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양, 성경 그리고 봉천
4박 5일 코스로 중국 심양을 다녀왔다. 패키지여행과는 궁합이 안 맞아 마음먹고 정한 배낭여행이다. 중국어는 쎄쎄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당연 역관이 필요했다. 지난해 늦가을 상해를 누빌 때 수고를 한 역관(곽부장이라는 근무처 선배님)을 다시 섭외했는데 전과 달리 뱃똥을 튕기는 바람에 공술을 사고 공을 들였다. 심양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하얼빈, 장춘, 요동, 안산을 다녀오는 일정을 잡았다. 짧은 시간에 이 코스가 가능한 것은 근래 고속열차 개통으로 시속 3백 km 질주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얼빈은 당연 안중근 의사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뜻을 기리는 제사장이 필요했다. 일원 중 제일 연장자이신 일흔이 넘은 도박사님을 정사 겸 제사장으로 모셨다. 부사 겸 돈 관리를 맡은 이박사, 사진 등 역사의 검증을 책임지는 현시대 화공 박 박사, 견마잡이인 나, 그리고 연암 박지원 닮은 한량인 김이사란 비장까지 하여 도합 여섯이 떠나는 유람이다.
그런데 왜 유명 여행사 탐방 주 종목에 끼지도 못하는 그곳을 가고자 한 것일까. 나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고구려 우리 땅이니까. 그렇다면 고구려 발상지인 집안이나 우리의 영산 백두산으로 가야지 왜 심양이냐. 중화인들은 고구려 하면 질색을 하고 백두산이라고 해도 싫어한다. 그들에게는 곧 죽어도 장백산이다. 그들이 철저히 봉쇄를 하고 소수민족이라고 업신여기며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우려 하는 데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백두산이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우리 역사가 아닌 게 되는가. 역사는 자연스럽게 시간의 굴곡을 쫓아 면면이 존재하기에 억지춘향 격 동북공정을 떠들어봐야 지워질 것도 잊혀 질 것도 아니다. 실은 일행들 대부분이 이미 백두산을 다녀온 상황, 색다른 역사 루트가 필요했다. 나는 툭 불거진 볼떼기와 눈두덩, 넓은 이마에 굽은 등(몽고인들도 이 모습과 유사하다)으로부터 영락없는 고구려인들이 여전히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중국 남경 박물관이 소장한 양직공도(6세기 양나라 시대 제작한 사신도) 에 따르면 백제 사람들은 정말 세련되어 보이고 고구려인은 상체를 벌린 호기어린 모습으로 보이며 신라인들은 촌스럽기 그지 없으며 왜(일본)는 옷도 입지 못한 초라한 야만인으로 그려져 있다. 예로부터 예맥족들은 콩장류를 즐겨먹고 맥적, 꼬치 등을 잘 구워 먹었다. 개성에 설야맥적은 지금도 알아주는 명물이다. 발걸음 옮기는 족족 마늘을 빻아서 버무린 그을린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나중에 천산이란 동네에서 우리의 막된장 비스무레한 양념에 생파를 찍어 먹는 모습을 보고 나는 환하게 웃었다. 북경이나 상해와는 생김새나 먹는 습속이 확실히 달랐다. 비록 말은 달랐지만 영락없는 고구려인들이다. 거기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흔적에 병자호란의 한 맺힌 상처, 그리고 북간도 봉천 길림의 용정 등등..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없는 너무도 친숙한 만주 땅이고 요동벌이 아니던가. 사실 즐기자고 떠난 통속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 기나긴 역사, 과연 국가란 무엇일까 하는 다소 부질없는 추상을 떠올리며 알토란같은 글감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 나는 '열하일기 자취 소리' 라는 글구멍을 다 메꾸고 '심양고궁'이란 글 제목 밑에 빈 칸 하나를 남겨 두었었다. 북간도, 봉천, 조선 만주... 심양은 변천사만큼 그 의미를 충분히 갖는 곳이다.
