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 속의 11월 1일
사건事件 |
1755년 |
포르투칼 리스본에 지진(주민 약 6만 명 사망) |
1800년 |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개관 |
1905년 |
한국, 도량형 신제도 채택 |
1908년 |
한국의 첫 월간 잡지 ‘소년’ 첫 발행 |
1909년 |
사법청의 개청으로 법부 폐지 |
1909년 |
창경원 시민에 공개 |
1911년 |
압록강철교 완공 |
1911년 |
총독부, 교과서편찬 개시 |
1922년 |
오스만 투르크 제국 멸망 |
1925년 |
중국, 무한정부 수립 |
1931년 |
동아일보 신동아 창간 |
1934년 |
부산-장춘간 직통열차운행개시 |
1935년 |
나진항 개항 |
1939년 |
외국인 입국체재 및 퇴거령 공포 |
1945년 |
북한 노동신문 전신 ‘정로(正路)’ 창간 |
1949년 |
서울-부산간 민간항공취항(운임 1만100원) |
1950년 |
코리아타임즈 창간 |
1951년 |
미국, 네바다서 원폭실험 개시 |
1952년 |
미국, 세계최초로 수소폭탄 실험 |
1954년 |
알제리 독립 요구하며 7명의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 시작 |
1954년 |
호남선에 특급열차 태극호 등장 |
1956년 |
국내 최초 TV방송국 HLKZ-TV 정규방송 |
1956년 |
영국-프랑스군, 수에즈운하 폭격 |
1956년 |
오스트리아, 영국-프랑스와 단교 |
1960년 |
서울대생들, 민족통일연맹-장면총리 미소방문-남북학생회담 등 주장 |
1960년 |
인도네시아, 석유 산업 국유화 발표 |
1961년 |
알제리서 혁명7개군 데모 |
1962년 |
소련, 화성에 로케트발사 성공 |
1963년 |
베트남 군부쿠데타(1차)로 정반민 장군 집권(2일 고딘디엠 대통령 피살) |
1963년 |
부산 수산센터(종합어시장) 개장 |
1964년 |
월맹게릴라, 월남 美공군기지 습격, 사상 56명, B57기 27기 파손 |
1966년 |
문화예술 종합 월간지 ‘공간’ 창간 |
1966년 |
잡지의 날 제정 |
1977년 |
미국, 국제노동기구(ILO)탈퇴 선언 |
1978년 |
미국, 긴급 달러보호책 발표 |
1980년 |
문교부,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 결정 |
1980년 |
사회정화위원회 발족 |
1980년 |
전국 인구-주택 센서스 실시 |
1983년 |
미국 신형토마호크 미사일 영국 도착 |
1983년 |
미해병, 그레나다 철수 |
1983년 |
새주민등록증 발급 개시 |
1986년 |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 |
1987년 |
해병대사령부 재창설(73년 10월 10일 해체) |
1988년 |
서울시 인구 1천28만6천5백3명 기록 |
1988년 |
외환보유-송금 자유화 |
1989년 |
한국-폴란드 국교 수립 |
1993년 |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 |
2001년 |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합병한 새 ‘국민은행’ 출범 |
2001년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김병현, 한국인으로 첫 월드시리즈 진출 |
2002년 |
대한민국 전자정부 출범 |
탄생誕生 |
1757년 |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 출생 |
사망死亡 |
1894년 |
러시아 민족주의 지지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사망 |
1916년 |
신소설 작가 이인직 사망 |
1925년 |
백암 박은식 선생 사망 |
1948년 |
여순반란사건 반도 89명 사형집행 |
1948년 |
중국 상선, 남만주해에서 폭발, 침몰로 6천여 명 사망 |
1908년 오늘 육당(六堂)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뿐이었고 1년이 넘도록 200명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광수, 홍명희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참여한 ‘소년’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천재 소년 최남선은 창간호에 한국 최초의 신체시로 평가받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해 새로운 시 형식을 선보였다. 그의 시는 점잖은 말투를 사용하던 시조와 달리, 일상 대화에서 쓰이는 단어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최남선은 또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자’는 내용의 글을 실어 국민들에게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차례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소년’은 1911년 5월, 4권 제2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31/2008103100971.html에서 가져옴. |
[1908년] |
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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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1월 1일 최남선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 창간호 표지 |
1908년 11월 1일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에 불과했고 1년이 지나도록 200명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소년'은 최남선을 중심으로 이광수 홍명희 등이 필자로 참여한 당시 최고의 잡지였다.
