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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첩 속에는: 전민 시선집
제 1 부 : 사랑의 언어
인생론
사랑의 언어
지는 벚꽃이 더 아름답다
산사 풍경
진달래꽃
5월밤 연가
민화 한 폭
배나무골의 배서방은
밤꽃 피는 밤
바닷가에
빗속의 연가
민들레꽃
지리산 행
피력(披 瀝)
가을비 곱게 내리는 저녁나절에는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며
*바람 일기
저 은(銀)밭에 빨간 꽃송이를
제 2 부 : 내 유년의 보리밭에는
기도
동물농장에서 온 편지
내 유년의 보리밭에는
충청도
독도
빈바다
대나무
사는 방법
일기
징검다리 건너
삶의 자투리
보문산
중생에도 법어가
50회 생일에
그대 마음 훔쳐 싣고
자연의 아들
저울산 밑의 풍경화
제 3 부 :빛바랜 사진첩 속에는
바다
국화
열매
간월호의 철새
소 라
바람이 떨어뜨린 쪽지
또 하나의 직함
수박밭 며느리
우리 부부는
바람꽃 해후
계룡 단풍
가을 노래
흑백사진 한 장이
순이는 여승의 딸
강강술래야
가슴꽃 이야기
지리산 반순이
빛바랜 사진첩 속에는
제4부:물구나무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蘭( 난)
연꽃
두릅나무의 한(恨)
승부시대
동물답게 살고 싶어요
도망친 암소
지구가족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의원님의 자격요건
꽃신 사오셨네
진눈개비 쌔려 날리던 봄날
마누라 미투
어떤 고해성사
물구나무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비무장지대(DMZ)
애기봉에서
스님은 행복도시로 내려갔지
제1부 사랑의 언어
인생론(人生論)
용돈을 쓰듯
많이도 써버렸다
반은 썼을까
그 이상을 써을지도
남은 생애(生涯)
존졸히 써봐야 할 텐데
누가 보태 줄 것도 아니고
누가 잘못 썼다고
나무랄 것도 아니고
인생은 용돈
사랑의 언어
1
촛불은 심지를 태워
불꽃을 피우지만
사랑은 영혼을 뽑아
가슴을 더웁힌다
목마른 빛을
당신에 내품는
<보노니아>의 돌
2
꽃은 봉오리
달은 초승빛
사랑은 귀먹은 소경, 벙어리
잠긴 빗장을 빼려다
수백 번 기진해
별 한 번 훔쳐보며
다시 일어나서
마셔보는 한 움큼의 너
3
땡볕에 말라가고
파도에 씻겨가고
불타 없어져
패인 자국 위에
하얀 눈 뚫고
뽀족이 솟아 나오는
파란 싹
4
품에 넣지도
꺼내지도 못하는
중심점은
완벽한 원을 낳는다
이름도 없으면서
관계도 못 찾으면서
둘러처진 생울타리
그 안에
쏟아지는 햇살
맴도는 의미(意味).
지는 벚꽃이 더 아름답다
절정에
사정하고
한꺼번에만
거두어주는 너
누가
사꾸라라
이름 붙였나
하얀 꽃 태워
깜장 믿음 버찌
품지 못할 향기는
탐내지 않는 거란다
산사(山寺) 풍경
저녁노을 침묵으로
나비 되어 산사에 내려앉고
외진 승방 감아 도는
스님의 독경소리에
외지에서 찾아온
수녀 한 분이
동양화 한 폭으로 머물러 있다
-석가여래상과 동안의 이 수녀님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도수 높은 안경을 눌러 쓴
무척이나 키가 큰 스님 한 분
다갈색의 바리때 닦아들고
승방 안쪽 문을 들어선다
수녀님과 스님의 두 눈 빛은
한 점에 멈춰 포개지고
무섭게도 조용한 시간은
어둠처럼 덮여가고
불교학원을 나와
수녀가 된 그녀와
수도원을 나와
스님이 된 그이의 그 이후는
서로가 말하지 말자는
오직 하나의 그 무엇으로
화석 되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저녁노을 나비 되어
동양화 한 폭에
말없이 내려앉는.......
진달래꽃
샛바람 불면
젖꼭지 간지러워
길가 언덕
맴도는
연달래
꽃불 난
앞뒤 산
두견새도
밤잠 잊었나
북으로는
고구려의 만주 벌판
남으로는 신라의 한라산
몸으로 지켜온
정 5품(正 五品)의 그 절개
난(蘭)달래
진달래꽃.
5월밤 연가(戀歌)
노을꽃
막 지고나면
밤 꽃몽올 다시 피어나는
오월 밤 달무리
철없는 불나비
눈부신 불빛 따라
무작정 찾아온 것도
큰 죄가 되나요
새 생명
싹 터 올라
천상에서 지상으로
울려 퍼지는 사랑의 음율
개골, 개골골, 개골개골
둔산동 샘머리 공원
공사장 빈터마다는
오월 밤의 연가(戀歌)만이.
민화 한 폭
보름달빛 곱게
색동옷 받쳐 입고
세월 나들이 나선
백두대간 암호랑이는
계룡 장터 구경나온
숫총각 하나 나꿔
등위에 들쳐 업고
가을 하늘 아래 첫 동네
처녀 하나 어금니로 찍어
새벽달 목 넘어 갈 때까지
추억 속 대바구니에
과거의 다슬기 줍기.
