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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샘이 요즘 녹색인문학 듣고 계신거 다들 알고 계시죠?
녹색연합에서 보내신 녹취록을 메일로 보내주셨어요
2014 성찰하고 상상하는 녹색인문학 3강 – 박성준 님 강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린시절
5년 전 2월 25일. 그 날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네, 아시는 분이 계시는 군요. 2월 25일은 대통령취임식이 있던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길담서원이 통인동에서 문은 연 날이기도 해요. 그날, 눈이 폭설이 내렸어요. 신문에선 청와대에 입성하는 새 대통령을 축하하는 눈이라 했지만, 우리는 길담서원을 축하하는 날이라고 생각했어요. 경복궁 옆, 세종대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이 동네, 청와대 근처인 이 동네가 너무 가벼워지는 것 같아 길담서원은 종이를 움직이지 않게 눌러놓는 문진처럼 이 거리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곳이라고 여기고 길담서원의 문을 열었어요. 돌아오는 5년째엔 더 기쁘게 길담서원 여는날을 축하하리라 했는데, 올해, 그렇게 되진 못했지요.
저는 일제시대에 태어났어요. 서울로 솔가한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 있는 남정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곳을 다시 갔더니 너무 작은 학교더라구요. 저희 부모님은 일제시대 때 옥살이를 하시기도 했던 분인데, 해방 후 미군정 3년 동안 저희 집에선 종종 무장한 미군들이 와 가택수색을 하고 부모님은 연행되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어요. 부모님이 연행되고 나면 어린 아이들끼리만 며칠씩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런 생활이 계속되자 어렸던 저하고 제 동생하고 떼어서 고향에, 경남 통영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내려 보냈어요. 그것이 제가 부모님과 형 누나 식구들을 본 마지막이었어요. 전쟁 통에 서울 식구들은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저와 제 동생이 의지할 데가 없게 되었어요. 저는 5학년 때 한국전쟁 중인데 수업 중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어요. 의식을 잃었죠, 눈을 뜨니까 여선생님들이 저에게 도시락에 물을 부어 밥을 말아서 제 집에 떠넣어 주시더라구요. 곡기가 들어가니까 눈을 뜬 거죠. 그 이후로 선생님들이 십시일반으로, 아주 어려울 땐데 식량을 조금씩 모아서, 이건 성준이 몫이다 떼 주었어요. 학교에 일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식량을 맡겨놓고 거기서 밥을 얻어먹으며 졸업을 했어요.
그 후에 학교에서 심부름하는 아이, 급사가 되었어요. 학교에서 밥을 얻어먹고. 그러다가 그 학교 건너편에 아주 큰 여자중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거기 오면 A, B, C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성준이 그리 갈래 하길래 네 해서 그리 간 거예요. 그 학교에서도 심부름하는 아이가 되었어요. 저는 숙직실에서 지냈는데, 숙직실 옆이 음악실이었어요. 제가 음악선생님을 좋아했어요. 대학생이 되어서 그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윤 선생님이었는데, 제 기억, 마음속에 있는 모습이 또 아니더라구요. (웃음)아무튼 수업 시작 8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여학생 5~6명이 돌아가며 피아노 연습을 했어요. 서 있는 피아노 한 대 있었어요. 거기서 피아노 연습곡을 들으면서 새벽에 항상 음악을 들었어요. 그 영향으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똑같은 피아노가 지금 길담서원에 있어요. 일생동안 피아노를 갖고 싶었는데, 최근에 갖게 되었어요. 독일에서 피아노 공부한 분이 지나가다 피아노가 있네 하며 들러 피아노를 만지신 게 계기가 되어 길담음악회가 시작되었어요. 길담 음악회는 유명해요. 매니아가 형성되어 공지가 탁 올라가면 잠깐 사이에 객석이 동이 나요. 인연이 깊은 그 학교에 어느 날 도난 사고가 있었어요. 교장실에 있는 기물을 다 가져갔어요. 학교가 운동을 잘해서 우승컵들이 진열장에 다 있었는데 그걸 몽땅 가져갔어요. 돈도 안 될텐데. 그 다음날 경찰서에서 절 데려갔어요. 말하자면 일생에 처음으로 취조라는 걸 받았어요. 그 도난사고와 저를 연관시키는 투의 질문을 듣고 제가 너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나를 의심하다니 하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복받치는 설움에, 설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죠. ‘와앙’ 하고 울어버렸어요. 순사들은 뻥 쪄버린 거죠. 애가 왕 하고 우니까 감당을 못하는 거죠. 어깨 툭툭 치면서 울지마 하면서 가라고 하더라구요.
