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목기 장인의 외길 박수태
글·사진 / 최 홍 (작가)
남원 목기의 원천, 지리산
“장인 정신이란 돈을 목적으로 하는 데서는 절대 형성될 수가 없어. 무엇보다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끼고, 미쳐야 돼. 그리고 선대의 장인들을 따라가겠다는 집념도 있어야 하고. 이런 정신 상태로 우리 전통은 맥을 이어온 거야.”
전북 남원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뱀처럼 구불거리는 여원재가 나타난다. 이 재를 힘들여 넘으면 철쭉 군락지인 바래봉과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진 운봉읍(雲峰邑)이 있다. 이 운봉읍 산덕리 삼산부락으로 들어서면 ‘운봉 목공예 공방’이라는 간판을 만날 수 있다.
박수태(66세) 씨는 이곳에서 평생을 바쳐 우리 전통 목기 제작에만 힘을 쏟고 있다. 17세에 부친에게서 전수받기 시작하여 46년 성상을 매달렸다. 그 덕택인지 살집이 없고 많은 주름에 세월의 더께가 앉은 얼굴은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첫째와 둘째 아들에게도 전수시켰으니 3대째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두 아들은 자신의 뒤를 잇지 않기를 원하여 말리기도 했으나, 내심으로는 대를 이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두 아들은 눈썰미가 좋아 각각 목기깎기와 옻칠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여 부친에 이어 3대를 잇게 됨은 물론 3부자의 합작품을 생산할 수 있게도 되었다.
3대째 잇고 있는 가업
박씨의 부친 박건문은 일찍부터 목기 제작에 뜻을 두고 일제시대에 지인과 합심하여 일본에서 목기 제작에 필요한 기계와 공구들을 수입하였다. 가격은 당시 백미로 쳐서 10가마 정도였다. 처음 공방을 설립한 곳은 남원의 산내면 백일리 부근이었다. 현재의 뱀사골 입구에 위치한 곳으로, 함양군 마천면과 함께 남원 목기의 원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공방을 설립한 이유는 바로 옆에 천년 고찰 실상사가 있고 지리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실상사 스님들로부터 밥그릇인 바루 제작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실상사는 한창 때 스님이 3,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수요도 충분하고, 지리산의 풍부한 임목자원이 있어 기술연마에 매진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님들이 바루로 목기를 사용한 것은 소리가 나지 않아 절 분위기에도 적합하고, 가볍고 단단해서 바랑에 넣고 다니기도 편리하기 때문이었지.”
그 후 남원 목기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독특한 향과 단단한 재질, 장인의 혼이 깃든 정교하고 섬세한 공예 등은 타 지역 제품의 추종을 불허했다. 명성을 타고 상류층의 생활 용구로 활용되었고 왕실에 진상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식 관혼상제가 보편화 되면서 왕실 외에도 사찰과 가정에서 주로 제기(祭器)로 사용되었다. 목기가 제기로 각광 받은 이유 역시 특유의 조용함과 정결함 때문이다.
그 후광으로 1929년에는 산내초등학교에 목공과가 생겼으며, 1952년에는 현 산내중학교의 전신인 전라공업기술학교에 목공과가 생겨 많은 기능공들을 양성하였다.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남원목기
처음 기계를 도입할 당시에는 동력원인 전기가 없었다. 그래서 기계를 발로 밟아서 돌리기도 하고, 물레방아를 이용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부친은 목재를 목기화 하는 과정에 있어서 선질과 눈질(나무를 세우거나 눕히는 것) 방식, 목기 종류의 개발, 기술의 발전 등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후배들이 수월하게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초석을 닦아 놓았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장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전소되면서 박씨는 일찍부터 목기 제작 현장으로 뛰어들게 된다.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17세에 부친의 조수로 목기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기능을 전수받아 1973년에 현재의 삼산부락에 공방을 차렸으나 이를 생업 수단으로 삼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산업화의 바람으로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들이 쏟아져 나와 목기 운신의 폭을 더욱 좁게 하였다. 그런데다 산림보호법의 강화로 지리산에서 목재의 조달이 원활치 못하자 작심하고 공방을 정리하여 다른 삶을 모색하기도 했다.
