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목표는 오체투주
고후 12:6-1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내 인생의 목표는 오체투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오체투주(五體投主)라고 하는 말은 불교의 용어로부터 제가 조금 변경을 시킨 말입니다. 불교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던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예법입니다. 절하는 방법입니다.
삼보에 절한다 할 때 그 절하는 방식인데 영화같은 데서 보셨을 것입니다.
절에 가면 불자들이 부처의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마를 땅에 댑니다. 팔을 땅에 대고 손을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 무릎을 땅에 붙이고 엉덩이를 낮춰 납작 엎드립니다.
그러니까 이마와 양팔과 양 무릎이 땅에 닿습니다. 이렇게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습니다. 그리고 손을 부처님의 발을 받들 듯이 듭니다.
이것을 예법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주된 목적이 교만에 빠지기 쉬운 중생을 이끌기 위한 방법입니다. 교만해서 저지른 잘못을 참회할 수 있도록 이런 동작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바꿔 본 것입니다.
五體投地, 즉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던진다는 것을 五體投主, 즉 몸의 다섯 부분을 주님께 던진다는 것으로 바꾸어 본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와 연합한다는 것은 이마에 가시 면류관을 씁니다. 손가락만한 가시에 딱딱한 나무로 만든 것을 머리에 눌러 씌웁니다. 그리고 양손이 못 박히고 양발이 못 박혀서 십자가에 매달려 공중에 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나의 다섯 부분을 주님께 던진다는 것입니다. 五體投地가 아니라 五體投主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손.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발. 내 마음대로 가고 싶었던 모든 인생의 역정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는 것,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미덕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지금 불교에서도 겸손을 가르치기 위하여 五體投地의 예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꼭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문학인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열쇠며, 교만은 지옥의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이 높아지자마자 지옥이 펼쳐지고 마음이 낮아지지 마자 천국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이 쓴 ‘그꽃’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마음이 높아지고 높은 자리를 향해 인생이 가고 있는 동안에 그 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낮은 곳을 향해 내려올 때에 비로소 그꽃이 눈에 보인 것입니다.
그 꽃은 바로 우리 인생의 아름다움입니다. 인생의 행복입니다.
그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겸손의 미덕, 겸손의 유익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五體投地한다고 다시 말해서 이마를 땅에 대고, 양팔을 땅에 대고, 양 무릎을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부처님의 발을 받들듯이 손을 들어 올린다고 겸손이 체질이 됩니까? 아니지요.
앙드레 지드에게 묻습니다. “겸손은 천국을 여는 열쇠고 교만은 지옥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면 앙드레 지드 당신은 지옥을 살았습니까? 천국을 살았습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웬만큼 철이 들면 알기는 압니다. 겸손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다 압니다. 사람관계에서도 겸손한 사람에게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예능인들을 봐도 그래도 사회하는 사람을 보면 겸손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여러 방송국에 나오고 장수하는 것을 봅니다. 이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체질적으로 그저 마음을 낮추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 겸손하다고 그럽니다. 그 사람이 마음이 높아지고 싶은 욕망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낮추면서 교만과 불굴의 투지로 싸우면서 겸손해지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체질적으로 태생적으로 마음이 좀 낮고 욕심이 좀 덜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대기를 원치 않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좀 겸손하게 온유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기독교가 말하는 겸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겸손은 어디까지 낮추어야 됩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겸손은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겸손의 가르침은 항상 정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직이란 정직하게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제 아들이 저한테 그럽니다. 아빠 머리가 멋있대요. 머리를 감고 나서 드라이로 말린 다음에 빗으로 올백으로 넘기고 정 가운데 가르마를 탑니다. 이게 멋있다고 그럽니다. 제 머리가 멋있다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철없는 아이니까 그 아이 앞에서는 내 모습이 때로는 멋있는 모습이 있는 부분입니다.
아내 앞에서도 또 이 세상 누구들 앞에서도 인정받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내 모습은? 다 아닙니다.
아이가 내 헤어스타일이 멋있다고 해서 진짜 내가 멋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내 모습을 찾아야 됩니다.
