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토사수팽) [편집]
9.1. 밥값을 갚다[편집]
졸지에 제왕에서 초왕이 되긴 했지만, 초나라 지역은 한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한신은 위풍당당한 왕이 되어, 과거 자신을 찌질이로 여겼던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신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아낙네들을 찾아나서 천금(千金)을 주었고,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에게는 백전(百錢)만 주면서 이런 소리를 덧붙였다.[72]
"공은 소인이다. 덕을 베풀면서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밥 한 그릇의 은혜를 천금으로 보답하니 일반천금의 고사다. 밥 수십 그릇은 겨우 백전으로 돌려줬지만
그리고 과거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걸어가게 했던 사람도 찾아내서, 초나라의 중위(中尉)에 임명하였고, 이번에는 이런 말을 부하들에게 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욕보였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한들 이름을 얻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 공을 이루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는 명언을 몸소 실현한 것이었다. 즉, 이 이야기들은 한신의 대인배스러움 등을 나타내는 일화로 설명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가랑이 사이를 긴 것은 한때고 밥을 빌어먹은 건 여러 날이 되었는데 분명 후자도 한신이 분기탱천하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조롱하며 백전만 준 것은 오히려 자기를 중간에 저버린 정장에게 쪽을 주기 위해서 이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신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대인이라서 이랬다기보다 그냥 옹졸해서 했을 가능성도 있다. 진짜 한신이 대인이었다면 정장에게도 천금을 주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겨우 몇달 후에 종리말에게 저지른 행동과 이어보면 후안무치한 일화로 변하기도 한다.
개중에는 유방이 장량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제일 싫어한다는 옹치를 개국공신에다 앉힌 것을 따라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
여하간에 용저 등에게 조롱받았던, 답이 안보였던 막장 시절의 생활이, 왕이 되고 난 후의 한신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고의 과정이었던 점만은 알 수가 있다.
9.2. 반란혐의와 회음후 강등[편집]
그러나 한편으론 매우 의심되는 행동도 일삼았는데 당장 항우의 몰락 이후에도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은 초나라의 주요 장수 종리말을 숨겨준 것이다. 심지어 황제인 유방이 종리말을 체포하라는 명령까지 한신에게 내렸는데도[73] 이를 무시하고 숨겨준 것이다.[74] 거기에 한신은 초 땅에 부임하자 곧 군대를 대거 양성하고 초나라 지역을 순행하는 등 수상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렇게 되자 앞에서 말한 행동들도 죄다 반란을 준비한다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그것도 가뜩이나 같은 시기 영천후 이기, 연왕 장도가 각각 반란을 일으켜 유방이 직접 진압하러 간 상황에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특히 이기는 항우의 부하 출신이라 항우세력의 재집결에 전 한나라가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었다. 정리하자면 한신은 과거 항우의 본거지에서 항우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모으는 짓을, 그것도 황명까지 어겨가며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초나라 쪽의 여론도 한신에게 부정적이었는지, BC 201년 음력 12월 다름아닌 이렇게 징병된 병사 중 한 명이 한신의 진지를 드나들더니 유방에게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75] 작년 연왕 장도의 반란으로 유방과 신하들 모두 반란에 신경이 곤두선 상황에서 신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유방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군사를 동원해 한신을 묻어버려야 한다" 고 강경하게 주장하는 등, 일단은 '혐의' 수준인 한신을 비호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한신 토벌을 주장했다. 한신이 평소에 인망이 없었거나, 혹은 이미 유방과 운명공동체였던 제장들 입장에서는 한신이 여러 행적과 태도로 볼 때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존재였을 수 있다. 어쩄든, 확실한건 한신은 한나라 조정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제장들의 태도와는 별개로 유방은 오히려 침묵을 유지하며 신중을 기했다. 유방이라고 한신이 별로 이뻐서 그런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이렇게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는 쪽에 가까웠던 듯. 유방은 진평에게 대응책을 물었는데, 지금 폐하의 장수, 군대가 한신을 이길 수 없고 한신이 모반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고 한신도 계획이 새어나간걸 모르니 그냥 놀러온 척 하고 찾아가서 한신을 간단하게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남방의 운몽택(雲夢澤)으로 놀이를 나간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진현으로 모이게 했다. 물론 이는 한신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회음후 열전에 따르면 처음에 한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었는데, 당초에는 놀라 아예 한번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괴철의 제안에 우물쭈물했던 그때처럼 머뭇거리다가 직접 나서서 억울함을 밝히면 유방이 용서해줄거라고 믿고 그만두어버렸다. 이에 누군가가 한신이 숨겨주고 있던 '종리말의 목을 가져다 바치면, 황제가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하자 한신은 그 이야기를 종리말에게 꺼냈다. 그러자 종리말은 한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황제가 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바치면 나도 죽지만, 곧 너도 죽을 것이다. 너 같은 자를 어찌 장자(長者)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결해버렸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베어 바리바리 싸들고 유방을 만나러 갔는데, 당연히 유방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근흡(靳歙) 등은 한신을 사로잡아 수레에 태워버렸다. 한신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과연 사람들이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가 삶겨진다(狡兎死 走狗烹)라 한 것과 같구나!"