배나무 골의 배 서방은
천년 냇가에
은밀히 숨겨놓은
솜털 구름 속을
가을 나비와 피라미는
하늘 천 따지
속절없이
숨바꼭질을 즐겨도
아내와 딸년마져
도회의 불나비로
떠나버린 뒤
배나무 골의 배 서방은
배반의 반세기를
오늘도 어김없이
가슴속 깊히 못 박고 있지
박힌 못 피와 함께
세상을 떠돌고 있지.
밤꽃 피는 밤
오뉴월 어스렁달밤을
헤엄쳐 나온 밤꽃 향
돌담 넘는 들고양이
청상과부 순덕이 댁
안방 창문에 곰실곰실
밤꽃은 밤에만 핀다
밤꽃향은 가시가 있다
밤새껏 뒤척이는 잠자리
짓누르던 밤파도 소리
달빛 섞인 밤향 가시로
허벅지를 콕콕 찍으며
세월 빛 촘촘히 박음질
민들레꽃
맨발로 짖밟아 다오
차라리 뿌리 채
뽑히고 싶어라
나는 앉은뱅이꽃.
이제사
두고 온 하늘 그리며
눈물 짜 어쩌잔 말이냐
외옴드레, 민들레야
햇살 터 이슬 마를 때
정성껏 피워 보이고
짙은 어둠 덮어 올 때
곱게 접어 숨으며
날 좋아 받은 날
하얀 속살 빼내
네 혼(魂) 쒸워
오월 하눌 찾고 싶은.
바닷가에
미역 냄새 해초 내음 갯골 타고
촉촉이 불어오는 솔숲 언덕에다
행주치마 너비만 한
초집 한 채 오뚝이 마련하고
둘이는 하나처럼 살겠네
토방 위엔 세파에 깎인 조가피와
천년 씻긴 조약돌이 가득하고
나는 철없는 내 아이들처럼
맨발로 모래밭을 휘젓다가
개흙이 묻은 손끝으로
원고와 헌책들을 매만지며
책갈피 작은 바다 파도 따라
갈매기 되어 나를래
뭍을 떠난 꿈의 통통선
피안에 와 닿을 때
밤 파도 소리는 일기 시작하고
비워둔 또 하나의 방에는
상현 달빛 외줄기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속삭임을 부르며
가냘픈 맨살을 창틀에 비벼대며
제 몸 앓고 있을걸세.
빗속의 연가
바이칼호수일까
갠지스강 상류이거나
세느강 혹은 나일강 일지도
아니면 아주 가까운 곳인
대청호수이거나 금강일 수도
모태는 강과 호수의 심원
그리던 하늘로 비상하다
산등성이와 나무가 가로막고
골바람의 등쌀에 못 이겨
산줄기와 해안선을 따라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천사의
고향은 마음속의 수중궁궐 .
지리산 행(行)
1
철따라 시간마다
님 맞는 표정은 달라도
그대는 역시 처녀림
바라보아 좋은 곳은
몸매보다도 긴 머리결
하늘 뚫는 봉우리
빨강 스카프 목 위에 걸고.
철쭉꽃 찾은 봄
여름 덮은 녹의(綠衣)
핏빛 가을 단풍 터널
눈꽃 활짝 핀 겨울 산
눈 뜨면 눈부시고
눈 감으면 가슴 뛰고.
새벽안개 숲을 헤엄치고
아침햇살 꽃을 불태우고
계곡 따라 청아한 목청
골속마다 경쾌한 산새 노래
꿈을 싣고 가슴속 젖어드는
지리산의 체취여.
2
갈나무숲 바다
바다 위에 운해(雲海)
운해 위에 인해(人海)
오색 물결은 단풍
아니면 사람
그것도 아니면 무지개인가
하늘 여는 첫 주봉
천황봉 돌아내린 산바람도
다리 풀고 쉬어가는
노고단 돌바위 길
피아골 원색 단풍
큰 숨 더 크게 들이키면
온 몸에는 오색물이 빨아들고
가슴에는 분홍 꽃이 피어나고
이 한 몸 자연 속에 인간인가
인간 속에 자연인가.
3
피아골의 점심 해는
밥만 먹고 사라진다
질펀하게 깔아놓은
산그리메 둥굴리며
가을 산 폭포수 샘터 되어준
섬진강 푸른 물줄기
허리끈에 옹쳐매고
박경리 할머니의
토지(土地) 마을 지나간다.
새색시 부끄러움처럼
곱게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매콤하게 스며드는
뿌리 깊은 민족의 한(恨)
전라도 삼백리 같은
온갖 회한의 추억을
펌프질 하는 역사의 오솔길
조영남의 화개장터.
강마을의 노을
마음 깊이 칠해놓고
어둠 속에 그려보는
남원골 춘향 얼굴
광한루 위에 크고 있는
초승달은 마음만 급하고
등산객 발자욱 따라
대둔산 중턱까지 따라온
지리산 산 냄새하며
섬진강 푸른 물소리하며
남원의 춘향 마음.
피력(披 瀝)
1.
산초 열매 반쪽 벙글어
별빛 채워 아무는
백양나무숲 개울가
조약돌 씻는 마음에서
손 탐 없이 지켜온
풋머리 산 그림자
비린내 채 가시지 않은
무지기 소녀
일곱 층 끝 단
참새 떼 날아와
노란 햇씨를 뿌린다.
2
비 갠 잔디밭
풀잎마다 열린 무지개
미끄럼 타며 노는 물방울
휘파람 곱게 불면
일제히 水液을 펌프질하는
나무들의 행진
화강암 굴 바닥에
솟아오르는 돌순처럼
톡톡 솟아나오는 샛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와 같이 나를 위하여
童貞을 지키듯
잃지 않은 눈매
마음밭 깊은 곳엔
사철 푸른 소나무가
다른 방에는
때가 고조된 아내가
나를 기다리듯
고향 따라 뻗어가는 싸리순
고향 하는 지켜주는
그녀와의 눈맞춤.