경찰서 나왔는데 그 학교로 돌아가게 되지 않아요. 그래서 지나가는 트럭을 막 달려가서 올라 탔어요. 그렇게 간 곳이 어느 집이었는데, 그 집 애들은 외국에서 원조물자로 온 헌옷들 청바지 이런 것들 입었어요. 그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애들은 그 집 애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청바지를 외면하고 싶었어요. 그 때 생각이 나서, 고아원에 있었던 거예요. 저는 어린 시절에 제 동생하고 고아원에서 살았어요. 그게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고아원 아이들은 학교를 무상으로 다녔어요. 제가 여러분과 이렇게 만난 건 그 도난사고 때문이었어요. 그 도난사고가 아니었다면, 폄하하는 게 아니라 상당히 우수한 사람이 되어 지방의 면서기 같은 거 하고 있었을 거예요.(웃음)
공부의 기술, 그러나 화근이 된 기술
저는 책이 없었어요. 책을 일주일이나 열흘 책가진 선배나 친구들에게 빌려서 봐요. 고아원은 저녁에 다 소등해요. 불이 켜진 곳은 딱 한 곳. 화장실에. 옛날식 화장실 계단에 박스같은 거 갖다 놓고 그 책을 다 베껴 적었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가 드리는 이 가운데 공부 이야기가 조금 있는데, 학교에서 진도가 나가기 전에 저는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에 항상 수업보다 조금 앞서 나가있었어요. 공책이 없으니까 베껴 적을 수가 없어 제일 값싼 종이, 옛날에는 한국전쟁 직후라 똥종이라고 있었어요. 제가 감옥에 가니까, 제가 감옥살이 한 거 여러분 아시는지요.? 15년형을 받고 13년 반 대전교도소에 살았고, 미결수일땐 지금은 역사자료관이 된 서대문형무소에 있었어요. 처음에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다 당하고 그랬어요. 자기들이 원하는 거, 자기들이 적고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하고, 서대문형무소에 갔어요. 바로 엊그제에 역사기행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서대문 형무소 가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서원지기소년도 가신다 해서 사람들 모집해 갔어요. 가보니, 다 허물고 몇동을 남겼는데, 들어가면 바로 통하는 그 집, 보안과에서 가장 감시하기 좋은 곳, 9사인데, 거기 6방, 작은 독방 거기에 제가 있었어요. 빨리 다음 주제로 넘어가야 하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말똥말똥하게 보고 있으니,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조금 어려운데요. 조금 더 할께요. (웃음)
종이가 없으니 가장 값 싼 종이를 사서 절반 접고 자르고 절반 접고 자르고 해서 꿰매서 공책을 만들어, 책을 빌린 날짜에 맞춰 밤을 새워가며 베껴 적었어요. 그런데 볼펜이 없잖아요. 잉크병에 펜촉으로 찍어 쓰는데 저는 그런 게 없으니까 아이들이 쓰다가 뭉툭해서 버린 펜을 대꼬치 같은 데에 칭칭 묶어서 썼어요. 잉크를 늘 갖고 다녔는데 그래서 옷의 윗주머니는 잉크가 새서 늘 시퍼랬어요. 모든 공부를 제가 그렇게 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어요. 제가 어떤 텍스트가 있으면 쉽게 노트에 옮겨 적는 기술이 탁월한 기술이 있어요. 그게 화근이 되어 제가 재판을 받을 때 박성준 이놈은 웬 이렇게 많은 문헌을 노트를 만들어 증거품으로 이렇게 갖다 놓고 재판을 하느냐, 이 놈은 보균자다. 빨리 내보내면 균을 퍼뜨리는 자다며 검사가 무기징역을 내렸어요. 1심에서 15년을 받고 2심 3심도 다 들었다 놔 버렸어요. 제가 베낀 그 책, 지금 길담서원에서 다 파는 책이예요.
청바지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은 마음의 상처 같은 게 다 아물었어요. 상처를 트라우마라 부르대요. 트라우마를 제가 언제까지 갖고 살았냐면 육십이 될 때까지였어요. 제가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건ㅅ이 몇가지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제가 고아원에서 살았다는 거, 지금도 마음껏 이야기해요. 청바지도 지금은 즐겁게 입어요. 예전엔 아픈 옷이예요. 사람이 가진 상처라는 게 쉽게 낫지 않더라구요.
웃을 줄 아는 인간이 되기 위해
제가 이십대 후반에 감옥에 들어가서 삼십대는 완전히 감옥에서 살고 사십대에 나왔는데, 세상이 너무 잘 살게 되었어요. 6.70년대 경제발전이 되어 거리를 걸으면 빌딩이 너무 높아 쳐다보다 핑 돌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사회에 적응이 안되요. 십 몇 년동안 감옥 살다 나오니, 마음을 못 붙였어요. 15년이 끝난 후 다시 15년 자격정지를 당하고, 30년이 끝날 무렵에 저에게 복수여권이 비로소 주어졌어요. 그때도 한국사회에 마음을 못 붙이고 있어서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생활하다 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게 불과 14년 전이예요. 그때 한국에 돌아올 때 이번에는 한국에 뿌리를 내려보자, 정을 좀 붙여보자 결심을 했어요. 선물을 마련해서 가자했어요. 그 선물이라는 게 ‘움직이는 학교’라는 아이디어였어요. 둘러앉아 하는 모임을 했지요. 그리고 성공회대에서 평화학을 가르치고, 박원순 시장이 아름다운 가게를 시작할 때 제가 대표로 참여해서 한 5~6년 했었고, 비폭력평화물결이라는 평화단체를 만들어 한강하구에 배 띠우는 등의 일을 했었죠. 그렇게 살았는데, 제가 65세가 되었을 무렵 어느 날 동에서 우편이 날아왔어요. 봉투를 뜯어보니 뭐라고 씌어 있냐하면 정부가 노인에게 교통비를 지급하니 수령하시오 하고 쓰여 있어요. 만 65세 노인이니 경로우대를 받을 수 있다, 이걸 가져가면 표를 주지요. 요즘은 카드를 주는데, 동에서 주는 그 표를 갖고 지하철 매표구에 내밀며 표를 달라하면 꼭 신분증을 확인해요. 다른 분들은 그냥 주는데, 그래서 뒤에서 기다리는 분께 미안합니다 하고 말하면 그 분이 귓속말로 “그때가 좋을 때입니다” 하곤 했어요. 한참을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가 좋았던 거죠.