이 한신의 누명 주장을 들은 유방은 "나라에 반기를 든다는 고변이 있었다"라며 차갑게 반박한 뒤 한신에게 수갑을 채워버린다(출처- 사마천, 사기 회음후 열전).[76] 진승상세가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윽박지르며 "네가 뭐가 억울하냐!"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낙양에 도착한 유방은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을 사면하고 직후 한신의 초왕자리를 박탈하고 그 땅을 유씨 친척들에게 분봉할 것을 주장한 전긍의 건의를 받아들여[77] 10여 일 뒤 한신의 초왕 직위를 박탈하고[78] 회음후로 강등시켜 버린다. 이렇게 한신은 이번에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79]
9.3. 다다익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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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그 이후로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병을 칭하면서 조정의 조회나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면서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러다보니 불만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내가 주발이나 관영 같은 놈들하고 동급이 되다니!" 하고 불평했다. 어느 날 번쾌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번쾌는 후작으로 강등당한 한신과 동급이었지만, 연신 굽신거리며 한신에게 왕 대우를 했다. 한서에서는 번쾌가 한신을 대왕으로 부르면서 "왕께서도 자신이 신하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미 단단히 꼬인 한신은[80] "살다 보니 번쾌 따위와 같은 항렬이 되었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한신이 망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한신이 폄하한 관영, 주발, 번쾌는 다 초한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익장들이며 고제와의 관계도 한신보다 훨씬 가까웠고, 또 관영은 한때 한신 휘하에서 함께 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으며 특히 번쾌는 공적도 높은데다 여후의 여동생과 결혼했기에 유방과 친인척 관계가 되는 중신이다.[81] 그리고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번쾌는 한신을 예를 다해 위로하려 한 행동임에도 한신의 이런 삐딱한 자세는 결국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었다고 할 수 있다. 사타구니 밑도 기어서라도 참고 참았던 한신은 이미 뭐든 지 맘대로 돼야 속이 풀리는 소인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은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는지, 유방을 만나 각 장수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이때, 유방이 한신에게 "내가 어느 정도 숫자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라고 대답했고, "그럼 니는?"이라는 유방의 질문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臣)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에 표정이 썩은 유방이 그렇게 잘났으면서 왜 자신에게 사로잡혔는지[82] 물어보자,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은 부족하시지만, 그 군사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군들을 거느릴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은, 유방이 실제로 재주는 없는데 운이 좋았다는 식의 조롱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신을 몇 번이나 간단하게 요리해버리는 유방에 대한 한신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석이야 각자 알아서 해보자.[83]
[예고]
몇회 전부터 '한고조열전'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한신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 옴으로서 이야기의 줄거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닥다리를 너무 높이 올라가다 보면 떨어지는 수가 있기에 이쯤하고, 다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다음 회부터는 '한고조열전'의 본 줄거리로 되돌아 가려고 합니다. 기대하사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