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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산책 스크랩 안동 사람들의 뒤에 있는 여인들 3. 도학자 퇴계의 그늘에 있는 세 여자
해암 추천 0 조회 305 18.09.26 05: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리움 사람들을 찾아서 7



        안동 사람들의 뒤에 있는 여인들 3



             도학자 퇴계의 

     그늘에 있는 세 여자





                  

도학자 퇴계의 그늘에 있는 세 여자

 

   

 

하회마을를 떠나 다시 안동 시내로 들어와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낙동강이 보였다. 안동댐으로 호수처럼 풍성해진 강이 산에 가려 사라지고 또 드러나는 모습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문득 소수서원의 문 양쪽에 그려진 태극무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10여 년 전 문예반 아이들과 답사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 태극은 주자학의 상징이고, 주자를 숭배한 퇴계, 그리고 실학이 대두될 때까지 조선 선비들의 철학적인 화두였다. 이 태극(太極)에서 음과 양(陰陽)이 생기는 것처럼, 문이 열리면서 태극이 둘로 갈라지는 것은 참으로 시적이고 아름다운 착상이다.

 

여기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나온 것이다. 곧 이()에서 사단(四端)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나오고, ()에서 칠정(七情)인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른 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다.

 

이 소수서원도 퇴계의 손이 깊숙이 닿아 있다. 주세붕이 숙수사 절터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퇴계가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사액, 곧 책과 노비와 토지를 받아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그 무렵 백운동 골짜기에서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서 퇴계는 경()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 골짜기에 버린 불상들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닫힌 문에서 서로 끌어안은 삼태극 

 

공경은 퇴계의 중심이지 아마.’

아무튼 흐뭇한 일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였을까. 아니 수양대군에게 저항하다가 여기서 무참히 살육당한 금성대군파들에 대한 동정, 어쩌면 후인에 대한 경계였을지도 모른다.

분천 버스 정류소에서 도산서원으로 꺾어 들어가면 농암 이현보 농암가비(聾巖歌碑)가 길가에 서 있다. 비석 뒤엔 농암가가 새겨진 간단명료한 노래비인데 정말 멋이 없다. 한글

 

농암애 올아 보니 老眼猶明이로다

人事 변한들 산천이야 가실가

巖前 某水某丘이 어제 본 듯 하예라.

 

당파싸움하는 세상을 떠나 은거하던 농암 이현보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우리 향약을 기초한 퇴계처럼 농암도 시끄러운 세상이 싫었던 모양이다. 강물 철썩이는 소리가 시끄러워 호를 농암(聾巖), 곧 귀머거리 바위로 지었던 것을 생각하니 재미있다.

  

                              농암가비

 

차를 내려 강을 따라 좀 걸으면 퇴계가 청려장(靑黎杖), 즉 푸른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산책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보인다. 이름처럼 햇빛에 강물이 빛나고 겨울 물새들이 잔 구름처럼 떠 있다. 이어 작은 섬 시사단(試士壇)이 눈에 들어온다. 정조 때 지방 별과시험을 보이던 곳이다. 무려 7000명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는 곳인데 안동댐 공사로 솔밭은 섬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옛 표현처럼 도산서원으로 구름 같은 선비들이 모여들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서원 앞에 중수비가 앉아 있다.


.......(전략) 이곳이 곧 동방 유학을 집대성한 퇴계 이 선생께서 일찍이 경학을 연구하여 실천에 옮기고 수많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인재를 길러낸 도산서당이다........(중략)........ 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이조 일대의 정신적 지표가 되었으므로, 그 전기의 성리학과 후기의 실학이 모두 이에 연원하였고, 역대 임금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탐독하여 나라 다스리는 원리로 삼았다........ (후략)

    

도산서원은 1561년 퇴계가 61살 때 자리를 잡은 서당이다. 중국에서 공자와 주자의 업적처럼 퇴계는 동방 유학을 집대성하였던 것이다. 남의 장단과 시비를 삼갔다는 퇴계는 최치원, 정몽주, 이색, 권근,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서경덕, 조식, 김인후 등에 대한 인물평을 하고, 이 중 정몽주를 동방 유학의 시조로 보고 김굉필, 조광조에 이르는 도통 계보를 확립하였다. 퇴계는 특히 이언적을 동방 제일의 올바른 학문이라고 평가하였다

       

                           도산서원 전경단

 

도산서당의 문을 열면 먼저 세 칸의 도산서당이 다가온다. 퇴계가 쓴 도산잡영 병기에 의하면 연못을 파 정우당(淨友塘), 샘을 파 몽천(蒙川), 매화와 대,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 도학자다운 모습이다. 지금도 매화원(梅花園)이란 표석 곁에 늙은 매화가 살아 있다. 도산서당 건너 쪽은 유생들의 공부방이며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이다. 도산서당은 이렇게 검소하게 시작하였는데 뒤에 사액을 받고 후학들이 서고, 강학실, 사당, 관리실 등 화려하게 확장하여 민초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도 딸린 전답은 6정보였다니 다른 곳보다는 검소했던 편이다.

