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산청 문화원에서 시행한 전국 학생 한글 백일장 공모전에 양곡 시인과 함께 심사를 보고 왔습니다.
지역의 작은 공모전이지만 전국의 초중고등학생 1,000명이 넘게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심사위원 4명이 각각 운문과 산문을 나누어 심사하는데, 제한된 시간 내에 우수 작품을 선발한다는 점에서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편의 작품도 놓치지 않고 공정하게 심사해야할 위치였기에, 정말 눈이 빠지도록 읽고 또 읽은 결과,
마침내 결과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성 작가들도 간혹 어떤 공모전에 글을 출품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우리처럼 이렇게 열심히 심사하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들면서, 6월호 제가 쓴 생활수필(칼럼)을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시골에서 작가로 버티기
소설가 이인규
시골에서 삶, 특히 귀농이 아닌 귀촌은 녹록지 않다.
은퇴자의 경우 넉넉한 공무원 연금 수급자 혹은 도시에서 제법 돈을 모은 자들은 자연을 벗 삼아 텃밭이나 가꾸며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물론 귀촌자에 한정하여 그렇단 말이다. 귀농의 경우, 착실하게 준비한 자들은 논농사, 특수작물 재배, 시설 농사를 통해 도시만큼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내 주변엔 딸기, 감, 블루베리 등으로 제법 성공한 자들도 많다. 그들은 대개 어릴 때 농촌에서 성장하면서 부모나 주위에서 농사짓는 걸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다. 아니면 철저한 준비 끝에 농업 교육을 이수하였거나, 농사지으면서 해당 작목반에 가입하여 서로 간의 정보(재배법, 마케팅, 판로 등)를 실시간으로 공유한 자들이다.
문제는 귀촌, 그것도 이상적인 삶과 창작을 꿈꾸며 들어온 소위,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현실을 도외시한 몽상가이거나 한량이라고 불리는 자. 둘째, 보통 사람들과 비교하여 술, 담배 등 민감한 문제에 취약한 자. 셋째, 도무지 팍팍한 농촌 현실을 타개할 생존법, 이를테면 탁월한 의사소통 능력, 친화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중 절반은 지역 정착에 실패하여 도로 도시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극빈층으로 살면서 꾸역꾸역 돈도 되지 않는, 아무도 몰라주는 나 홀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이쯤 읽으면 독자들은 내가 이 세 가지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고 지레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왜냐하면 첫째, 귀촌 전에 필자는 세 군데에서 필사적으로 공직생활(합 20년)을 마치고 일정 금액의 공무원 연금을 13년째 수령(벌써 1억 원 넘게 받음)하고 있어 아내가 감히 날 내칠 수 없는 구조이다. 게다가 귀촌 후에 즉시 임의 가입한 국민연금도 적은 금액이지만, 내년 초부터 받을 예정이다. 둘째, 도시에 살 때 아내와 최대 쟁점인 술은 약간 과하긴 하지만, 낮술을 일절 금하고 해가 지는 술시에 시작하여 빨리 마치는 바람에 창작 및 설거지, 빨래, 텃밭 가꾸기 등 일상에 거의 지장이 없다. 셋째, 지역 주민자치회나 지역 문학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등 최소한의 소통 능력과 친화력이 있다.
하지만 나의 주장은 최근 5년간의 사정이고, 귀촌 초창기 생활은 위의 세 가지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아무런 생계에 대한 대책 없이 직장을 박차고 시골로 들어올 때 나는 장편 소설 몇 권만 내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줄 알고 돈 걱정은 아예 하지 않았다. 생계비 문제로 아내와 다툼이 잦아지면서 나는 나처럼 지역에 귀촌한 문학인들과 어울려 낮부터 술을 마시며 현실과 너무도 다른 시골 생활에 불만을 표출하거나, 비판적인 문학과 문학인의 성토 및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귀촌 문학회라는 문학단체를 결성, 호기롭게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회원 모두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걸려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다.
그중 한 명인 K 소설가는 서울의 모 대학에서 인도철학을,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자였다. 아이를 셋 둔 그는 집 근처 복지관의 팀장을 맡고 있었으나, 그쪽 사정으로 문을 닫자, 과감하게 어머니의 고향인 이 지역으로 홀로 들어왔다. 버려진 시골집을 개조한 그는 이참에 창작에 몰두, 두 편의 소설집을 내면서 나와 의기투합하였다. 문학회 공식 모임이 아니더라도 그는 나와 따로 만나면서 유명 소설가로서 꿈을 키웠지만, 결국 생계가 해결되지 않자 아내와 아이들이 사는 서울로 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떠나자 우리 모임의 유일한 여성 소설가 역시 지역 청소년 센터에 취직되어 그만두었다. 그 무렵 나 역시 아내의 압박으로 인근 도시의 경비로 취업하여 문학회를 소홀히 하자, 남아 있던 두 시인 역시 극심한 경제적인 문제로 차례대로 이혼까지 당하였다.
그리고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남아 있던 시인 중 A는 이혼의 충격으로 매우 힘든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그와 나는 가끔 만나면서 안부나 묻고 술자리를 가졌지만,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를 정도로 연락이 뚝 끊겼다. 하지만 아직도 자주 술자리를 가지면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시인이 있는데, 그는 나와 같은 고향인 부산에서 귀촌한 B였다. 젊은 날,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이 지역에 사는 여성과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시골로 들어왔다. 아내의 고향 마을에 살던 그는 생계를 위해 교통 중심지인 ‘원지’라는 곳에서 최초의 커피 전문점을 차렸다. 아직도 아가씨가 있는 시골 다방이 대세였던 면 소재지에서 차린 그의 가게는 한때 유행을 선도하였으나, 결국 손님이 많지 않아 폐업하였다. 그런 후 그는 나름대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직장에 다니면서 시를 쓰고 또 발표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벌이가 시원찮아지면서 아내와 끝내 이혼하고 말았다.
한동안 그는 삶의 의욕마저 잃은 채, 시도 포기할 정도였지만, 귀촌 문학회의 마지막 보루인 나의 설득 끝에 재기하였다. 현재까지 두 권의 시집을 낸 그는 올해 들어 도서관 시설관리직에 임시직으로 취업하면서 세 번째 시집을 출판 준비 중이다. 몇 년의 실직 끝에 첫 월급을 받던 그는 내게 술을 사면서 “시가 없었더라면 아마 저는 폐인이 되었을 겁니다.” 하고 수줍게 말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나는 “버티자, 떠난 여자는 할 수 없다. 여자가 뭔 필요가 있냐? 시골에서 너와 난 오롯이 시와 소설로 버틸 수밖에 없다.” 하고 당차게 말하였다. 한때 나를 추앙했지만, 지금은 나의 상관이나 마찬가지인 아내가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말이다.
이인규
경부울 문화연대 스토리 위원장
등단 : 2008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저서 : 장편소설 '사랑과 절망의 이중주' 등 다수
leeingu6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