바로 그때 65세가 되었을 때 정부가 노인에게 뭘 주고 하는 그걸 보고 그 ‘노인’이라는 말이 저에게 충격이었어요. 뭐, 내가 노인? 68세때 제가 길담서원을 열었는데, 그 사이 동안은 제가 마음 고생을 했어요. 따지고 보면 제 인생에서 쨍하고 볕이 났던 햇수는 몇 해가 안돼요. 예순 살 때까지는 제가 싸안고 있던 상처, 누구에게도 나의 깊은 내막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상처를 가진 사람은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말, 표정이 모든 것이 다 껍데기예요. 안에는 다른 것이 하나 있어요.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 아는. 이런 삶을 사는 게 상처를 가진 사람의 삶이예요. 내가 그랬거든요. 딱 한마디로 말하면 저는 예순 살이 될 때까지, 저는 한 번도 진정으로 웃어보지 않았어요. 웃은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 웃는다는 건요. 정말 복입니다. 복. 지금 저는 웃을 줄 아는 인간이에요. 아, 웃을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나도 그런데, 나도 진짜 웃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그런 분이 계시면 꼭 웃음을 배우십시오. 웃음을 배워야 해요. 인간은 웃을 수 있도록 태어난 존재예요. 어떤 조건 때문에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웃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은, 우리는 웃을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도와야 해요. 아무튼 저는 이런 것들이 일차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아닌가, 왜 인문학을 배우는가, 인문학을 배우면 뭐가 좋은데, 웃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웃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아, 정말 기가 막혀요. 내가 예순살이 지나고 나서 큰 거울 앞을 지나가는데, 어, 저게 누구야? 배시시 웃고 있더라고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예요. 어, 너도 이제 웃을 수 있게 됐구나 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제가 인간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같은 패턴이 반복되지 않도록
2000년에 제가 돌아왔는데, 그 다음에 9.11 그리고 이라크 침공이 있었죠. 그 무렵에 저에게 또한번의 위기가 왔어요. 그것은 죽음의 문제였어요. 지금은 그 문제가 저에게서 많이 정리가 되었어요. 이번에 길담서원 옥인동으로 이사 오면서 5년 계약을 했어요. 그래서 5년 계약을 하는데, 그 5년이라는 숫자가 저에게 딱 다가오는 거예요. 아, 내게 남은 시간이 5년이라는 뜻이구나. 5년 후에는 내가 만 80이 되는데. 80이 되었는데, 내가 여기서 얼쩡얼쩡 하고 있으면 참 꼴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길담에 있고 싶어도 떠나 줘야 하겠구나. 제가 5년이라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제가 80이 될 즈음엔 “그 꼰대 아직 거기있어”라는 말은 적어도 안 들어야죠.
여러분이 저에게 준 질문 가운데 공부해서 뭐 할건데, 먹고살기 바쁜데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공부합니까 질문도 있어요. 다 맞는 말인데,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기 위해, 활짝 웃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입장이예요.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가 타이타닉호인가 알아야 하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어림짐작으론 안돼요. 우리가 이번에 겪은 이 참사만 하더라도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건데, 난 또는 우리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있는데, 아주 나쁜 방향으로 정리해 버릴 수 있거든요.
어떤 친구가 있는데, 평소엔 뭐, 제 맘에 드는 이야길 안 하던 친구인데,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어요. 뭐냐면 패턴이 똑같다. 노무현 죽었 때.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바꾸겠습니다. 똑같은 패턴,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그러더라구요. 그 친구가 이번엔 똑부러진 말을 하는구나 했어요. 우리가 그렇게 안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뭐냐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시간이 안 되어도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 있어요. 그게 바로 인문학이라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조금 환경을 만들고, 시간을 내고, 문화적인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길담서원도 그렇고 여기도 또다른 의미의 하나의 학교가 아닙니까, 길담서원도 전통적인 서원을 대적으로 꽃피워보자는 꿈이 있어요. 넓은 의미의 학교인거죠. 지금 정규학교가 아닌 학교를 만현드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여기저기 도처에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요. 시행착오도 하고 있구요. 그 귀퉁이에 조그만 아주 작은 공간이 길담서원이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다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 인연 때문에 제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구요. 크게 보면 이게 다 진정한 배움, 진정한 가르침의 길인거죠.
새로운 공부를 발명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이렇게 생각해요. 배이름도 부르기 싫지만 아무튼 세월호 참사,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 사람들이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그 이후에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 문제 지금 일본도 잘 안 되고 있잖아요. 하물며 우리는. 그 규모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지만, 사실 우리 앞에 다가올 게 뭔지 잘 모르죠.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공부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제는 이 공부라는 이름을 가진게 너무 많아서 옥석이 구분이 안되죠. 사교육도 많고, 수많은 학교도 있고, 다 공부죠. 근데 진정한 공부가 뭔지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정한 학교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라는 것은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란, 학교란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지금은 우리가 발명해야 한다, 발견이 아니라, 발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견의 차원이 아니라 발명의 차원입니다. 발견하려 하면 아마도 똑같은 것을 반복할 겁니다. 발명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몫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길담서원이 아주 작은 한 부분이지만 제 몫을 감당하려 해요. 이미 5년에서 5개월이 빠르게 흘러가 있지만, 저는 이 시간에서 제 몫을 감당하려 하고 있어요.
길을 찾고 사람은 길을 찾는 마음으로 힘이 납니다.