 

도산은 49세 이후 수없이 사직서를 냈다. 벼슬은 50살 때 성균관 대사성 정 3품에 이르렀고 뒤에 우찬성이 되었으나, 겨우 60살에 이르러서야 도산에 은거하여 후진을 기르게 된 것이다. 금란수는 도산서당영건기사에서 기록하였다.

 

방 가운데 서북쪽 벽에 서가를 만들고 서면은 격장을 두어서 반은 침실로 남겨 두었다........ (중략)........이 가운데 고서 천 여 권을 좌우로 서가에 나누어 꽂았으며, 화분 한 개, 책상 한 개, 연갑(硏匣) 하나, 지팡이 한 개,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를 두었다........ (후략)

 

이렇게 퇴계는 주자처럼 도산에 은거하여 도산(陶山)이란 호를 짓고 도산십이곡을 읊었다. 두보와 도연명의 시를 좋아한 퇴계는 만년에는 주자의 시를 읊었다. 천연대에서 주자의 무이구곡을 읊은 어느 가을날 퇴계는 정사성에게 다음 시를 주었다. 퇴계의 문하생인 정사성은 임지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

 

한밤중에 노니던 신선이 꿈에서 깨어

그윽한 친구를 불러 강둑에 오르도다

맑은 바람은 뜻이 있어 옷소매에 찾아오고

밝은 달은 다정하여 술잔을 보내 주네

 

예순 살에 퇴계는 기대승과 유명한 사단칠정에 대한 기나긴 논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죽기 한 달 전에 치지격물설에서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여 기대승에게 보냈다. 곧 사단(四端)은 이()에서 나오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七情)은 기에서 나오고 이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라고 정리하였던 것이다. 대학자다운 겸손이었다. 이런 퇴계의 문하에서 수많은 인재가 나왔다. 박순, 이산해, 유성룡, 이이 등 대제학이 10, 재상이 10, 시호를 받은 이가 37명이었다고 한다. 허나 진성 이씨 퇴계 후손 중 가장 높은 벼슬이 이조참의였다니......... , 알다가도 한참 모를 일이 안동 사람들이다.

 

퇴계의 임종 모습은 감동적이다. 매형(梅兄-매화)에게 불결하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다고 밖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임종 날 아침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고 몸을 일으키라 하여 앉아서 죽었다. 나이 일흔 살이었다. 조용히 앉아 마음을 편하게 해서 하늘의 이치를 몸소 알아내던 도학자 퇴계의 단정했던 모습이다. 기대기를 싫어한 꼿꼿한 성격이란 뜻도 들어 있다.

 

도산서원을 나오면서 보니, ‘박대통령 각하가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시던 금송을 도산서원 경내를 빛내기 위하여 1970128일 손수 옮겨 심었다는 기념비가 보인다. 이 금송은 일본 토종식물로 우리나라 천 원짜리 지폐에도 나온다. 동방 유학을 집대성한 퇴계의 사당이 있는 서원에 꼭 이 금송을 심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도산서원을 빠져나와 태백 쪽으로 조금 가 도산면 소재지 청계식당에서 늦은 식사를 하였다. 돼지찌게였다.

안동에 와서 가장 맛있게 먹었습니다.”

고 칭찬을 하니, 중년이 넘지 않은 여자가 살짝 웃으면서 시장해서 그런다고 겸손해 한다. 안동에 와서 처음으로 여인의 웃음을 본 것 같다. 안동 여인들은 퇴계의 유학 탓인지 얼굴이 너무 굳어 있었다. 남자들에게 가려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억양은 세다.

 

버스 터미널에서 싸우는 사내들의 귓전을 때리는 억센 억양을 뒤로 하고, 오던 길로 다리를 건너 퇴계종택으로 향했다. 퇴계가 태어난 퇴계태실은 온혜리에 있고, 퇴계종택은 토계리 상계동에, 그리고 묘소는 토계리 하계동에 자리 잡고 있다. 퇴계는 이 토계(兎溪)를 고쳐 퇴계(退溪)라 하여 호로 삼은 것이다. 응달길은 빙판이다. 산자락엔 잔설이 깔려있고 자작나무들이 하얗게 서 있다. 길 따라 언 개울이 줄곧 따라왔다

 

퇴계는 궁벽한 산골 온혜리에서 향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사로 선산부사를 지낸 증조부가 온계리에 입향하여 진성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퇴계의 부친은 여러 번 시험에 낙방하다가 퇴계가 태어나던 해 비로소 진사가 되었는데, 첫 부인은 31녀를, 재취 박씨는 4형제를 낳았다. 퇴계는 막내였는데 더구나 부친은 다음해 40살로 죽었다. 빈궁 속에서 어머니 춘천 박씨는 퇴계 형제들을 길러낸 것이었다.