1985년에 상경하여 하월곡동에서 횟집을 운영해 보기도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자신의 길은 목기 제작뿐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낙향하여 다시 목기를 깎기 시작했다. 그 동안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관광붐이 일고 있었다.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목기가 전국 사찰 주변 관광객들에게 선물용으로 인기를 끌면서 공방은 기반을 잡았고, 한때는 재미를 쏠쏠하게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제수용 목기는 제례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한 번 구입하면 재구입이 쉽지 않다. 또한 목기는 잘 깨지지 않고 부식이 되지 않아 수명이 반영구적이다. 여기에 관광지 주변의 선물 가게들도 수지가 맞지 않았던 탓인지 대부분 식당으로 전업하여 수요가 점차 줄어들었다.
생활 목기로의 변신
그러다 보니 목기 제작업자들끼리 덤핑 경쟁을 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값싼 중국산 목기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산은 국산의 반값에 불과한 가격이기도 했지만 아예 남원 목기로 둔갑하여 버젓이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목기 공장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포기하고 농사로 전업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박씨도 자연 술을 가까이 하게 되고, 한때는 술에 절어 살기도 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길은 이것뿐이라는 신념으로 고난을 참고 견뎌냈다.
“장인 정신이란 돈을 목적으로 하는 데서는 절대 형성될 수가 없어. 무엇보다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끼고, 미쳐야 돼. 그리고 선대의 장인들을 따라가겠다는 집념도 있어야 하고. 이런 정신 상태로 우리 전통은 맥을 이어온 거야.”
남원 목기 천년의 역사는 이러한 바탕으로 이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문화는 곧 역사이고 전통이었다. 그러나 전통 문화도 현대와의 접목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의 기호에 맞게 변신하지 않으면 맥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원 목기도 점차 변신을 시도했다. 그 동안의 제기 중심에서 탈피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할 수 있는 생활용품에 착안한 것이다. 요즘은 생활목기의 종류가 밥상, 밥통, 쟁반, 찬합, 술병, 컵, 찻잔, 골호(骨壺: 시신 화장 가루를 담는 그릇) 등 대략 20여 가지에 이른다.
생활 목기들은 제기에 비해 공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자연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웰빙 바람이 불어 자연친화적인 제품을 선호하는 세태인데다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지면서 목공예로 만들어진 생활용품들을 찾기 시작해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다.
목기의 생명은 재질과 건조
목기 제작에 쓰이는 원목은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노각나무, 괴목, 버드나무, 들미나무, 야사보시(일제시대 일본에서 수입) 등이다. 원목 채취는 낙엽이 진 11월 이후가 가장 적기다. 이 중 노각나무와 괴목, 은행나무 등은 고급 목재에 속하며, 주로 오리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사용된다.
오리나무는 1,000m 이상 되는 산의 중턱쯤 응달이 진 곳에서 자생한다. 가벼워서 운반하기가 쉽고, 목질이 연하여 작업하기가 편리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가장 널리 자재로 사용되었다. 옻칠 작업 후 색상도 좋다. 바루, 제기, 상(床) 등에 많이 사용된다.
물푸레나무는 600m 이상의 너들겅(돌이 많은 골짜기)에서 자생하며 재질이 단단하고 결이 곧아 야구 배트 제작에 많이 사용된다. 제기 외에 줄무늬가 아름다워 생활목기 등으로도 적합하다.