가을비 곱게 내리는 저녁나절에는
고향 뒷동산 장수바위에 올라
소 꼴 뜯기던 앞 냇둑 잔디 위에 누워
유년의 하아모니카를 불고 싶다
흘러내리는 베잠방이 쥐어 잡고
옥수수대 단물 씹던 옛 추억
흘러가는 뭉개구름 마냥 쫓아
산 넘고 물도 건너 어디든 가고프던
그때 그 동심 호흡으로 다시 몰아
이 빠진 하아모니카에 넣어주고 싶다
지금쯤은 중년의 문턱에 서있을
소꼽놀이 함께하던 동네 계집애들
자치기 딱지치기 같이하던 머슴아들
통학 버스 안에서 눈맞춤 하던 단발머리
눈이 커 꽤 예쁘던 자주색 가방까지
이름 석 자마저 아름아름해오니
기억의 내 사전에서 빠저 버리기 전에
겉봉 없는 긴 편지라도 쓰고 싶다
교외선 완행 밤 열차를 타고 싶다
길게 매달린 객차 칸칸마다
창문은 열려 불빛은 쏟아지고
솔바랍소리 대신 들어와 차는데
저 멀리 반딧불빛도 간간이 보이고
토담 위에 흰 박덩이 달빛에 정겨운 밤
긴 머리칼 정결히 매만지며
독서삼매경에 빠진 소녀와 만나
하늘과 바다를 노래하며
작은 별을 바라보고 싶다.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며
현주소를 찾으러 동사무소에 갔다
모처럼만에 흘러 거슬러 가본 수 십 년.
밤꽃 향기 음악 되어 흐르는
가난해도 흡족한 내 고향, 금국리
깜장 고무신짝에 파닥이던 피라미는
지금도 솔밭 건너 긴 모랫벌
겨울 소나무 내품는 깊은 소리
산파도 몰고 오는 쌍류(雙流) 골짜기
여름밤 돌 틈에 가재 찾아가듯
꺼져가는 추억 속에 불 붙여 들고
남의 부인이 되어 버린 옛 여자를 잠시 훔쳐
희미해져가는 자욱들을 찾아보고도 싶고.
달빛 쫓다 키가 너무 커진 미류나무
물소리 새소리 뒤섞인 몇 아름의 의미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면사포 쓴 신부를 간음하는 주례처럼
발아(發芽)하는 싹눈을 떼어가는 꽃샘바람
쌀집 뒷방에서 꿈꾸던 무지개꽃
길가 옆 문간방, 고개 넘어 김 과부댁 건넌방
부표 되어 떠다닌 수십 년
가난으로 무디어 피지도 못한 채
꽃보무라지 옛 모습 그대로 화석 되고.
내가 혼자에서 둘로 셋으로 넷으로
세포 분열 하여가며 하나가 아님을 느낄 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면서
성장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지
오고가는 사람 선별하지 않고
대문 없이 통하는 유리창, 미닫이문
닫힌 듯 열어 두었던 해미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도 바닷바람은 불어오고
고리대금 하다 새벽에 떠난 목사부인
전세값 올려주고 살던 집 빼앗아간
계산속 환한 수학선생 사모님
부인에 비해 꽤 인정 많아 반갑던
정년퇴임 면서기 한 계장 아저씨
그러나, 읍성을 돌며 찾은 깊은 뜻
심어줄 값진 보물 하나 얻어 길렀어
현주소를 챙기려 동사무소에 가
수줍음 타는 새 각시의 젖을 만져가듯이
엣 주소를 은밀히 더듬던 나
현실 앞에 소스라쳐 놀랐다.
“나는 범인이 아닙니다”
“도피자도 아닙니다”
“거센 삶의 파도를 타고서
바람 쎄지 않은 순한 곳을 찾아
돛이 없는 배를 수 십 년 저어왔을 뿐입니다.“
주소 기입란이 벅차게 살아온 날들
한 번도 눈 돌리지 않고 지켜온
맨 위 본적지, 내 고향 금국리 376 번지
그 아래로 쓰인 주소 마르기도 전에
다시 쓰여 지고 또 지워진 일곱 개의 주소
세상물정 모르면서
흙먼지 뒤범벅이 되어 뛰놀던
나의 어린 것들은 그래도 지워진
그 때 그곳들이 좋았단다.
강물은 바다의 어데로
얼마만큼 차지해 흐르고 있나
새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아파트 4층 내가 앉을 자리에는
어린 것들과 장난감 로버트가
양지 바른 묏 기슭 내가 놀던 그 자리에는
낯모르는 아이들이
깨끗하게 새로 쓰여진 현주소
하늘과 땅의 힘이 맞닿아
줄다리기 하는 가운데 지점.
바람 일기
바람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여름밤 하늘의 별처럼
6.25 사변 통에
아들 잃고 딸마저 빼앗겨
화병이나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되어
한곳에 머물러
자리 잡지 못한다
바람은 정이 많아
더웁혀진 가슴 속에
깃발로 펄럭이다가
고향의 짙은 냄새며
날아간 그리움의 날개깃을
쫓아나서 보기도 하고
바람은 첫정을 심어놓고
자취를 숨기어 버린
그녀의 현주소를 찾아
함석 대문도 흔들고
유리 창문도 두드려 본다
저 은(銀)밭에 빨간 꽃송이를
빗 바람 쌔리는 소리
그 소리를 재우려는 속소리
천둥 번개 치는 소리
대답하는 조그마한 목소리
그래도 못다 핀
깊숙한 내 소리
두었다가
얄따란 네 겹 망사
벗으면 하얀 속살 깊이
훔쳐 온 비수(匕首)처럼
숨겨 두었다가
버선발 흰 구름 차며
비단 폭 치마 너울거리시며
그이가 오시는
간밤 꿈결에
장미꽃 피우자
저 은 밭에 빨간
꽃 한 송이를.