 

퇴계는 강원도에서 감사를 그만두고 온계에서 쉬던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웠지만, 거의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하였다고 한다. 15살 때 가제라는 철학적인 시를 썼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네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다리도 많구나

평생을 살아도 한 움큼의 산의 샘 속이니

강호의 파도치는 물이 그 얼마인지 알지 못하네

 

19살 때 퇴계는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입하다가 병을 얻어 평생 채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21살 때 진사 허찬의 딸과 결혼하였다. 허찬은 장인의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공교롭게 허찬은 뒤에 또 사위인 퇴계에게 부유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퇴계의 당시 재산은 이수건이 <영남 사림파의 형성>에서 밝힌 바, 논이 1166마지기, 밭이 1787마지기로 당대 부호였다. 예안, 봉화, 영천, 의령, 풍산 등지에서 한해 1700석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허나 이 재산을 토대로 공부도 하고 뒤에 도산서원을 세워 제자를 길러냈으니, 27살에 죽은 허씨 부인의 덕이 큰 셈이다.

 

퇴계는 향시에 세 번 낙방하였으나 27세에 진사가 되었다. 헌데 부인 허씨가 27살로 둘째 아들을 낳고 죽어서 30살에 재취부인으로 권질의 딸을 계실로 맞이하였다. 둘째 부인 권씨는 사화에 관계된 부친 권질 때문에 퇴계에게 얼마간 고초를 주었을 뿐더러 지금도 문중에서 바보할매로 통한다고 한다. 하얀 도포를 붉은 천으로 깁는다든지, 제사음식을 미리 집어 먹었던 모양이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퇴계가의 족보에 서자(庶子)라는 말을 일체 쓰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런 좋은 풍조는 영남 일대 사대부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퇴계가 재취 권씨 부인 태생이고, 퇴계 또한 재취부인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겨울 퇴계종택은 솟을대문이 큼직하지만 마냥 허름하고 어질러져 있다. 이 집은 온혜리의 노송정 종가와 함께 구한말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다가 일본군에게 불태워졌는데 1929년에 이곳에 옮겨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퇴계종택

 

그런데 퇴계종택를 나오면서 퇴계가 임종 시에 매화에 물 줘라!’ 고 한 그 매화가 자꾸만 기생 두향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두향(杜香)48살인 퇴계가 단양군수를 지낼 때 사귄 관기로 시율에 능하였으며, 매화와 난초를 사랑하였는데, 퇴계를 연모하다가 수절(守節), 혹은 순절(殉節)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충주댐 공사로 두향의 무덤은 단양의 강선대 기슭으로 옮겼지만 영조 때 이광려가 두향을 기리는 한시를 쓴 것을 보면 명기였던 모양이다.

 

외로운 무덤이 국도변에 있어

거칠은 모래에 꽃이 붉게 비치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강선대의 바위도 없어지리라

 

지금도 퇴계의 제사를 지낸 뒤 퇴계의 후손들은 두향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저 매화에 물 줘라고 퇴계의 암시가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도학자 뒤에 있는 퇴계의 인간적인 모습인데, 왠지 나는 그런 게 더 마음에 끌린다.

 

         퇴계 묘소   

 

퇴계의 묘소는 길가에 서 있는 퇴계선생묘하(退溪先生墓下)’ 라는 표지석 옆으로 돌계단을 따라 숨 가쁘게 올라가야 된다. 묘소에는 왕후장상 못지않은 큼지막한 문인석과 망주석을 세워서 퇴계의 참모습을 흐려 놓았다. 후인들의 짓이다. 원래의 묘소는 퇴계답게 단순 소박했을 것이다. 얼굴 모습을 알아 볼 수 없는 정말 작은 문인석 둘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안동을 안내해 준 차선생 가족과 퇴계묘소의 석물

 

묘소에 재배하고 돌아서면 우아한 소나무 사이로 영지산이 보이고 앞으로 퇴계가 흐르고 있다. 비석엔 퇴도만은진성이씨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쓰여 져 있다. 도산에 물러가 늦게 은거한 진성이씨의 묘라는 뜻이다. 유언으로 퇴계는 벼슬 이름을 쓰지 말도록 하였으며 스스로 자찬 묘비명(自撰 墓誌銘)을 지었다.

 

중간에 어쩌다가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 주어졌네

나가서는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나라 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구나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관복을 벗어 버려 모든 비방 씻었거니

내 마음을 제 모르니 나의 가짐 뉘 즐길까

생각컨대 옛 사람은 내 마음 이미 알겠거늘

뒷날에 오늘 일을 어찌 몰라줄 까 보냐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 있는 법

조화 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랴

 

 

탐구 1.