길담서원에 놀러오세요. 오시면 좋은 게 있어요. 주차장공간이 있는데, 거길 야생초 꽃밭이 있어요. 그 꽃밭을 지나 들어오면 큰 통유리가 있고 큰 탁자가 있어요. 거기서 인왕산이 보여요. 저녁때가 되면 저는 인왕산에 걸려있는 해를 바라봐요. 머지않아 꼴깍 넘어가는 해. 저는 그 해 같은 시나리오을 갖고 있어요. 65세에서 68세 사이. 그 전엔 제가 뭔가를 좀 갖고 있어서, 꿀벌이 꿀을 모은 것을 나눠주고 싶은 것처럼 나눠줄 게 있었어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자기가 산 속에서 외롭게 고독을 즐기면서 꿀벌이 꿀을 모으듯 모은 지혜를 동무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독일어로 운트게엔. 아래로 내려온다, 하산, 하강한다고 했어요. 운트겐 이 단어가 니체사상에서 중요하다 해요. 저 자신도 운트게엔, 어떻게 운트게엔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인데, 해가 서산에 꼴깍 넘어가는 것, 밤마다 그대가 운트게엔 하듯이 해를 바라보면서 저가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거죠. 꽃이 다 피어오르고 졌을 때 그 자리에 열매가 딱 맺히는 순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65세에서 68세 무렵 저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꿀벌처럼 나눠 줄것이 있는 저였는데, 65세에서 68세가 되는 그 어간에 내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거, 내가 뭔가 해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의문이 들었어요. 완전히 헐벗은 자가 되었어요. 굉장히 힘든 상태가 되었어요. 그 때 제가 가진 모든 용기를 발휘해서 결정, 결심했어요. 다시 시작하자. 출발을 다시. 원점에 섰어요. 제가 소위 말하는 철학입문, 철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조금 전 니체를 인용하듯이, 제가 그전에 저의 사상, 신념.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었는데, 하나는 복음서 예수였고, 또 하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갔는데 맑스주의라는. 이 두가지에 대해서 완전히 자신을 완전히 상실했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출발점에 섰어요. 그리고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왔는데, 지금, 아직 답을 찾지 못했어요. 물음만 잔뜩. 물음만 많아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은 많이 가벼워졌어요. 많이 따뜻해졌어요. 왜냐하면 길 찾기를 하고 있으니까. 길을 찾고 있는 자는 찾고 있다는 마음 때문에 삶을 잘 지탱할 수 있어요. 그게 힘이 되줘요. 길을 찾는 힘으로 버텨낼 수 있어요. 오늘은 제가 답을 여러분에게 갖고 온 게 아니예요. 다만, 나는 이렇게 답을 찾고 있다는 것을 가져온 것 뿐입니다.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길담서원 열고 지금까지 우리 카페 보면 콩글리쉬 반이라고 있어요. 왜 잉글리쉬가 아니고 콩글리쉬인가, 그 이야긴 오늘 내가 들고 온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 책에 보면 나와 있어요. 이 책은 굉장한 책이예요. 예언자적인 책이예요. 특히 지금 우리의 상황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지금은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명명하고 해요. 침몰하는 배를 우리는 타고 있었던 거죠. 이 책의 부록에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가 있는데, 예리한 글입니다.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 영어란 나에게 무엇인가, 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이야길 하고 있어요. 아시아인은 아시아인의 영어를 해야 한다, 거기에 제가 붙인 이름이이 콩글리쉬 반이예요.
제가 콩글리쉬 반에서 만 6년, 7년째 영어원서 강독을 하고 있어요. 여러 가지 책을 읽었죠.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슈마허의 Small is Beautiful 이예요. 여러분은 나도 이 책을 안다 하시겠지요. 저도 그랬어요. 정작 그 책을 영문으로 꼬치꼬치 공부해 보니까, 한 번도 제가 읽지 않은 책 이더라구요. 같은 경험이 또 있는데, 제가 철학입문하면서 독일어,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자기들이 나에게 느끼는 어떤 도전, 자극을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요. 서원지기소년을 누구도 못 따라간다 그래요. 제가 68세가 될 무렵에 프랑스어에 입문해서 최근에는 프랑스어로 공산당 선언을 읽고, 또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읽었어요. 프랑스어로 두 번. 앞으로 여덟 번 더 읽을 거예요. 인간의 대지도 읽을 거예요. 이런 책들은 정말로 읽어봐야 할 책인데, 제 경험은 우리들은 진짜로 읽지 않았는데, 읽은 줄로 아는 책들이 있어요. 수박겉핥기로 읽었는데, 읽었다고 생각해요. 중대한 착각이예요. 책이라는 건은 그렇게 수박겉핥기로 읽을 때엔 속을 보이지 않아요. 책만 그렇겠어요. 사람도 그래요. 남편이나 애인, 모를 일입니다. 진짜 만났습니까? 그 속을 다 들어가 봤습니까? 책도 그래요. 그 전에도 어린왕자를 여러 번 읽었어요. 영어로도 읽고, 일본어로도 읽었어요. 그러나 최근에 와서야 진짜로 읽은 거예요. 그 전엔 읽은 게 아니었어요. 슈마허의 small is beautiful도 바로 그런 책이었어요.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도 그런 책이예요. 여러분도 그렇겠지요. 읽은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꼭 다시 읽어보세요. 그러면 박성준이 하는 말이 맞아 그럴거예요. 이 책 뒤 표지에 있는 문장. 아마 김종철 선생이 넣었을텐데. 제목만 한번 읽어보세요.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무슨 말일까요? 한번 읽어 보세요. 지금 우리 세월호 참사, 많은 이야기가 무성하죠. 정작 우리 무력감 느끼지 않습니까?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예요. 우리 민주주의 하고 있습니까? 지금. 더글라스 러미스라는 분은 정면으로 우리에게 “민주주의 하고 있습니까? 진짜 민주주의 아닙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아닙니다. 진짜 민주주의 해야 합니다” 하고 있어요.
