 다르다고 비판한다.
23)
외인의 질문이다. 그대는 참(慚)ㆍ괴(愧) 심소가 구생(俱生)하지 않는 것으로써 우리를 비판하지만, 그대의 견해에도 두 심소의 인식대상이 다르다는 과실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와 우리 둘 모두 과실이 있는데, 어째서 우리만 비판하느냐고 묻는다.
24)
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자(自), 해롭게 하는 것은 타(他)라고 한다.
25)
무탐(無貪, alobha)심소는 애착심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에는 5취온(取)뿐만 아니라 열반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열반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원인이 되어 3계 윤회의 과보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26)
유(有)는 3유(有:三界)의 과보[果], 즉 윤회의 삶을 말한다.
27)
유구(有具)는 3유(有), 즉 윤회의 삶의 원인[因]이다.
28)
무진(無瞋, adveṣa)심소는 성냄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3고(苦:苦苦ㆍ壞苦ㆍ行苦)뿐만 아니라 또한 열반[苦具]에 대해서도 성내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열반을 추구하다가 뜻대로 증득하지 못하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29)
윤회하는 삶의 원인[有具]ㆍ고통[苦]ㆍ고통의 원인[苦俱]을 가리킨다.
30)
여기서 관(觀)은 관대(觀待)로서, 상대하는 것을 말한다.
31)
탐(貪)심소를 윤회의 삶[有]과 그 원인[有俱]에 관대(觀待)하고, 진(瞋)심소를 고통[苦]과 그 원인[苦俱]에 관대하여 둘의 별상(別相)을 건립한다. 그러나 반드시 무탐(無貪)심소가 유(有)와 유구(有俱)를 반연하고, 무진(無瞋)심소가 고(苦)와 고구(苦俱)를 반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32)
무치(無癡, amoha)심소는 모든 사리(事理)를 밝게 이해하는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33)
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4)
『대승아비달마집론』 제1권(『고려대장경』 16, p.212下:『대정장』 31, p.664中).
35)
무착(無着, Asaṅga)의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의 본문의 내용을 그 제자인 사자각(獅子覺, Buddhasiṁha)이 해석한 문장에서이다. 즉 보(報)ㆍ교(敎)ㆍ증(證)ㆍ지(智)를 순서대로 생득혜(生得慧)ㆍ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에 배대한다.
36)
여섯 가지 번뇌심소 중에서 악견(惡見)을 별도로 유신견(有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별도로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37)
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8)
22근(根)을 가리킨다.
39)
『유가사지론』 제57권(『고려대장경』 15, p.1027上:『대정장』 30, p.619中).
40)
여래의 18불공법(不共法) 중의 10력(力)을 가리킨다.
41)
불방일(不放逸)ㆍ행사(行捨)ㆍ불해(不害) 심소를 가리킨다.
42)
『유가사지론』 제55권(『고려대장경』 15, p.1002上:『대정장』 30, p.602中).
43)
나머지 여덟 가지 중에 무치(無癡)심소가 있고, 논서에서 이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44)
『대승아비달마집론』 제1권(『고려대장경』 16, p.212下:『대정장』 31, p.664中),『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고려대장경』 16, p.284下:『대정장』 31, p.697下).
45)
무치(無癡)의 원인과 결과는 모두 네 가지 혜[四慧:報ㆍ敎ㆍ證ㆍ智]에 통하므로, 지금 그것을 들어서 그 자체분을 나타낸다.
46)
승해(勝解)심소로서 신(信)심소의 원인이다.
47)
욕(欲)심소로서 신심소의 결과이다.
48)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심소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