퇴계가 단양군수 직에서 물러나 풍기군수로 가기 전날 밤 이별을 아쉬워하는 관기 두향은 시조 한 편을 읊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받아 이별시를 써 보세요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덧 술 다 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탐구 2

퇴계의 매화시는 100여에 가까운데 그중 도산에서 달밤에 읊은 도산월야영매가 유명합니다. 감상하고 달밤의 매화를 소재로 시를 써 보세요.

 

陶山月夜詠梅(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퇴계 이황

 

步屧中庭月趁人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네

梅邊行繞幾回巡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香滿衣巾影滿身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가 몸에 닿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떠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찬다

 

山夜寥寥萬境空 산 속의 밤은 적막하여 온 세상이 빈 듯

白梅凉月伴仙翁 흰 매화 밝은 달이 늙은 신선 벗해 주네

箇中唯有前灘響 그 가운데 오직 앞 시내 흐르는 소리 들리니

揚似爲商抑似宮 높을 때는 상음이고 낮을 땐 궁음일세

 

晩發梅兄更識眞 늦게 핀 매화가 참됨을 다시 알아선지

故應知我寒辰 이 몸이 추위를 겁내는지 아는지

可憐此夜宜蘇病 가련하구나, 이 밤에 병이 낫는다면

能作終宵對月人 밤이 다 가도록 달과 마주 하련만

 

往歲行歸喜몇 해 전엔 돌아와 향기 맡아 기뻐했고

去年病起又尋芳 지난해엔 병석을 털고 다시 꽃을 찾았네

如今忍把西湖勝 어찌 이제 와서 차마 서호의 절경을

博取東華軟土忙 우리 비옥한 땅 바쁜 일과 바꿀 손가

 

老艮歸來感晦翁 노간이 쓴 매화시에 주자는 세 번이나 감동해

託梅三復歎羞同 수동이란 글귀로 세 번이나 탄식했네

一杯勸汝今何得 너에게 한잔 술을 주고 싶지만 안 되니

千載相思淚點胸 천 년 전 생각에 눈물로 가슴이 젖네

 

발전 1

매화는 조선의 선비들이 본받던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에서 으뜸입니다. 조선 중기에 한문사대가로 불린 신흠의 시에는 매화의 선비기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감상하고 지조를 중심으로 시를 써 보세요.

 

桐千年老恒藏曲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노래를 품으며

梅一世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모습이 변치 않으며

柳經百別又新枝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발전 2

퇴계가 지은 도산 1212수의 연시조입니다. 퇴계는 이 시조를 전 6곡을 언지(言志), 6곡을 언학(言學)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지는 산수와 더불어 강호에 은거함을 노래하였고, 언학은 학문과 수양을 닦는 순수하고 바른 마음을 노래하였습니다.

 

퇴계는 국문시가는 한시와는 달리 노래할 수 있어서 흥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고려 사대부의 한림별곡은 풍류를 읊었지만 관능적이고 향락적이라고 비판한 퇴계는 주로 시조를 새로운 풍류라고 보았습니다. 퇴계의 이런 태도는 국문시가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후 도산12곡은 후대의 사림파(士林派) 시가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현대어로 풀은 도산 12곡을 감상하고 자연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 연시조를 써 보세요.


1.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요

시골에만 묻혀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떠리오

하물며 자연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 병을 고쳐서 무엇 하겠는가

 

2.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 가네

이러한 가운데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하노라

 

3.

순박하고 좋은 풍속이 죽었다 하는 말이 진실로 거짓말이로다

사람의 성품이 어질다 하는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로다

천하에 허다한 영재를 속여서 말씀할까

 

4.

그윽하고 향기로운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자연스러워 좋구나

흰 구름이 산에 걸려 있으니 자연스러워 보기가 좋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 저 아름다운 임을 더욱 잊지 못하는구나

 

5.

산 앞에 대()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 도다

떼를 지어서 갈매기들은 오락가락 하는데

어찌하여 새하얀 망아지는 멀리 마음을 두는가

 

6.

봄바람에 꽃이 산을 뒤덮고 가을밤에 달은 누각에 가득 차도다

네 계절의 아름다운 흥이 사람과 마찬가지라

하물며 천지조화의 오묘함이야 어느 끝이 있을까

 

7.

천운대를 돌아서 완락재가 맑고 깨끗한데

많은 책을 읽는 생활에 즐거운 일이 끝이 없구나

이 중에 오고가는 풍류를 말해 무엇할까

 

8.

벼락이 산을 깨쳐도 귀먹은 자는 못 듣나니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어도 장님은 보지 못하나니

눈도 밝고 귀도 밝은 남자로서 귀먹은 자와 장님 같지는 말자구나

 

9.