독일어로 니체를 읽으며
철학이라는 동네를 들어가 보니, 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산맥이더라구요. 그래서 등산하는 기술도 없고, 장비도 없고, 뭐. 이게 될일이 아니더라구요. 저는 나이는 70을 바라보고, 지금은 70이 지났고, 갈 길이 너무 멀고, 될 일이 아니예요.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길을 찾고 있다.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저를 북돋아 준단 말이예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올 수 있었고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무릇 철학을, 서구의 철학을 할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독일어와 프랑스는 해야 하겠더라구요. 어떻게 하겠어요? 피해갈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하기로 했어요. 이제 프랑스어는 주변으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어요. 우리 카페에 들어가 보면 호떡집에 불난 것 같은 공부방이 있는데, 그 중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독일어로 읽는 니체 왈츠 방이 있어요. 이 책은 제가 대학교 입학했을 때 1학년때 슬쩍 읽었어요. 신은 죽었다 두 마디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니체를 읽었다 하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거예요. 큰 문제예요. 우리의 인문학이라는 게 큰 문제예요. 이런 식의 지식의 악세사리 이런 것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니면서 나는 니체를 알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인문학이 아니에요. 제가 말하는 공부라는 건 인문학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에요. 제가 니체를 읽어보니까,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 자신이 2000년 서양의 유럽의 철학의 인류의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최고의 책이라고 스스로 자평했어요. 그런 책인데 부제를 뭐라고 붙였냐면, ‘모두를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그러니까 앞에 모든 이를 위한은 인류 모두가 읽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이 있죠. 그러나 현실은 이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죠. 그러한 세월이 백년 이상 흘려온 거죠. 최근 니체 사후 100년에 책세상에서 니체 전집을 발행했어요. 지금까지 말씀드렸듯이, 저는 서산에 해가 걸린 상태 아닙니까, 꼴깍 넘어가는 상태. 그 상태에서 길찾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짧은 독일어를 배우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는 저는, 제가 읽어보니까 이 책을 제대로 읽으면 이번에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사태, 여러 류의 인간군상이 대응하는 방식. 그 중엔 한겨레 신문도 있고, 진보적인 인사도 있고, 오만 사람이 다 있어요. 이 책을 깊이 읽으면서 보면 뤤트겐 앞에 우리 흉곽을 들이밀면 우리 갈비뼈 골조가 찍혀나오듯이 투시경을 갖고 있는 책이예요. 여러분들,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드리거나 뭔가 좌절감을 느끼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고 보십시오. 제가 75세입니다. 짜라투스트라를 읽어야 하기에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길담서원을 오시면, 제가 독일어 문법을 도와드립니다. 독일어를 해보니 진짜 처음에 울고 들어가야 해요. 문법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해요. 그 관문을 통과하는 법을 제가 도와드려요. 그 문법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 너무너무 쉬운 거예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입구에 있어도 알겠어요. 게르만어는 영어와 어원이 같아요. 독일사람들이 왜 영어를 잘하냐, 영어와 독일어는 일대일 맞대응이 되는 거예요. 그런 말이예요. 바꿔 말하면 한국에서 고등학교나온 사람은 다 독일어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같은 꽃다운 나이의 사람들은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니체 왈츠방은 들ᄊᅠᆨ들썩 난리가 났어요. 전주에서 대전에서 매주 올라오는 분들이 있어요. 50대, 60대의 분들이에요. 제가 소위 지식이라는 또 하나의 욕심. 존재냐 소유나 하는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이상한 짓거리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정말 내 삶을 이제 내가 살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지금 겪고 있는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부가 필요한데, 나에게 그런 환경이 없다면, 그럼 발명이라도 해서, 공부를 해야 하겠다 하니까. 전주에서도 올라오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그런 공부가 필요한 시점에 있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의 피난처, 헤이븐을 만들어야 합니다
엊그제 어떤 분이 과학자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저를 초대했어요. 길담서원 이야기 듣고 싶다 해서 갔어요. 거기에 서울대의 공학박사도 있고 연세대의 정보공학박사도 오시고 몇 분이 오셨어요.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모이면 꼭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지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일은 무능해서 온 것이 아니고 무능이 아니고 사악한 것이다. 애들이 죽어가는 걸 뻔히 보고서 그걸 그대로 보고 있다는 것, 살인의 장면을 목격하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요즘의 교수들은 위협을 느낀대요. 그래서 침묵을 지킨대요. 발언을 하지 않는대요. 이제 중고등학생들이 촛불을 들 텐데, 교수들은 침묵을 지킨대요. 거기 연세대에서 오신 분은 자기 부인이 한국을 떠나자 했대요. 이런 말씀하시더라고요. 못 구한 게 아니라 수장시킨 것이다. 의도적인 것이다. 먹이사슬 때문이었다. 이렇게요. 구할 수 있는데 안 구한 것이다. 공학박사들이 이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더라고요. 과학자들 입에선 다른 이야기가 나오겠지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제가 질문을 했어요. 섬뜩한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들 실은 제가 후쿠시마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 체르노빌 다음이 한국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저에게 있었는데, 한국이 아니라 후쿠시마였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지금도 불안하지요. 세월호 다음에 이제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죠?” 했어요. 그 중 한분은 안전공학 박사였어요. 그 이야길 하니까 그 분이 “우리 핵발전소 아무런 보장이 없어요.” 해요. “일본 열도는 길잖아요. 동북 지방에서 그런 일어나면 그 밑으로 가면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반경이 얼마 안돼요. 피난할 데가 없어요. 이 많은 인구가 어디로 가요. 사고가 나면 우리는 끝장이 아닐까 하는 예감 때문에 정말 괴로워요” 했더니 그 분이 “네. 맞습니다” 하고 수긍해 버리더라고요. 저는 그 분들은 그렇지 않아요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정말 우울했어요.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최근에 후쿠시마 이후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이런저런 대담도 하는 걸 다룬 책들을 그냥 쌓아만 두고 있다가 이번 세월호 사고가 나면서 들어다 보기 시작했어요. 서문부터 시작해서 한마디 한마디가 뼈에 사무치는 이야기들이예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문제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그럼 이럴 때 우리가 뭘 해야 하나, 뭔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럴 때 나의 몫이 무언지 물어야 해요. 