제2 부 : 내 유년의 보리밭에는
기도
왕이 아닙니다
황금도 아닙니다
지위나 권력도 아닙니다
당신의 노예가 되어도
밟고 뭉개려 하지 않고
촌스럽고 못났어도
외면하며 따돌리지 않고
모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지청구 자주 하지 않고
반가와서 내민 손을
쓸쓸히 다시 넣지 않게
잠자리에 들어와서
남모르는 눈물 흘리지 않게
베풀고도 남은 당신의 뜻을
마지막 나의 선물이
될 수 있게 살펴주소서.
동물농장에서 온 편지
숨이 가빠요
힘이 빠지네요
하늘빛마저 노랗고
무지개는 목을 조릅니다
물려받은 습성 그대로
우직하게 살아온 죄로
복부에는 쇠파이프가 박히고
심장은 펌푸질 당하며
네 발바닥이 스프로 녹아버릴 때 까지
알사탕 받아먹으며
대신 내어주는 생 쓸개즙
황금에 불꽃 핀 주인님
긴 줄 속에 차례 기다리는 보신족
쓸개 빠진 환웅 자손 벗어나
인간성 동물로 환생하여
쇠창살 속 의형제나 맺읍시다
태풍 불어 여름 휩쓸어 가는 날
복부를 수술 받은 아기 곰이.
내 유년의 보리밭에는
내 유년의 풋보리 밭에는
꿩알 주으러 아침에 들어간
동네 친구 철이가
점심대가 넘어 저녁
다시 몇 밤, 몇 달
몇 해가 지난 여직까지
억새꽃 나비 되어
노을밭 서성여도
깜장 고무신 뒷굼치 한 쪽
내보이지 않고
내 유년의 청보리 밭에는
숨바꼭질 놀이 하다가
짚더미 넘어간 술래
숫자 세어가는 목소리
들려올 듯, 말 듯
앞머리 뒤퉁수 덮어
꿈결에서 챙겨봐도
긴 머리칼 한 올
넘어오지 않고
내 유년의 갈보리 밭에는
길찬 장다리 꽃밭에서
밀려온 노랑나비 한쌍이
날개깃에 묻흰 보리 깜부기
서로 털어다가
호랑나비가 되어
마음속 사래 긴 밭
돌고돌아 찾아봐도
풀피리 소리 한 잎
돋아나지 않고
독도
막내는 밤새껏 추워서 떨었다
망망대해 파도치는 곳에서
엄마 품이 그리워서
형제자매들이 보고파서
밤새워 뒤척이던 악몽을 토하며
괭이갈매기와 함께 을었다
어제도 오늘도 흐느껴 울었다.
아침의 동해에
해가 떠오르며 파도도 가라앉고
지나온 과거의 아픔을
현재에 의젓하게 삭이며
이제부터는 응석만 부리지 말고
투정만 부리지 말고
영원한 미래 조국의 영토임을
빈 바다
물 빠진 갯벌엔
파도를 그리는 빈 배가
한 폭의 그림으로 머물고
목이 쉰
갈매기 두어 마리
고향을 부른다
빈 바다는
알 살 홀딱
드러내놓은 여자
일, 그 후에
곤히 잠에든 아내
썰물이
훑어줄 속살을
고이 어둠으로 입는다.
대나무
나에게는
한 송이 화려한 꽃도
한 알의 틈실한 열매도
약속되어 있지 못합니다
언젠가 에는 꽃이 필 수 있고
정말로 언제쯤엔 열매가 열릴 수 있는지
자신도 모르며 살아오고 있는 오늘
비바람이 씻고 지난
몇 십 년 후에는
꼭 한 번 쯤
사랑의 꽃몽올도
믿음의 열매 알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며
잎 떨어져 가는 아픔을
마디마디에 숨기고 있는
인고(忍苦)의 긴 세월
기도의 내 시간.
사는 방법
산이 좋아
산과 함께 살다보면
산사람 되어
들꽃 향기 아쉽고
들이 좋아
들과 함께 살다보면
들사람 되어
솔바람 소리 그립고
어제는
산을 올랐고
오늘은
들로 내려오는 참이다
비슷하게 사는 방법 없을까
이 세상 어딘가엔
두 팔 뻗고 노래 부를
그러한 곳이 있다는데
이 세상 어딘가엔
아까운 것 다 털고 일어서도
부러운 것 하나 없는 곳도
정말로 있다던데
황금 나팔을 불며
달려오는 쌍두마차는
내 차지가 아니라 해도
간간히 흐르는 실구름 한 점
얻어 두었다가
참참히 나르는 산비둘기
들 멧새 날개 깃 하나
빌어 두었다가
저 딴 세상 얘기
훔쳐 들으며
살아도 좋은.
일 기
오늘 한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희미한 껍질 한 쪽
들어와 차지 않는다
안개 낀 거리의 골목도
겨울비를 맞으며 걷다가
목노에 앉아 입술을 마주치던
따스한 유리컵의 촉각도 되살아나는데
화단에 꽃씨를 묻고
기다리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몇 년 전 사귀었던
안경 쓴 여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날
내 속 깊이 일렁이던
파도 너비가 떠오르지 않는다.