훌륭한 옛 어른이 지금의 나를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뵙지 못하네

고인을 뵙지 못해도 그분들이 행하시던 길이 앞에 놓여 있으니

그 가던 길이 앞에 있으니 또한 아니 가고 어떻게 하겠는가

 

10.

그 당시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실천하던 길을 몇 해나 버려두고

어디에 가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11.

청산은 어찌하여 항상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칠 줄을 모르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서 오래도록 높고 푸르게 살아가리라

 

12.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실천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성인도 못 다 행하니 그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늙어가는 줄을 모르노라

 

심화 1.

주자의 성리학은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조선 중기가 되면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주자의 사상과 작품들을 완전하게 소화하였습니다. 특히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가는 조선의 성리학자들 사이에 주자학을 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하였습니다.

 

주자의 무이구곡도가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아홉 경치를 읊은 시입니다. 무이산은 36개 봉우리와 99개 동굴이 있는 명산인데, 8의 계곡의 9개 골짜기는 승진동(升眞洞), 옥녀봉(玉女峯), 선기암(仙機巖), 금계암(金鷄巖), 철적정(鐵笛亭), 선장봉(仙掌峯), 석당사(石唐寺), 고루암(鼓樓巖), 신촌시(新村市)입니다.

 

남송 때 성리학의 대가인 주희(朱熹)1183년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썼고, 이듬해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를 지었습니다. ‘무이구곡도가는 첫 수를 제외하고는 무이구곡의 자연을 묘사하면서 도학(道學), 즉 성리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특히 무이구곡을 그림으로 표현한 무이구곡도와 율곡 이이가 지은 고산구곡가는 자연에 대한 우리나라 화가들의 태도나 중국적인 운을 따르는 시작법이나 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중국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는 개성적인 학문이나 그림을 그리게 되고 독특한 한국적 성리학을 개척했던 것입니다.

 

무이구곡을 감상하고 자연 속에서 도를 닦는 작품을 써 보세요.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주자(朱子)

 

武夷山上 有仙靈

山下寒流 曲曲淸

欲識箇中 奇絶處

櫂歌閑聽 兩三聲

 

무이산 위에 신선 세계 있으니

산 아래 차가운 물 흘러 굽이마다 맑도다

그 가운데 절승지를 알고자 할진댄

즐거운 뱃노래를 귀기우려 들어보게나

 

一曲溪邊上釣船

慢亭峰影醮淸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峯鎖暮煙

 

일곡의 물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만정봉이 물 가운데 거꾸로 잠겨있네

무지개다리는 끊어진 뒤에 소식이 없고

골골마다 봉우리에는 비취빛 안개 자욱하네

 

二曲亭亭玉女峰

揷花臨水爲誰容

道人不復荒臺夢

興入前山翠幾重

 

이곡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옥녀봉아

꽃처럼 예쁜 단장 누구 위해 꾸몄는가

도인은 황대몽(荒臺夢)를 다시 꾸지 않는데

흥에 겨워 앞산에 드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三曲君看架壑船

不知停櫂幾何年

桑田海水今如許

泡沫風燈堪可憐

 

삼곡에 매어둔 배를 그대는 보았는가

노 젖기를 그만둔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밭이 바다 된 것 지금부터 언제런가

물거품 바람 앞에 등불 인생 가련하기 그지없다

 

四曲東西兩石巖

巖花垂露碧氈毿

金鷄叫罷無人識

月滿空山水滿潭

 

사곡의 양쪽에는 바위산이 두 곳인데

바위 틈 꽃들에는 이슬 맺혀 더욱 곱고

금닭이 울어 아침 온다고 본 이는 없었나니

달빛은 하늘 높이 물은 못에 가득하구나

 

五曲山高雲氣深

長時煙雨暗平林

林間有客無人識

欵乃聲中萬古心

 

오곡의 산은 높고 구름의 기운이 깊도다

언제나 구름비에 평평한 숲은 어둑하네

숲 사이 나그네를 알아보는 사람 없고

사공의 노래 소리 세상 근심 여전하네

 

六曲蒼屛繞碧灣

茅茨終日掩柴關

客來倚櫂岩花落

猿鳥不驚春意閒

 

육곡의 바위 병풍 물굽이를 감아 돌고

띠집에 낀 이끼 사립문을 빗장 걸어

노를 젓는 나그네 옷에 꽃잎은 떨어지고

원숭이 산새 함께 봄나들이 즐기고녀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幾度寒

 

칠곡에 배를 몰아 푸른 여울 올라서서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금 돌아보니

어제 밤에 내린 비에 더욱 아름답고

떨어지는 폭포수는 시원함을 더해주네

 

八曲風煙勢欲開

敲樓岩下水濚迴

莫言此處無佳景

自是遊人不上來

 