제 몫은 길담서원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겠죠. 저는 그걸 알고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우치다 타스루라는 일본의 평론가이자 사상가가 있어요. 그분이 합기도 7단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분인데, 그 분이 최근에 퇴임을 하고 후쿠시마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집을 지었어요. 1층엔 다다미 80장이 깔린 넓은 합기도 도장이 있고 2층은 공부하는 공간이에요. 그 분이 집을 지은 이후에 후쿠시마 사태와 연관 지어서 침몰하는 일본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는 책을 냈어요. 그 책에서 도장을 만들고 공부하는 공간을 만들어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쏙 맘에 드는 건물을 지었다 생각했는데 이 공간을, 80평 다다미가 깔린 공간을 피난소. 특히 젊은이들이 피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써야겠다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공부모임, 우리가 정말 아까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했잖아요. 이 무력감을 극복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만들고 있어 라는 안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 무력감을 우리는 이겨내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런 모임을 하나 하면 바로 여기가 피난처입니다. 영어 단어에 헤이븐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먼 항해를 끝나고 배들이 안전한 항구에 와서 식량도 채우고 물도 채우고 선원들이 항해사들이 쉬어가는 곳을 해이븐이라 하죠. 그런 의미에 우리가 모임을 하면 그 모임이 헤이븐이 되어야하죠. 길담서원도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하죠. 길담서원 카페에 들어가보시면,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라는 건축가 이일훈 선생이 설계하고 송승훈 국어 선생님이 지은 집 ‘잔서완석루’라는 집. 추사가 즐겨 썼던 현판을 갖고 이름을 지었다는데, 그 뜻은 학문은 변변치 못하지만, 뜻은 굳다라는 뜻이예요. 그 집에 관한 글이 카페에 올라와 있어요. 그 집에서 6월 달에 길담서원에서 하는 음악회가 거기서 열려요. 주인장 송 선생이 잔서완석루라는 집 이야기를 도입부에 하신답니다. 이일훈 선생이 우리나라의 선배 건축가라 하는 김중업 선생의 말을 옮겨 놓았는데 ‘무릇 집이란 어딘가 기둥을 부여잡고 울음을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게 집이다.’라고 썼다는 걸 누가 카페에 올렸어요. 오늘 새벽에 그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았어요. 제가 조금 전에 했던 취지의 말인데, 우리가 정말 무력감을 느끼는 그런 우리가 아니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만들어가고 있어’ 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우리가 하는 이 동아리가 바로 잔서완석루라는 글에 달아놓은 길담서원에 관한 말, 피난처 같은 곳이라는 것. 그런거죠.
가령 저같은 사람,이 예순이 될 때까지 한번도 웃어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에게도 발성하지 못한 이야기를 꽁꽁 묻어두고 사는 것같지 않은 세월을 산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제 웃는 시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여러분 앞에 와서 할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죽음에 대해서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것이 크게 보면 공부이고 교육이고 학교이고 인문학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지구촌 사람들의 설레는 꿈, 기본소득
마지막으로 꼭 말씀드리고 싶은 건 최근에 인터넷에 떠나디는 이야기 가운데 기본소득 아시죠? 녹색평론에 긴 좌담으로 실렸었어요. 영어로 basic income. 지금 프랑스어, 독어, 영어 자막이 있는 기본소득에 관한 영상이 길담서원에 올라가 있어요. 놀랍더라구요. 지금 이제 지구촌에 기본소득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올 것이 오고 있어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살면, 지금처럼 젊은이는 일자리가 없고,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경제성장은 되는데 투자는 하는데, 결국은 한쪽은 계속 가난해지고 20대 80대의 비율은 커지고 중산층은 몰락하고 그럼 경제는 뭘 위해서 하는가, 경제성장은 왜 하는가 하는 문제, 가진 자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시작했어요. 꿈틀대기 시작했어요. 기본소득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라거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고 기본소득이라는 하나의 상상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다큐의 마지막에 보면 마틴루터킹 주니어 목사가 아이 해브 어 드림이라는 거 떠올리게 해요, 우리에게 꿈이 필요해요. 민주주의에 무력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우리는 꿈이 필요하다는 거죠. 뭔가 새로 사랑을 하는 것처럼, 이런 새로운 시대를 너나할 것 없이 나이를 불문하고 저같이 노인의 가슴에도 꽃봉오리가 벌어지듯이 설레임이 있어야 해요. 다큐를 한글로도 보고 영어자막으로 보고 독일어로는 어떻게 되어있나, 프랑스어로는 어떻게 되어있나 궁금증을 가지시고,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하는데, 꽃다운 여러분은..
책을 읽으면 얼굴이 변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우리 선인들은 독서를 하면, 얼굴이 빛난다 생각 했어요. 신체에 변화가 생긴다. 진정한 독서는 우리 몸에 변화를 가져온다. 제일 먼저 변하는 게 눈빛이 변해요. 눈빛이 변하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변해요. 그래서 가깝게 늘 지내던 사람도 한동안 못보다 만나면, 엉, 너 맞어 이렇게 놀라게 하는 게 진짜 독서예요. 저는 성형수술을 이렇게 많이 하고 있는데, 좋은 책을 만나 진짜 독서를 하게 되면 그것보다 더 좋은 미용술은 없습니다. 꼭 좋은 책을 마나세요. 좋은 책은요. 내가 꼭 만나야 하는 그 사람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책을 만나야 해요. 저는 최근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만나며, 아, 만났구나 이런 생각했어요. 저는 제가 마지막 인생,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요. 짜라투스트라에서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라는 글에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사람은 알맞은 때에 죽을 줄 알아야 한다. 제 때 죽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제 때 살 줄 아는 사람이. 저는 제 때 살 줄 아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때 죽을 줄 아는 사람. 그 자유는 제가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날, 가슴에 꼭 끼고 먼 길을 갈 책을 제가 찾고 있었어요. 지금은 찾은 것 같아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김종철 선생과 이런 이야길 했는데, 번역을 읽을 때 아무리 좋은 번역이라도 번역이안 되는 글이 있어요. 짜라투스트라는 인류 역사상 모든 철학서 가운데 가장 음악적인 책이래요. 각운이라든가 리듬, 도치법이 엄청 사용되고 있구요. 이걸 어떻게 번역하겠어요. 문장구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독일어로 읽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초보니까 번역본을 옆에 두 권 끼고 보지만, 결국은 독일어로 읽으며 아, 그렇구나 하며 읽어요. 결국은 독일어로 읽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꽃다운 여러분이 못 하겠어요. 나는 할 수 없어 이것 때문에 할 수 없어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가능성을 만들어야 해요. 발명해야 해요 누가 갖다주지 않아요.