여직껏 미뤄온 중대발표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징검다리 건너
내 예까지 걸어온
반평생은 맨발에 자갈길
뒤돌아보면 가시밭길
한발 헛디디면 빠져버릴
한 치 아래 수렁 길
징검다리 건너 저쪽엔
뭉게구름 꿈처럼 피어나고
논두렁 물소리, 숲속의 새소리
저녁놀 받아 불타는 사르비아꽃
보름달 마중 나온 가로수
해 돋는 곳, 달 뜨는 곳
그대 찾아 수십 년
징검다리 건너 새로운 길엔
땀에 젖은 작은 이마 씻어 줄
새색시 기다리고 있다네
지나온 길벗 삼아 노래하며
오는 세월 악수해줄 수 있는.
삶의 자투리
조그마한 화단 안의 풀꽃들과
눈싸움을 즐겼다
때로는 고집스러운 담벼락을 뚫고
나는 새의 깃에
하늘 가슴 깊이 안겨도 보고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 위에
또 다른 무게로 내려앉는 상(像)
눈물의 한 올을 찾아 백두산 천지로
한라산 백록담에서 캐낸 기쁨의 한 올로
숨겨둔 보물 상자를 찾아가듯
삶의 자투리를 찍어내며.
충청도
입술 꼭다문 채
참아온 일천 삼백 사십 년
햇살 터져
꽃몽올 피어나는
한반도의 심장
가슴 뜨거운 충청도여.
칠백년의 금빛 역사도
찬란했던 백제의 왕조도
낙화암 절벽 아래
삼천궁녀 되어
순간처럼 묻혀 버리진 않았다.
비단강 물줄기
다시 모여 서해 바다
계룡산 정기 뻗어
웅진, 사비, 한밭 뜰
불타는 용광로여
빚어내는 역사여
무령왕릉 금관
아침마다
금술 하나씩 더해가고 있다.
보문산
박팽년(朴彭年)의 가슴 너비
송시열(宋時烈)의 눈 높이
해와 달과
크고 작은 별들이
눈맞춤 하다
마음 맡긴 곳
유년의 풀꽃
청춘의 나뭇가지와
愛戀의 열매가
산파도 일궈
역사책 넘기는 곳
천년 두껍아 나오렴
목타는 보물접시에
아침 햇살 가득 담아
그믐빛 삭이며
새벽같이,한밭 뜰로.
중생에도 법어(法語)가
하늘 아래
산
산 그 아래
나
바다 저 아래에서
움 돋는 빛이여.
바다 위애
너
너 그 위에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여.
빛과 소리는 하나다
하늘과 바다도 하나다.
50회 생일에
더도 덜도 말고
딱 오십 년 후에
제 발로 떠나버린 사람
등 밀어 보내버린 사람
돌 던저 과녘 맞춘 사람
맞은 사람 가리지 말고
눈자위 맴도는 사람
뒤퉁수마져 멀어저간 사람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지난날에 입었던
헌 누더기 옷 과감히 벗어버린 채
알몸으로 이 자리에 다시 만나
가슴속에 깊이 묻어둔
우리들의 이야기 모두 꺼내
막소주나 한 잔 곁들여 나누며
과거 여행 떠나보면 어떨까
내 귀빠진 턱
톡톡히 한 번 낼터니.
그대 마음 훔쳐 싣고
새벽 봄비 발자취에
선잠 깬 이른 아침에는
막 목욕 후 머리 빗고 있을
고향 언덕 청보리 밭
배동 오르고 있는 新婦가
야리리 풋살 내음 품기며
하루의 쟈크를 열고
비 맑게 갠 뒤
옛 그림자 , 아침햇살 타고
닦아놓은 내 마음의 창에
파도처럼 밀어닥칠 때
화사한 찔레꽃 덩쿨
곱게 덮어 가는
유년의 뒷동산에 올라
풀피리 늴리리, 저기에
하얀 드레스 자락 날린다
소장산 연달래 꽃불
저녁노을에 옮겨 붙어
바라보며 뒤는 가슴 깊이
연분홍 꽃물 스며들 때
지켜오던 자리 용수철처럼
빈손 탁탁 털고 일어서
역류하는 물살따라
그대 마음 훔쳐 싣고.
자연의 아들
지구는 어머니의 태반입니다
숲속에 피어나는 풀꽃 한송이
그 위를 찾아주는
고마운 벌과 나비
산토끼 모는 살쾡이
비둘기 채어간 독수리 까지도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의 피붙이, 형제 자매 입니다.
희롱하지 마셔요
짓밟지 마셔요
산허리를 끊어 문명의 심을 박고
大地의 동맥을 막아 생살이 썩어가고
처녀림에 인공의 말뚝에 박혀
회한의 사생아만 잉태하고 마는
갓 태어난 물고기가 죽어가고
막 피어난 꽃송이가 시들어 갑니다
자연은 인간을 넘보지 않고
자연은 인간을 배반하지 않아요
소낙비 막 씻고 간 솔숲
영혼의 속삭임, 시냇물
새 생명의 약속, 새싹
신비로운 탄생, 꽃봉오리
맛갈스러운 향내음, 열매
좁쌀만한 하루살이에서
바위덩이 같은 불곰까지도
한솥밥을 먹으며
호흡을 함께하고 있는
지구속의 대가족입니다
인간은 지구가 낳은 자연
자연의 아들입니다.
