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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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0345
한자 鄭在浣
영어음역 Jeong Jaewan
이칭/별칭 물헌(勿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호는 물헌(勿軒). 아버지는 정규영(鄭奎榮)이고 어머니는 조용주(趙鏞周)의 딸이다. 정규영은 영남 유림의 거두 곽종석(郭鍾錫)의 문하로 정3품 통정대부 벼슬과 하동 향교 정교를 지낸 유학자였다. 동생은 정재기(鄭在淇)이고, 누이들은 강도현(姜道鉉)·이회근(李晦根)·정원현(鄭元鉉)·이인근(李人根)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정재완(鄭在浣)[1881~1964]은 1881년에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정규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재완은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아 일찍이 민족주의에 눈을 떴다. 젊은 시절부터 부친을 통해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등 당시 선각자들과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하동 최고의 갑부로 소문났던 정재완은 백산상회가 1919년 주식회사로 전환될 때 안희제의 권유로 주식 500주를 출자하였다. 출자에 머무르지 않고 백산무역주식회사 하동사무소 운영자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 자금을 전달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가 자금난에 허덕이자 정재완은 고향의 전답 수백 마지기를 처분해서 동래 온천장에 여관 겸 요정인 산해관을 설립하였다. 정재완은 산해관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독립운동가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자료가 없어 산해관의 설립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2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산해관이 워낙 비밀리에 운영되어 일제 경찰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으나 수년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자 차츰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길은 육영 사업에 있다고 판단하고 민족 학교 설립에도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 1923년 일신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자고등학교]의 설립에 자금을 출자하여 이사가 되었고,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설립에도 많은 자금을 출자하였다.
정재완은 육영 사업과 함께 민중 계몽을 위한 민족 신문의 발간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1920년 3월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거금을 출자하고 대주주가 되었으며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장덕수(張德秀) 등 9명과 함께 공동 이사를 맡았다. 이외에도 자금난에 빠진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지원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전답을 담보로 맡기고 자금을 조성하였다. 1927년 신간회 하동지회가 창립되자 어렵게 돈을 마련해 하동청년회관을 건립하여 집회와 민중 계몽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전답을 다 날리고, 산해관도 일본인의 손에 넘기고 말았다. 더구나 외아들인 정동석마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1945년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좌우익 이념 대립 속에서 외아들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다가 1949년 세상을 뜨자 정재완은 세상을 등지고 쓸쓸히 말년을 보내다가 1964년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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