<대화>
- 차라투스트라 누가 번역한게 그 중 낫나요?
: 민음사 판이 있고, 책세상의 전집 중 한권이 있어요. 전공자들이 번역한 거죠. 제가 대조해보니 두 권 다 도움이 되는 게, 보완이 되는 게 확실해요. 기본은 전공자들이 번역한 책세상 것으로 하는 게 쉬워요. 그러나 제가 독일어로 된 걸 보니, 비로 초보지만 번역본을 읽는 것은 발가락이 가려운데, 구두 위로 긁는 것 같아요. 안 긁는 것보다는 낫죠
- 그렇게 오랫동안 우울하게 사셨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셨을텐데..
: 저는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저는 못 먹어서 교실에서 졸도하지 않았습니까? 내내 배가 고팠어요. 그러니까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 입주가정교사를 하면서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못먹고 공부해서 위장이 다 탈이 났어요. 감옥살이 하는 내내 저녁밥이 네시반쯤 나오고 나면 다섯시 입방하고 나면 겨울은 밤이 엄청 길어요. 열네시간씩 저녁 열두시 즘 소화가 다 되고 나면 새벽 세네시 되면 통증으로 내내 뒹굴었어요. 저는 살아나온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마 옥사할 거라 생각했어요. 인간은요. 나는 밥 한번 실컷 먹었음 좋겠다, 어디 밥먹는 대회 없나, 일등할 자신있는데 했어요. 이렇게 사니까, 도스도예프스키가 쓴 .. 인간은 그 어떠한 역경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 존재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어요. 정확하진 않지만. 배가 고픈 어린 시절을 살고, 부모가 없는 어린 시절을 살고, 또 고아원에서 살아보고, 또 감옥에서 살아보고, 항상 상처를 지닌 사람은, 생존력이 강해요.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살고 싶은 거죠.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 수 있다하죠. 죽는다는 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에 아름다운 게 얼마나 많고, 공부할 게 얼마나 많고,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하고 나서 죽어도 늦지 않죠.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라는 걸 듣고나서.. 국가적인 재난 상황, 세월호를 보면서 무력감 많이 느꼈어요.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열심히 하려 하는데 잘 안될 때 무력감 많이 느껴요. 자존감이 떨어져 그런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 무력감이란 어느정도 범위를 잡고 들어가야 ..혼자서 무력감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여기 오셨잖아요. 그럼. 그걸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오셔야 해요. 와서 같이 뭔가 해요, 아까 타이타닉 호를 이야기했는데 일단 표를 사서 승선해서 배안에 같이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같이 가야해요. 내릴 수 없죠. 이렇게 같이 가는 게 필요해요. 혼자 내릴 수 없게. 길담서원도 같이 가는 곳이죠. 어느 분이라도 제 이야기에 솔깃하면 오십시오. 같이 배를 타세요. 니체왈츠 춤추는 배예요. 흔들리며 춤을 추게 되어 있어요. 그럼 춤을 배우는 거죠. 그죠? 그런 게 필요해요. 이 모임도 그렇게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혼자서 해결하려 할 게 아니에요. 나의 문제가 나의 문제만이 아니에요. 전체적인 구조적인 문제, 시대적인 문제예요.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해요.- 세월호를 보면서 보는 시각이 진보나 보수가 참 다르다 싶어요. 저희 시댁이 경북이고 굉장히 보수적인데, 저는 세월호에 관해선 다를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구요. 애들을 구조하는 게 애들이 포커스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욕먹을까 구조하는 거예요. 저는 아 이게 극복할 수 없는 벽이구나, 서로 보고 싶은 세상만 보는구나 싶어요. 이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화하고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지 회의가 들어요. 저랑 뜻이 맞는 사람이랑은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랑은 어떻게 할지 회의가 들어요:제가 답을 갖고 있진 않아요. 답을 가진 마술사가 아니예요. 저역시 그런 답답함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아까 기본 소득에 관한 전세계적인 뭔가 가슴이 설레고 있다 말했죠. 꼭한번 보세요. 사람들이 막 나와 이야기해요. 우리가 지구마을사람들이 우리 이웃들이라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희망을 말하고 있어요. 기본소득만이 꼭 답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답을 찾아서 꽃 피는 가슴을 가져야 한다. 설레이는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말해요. 아버님이 경북 어디세요?(안동입니다) 안동 사시는 부친께서 어떠하시든, 거기만 주시하지 마시고 세계 우리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설레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거기도 반대하는 사람이 나와요. 일도 안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나고 걱정하는 사람도 나와요. 어디나 있어요. 그런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는 게 문제지요. 그렇게 생각하시고 아버님 그렇게 사시게 놔 두세요. 니체를 읽으면요(독일어로요?), 어떤 걸 알게 되냐면요. 니체는 원그리스가 있었다고 해요. 소크라스테스부터 병든 그리스가 생겼다 해요. 플라톤이 망쳐버렸고, 진짜 그리스는 저 멀리 있다해요. 지금 살아있는 이 세상은 가짜라고 해요. 저리로 찾아가야 한다고, 이걸 종교적으로 세속화시킨 것이 기독교예요. 니체는 아버지가 목사,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목사예요. 목사 가문의 총기 있는 소년이었고 교회에서 살았죠. 저도 목회를 할 정도로 신학공부를 했고, 소위 이른바 제가 신학학위를 갖고 있답니다. 그런 사람인데, 제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읽으니까 니체 자신이 제5 복음서 라고 했어요. 예수가 탄생하면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었는데, 니체는 짜라투스트라가 새로운 기원이라고 했어요. 이 책이 탄생하면서요. 일리가 있어요. 지금 저는 이제 앞으로 끽하면 한 10년 정도 남아있는 사람인데, 부친께서는 올해 연배가? (78이세요), 저보다 조금 위시네요. 저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더 사시겠지요. 길어봐야 10년 단위예요. 니체는 삼천년 오천년 단위를 생각해요. 미래에 천년 후에 나를 알아주는 인류가 탄생할 것이라 이런 식으로 말해요. 