팔곡에 바람 불어 구름이 개려는데

고루암 바위 아래 맑은 물 돌아드네

이곳에 좋은 경치 없다고 말 말게나

여기부터 속인은 올라갈 수 없다네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

 

구곡에는 모두가 다 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상마(桑麻)에 달린 이슬, 평평한 시내가 모두 보여

사공들은 다시 한번 무릉도원 찾지만은

이게 바로 인간 세상 천하 절승 별천지네


심화 2

송나라의 뛰어난 유학자였던 주자는 음양(陰陽)과 오행설(五行說)을 결합하여 성리학(性理學)을 대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음양과 오행설은 오래된 것이었는데, 역경, 특히 주역(周易)이 기본적으로 음양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양의 원리는 종교학에서 일컫는 창조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 즉 자연의 이치(理致)가 바로 서양의 신의 개념, 혹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창조신화는 신의 창조론(創造論)과 자연적인 생성론(生成論)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의 창조론은 이집트의 프타신화, 히브리의 창조신화처럼 신이 생각과 말로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신화입니다. 반면에 자연적인 생성론은 이 세계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신화로서 바빌로니아 신화의 티아마트처럼 어떤 존재가 해체되거나, 혹은 중국의 도교처럼 혼돈이 분화하거나 일본의 신화처럼 알이 분열되어 이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신화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자연적 분열론은 단적으로 세상의 아버지인 하늘과 어머니인 땅이 저절로 나뉘어졌다는 창조신화입니다. 이 세상이 자연적으로 분열되어 만들어졌다는 분열론(分裂論)은 중국의 도교와 유교의 음양오행설에 나타나 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40장에서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즉 천하의 만물이 유에서 나왔고 유는 무에서 나왔다고 태초에 무에서 존재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장주는 장자지락편에서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變而有形 形變而有生,

 

(혼돈)이 변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하여 존재가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원적인 이치인 도()에서 음과 양이 생기고 만물이 생성된 원리는 노자의 도덕경 42장에 보입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품으며 형체가 없는 기가 조화를 이룬다.

 

중국인이 하늘을 양으로 보고 땅을 음으로 본 것은 창조신화의 자연 생성론처럼 자연(自然)의 의인화(擬人化)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인 양은 밝은 태양처럼 남성적이고, 어머니인 음은 어두운 달처럼 여성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음양을 표시하는 부호는 기원전 1600~1046년경 중국의 상()나라 시대에 국가의 운명을 점치려고 불에 구운 거북의 등껍질의 선을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음()을 여성의 성기, ()을 남성의 성기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를 따른다면 음과 양의 기원은 주술적인 원시수렵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원이 까마득한 음양설을 토대로 64괘의 점사를 모아놓은 점술책이 주나라의 역법인 주역(周易)입니다. 주역의 원리는 태초에 태극에서 음()과 양()이 생기고 8괘로 발전하였는데, 음과 양을 3개씩 더하면 () () () () () () () ()이라는 8()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주역은 천지만물의 현상과 모습을 나타내는 8괘를 곱한 64괘의 경()과 공자가 철학적으로 해설한 10편의 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인은 64괘중에서 하나를 뽑아서 공자의 해설이나 문왕과 주공, 혹은 유명한 예언을 참고하여 점을 쳤습니다. 하지만 유교에서 주역은 우주의 법칙, 국가 통치의 원칙,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밝힌 경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원이 오래 된 음양은 기원전 6세기 서경의 홍범(洪範)에서 대립적이면서 의존의 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5세기에 도가와 공자에 이르러 철학적이 됩니다.

 

지금까지 음양설을 살펴보았지만 중국에서 오행설(五行說)도 여러 시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서경의 홍범편에서 오행은 영원히 순환운동을 하는 에너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행은 물이 불을 끄듯이 서로 상극(相剋 )관계에 있지만 또한 흙에서 나무가 자라듯이 오행은 서로 상생(相生)의 관계가 있습니다.

 

과학문명사가인 로넌은 중국인들이 오행설을 맛, 냄새, 방위, 인간의 건강, 색깔, 동물만이 아니라 날씨, 별의 운행, 정부의 부서 등 모든 자연과 인공적인 활동과 관련시켰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수()는 비, 짠맛, 북쪽, 신장, 흑색, 현무 등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는 오행설을 기초로 도덕의 바탕인 오덕(五德)과 사회의 기초인 오륜(五倫)을 만들어내고 무엇보다 오행설을 정치철학에 적용하여 군주나 왕조의 교체와 관련시켰습니다.