저울산 밑의 풍경화
청둥호박 밀가루 범벅
쑥 개떡 호밀 수제비
대대로 이어 받아
통사발 쭉쭉 빨고 있는
안산 넘어 거인
풋보리 열무김치
홑바지 베 등걸
포만(飽滿)의 용트림으로
코를 골고 있는 저울추는
만져도 깨워도
할미 젖통처럼
입 다문 새 각시처럼
동네 처녀, 아낙, 할멈
도라지 캐러 산에 가고
남자들은 막장에 나가고
뒤 처진 남정네들
국수내기 뽕 치러 주막 가고
사립문안 남은 아이들마저
시엉, 잔대 캐려 빠져 나오고
댓돌 위에 강아지만 졸고 있는
들마루 위엔 수탉만 활개 치는
글방 훈장도 하고
갱엿도 고아 파는
웃뜸 김선상댁, 상뜸 조씨네
큰 아들 서울 나가
미장공 되어 까딱없는 방서방 댁
속바지 속속 깊이
고린 지전(紙錢) 숨겨 있을 거라고
냉천 빨래터 뛰뚝이는 바윗돌 위
윤초시 맏며느리는
깊은 한숨 꺼내 휑궈빨다가
구 구장 만나러 지나가는
면서기 박주사 자전거 뒷바퀴 따라
굴렁쇠 되어 쫓고 있었다.
산밭에 몸 파는 이웃들
참도 안되 밭둑으로 길옆으로
오뉴월 갯벌에 능정이처럼
사카린 탄 단물에다
질커덩이 삶은 보리감자
꺼진 삶 임시 속일지라도
일평생에 단 한 번
자식은 공부시켜
붓대 잡은 월급쟁이
검은 양복에 흰 칼라
면서기, 조합서기 되는
꿈으로 채워 가는.
새경으로 받은 암송아지
뼛골 팔아 키운 금송아지
읍내 장터에 내다 팔던 날
허리춤 깊이 감춘 돈 뭉치
두 손을 떼지도 못한 채
삼 십리 길 단숨에 달려와
옥양목 세 폭 깊이 싸
빈 뒤주 속에 감춰놓고
맷돌을 올려놓고
도구통도 엎어놓고
맏아들 예쁜 이마 위
가운데 중(中)자 별처럼 반짝이는 날
어렵게 넘어가던
목 부러진 성황당 고개 위의
헹가래 치던 뭉개구름
송이송이 꽃송이
송이구름 피어나고 있었다.
잎담배 엮어 가는 사랑방
눈 맞춘 이씨 댁과 머슴이
파리 빠진 팟죽
이 빠진 밑둥
건져내면 그만이고
다시 나면 닥상인 도회물결 타
온 몸 휘감겨 뒤틀고 있을 때
방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깎아놓은 생고구마
새크맣게 물들도록
옆집 골방에 숨어
꺾어온 갈대꽃으로
깊은 몸 벗은 살에
은은한 간지럼치기 놀이
별 뜻 없이 우물 파다 건진 흙
뽑아낸 돌 뭉치
뫼 흙 파다 밥 짓고
잔듸풀 빤질빤질
병사공 문중묘지 위에서
미끄럼 타던 몇몇 애들은
북새풀 긁어모아
성냥불을 켜댄다
콧구멍이 새크맣게
머리칼이 뽀얗게
밭 갈던 산지기 김씨
쟁기 놓고 작대기 들고
칠팔월의 뇌성병력
몰이꾼에 밀리는 산토끼
총소리에 놀란 장끼
솔포장 사이 새로
독수리에 쫓기는 병아리들.
무수 밭으로 가자
배차 꼬리 도리러 가자
잘생긴 장대 무우 하나 덥썩 뽑아
딸려 나오는 흙
발바닥에 툭툭 털고
옆구리에 쓱쓱 문질러
엄지손톱으로 겉껍질 돌려 벗겨
어금니 깊이 깨물며
단지, 베속것 땀 젖어
벗고 잔 댓가로
꿀 찾다 얻은 맹물
덤으로 쌓인 자갈밭.
산비탈 말 타는 녀석
맨손으로 짱아 잡는 녀석
갈아입은 솜바지 조끼
몽땅 적셔 볕에 벗어 말리는 녀석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 녀석
유별난 남자애들은
전봇대 위에 맨발로 기어올라
철사줄을 몰래 끊어다가
미끈한 생소나무 중대가리 마구 베어다가
쓰깨또를 마련하고
새침뜨기 계집애들은
굴뚝 밑 양지 뜸에
깨어진 새금파리 바가지 쪽
헤어진 고무신짝 모두 모아
찰흙으로 떡 빚고
사랑방으로 모이자
여물 솥에 보리감자
군불 지펴 삶아 놓고
아랫목 짚북데기
북석북석 달아오를 때
웅크린 다리 맘껏 뻗고
묵은 달력 뒷판에 윷판 그려
도, 개 , 걸, 윷, 모
무나물에 생명태국
해위쌈에 달걀부침
기다리던 조씨네 밤 제삿밥
소식 감감하자
굴뚝에다 살그머니
메꾸리 덮어 애먹이고
닭서리 나간 녀석들
도둑고양이 되어
개울뜸 넘어 헤집다가
달빛 받아 맑은 물에 세수하고
제집 닭 하나 목 비틀어 오면
흰 연기 검게 피어
보름달 뒤덮는 밤
김과부댁 솔가지동
샛서방 모르게 동이나도
저울산
저울산 밑의 풍경화는
만져도 깨워도
할미 젖통처럼
입 다문 새각시처럼.