그러나 '소년' 창간호는 이보다 훨씬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 실린 최남선 자신의 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도도한 서세동점(西勢東漸), 제국주의 침략의 암운 속에 새 세기의 새벽을 맞는 한국인 의식의 주소를 밝힌 것이다. 최초의 신체시로 불리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의 권두시였다.
18세의 천재소년 육당은 바다를 빌려, 새 시대의 주역인 '소년'은 힘차고 두려움을 몰라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시선이 대륙을 떠나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바다'는 문명 개화를 통해 도달하고 싶은 동경의 공간을 의미한다.
내용면에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근대적인 자아의식이나 미의식을 개척하지 못하고 '계몽주의'에 머물고 말았지만, 형태나 표현상에 있어서의 시도가 근대시로의 출발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신체시라는 시사적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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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chdb2.chosun.com/history/를 기본으로 다듬었음.
1985년 11월 1일 오전 4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대학본부 건물은 밤새도록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서울대 각 단과대학 학과장급 이상 90여 명의 보직교수는 조용섭(현 서울대 명예교수) 부총장 주재로 학내 시위 수습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전날 밤 10시부터 시작해 장장 6시간 동안 회의를 했지만 교수들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박봉식 서울대 총장은 농성 중인 학생들이 대학본부로 다시 몰려올 것을 우려해 대학본부와는 한참 떨어진 학군단 근처의 교수회관으로 몸을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상황 보고를 받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1일 아침 열린 서울대 전체 교수회의엔 400여 명의 교수가 참석해 교수 전체 이름으로 학생들의 자숙과 이성을 촉구하는 공고문을 채택했다. 교내 곳곳에 공고문이 게시됐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경찰이 서울대 캠퍼스 안으로 들어와 수배 중인 서울대총학생회 부회장인 손영진(당시 22세·원자핵공학과 4년) 씨를 31일 오후 2시 55분에 잡아갔다. 경찰은 이 문제를 학교 측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다. 서울대 대학본부와 도서관 사이에 있는 광장인 ‘아크로폴리스’에선 손 씨 주도로 경찰 수배 중 자살한 민추위 위원 우종원 씨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경찰은 이때를 틈타 전투경찰 150여 명을 추가로 투입해 행사장에 최루탄을 던지고 손 씨를 붙잡아갔다. 한마디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순식간에 당한 학생들은 흥분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500여 명의 학생은 학교 밖으로 철수하는 경찰을 뒤쫓으면서 돌을 던졌다. 학생들은 순식간에 2000여 명으로 불어나 경찰들과 격렬하게 맞섰다.
경찰이 철수하자 학생들은 대학본부로 몰려갔다. 경찰이 교내로 전격 투입된 데는 학교 측의 동의나 방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학생들은 “어용(御用) 총장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본부 건물에 무차별적으로 돌과 각목을 던졌다. 이 바람에 유리창 200여 장이 박살났다. 특히 총장실은 학생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돼 집무실 창문이 산산조각 났다. 학생들은 “총장 퇴진” 구호를 외쳤고 대학본부 건물 진입에 실패하자 도서관을 점거해 철야농성을 벌였다.
1980년대 대학가는 이처럼 암울했다. 대학가의 축제는 말이 축제였지 마지막 날엔 어김없이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공교롭게도 지금 검찰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다. 그는 검찰 수사가 정치적 탄압이라며 법원의 영장 실질심사를 거부하고 31일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김 최고위원은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당시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여장(女裝)을 한 채 서울대 정문을 통과하여 학내 집회에 참석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뀐 23년이라는 세월은 정치 상황뿐 아니라 참으로 많은 것을 바꿔 놓은 것 같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1101/8651698/1에서 가져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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