먼저 이 나무들을 5~6개월 이상 자연 상태에서 건조시킨다. 목기는 좋은 재질과 건조가 생명이기 때문에 적정 수준까지 충분히 건조시켜야 한다. 둘째 공정은 이러한 원목을 용도에 알맞은 크기와 길이로 절단하는데 이 과정을 절동이라고도 한다. 절단 후에는 옆면고르기라 하여 나무의 불거진 곳을 다듬어 면을 잡는데, 원래는 자귀를 사용해 손으로 돌려가면서 했으나 기계를 사용한 후로 정확성과 능률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공정은 초갈이, 또는 초벌깎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절단된 원목을 끌칼을 사용하여 용기 구조에 맞게 1차적으로 외형을 깎는 것을 말한다. 과정이 끝나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5개월 정도 건조시킨다. 이때 건조가 잘 되지 못하면 표면에 틈이 생기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골고루 건조시켜야 한다.
넷째 공정은 재갈이 또는 재벌 깎기라는 것으로, 칠 공정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건조가 끝난 초갈이 용기의 고르지 않은 면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용기를 백기(白器), 또는 백골(白骨)이라고 한다.
수명과 멋을 부여하는 옻칠
다섯째 공정은 칠하기이다. 칠을 하는 것은 습기와 벌레로부터 목기를 보호하여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초벌칠을 한 후 흠집을 잡고, 사포질로 면을 부드럽게 한 뒤 칠하고 말리는 과정이 5~6회 계속된 후에 목기가 완성된다.
칠은 자연산인 옻칠과 공산품인 카슈칠로 나누어지는데, 자연산이 가격은 훨씬 비싸지만 침투력이 강해 목기 속으로 스며들어 끓는 물에도 벗겨지지 않는다. 또한 불에 타지도 않고 살균작용이 있어 부식을 방지한다. 나무의 결도 그대로 살릴 수 있다. 처음 칠할 때는 새까만 색이지만 2~3년 후에는 저절로 피어나서 발그레해진다(發火). 요즈음에는 정제칠법이 개발되어 목재 무늬의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살리는 방식도 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장인들은 비싸더라도 반드시 옻칠을 사용한다.
이렇게 목기 제품을 완성하는 데는 보통 6개월 정도 소요되지만 원목을 말리는 과정까지 더하면 1년 정도가 걸린다. 옻액은 보통 낙엽이 지는 11월에서 다음 해 3월까지 채취한다.
우리 문화와 얼의 고양 차원에서 발전시켜야
남원시에서는 일찍부터 목기제작을 특화사업으로 지정하여 지원을 해왔다. 국내 생산량의 80%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그 동안 남원공예품경진대회 등 각종 경진대회에서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에는 남원 시청으로부터 명장(明匠)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또한 ‘한 벌의 반상기’ 등 4회의 의장 출원 기록도 있다.
그러나 박씨는 이제 나이 든 목기 장인으로 혼자만 남았다며 씁쓰레한다. 그동안 세상을 뜨거나, 살아 있는 동료들도 사양화 추세를 견디지 못하고 농사 등으로 전업했기 때문이다.
목기는 도기(陶器), 유기(鍮器) 등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인간의 생활용기로 사용되어졌다. 우리 선조들은 이 목기의 실용성에 예능을 가미하여 목공예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따라서 목기의 전통을 잇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선조들에 대한 예의이며, 우리의 문화와 얼을 고양시키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박씨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있다.
“지금도 남원시에서는 여러 노력들을 하고 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다 확실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목기의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세계적인 상품으로 키운 전주 한지(韓紙)가 있다. 고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현대화된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기술을 육성시켜야 한다. 그리고 일본이나 서구 등의 소비자들의 기호도 열심히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목기도 충분히 세계적인 상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처럼 앉아서 수작업으로 다듬는 과정이나 옻칠 기법 등을 흉내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박씨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남원 목기가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으며 자식들과 함께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교한 우리 목공예와 옻칠 기능이 현대적 취향에 맞게 다시 태어나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3대째 남원 목기 제작의 맥을 잇고 있는 박수태 씨
재벌깎기가 끝나 건조 중인 백기(白器)
박씨에 의해 제작된 바루와 생활 용구들
박씨에 의해 제작된 제기(祭器)
옻칠이 끝난 목기를 살펴보고 있는 박씨
남원 목기의 원천, 지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