그러니까 고전이라는 그런 거예요. 저기 한국에 반도에, 서울에 녹색연합이라는 어느 모임에서 선생님들하고 앉아서 자기 이야길 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게 고전이예요. 우리만 그러겠습니까? 백년 후에 이백년 후에 삼백년 후에 어디서든 짜라투스트라를 읽고 있을 거예요. 거기보면 부친도 나옵니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등장했떤던 인간 군상들이 다 나와요. 그러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사람의 변화를 세 단계로 말해요. 낙타의 삶에서 사자의 삶으로 사자의 삶에서 어린아이의삶으로. 어린아이가 되라 해요. 예수가 말하는 거랑 비슷하잖아요.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하잖아요. 제가 닉네임을 카페에서 서원지기소년이라고 쓰고 있어요. 보십시오. 저도 이제 몇 살이냐하면요, 일곱. 다시 소년이 된 거죠. 진짜 소년이 되고 싶어요. 진짜 소년이 되어 이 세상을 마무리하고 싶어요. 우리 주변의 현상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실게 아니라 설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더 귀기울이세요. 그러면 아, 그래, 아빠 알았어요, 알았어요 할 수 있어요. 진짜는 이쪽에 있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해먹으면 얼마나 해먹겠어요. 벌써 많이 지나왔죠. 그런 거예요. 맑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말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롭고 아주 개성이 넘치는 그런 개인으로서, 그러나 하나의 동아리를 이루는 사회를 꿈꿨어요. 결과적으로 러시아혁명을 통해 나타난 것은 아주 이상한 그런 공산주의 사회였어요. 짜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만일 그러한 어떤 맑스를 꿈꿨던, 해방된 인간들의 세상이 왔다면, 그때야말로 니체를 읽어야 하는 때일거라 생각해요. 니체는 어느날 그런 환상을 봤어요. 어디를 갔는데, 자기가 너무 작아요. 자기가 소인의 나라에 왔나, 알고봤더니 사람들이 그렇게 작아졌어요.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들. 소인배 있죠. 작은 인간들. 인간들이 왜 이리 찌질하고 작아졌을까? 이 인간들은 원래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력이 개화된 꽃핀 성숙한 인간. 위멘베쉬라고 해요. 직므의 이 찌질한 인간이 아닌, 그런, 위멘베쉬라고 하는 그런 어떤 성숙한 인간을 꿈꿨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마도 니체는 천년 후에도 읽힐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니체를 읽는 다는 것은 행복하다 생각해요.
흔히 잘못된 인생, 국가적 폭력의 희생도 있고 해서 감옥에서 나와 소주라도 먹고 신세한탄하다가 어떻게 적당히 폐인이 되어 서울역에서 죽는 게 십중팔구 같은데, 선생님은 완전히 그걸 극복하고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하신게 무슨 계기가 있을까요? 인생의 전환, 계기, 모멘텀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제가 만 예순살때까지 웃어보지 못했단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제가 힘든 세월을 살았단 말이죠. 감옥에서도 살았고, 배고픈 세월도 살았고, 외로운 세월도 살았고. 외형과는 무관하게 속으로는 그렇게 살았죠. 그런 결과 제가 길을 잃었다는 걸 내가 깨달았고요.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했고, 길담서원이라는 배움의 공간을 만들면서 제 자신도 같이 공부하면서 지금 기운을 받고 있죠. 그런 시점에서 여러분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저를 보시니까 행복하게 살았나 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죠. 2천년 불과 14년전까지, 저의 세월을 살지 못했다는 거죠. 한번도 제대로 쨍하고 볕들날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나 제 이야길 들으면서 꽃다운 여러분은 반드시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거죠. 꼭 아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주위를 둘러보면 니체를 읽으면, 다 보여요. 건강상태가 다 보여요. 잘나가는 사람들의 건강상태. 특히 유명한 사람들. 건강하지 못하죠. 그분들이 가장 건강하지 못한 그 포인트가 뭐냐면, 자기가 모른다는 걸 몰라요. 나는 길을 잃었다는 걸, 내가. 그걸 알아 다행이에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렇게 늦게나마 알았다는 게. 다행이에요. 그렇게 알고나서 보니까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더라구요. 저는요. 나도 조금 더 일찍 누군가가 나에게 ‘자네 말이야’ 하고 이렇게 좀 일러주는 선배나 이웃, 아저씨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요. 저는 부모님 혜택도 못 받았잖아요. 한때 기독교에 빠졌다가, 맑스주의에 빠졌다 감옥도 가고 우여곡절로 지그재그로 자칫 잘못했으면 영원히 길을 찾지 못하고, 지금도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했잖아요? 섣부른 해답은 위험해요. 열려있어야 해요. 불교적 가르침도 그렇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말이 있듯이 니체도 니체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의 자전적인 글이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고 하지 않는가? 했어요. 이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버려라. 그리고 너 자신을 찾도록 해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그때 너희에게 돌아온다 이런 말을 했어요. 니체는 우리에게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예요. 스스로 답을 찾으라 했어요. 진정한 해답은 해답이 없는 게 해답이다 생각해요. 열려 있는 것. 이런 걸 진작 저에게 귀뜸해 주는 친구나 선배나 아저씨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요. 혹시나 여러분들이 오늘 이런 경험을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을 마나지 않았습니까? 혹시 오늘이 계기가 되어 여러분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면 좋지 않을까? 기회라는 것은 그걸 자기가 기회로 만들 때 출발점이 되요. 지나가는 걸 잡아야 해요. 나의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지 그래야 기회가 되고 출발점이 되요. 그걸 대부분 놓쳐버리죠. 여러분 중 어느 분이라도 지나가는 걸 기회를 이건 내 꺼야 하고 딱 가진 사람이 있길 바래요. (정리 /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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