이게 바로 정직이요 겸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五體投主의 결단과 믿음과 선언없이는 우리는 정직할 수도 없고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모습 그게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되시는, 이 우주의 임금되시는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습니까?
하도 내 모습을 찾질 못하니까 내 모습 아려주시느라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五體投主의 믿음입니다.
내 머리의 가시 면류관, 손에 못 박히고 그리고 발에 못 박혀 있는 그래서 땅에서 들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바로 자식 앞에 서 있는 진짜 내 모습인 것입니다.
자식을 앞두고 있는 하나님 앞에 있는 내 모습, 사업을 앞두고 있는 하나님 앞에 있는 내 모습, 가정을 앞두고 있는 하나님 앞에 있는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닥칠 때 모든 인생의 순간에 五體投主의 마음이 사라지면 우리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五體投主를 향해 나갈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오늘 본문처럼 약한 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자랑은 대부분 공감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장동건씨와 고소영씨가 결혼을 했습니다. 나는 장동건씨처럼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도 장동건씨가 부럽습니다. 장동건씨가 고소영씨와 결혼한 것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왜 자랑거리가 되고 왜 자랑이 먹힙까? 세상의 뭇 남성들이 고소영씨처럼 아름답게 생긴 여인과 부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고소영씨와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는다면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동서네 딸이 잘나가는 의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내 마음에 시기가 일어납니다. 시기가 일어난다는 것은 자랑이 먹힌다는 것입우리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의사와 결혼하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 인생의 목표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인생의 목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없을까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의사라고 하면 인정해주지 않습니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살 수 없을까 그런 인생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혹 삼년 만에 싸워서 이혼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불행할 수도 있지만 의사와 결혼한다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의사와 결혼하고 나면 그 목표를 향해 진일보 한 걸음을 떼는 것이니까 자랑거리가 되고 자랑거리로 먹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자기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시는 원래 말뚝으로 번역이 되는데 몸네 말뚝을 박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거절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현재 너에게 부어준 은혜가 족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깨닫습니다. 이 약점을 자랑하자...
사도바울이 약점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몸에 지병이 있습니다. 말뚝이 박힌 것처럼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바울의 이 자랑을 아무도 자랑으로 받아들이질 않ㅅ브니다. 예를 들어 장동건씨가 고소영씨와 결혼해서 자랑한다 그러면 다 부러워합니다. 청년들은 고소영씨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그런 꿈을 꿀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10절)을 자랑하는 그 자랑을 자랑하지를 않습니다. 누가 이 자랑에 공감을 합니까?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도 사도바울이 자랑하는 것을 함께 공감하며 나도 그런 자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약한 것을 자랑하는 사도바울에게서 전도받은 우리들, 그에게서 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의 자랑은 늘 장동건씨가 고소영씨와 결혼한 것 아니면 동서가 의사로 사위로 삼은 일들, 하버드대학 들어간 것 이런 것들을 부러워하고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지요. 돈 많이 벌면 자랑하고 싶습니다.
이게 예수 믿는 자들입니까?
왜 이렇게 사도바울이 말한 자랑이 우리에게 먹혀들어오질 않는 걸까요?
왜 약한 점을 자랑하는 자랑의 효과가 나한테는 전무한 것일까요?
내가 원하지 않는 목표를 향하여 한 걸음 다가서는 자랑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너나 잘해라 식으로 자랑거리가 느껴지질 않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당신이나 약한 것들을 자랑하세요. 궁핍을 자랑하고 능욕을 자랑하세요. 나는 명예를 자랑하고 싶습니다.”솔직히 이게 우리의 속마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바울의 인생의 목표는 생활의 안정이나 다른 사람이 볼 때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과 궁핍과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어느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의 모든 서신을 관통하는 얘기는 우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과 연합해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또 연합할 수 있으니까요. 五體投主의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五體投主의 인생의 목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과 일체를 원하는, 즉 내 머리를 던지고 내 양팔을 던지고 양발을 던져서 못 박히고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기를 원해서 五體投主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데 왜 약한 것들을 자랑합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리 중에 가장 약한 자리요 가장 굴욕의 자리고 가장 고통의 자리입니다. 이 보다 더 낮은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낮은 자리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낮은 자리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을 때 약한 것들이 나타날 때 자랑하는 것입니다. 진일보하고 있으니까요.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로 다가가기 위한 진일보.