 

특히 중국인은 아주 고대부터 관찰한 5행성(行星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들을 오행설(五行說)과 관련시켰습니다. 하지만 오행성의 명칭을 오행설의 흔적으로 본 중국의 천문학자 쟝샤오위엔에 따르면, 속도와 주기까지 알려진 이 오행성은 오행설과 과학적으로 아무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행성은 오행설과 맞물리면서 군사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즉 금성이 안 보이거나 행성이 특정한 별자리를 지날 때, 혹은 한 자리에 모일 때가 큰 흉조로서 군사정변이나 왕조의 교체 등이 일어난다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인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이치인 천문현상이 음양의 순리(順理)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았다고 쟝샤오위엔은 지적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인류학자 마스페로는 중국인들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자연현상과 도덕을 동일시하여 비인격적인 하늘의 힘이 주 나라의 걸왕 같은 포악한 군주를 폐위시킨다는 주장을 정당화시켰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를 따르는 천지는 오행의 끝없는 순환과 연결된 음과 양의 힘으로 제 자리를 잡아가고 인간이 도를 어기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은 규칙적으로 잘 돌아가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성리학의 대학자인 주희(주자)는 공자에서 벗어난 순자를 이단으로 보고 맹자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도교와 불교에서 논하는 여러 주제를 유교의 입장에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주희는 우주를 객관적으로 검토한 뒤에 모든 사물은 기()와 이()로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기를 불러일으켜 물질 속의 변화와 운동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원리(原理)인 반면에 물리적인 기의 작용으로 음과 양의 두 에너지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기()를 양이라고 하고 정지한 기()는 음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오행, 즉 화수목금토가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기는 서로 의존하면서 서로 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결코 분리되지 않는데, 태극(太極) 속에서 이와 기가 서로 끌어안고 운동하는 형상을 보면 이와 기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학자 마스페로는 주희가 도교와 불교에서 쓸모 있는 것을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태극에는 도가(道家)의 도적인 요소도 있지만 도교의 도처럼 고요한 것이 아니라 이와 기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것을 생산해낸다고 여겼습니다. 또 불교의 공()을 비판하여 공이 실재도 아니고 우주가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태극이나 도의 중심에는 조화가 이루어져 있지만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주희의 합리적인 태도에는 초현실적인 존재나 내세가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니, 인간의 죽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귀신이나 저 세상에 대하여 침묵을 지킨 것처럼 중국인은 현실적인 삶에 충실하였던 것입니다. 공자는 제사가 공동체의 화목이나 국가의 통치 상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음양오행설은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가 되어가면서 신비스러운 참위설(讖緯說)로 바뀌어갔습니다. 즉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한 정권교체의 예언으로 바뀌어 가고 왕조의 권위를 위협하면서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의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국인은 인체의 내부와 자연계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인체의 조직은 자연계의 음양오행에 적용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비장(脾臟)은 목, ()는 화, 심장(心臟)은 토, ()은 금, 신장(腎臟)은 수라고 보아 그 기능과 성질을 설명하였습니다.


또 사계절의 변화가 인간의 생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거나 인체 내부의 5(五臟)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인 우리나라의 동이보감 같은 의학에도 이 이론이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하늘과 태양과 남성을 양, 땅과 달과 여성을 음으로 본 결과 조선시대의 남녀차별이 태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의 성리학과 남녀차별을 비판하는 시를 써 보세요.

 

심화 3.

퇴계 이황과 함께 율곡 이이는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입니다. 이황이 기대승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주고받을 때 이이는 기대승의 이론을 지지했습니다. 퇴계는 기보다 이를 중요시했지만 율곡은 기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율곡은 주자나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면서 이와 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이론에는 찬동했으나, 이가 주()이고 기는 종()이라는 이론에는 반대했습니다. 즉 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이면서 기라는 것입니다.

 

율곡의 이기론(理氣論)은 형이상학적인 이보다 현실 문제와 관련 있는 형이하학적인 기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퇴계가 개혁의 꿈을 접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힘을 쓴 반면, 율곡은 관직에 계속 머물면서 실천적 유학과 사회개혁에 노력한 점도 이와 같은 철학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을 영남학파(嶺南學派), 율곡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을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 부르면서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악용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현대에도 이를 이용하여 지역감정을 만들어 민족을 분열시킨 악덕 독재자가 있었고 지금도 그 상처가 깊게 남아 있습니다.

이를 비판하는 시를 써 보세요.


심화 4.