심양으로 가자! 연암 시절 말로만 북벌을 외쳤듯 나 역시도 가보자 하면서도 사실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 굴러 들어온 떡인가. 중국 특수가 불어 사는 곳 근처 청주공항에서, 그것도 매일 오가는 저가 비행기가 뜬단다. 그로 용기를 낸 심양이다. 그때까지 나는 심양이 일천만 명이 사는 만주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주섬주섬 챙긴 심양, 조선족이 몰려 산다는 심양 서탑 부근과, 고속열차로 하얼빈, 장춘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여행꾸러미는 의외로 쉽게 꾸려졌다. 인터넷으로 민박집을 찾아 전화를 했다. 대번 억센 조선말이 튀어 나온다.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별 세개 짜리 호텔은 최소 하루 7만원인데 민박은 아침 김치찌개 포함하여 2만원. 비수요기 저가 항공료까지 하니 4박 5일 경비가 일인당 65만원을 넘지 않는다.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에 가이드를 자청하고서는 일행들을 꼬드겼다. 갑시다 가요, 고구려로!! 내 공상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항공료도 내고 비자 신청도 마치고 가는 날만 꼽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그 이름도 낯선 메르스, 그래도 우리는 감행했다. 오히려 데카메론처럼 역병을 피해 잠시 도피하는 격 아닌가. 사실은 포기할 때 물어야 하는 위약금이 아까웠다. 여행은 바람이다.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새로움을 찾아 윙-하고 들떠서 날아가는 게 바로 여행이다. 4박 5일 내내 부푼 가슴은 진정이 안됐다. 오는 날 오기 싫어 쩔쩔맸다. 그래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는 말, 이는 맞는 말이다. 지치고 힘든 육신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맞바꾸는 게 여행이기도 하다. 어제 돌아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지만 나래를 탄 마음은 고달픈 육신을 늘 능가한다. 여행 길, 그것도 초행길에서는 실수도 하고 때로는 귀인도 만난다. 이번 여행길에도 많은 실수를 하고 또 귀인을 만났다. 그것은 여행이 주는 보너스, 잔재미다. 그중 대표적인 세 가지 실수와 세 명의 귀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실수, 우린 한 푼이라도 절약하고 주차문제에서도 자유롭자고 대전에서 청주공항까지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신탄진역에서 아침 7시 17분 발 무궁화호를 탔다. 8시경 청주공항 역 도착. 역이라고는 하는데 승무원도 역사도 없이, 기차가 잠시 섰다가 간다. 간이역도 아닌 셈이다. 우린 총총히 내려 관제탑이 보이는 곳을 향해 믿고 걸었다. 대합실은 쿠쿠 밥솥, 화장품, 신라면, 박스더미가 넘쳐나며 중국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제주항공에서 내린 중국 관광객들이 환승을 하러 대거 들이 닥쳤다. 면세점은 한국화장품으로 꽉 차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한류로구나. 그런데 메르스라니... 걱정이 앞선다. 10시에 이륙하니 2시간 못 미쳐 (시차 때문에 시계로는 1시간) 11시 경 심양 도착이다. 민박집 아줌마 말로는 공항에서 셔틀버스 타고 심양역 종점에서 내려 거기서 택시를 바꿔 타면 기본요금 밖에 안 나온다고 했다.