전도하다가 굴욕을 당합니다. 그러면 기뻐합니다. 왜요? 주님의 십자가가에 더 다가가고 있으니까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五體投主.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죽음에 완전히 연합해서 진짜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버리는, 이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의 사랑과 애정을 호소하고 이끌어내려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내 마음의 관심을 유출해서 밀반입해내려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모두 죽어버립니다.
세상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그리고 세상 일에 손 대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리고 발이 못 박혀서 내 인생의 여정을 내가 계획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五體投主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약한 것들을 자랑합니다.
여러분도 가장 낮은 자리요 능욕의 자리요 비참한 그 자리가 진짜 내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내 모습을 찾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이 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자꾸 우리의 모습을 벗겨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비전을 가져라.
대통령이 되어서 이 나라를 잘 살게 하는 그런 비전을 갖고, 오대양 육대주를을 돌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대선지자가 될 것을 비전으로 꿈을 꿉니다. 십만 명의 교인이 와서 울고불고 난리치며 은혜를 받는 목회 현장의 꿈을 꿉니다.
사도바울이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네가 약해야 내가 내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면 내가 약한 척 해야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니까 쉽게 말하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꼬실 때 남자다운 모습으로 강하게도 나타날 수도 있지만 전략적으로 모성애를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주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약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를 하면 곤란합니다.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게 전략이 아닙니다. 만약에 주님의 능력을 끌어들여서 내가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약한 것들을 자랑했다면 사도바울은 여전히 자고한 것입니다. 자기의 강한 모습을 꿈꾸고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내가 강한 모습으로 주님이 받쳐주는 힘에 의해서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지. 내가 언젠가는 10만 명 목회하는 목사로서 등장할 수 있겠지.
이게 자고한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마땅한 모습이 진짜 모습입니다. 왜 자꾸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십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면 끝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하늘에서 능력으로 내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는 깜짝 놀랄 수 있고 나는 그렇게 하면 안 좋겠다 하는 방식대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능력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이 세상에서 일을 하시는데, 나는 五體投主의 이상을 이루고 있는 동안에 五體投主의 목표에 도달하고 있는 동안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나시되 인간적으로 바라고 있는 모습대로 나타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로마감옥에 갇힙니까? 사도바울은 로마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내가 감옥에 갇혀 있어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2년이 지나고 나니까 시위대에게 전도를 하고 황제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심장부에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우리는 생각하기에 쇠사슬을 끊고 뛰쳐나와서 로마에서 한번 설교를 했더니 제국 전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경배를 했더라. 이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선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있었는데도 빌립보서에 나타나듯이 ‘기뻐하고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이렇게 할 수 있는 자체가 능력입니다.
五體投主의 인생의 목표를 갖습니다. 그리고 매진합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바울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약점이 들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지적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속마음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처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이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인정을 받는군요. ’
이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매달려 죽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약한 것들을 자랑합니다. 사도바울이 자랑하는 것들이 부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시 겁이 나지요? 말뚝 같은 것이 몸에 박혀서 고생스럽게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된다. 이것을 부러워하기가 힘이 듭니다.
역시 주님을 믿으면 다른 종교에서 처럼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좀더 돈이 잘 벌리고 좀더 건강하고 이러길 원하는데...
여러분,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여러분 병 걸리면 괴로움 다 아시고, 여러분 돈 없으면 그 어려움 다 아십니다. 그분의 사랑에 맡겨 드리세요. 제가 자꾸 부정적으로 고통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 속에서 자꾸 십자가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죄의 욕망에 제동을 거는 것이지, 주님이 무슨 성격이 변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혀야 기쁜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점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이상은 내 모습이 정직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모습이니까 五體投主, 즉 내 몸의 다섯 지체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 주님이 능력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을 때 그리고 주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드러난다고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보질 못하니까 저 사람 능력있다고 얘기할 때 우리가 까딱 잘못하면 내가 진짜 그런 줄 알고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끊임없이 五體投主를 향해 날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번제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을 정도로 비참한 사람이라고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진짜 내 모습보다는 과대평가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능력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선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에 五體投主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계속해서 내 인생의 목표를 날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한다. 몸의 다섯 지체가 주님과 연합하기를 원하다. 손과 발이 못 박히고 이마에 가시 면류관을 써서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싶다. 주님과 연합하고 싶다.