제 3부 :빛바랜 사진첩에는
바 다
삶의 무게에 짖눌려
가슴이 답답하여 올 때
야위여 가는 오늘의 그믐달을
어제의 보름달로 잘못 바라보다가
고향 냄새가 못내 그리워 올 때엔
태초의 태양과 시원한 바람을 잉태한
영혼의 태반, 어머니, 저 바다로 가자
바다 해(海)자에는 어미 모(母)자가
바닷속에는 자비의 손결이 있다
일렁이는 파도를 첫아이처럼
돌보는 바다에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다소곳 여민 가슴속에는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가 있다
天地가 하나로 만나는 수평선 위에는
사랑과 은혜가 점선으로 그어져 있다.
국 화
내 너를 좋아하는 연유는
사라지는 계절의 뜨락에서
삶 자체가 표현이기 때문
눈물겨운 가식과의 전쟁이
그대만의 색깔과 향기만이
마음밭 풀숲의 한 모퉁이에
의미다운 꽃으로 피기 때문.
화려한 보상을 꿈꾸지도
풍성한 열매가 목표이기도
짭은 세상 살아가는 것이
세속적인 잔치도 아닌 것이
마음과 가슴의 텅 빈자리에
고집스런 삶의 향기론 의미로
꽃답게 다가와 피어주기 때문.
열 매
한 알의 꼬마 우주가
손바닥에서 숨쉬고 있다
탄생의 기쁨과 설레임이
욕망의 화려한 용틀림이
폭풍우 속의 천둥소리와
긴 가뭄을 이겨낸 시련이
어떻게 계절의 의미로 피어
작은 우주로 열매 맺었는가
우리에게도 베풀어주는가를
따스한 가슴에서 머리에 받아
고개 숙이게 하는 작은 우주.
간월호의 철새
겨우내
지친 날개를 풀고
잠시 쉬어 가는
철새들의 천국
간월호의 모래섬
갈대밭엔
매와 말똥가리의
비정한 공습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예전엔 참 좋았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천적
인간들이 찾아온 후
쉼터를 조금씩 빼앗긴
물오리와 기러기 떼들은
찾아온 고향
간월호의 모래섬을
어부가 갯벌을 떠나
도회 불빛 따라 몰려가듯
하나 둘 씩 떠나고 있다.
소 라
궁둥이가앗뜨거워
깊은 잠에서 깨어 난
대천 앞 바다의 소라는
청계천 굴다리 밑 손수레
포장마차 낡은 가스통 위
양은 냄비 속 끓는 물이
찾아온 밀물인지도 모르고
봄바람에 흔들리는 산과
출렁이는 파도를 그리며
껍질 밖의 세상에 취해
우리는 하늘 아래 한세상
흘러가는 새털구름이요
몰아가는 샛바람이라며
밤새워 긴 목만 움추린다.
바람이 떨어뜨린 쪽지
캄캄한 밤보다는
대낮이 더 무서워요.
맹수보다는
인간이 더 무서워요.
자연 파괴범이 들어왔어요
못된 인간들이 몰려와
하늘이 내려다보고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어린 풀꽃의 목과
나뭇가지를 비틀어 꺾으며
나의 온몸을 더듬고 있어요
치마폭을 헤집고 있어요.
또 하나의 직함
아내는 달걀장사 사모님
나는 수박장수 선생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양계장 집 아줌마 좀
도와주며 살고 싶다며 몇 번 거들더니
아내는 아파트 통로의 달걀장사 사모님이 되셨고
트럭운전수와 눈 맞아 도회지로 줄행랑친
수박밭 며느리의 홀시어머니 사정이 하 딱해서
스무나문 통 남짓 사다가 인심 좀 썻더니
그 이틑날 부터 나는 수박장수 선생님이라는
또 하나의 직함을 달고 다니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의 젊은 주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최고만 찾기 때문에
알이 굵은 계란과 조금 싱싱한 수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뽑혀서 나가고
작은 것, 깨진 것, 꼭지 빠져 시든 것만 남아
중년 부부인 우리들의 마지막 차지가 된다
사실은 가정에서도 매한가지다.
수박밭 며느리
봄 나비, 가을 고추잠자리로
꽃과 나무, 창공이건 바위거나
싫도록 앉았다 마음껏 날고파서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월
역류하는 물줄기 되돌려 놓고
동굴 빠져 불빛 따라 왔어요
토끼 같은 자식, 능구렁이 남편
여수 같은 시어머니, 호랑이 시아버지
헌신발작 엎어놓듯 해놓고
보름달 바라보며 헛간 기둥 부여잡고
삼백 예순 닷새 그 어느 하루인들
뼛속 깊히 찾아드는 전율, 그 추위
그 누구 하나 알아주면 덮어줄까
2.5톤 트럭에 내 인생 모두 싣고
망 뚫고 나온 까투리처럼
들판 지나 숲, 비탈진 언덕에
장승처럼 서 있어요
산 아래 저 쪽에 불빛이 보여요
내 아직은 잘 몰라요
한 세상 박수 치며 살아가는 법
민들레꽃은 밤에 활짝 피고
설익은 수박도 달빛 받아
분홍빛 속살 더욱 돋아나고
한낮 땡볕 받아 세상사는 맛
찾아내는 것이 삶이 아니겠어요
삶의 답은 모범답이 따로 없고
오답이 더 정확할 때도 있거든요.
우리 부부는
마주보며 서있거나
살을 맞대고 누워 있어도
영혼을 섞으며 살아간다 해도
내가 아내일 수 없고
아내가 내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늘과 땅처럼이나.