다음 시는 주자의 무이구곡가, 퇴계의 도산십이곡가와 함께 율곡의 사상이 잘 나타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입니다. 이 작품은 율곡이 황해도 고산면의 석담(石潭)에 은거하며 그곳의 경치를 묘사하면서 학문을 정진하는 10수의 연시조입니다. 서곡 1, 본문 9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곡은 학문에의 의지와 자연친화적 성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본문은 고산의 경치와 흥취를 노래하는데, 첫 구절이 고산의 특정한 장소로 이끌어서 작품 전체가 완결된 한 편의 시조로 느껴집니다. 특히 각 지명은 경관의 아름다움과 함께 학문 수양과 풍류를 뜻하는 중의적(重義的)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 각 연은 하루의 시간적 순환, 봄에서 겨울에 이르는 한해의 질서에 따라 변화하고 있어서 시상과 미의식이 독창적입니다. 이는 조화와 질서를 추구한 이이의 철학이 작품에 반영된 것입니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단순히 모방한 반면 율곡은 시조의 형식에 경관의 묘사를 뛰어넘어 학문의 자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한층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감상하고 이를 본받아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고 수련하는 연작시를 써 보세요.

 

서곡.

고산 구곡담(高山九曲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터 닦아 집 지으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1.

일곡(一曲)은 어디인가 관암(冠巖)에 해 비친다

들판에 안개 걷히니 먼 산이 그림이로다

솔 사이에 술동이를 놓고 벗 오는 양 보노라

 

2.

이곡(二曲)은 어디인가 화암(花岩)에 봄이 늦었구나

푸른 물에 꽃을 띄워 야외(野外)로 보내노라

사람이 명승지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

 

3.

삼곡(三曲)은 어디인가 취병(翠屛)에 잎 퍼졌다

푸른 나무에 산새는 아래위로 지저귈 때

반송(盤松)이 이 바람을 받으니 여름 풍경 이에 더 없어라

           *취병(翠屛)- 깎아지른 푸른 절벽 

              *반송(盤松)- 키 작은 소나무

 

4.

사곡(四曲)은 어디인가 송애(松崖)에 해 넘는다

못 속의 바위 그림자 온갖 빛이 잠겼구나

숲의 샘이 깊을수록 좋으니 흥에 겨워 하노라

                             *송애(松崖)- 소나무가 자란 절벽


5.

오곡(五曲)은 어디인가 은병(隱屛)이 보기 좋다

물가에 세운 집은 깨끗함이 끝없구나

이 중에 강학(講學)도 하려니와 영월음풍(詠月吟風) 하리라

 

6.

육곡(六曲)은 어디인가 조협(釣峽)에 물이 넓다

나와 고기와 누가 더욱 즐기는가

황혼에 낚싯대 메고 달빛 받아 돌아온다

        *조협(釣峽)- 낚시하는 골짜기              

 

7.

칠곡(七曲)은 어디인가 풍암(楓岩)에 가을빛 짙구나

맑은 서리 엷게 치니 절벽이 비단 빛이로다

찬 바위에 혼자 앉아 집을 잊고 있노라

 

8.

팔곡(八曲)은 어디인가 금탄(琴灘)에 달이 밝다

빼어난 거문고로 곡조 몇을 연주하니

옛 가락 알 이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

           *금탄(琴灘)-가야금 소리가 들리는 듯한 시내

 

9.

구곡(九曲)은 어디인가 문산(文山)에 해 저문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속에 묻혔구나

사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

심화 5.

주자나 퇴계, 율곡이 꿈꾸었던 것은 이상적인 도의 세계일 것입니다. 에이레의 시인 예이츠는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비잔티움을 이상적인 세계로 보았습니다.

예이츠처럼 생사를 벗어난 영원한 세계를 묘사하는 시를 써 보세요.

 

비잔티움으로 항해

                                            예이츠

 

저것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서로 팔짱을 낀 젊은이들, 숲속의 새들

노래하고 있는 저 죽어가는 세대들

연어가 튀는 폭포, 고등어가 가득한 바다

물고기와 짐승과 새들은 여름 내내

지아비가 되고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들을 찬양한다

모두들 저 관능의 음악에 취하여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모르는구나

 

노인은 한갓 하찮은 것

단지 영혼이 손뼉 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는 막대기에 걸린 찢어진 외투다

육신이 걸친 모든 누더기를 위해

더 큰 소리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 자신들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며

노래할 학교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비잔티움의 성스러운 도시로 왔노라

, 성자들이여

벽에 새긴 금빛 모자이크에서처럼

신의 성스러운 불꽃 속에 서 있는 성자들이여

원을 그리며 그 거룩한 불꽃에서 걸어 나와

내 영혼의 노래 선생이 되어 달라

그리하여 내 심장을 태워 달라

욕정에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성에 얽매여

스스로가 어떤 지경인지를 모르나니 그러니

영원한 예술품 안으로 나를 거두어 달라

 

일단 현실에서 벗어난 후엔 다시는

어떤 현실의 형체로도 내 육체를 삼지 않으리라

대신 그리스의 금 세공사가

황금을 두들기고 황금 유약을 발라 만든 눈부신 형상으로

황제의 잠을 깨우리라

혹은 황금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리라

비잔티움의 고관대작과 귀부인들을 위해

과거나 현재, 다가올 미래가 어떨 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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