이러한 기도와 간구와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갑자기 내 삶의 환경이 은혜의 바다가 됩니다. 블루오션입니다.
레드오션. 내가 이마를 쥐어 짜고 내가 손을 대고 내가 인생의 여정을 다 계획해나가야 되는 붉은 피의 바다. 벗어나서 블루오션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야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은혜는 쌓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담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낮게 낮게 자리 잡으면 은혜가 깊이 깊이 담깁니다.
내 마음이 높으면 은혜는 담길 수가 없습니다.
서해바다와 동해바다를 비교해보시면 압니다.
서해바다는 1km를 걸어나가도 바닷물의 깊이가 30cm예요. 발목에 찹니다. 동해바다는 몇 걸음 가면 푹 빠집니다. 그렇다고 서해바다 수면과 동해바다 수면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관령을 끼고 있지마는 한반도를 끼고 있지마는 이 수면은 똑 같습니다.
문제는 깊이에 문제입니다. 바닥이 낮으면 물이 많이 담기고 바닥이 높으면 물이 담기질 않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십자가 五體投主를 통해서 몸의 다섯 지체를 십자가에 달린 주님에게 던지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날마다 살아나갈 때에 우리가 자꾸 낮아지니까 은혜가 자꾸 자꾸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쳐난다고 하니까 내가 마음을 높이 갖고 있어도 그 위에 자꾸 은혜가 넘쳐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점점 낮아져야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은혜가 많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가 많습니까? 똑같습니다. 바다 수면과도 같습니다.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바다 수면처럼 똑같이 임합니다. 문제는 누가 더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가까이 도달하느냐에 있습니다. 진짜 내 마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밖에 없을 만큼 처절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로 가까이 실감하며 다가가느냐에 따라서 은혜의 양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는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 쌓이지 않는다. 오직 담길 뿐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깊이 받기 위해서는 은혜를 달라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지금도 계속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닷물 중에 가장 깊은 해구(海丘), 그렇게 낮으면 은혜가 엄청 많아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많아지면 마음이 평강이 임하고 감사가 임하고 감동과 벅참이 있습니다. 이게 은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비전이 이루어질 것같이 느껴지는 것 이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부흥강사님들이 와서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이렇게 하면 내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그때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다 거짓말이고 사기치는 말입니다.
은혜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물 배후에 다 하나님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이 만져지듯이 실감나는 게 은혜이지, 내 인생의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게 은혜가 아닙니다.
두 번째 원리, 마중물의 원리.
다음 순간의 은혜, 내일의 은혜가 내게 임하려면, 그 은혜가 내가 느껴질 수 있으려면 지금 오늘의 은혜를 느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은혜는 계속 어어져서 나올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마중물이란 펌프에 물이 빠졌을 때 바가지로 물을 붓고 펌프 손잡이를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올라오는데 그 바가지의 물을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지금 이 상황에서 사업이 망했습니까?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면 사업이 망한 것이 왜 은혜인지 느끼게 됩니다.
자식이 대학에 떨어졌습니까? 십자가의 자리싸지 내려가서 보면 왜 자식이 대학에 떨어진 것이 은혜인지 보입니다.
내려갈 때 본 그 꽃,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습니다.
내려갈 때 보입니다. 다 은혜입니다.
병이 낫습니까? 십자가의 자리에 五體投主로 주님과 연합해서 내 본래의 자리를 찾고나면 왜 병이 난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육체에 말뚝이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五體投主의 인생의 목표를 통해 날마다 몸의 다섯 지체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께 던져서 주님과 연합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사가 OK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겸손의 미덕을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어떤 수련의 방법을 통해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복음의 능력 안에만 우리의 낮아짐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에게 몸의 다섯 지체를 던지는 五體投主의 삶을 날마다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내 인생에 편하게 내려오셔서 활동하시며 능력을 나타내시고 은혜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는 복지의 삶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