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
구순자
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내게 참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마도 ‘시를 만남’이 가장 행복한 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어머니의 병고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검정고시 합격 후 방송통신대를 들어가면서 나의 시 인생이 시작되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내에 버팀목문학 동아리에서 김종빈 선생님을 만나 시 창작을 배우고, 2004년 겨울에 김동수 교수님의 추천으로 대한문학에 등단을 했다. 어찌 보면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 아니었을까?
평생교육원에서 낭송을 배우고 안도 교수님께 동시와 동화를 배우고 했던 기억과 시를 배웠던 이기반 교수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이 그림 파일처럼 스쳐 지나간다. 수없는 고난이 나를 힘들게 하였어도 나는 이처럼 죽지 않고 살아서 나의 길을 가고 있다. 어찌 보면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두 번의 급성심근경색과 십이지장에 천공이 두 군데나 생겨서 피와 물을 다 쏟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척추수술 하고 의료사고로 폐에 공기가 들어가고 기관지가 파열되어 대학병원에서 폐의 공기를 빼고, 기관지 수술까지 하고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으니 내 죄가 큰가 보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어진다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날들. 자의건 타의건 그것은 내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택을 잘못하여 죄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결정을 잘못해 죄를 지은 적도 있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난 적이 있기도 하고 그러한 것을.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는 것인가?
파도는 바람과 함께 온다.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다 그렇게들 산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 삶을 합리화 시키려고 하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허나 난 다르게 생각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도종환의 시처럼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마는 삶은 누구에게나 시련이 있고 아픔이 있고 저 하늘에 높이 떠있는 해만큼이나 희망도 있는 법이니 그 빛을 따라 조금씩 오르는 것이다. 삶은 비극이었다가 희극이었다가 내리막길이었다가 오르막길이었다가 조금은 평탄한길이었다가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길흉화복이라는 말이 생겨난 걸까!
우리의 삶은 물과 같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로, 동그란 병에 담으면 동그랗고, 바위가 있으면 돌아 흐르고 계속해서 낮은 데로 흘러간다. 물은 엎질러지면 주어 담을 수 없듯이 우리가 잘못하고 살아온 행실도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도 물처럼 그리 되어야 한다. 낮은 데로 향하여 길을 내며 순탄하게 흐르는 물이 되어야 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란 영화의 제목처럼 그리 되어야 아름다운 삶이 되지 않겠는가?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교만과 거만한 마음은 행복의 선을 넘지 못한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려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기에 그런 점에서 남편은 나의 첫 번째 스승이다. 나에게 자녀 둘 외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절망만 가득 남겨주고 간 남편은 나에게 세상 욕심을 버리며 살게 했고 마음을 비우며 살게 한 것도 남편이기 때문이다.
나의 젊은 날들이 독수리가 날개 치듯 송두리째 날아간 날의 절망과 허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왔다는 말인가?
그런데 방송대를 입학하게 된 것도 남편의 한 마디 말 때문이다.
“한 번 해 봐.”
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1999년도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2000년도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를 입학했다.
허나 내가 가장 힘들 때 즉 내가 급성심근경색이 오고, 십이지장이 두 군데가 천공이 생겨 다 죽게 되었을 때 남편은 두 눈을 팔고 다녔고 나를 떠나 그녀와 이 년이 넘도록 산 것도 남편의 마지막 선택이란 것을 잘 안다.
난 남편도, 재산도 다 잃고 버겁게 내 운명과 마주하고 있을 때에 딸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많은 세월동안 넋을 잃고 살았다.
어느 순간 자녀들이라도 짝을 맺어 주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살아야 한다는 조그마한 희망의 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척추 수술 하다가 의료사고로 더 힘든 세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고통이 십오 년이 넘도록 지팡이를 놓을 수 없는 날들로 이어졌다. 이러한 고난들로 인하여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시는 내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나를 이끌어 가는 끈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많은 책을 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내 인생의 또 다른 기쁨이 된 것이다.
남편은, 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워만 할 수도 없게 만든 장본인이다. 사랑과 미움 사이 초라한 등불아래 한숨만 쉬고 있는 내 인생은 바람만 불어도 꺼질 것 같은 내 모습 이였다.
성경에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 한다.(사 42:3,4)” 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았지만 나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왼쪽 눈의 혈관이 터져 수술했는데 마취로 인한 의료사고가 생각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까봐 많은 걱정을 했다. 그 후로 넘어져 발목 인대가 늘어났고 수술을 했는데 또 넘어져서 인대가 더 늘어났고 그 후로 발가락에 말초신경염이 오고 콩팥도 많이 안 좋아져 무릎 관절이 파열되었을 때나 또 다시 아주 가느다란 혈관이 막혀서 호흡이 곤란하여 심장 시술을 받을 때에도 마취 없이 시술을 해야만 했는데 그 아픔이야 말로 참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문학 강의를 금암 도서관으로 받으러 갈 때에 나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그 오르막길을 쉬면서 올라간다. 천국은 걱정 근심도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고, 높은 도서관도 올라가다 보면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이 물질적인 면에서 아무 것도 남긴 것은 없지마는 방송대를 들어갈 수 있도록 말 한마디 해 주었기에 시를 만날 수 있었으므로 남편을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제 늦복이 온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을까?
병원에서 누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때를 생각하면 나 자신이 참 한심하고 비참했다. 모든 시련과 고통을 겪고 난 후에 찾아 온, ‘쓰는 일’이 바로 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이 아닌가 싶다.
꽃은 피어야 아름답고 사람은 도전해야 아름답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첫댓글 가슴이 찡한 고백서사...대단한 홀로된 여로의 대미가 분명 화사한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건강,건필 구순자 작가 화이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