일행이 여섯이라 택시타기를 대비하여 오기 전부터 두 조로 나누었다. 한 조는 역관이 타고 다른 조는 한자에 익숙한 영감님들이.... 버스에서 내려 하얼빈 행 고속열차 표를 먼저 예매하고 숙소로 가기로 했다. 버스가 정차한 큰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서둘러 줄에 섰다. 그런데 아무래도 수상했다. 역에 기차가 안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 터미널이었다. 그런데 건물 제목이 재밌다. SK 건물. 돌아와 알아보니 동북 최대의 버스터미널 '심양 SK 버스터미널(沈阳爱思开汽车客运站)'로 한국 SK 네트웍스가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옆으로 더 가야 심양역(그들은 남역이라고 부른다.)이 나오는 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좌우 살펴보지 않고 줄부터 선 게 잘못이었다. 어느 새 오후 1시가 넘은 시각, 소득도 없이 배만 무척 고팠다. 시작부터 실수라니... 기차표는 놔두고 터미널 안내하는 여인에게 적당한 식당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는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요렇게 가면 어디가 나온다 하는 안내만 해줘도 고마운 노릇인데 길을 앞서 가니 뜻밖이었다. 혹여 음식점에서 사주를 받은 전문 삐끼가 아닐까 의심이 났다. 이러다 바가지를 쓰는 게 통례 아니던가. 그 아가씨는 SK 건물 4층에 있는 ‘자하문’이란 곳까지 안내를 해주고는 이내 돌아섰다. 지배인이란 젊은 친구가 인사를 했다. 건물이 제법 으리으리한 게 겁이 더럭 났다. 그런데 웬걸, 한국말을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돼지 갈비를 먹고 냉면까지 가뿐히 해치웠다. 한국에 비하면 가격이 절반도 안 된다. 냉면은 시원 달콤 정말 진국이었다. 알고 보니 그곳까지 안내해준 젊은 한족 여인은 그들과는 전혀 무관했다. 젊지도 않은 여행객들이 큰 가방을 들고 헤매는 꼴이 딱해 보여, 한국식당에 들러 제대로 알아보라는 배려가 숨겨 있었던 듯싶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 부산이 집이라는 젊은 지배인 한국청년(이성원)은 우리가 머물 민박집을 안다며, 골목이 복잡해 초행에 찾기가 어려울 거라면서 굳이 함께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아무 조건도 없는 말 그대로 호의!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내가 이 글에 부러 그 식당 간판과 그 친구 이름을 게재하는 것은 고마움을 다소나마 덜고 싶은 마음에서다.
생면부지, 바깥세상은 겨울 찬바람처럼 냉랭하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훈풍은 어디서든 불어온다. 여행의 맛 중에는 이런 풍경들이 꼭 들어가 진한 추억으로 남는다. 갑자기 분 훈풍에 당시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고맙다는 표시도 제대로 못했었는데 여전히 마음이 따스한 것을 보니 그 심양의 따스한 기운이 그대로 체온 속에 남아 있나보다. 심양 도착과 더불어 찾아온 실수와 행운, 행운의 여신이 우리 곁에 있다는 막연한 긍지. 이방인들은 작은 미담으로서도 힘이 다시 났을 테다. 우린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아줌마는 억센 톤의 조선말을 쓰는 전형적인 조선족 여인이었는데 딱 부러지는 말투를 닮은 특유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군기반장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바로 두 번째 만난 귀인쯤 된다. 어찌 하는지 어찌 가면 되는지 그녀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줄곧 따라했다. 안 그러면 혼이 날 것도 같았다. 짐을 풀고 먼저 심양고궁부터 들르기로 했다. 간 김에 바로 옆에 위치한 심양의 번화가인 중가(中街)에 들러 한 번 호기도 부려 볼 참이다.

첫댓글 조 선생님, 어제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식사도 못하시고 가셔서 조금 서운했습니다만...
선생님 덕분에 심양까지의 와유를 즐깁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조선생님, 혹시, 혹시, 했습니다.
8,9년 전(?)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좋아지셨습니다.
역시 바다 건너 유랑하신 효과를 보고 계십니다.
자주 뵙고 싶습니다^^
중국여행 할 때 선생님의 글따라 가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조용하신 모습처럼 글 또한 잔잔히 흘러 가슴으로 전달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65만원으로 심양 4박5일 여행이 가능하다니 은근 구미가 당깁니다. 저도 늦지 않은 시일에 심양행 궁리를 해 봐야겠습니다. 꼼꼼히 올려주신 글은 가보지 않은 저희들에 대한 배려겠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