잠시 떨어져 있거나
생각하면서 가고 있는 길
비록, 똑같지는 않다 해도
나만이 혼자일 수 없고
아내만이 따로 일 수 없는
마치, 나무와 물처럼이나.
바람꽃 해후(邂逅)
사랑의 女神 아프로디테가 애인
아도니스의 상처에 키스를 하자
바람 따라 피었다가 지고 마는
사랑과 이별의 다채색 무늬 결
피고름 헤집고 꽃이 피어났네
결 따라 피고 다시 지는 魂, 꽃.
남과 북, 틈 사이, 반세기만에
찾아내 대어본 따스한 실핏줄
봄 꽃몽올 터 오는가 했더니
새순을 또 흩날려 버렸나
치솟는 눈물 안으로 감추며
또 다른 상처의 바람꽃 邂逅.
장승처럼 굳어버린 사랑과 恨을
이 가슴에 묻고 반 백년 살다가
바람 따라 와 만난 것도 잠시
구름으로 또 흩어져야만 하는가
두 몸통 속에 한 색깔로 녹여놓은
神話보다도 더 찐한 바람꽃의 邂逅.
계룡 단풍
연다홍 갑사치마
살금살짝 걷어올린
동학의 쎈 바람
드러나는 신비
보이는 속살
암용추
숫용추
사이로
석간수(石間水).
먼발치에서
그대 모습 바라보며
그믐달빛 한 올을 뽑아
가을 밭 계룡 치마 폭 속에
연거푸 방사해댄다
찢기우는 초승 밤
타오르는 시월상달.
가을 노래
출발이
잘못이었다면
결과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가두려 할수록
몸밖으로 삐져 나온다
가을밤
영혼의 깃발을
펄럭이는 계절풍
사색은
삶의 원동력
삶은 사색의 열매
기다림은
시간이 길수록
아픔이 깊을수록
그 가치의 농도가 짙다
마음 아파 본 이는
거짓 사랑에도
가슴을 열고
자선을 베푼다
추억은
유년의 텃밭에
흑백사진 한 장이
내 나이 아주 어려
철 아직 나지 못했을 때
내 나이 조금씩 더해
턱수염 까칠까칠해 올 때
내 나이 한참 들어
고향 박차고 뛰쳐나올 때
한 장의 흑백사진에 그려진
숨은 그림은 그대로의 明暗 밖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숨어버렸지
내 나이 혼자는 어려워
아내 얻어 같이 섞을 때
내 나이 이제는 부끄러워
어린것들 마주보기 민망할 때
내 나이 올해로 마흔 넷
돋아나는 새치 자꾸 덮고 싶을 때
묵은 책갈피 속에서 뛰쳐나온
흑백사진 한 장의 숨은 그림이
총천연색 활동으로 돌아가며
가슴 촉촉이 젖어들고 있음은?
순이는 여승의 딸
하얀 백합을 빼어 닮은 얼굴에
그림자 한 번 내린 적이 없는
삼학년 팔 반 사십팔 번 순이는
공부는 물론, 친구들과 잘 어울려
우리 반에서 그야말로 짱이었지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학교에
여승 한 분이 바람처럼 스쳐와
담임인 나와 보호자의 자격으로
한 시간쯤은 귓속말도 나누다가
뭉개구름처럼 사라지기도 하고.
이승 떠나기 전, 한 노파로부터
제 품에 안겨진 핏덩이 순이는
열일곱 해를 곱게 자라주었지요
아직도 저만을 제 어미로 알며…
이 모두가 부처님 큰 뜻이지요
앞으로 몇 년이 안 지나서라도
우리 딸 순이가 천생배필을 만나
어미 곁을 떠나는 결혼식장에서는
꿈속에서도 만나 본 일이 없는
두 남녀가 지켜보고 있을 걸요
지금의 순이 나이에 순이를 낳은
중후한 한 여인의 미혼모 마음과
지구를 반 바퀴쯤 단숨에 달려온
교포사업가인 과거의 대학생이
가슴에서 눈, 눈에서 가슴을 오가며.
강강술래야
달 떠온다 달이 떠온다
동해 동천에 둥근 달이 떠온다
깊은 마당 얕아지고
얕은 마당 깊어지게스리
억신억신 자꾸만 뛰어보세
팔월이라 한가위 달 밝은 밤
선창가의 구성진 목소리
푸른 달빛 아래 繡 놓아 퍼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야
남생아 남생아 놀아라
절래절래 가 잘 놀아라
동그라미 속에선 남생이 춤
원 밖에서는 엉덩이 춤이 들썩들썩
천냥짜리 처네 띠고
만길 담장 뛰어 넘보다
곤때 묻은 자색 조끼
열댓번은 찢고 찢었다네
우리 어매 이를 보고 야단커든
달 밝은 뒷동산에 유자나무
유자 따러 올라갔다 찢겻다고
그래도 안 듣거든 청사홍사
당사실로 흠침 없이 감쳐주세
말자말자 덕석 말자
비가 온다 덕석 말자
풀자풀자 멍석 풀자
햇빛 나온다 멍석 풀자
비야 오지마라 딸밭에 장구 친다
기왓장 밟아 깨지는 소리
넓고 넓은 들판 한가운데
가슴 뛰는 연분홍 저고리
햐얀 치마, 옥양목 외씨버선
동네 처녀, 아낙들 모다
동구 밖 안산 벌판에 모여
강강술래야, 강강술래야.
가슴꽃 이야기
恨이라는 이름의 江을 사이에 둔 남쪽과 북녘 마을에는 눈이 고운 총각과
마음씨가 착한 처녀가 하늘과 땅처럼 서로가 바라다만 보며 살았습니다.
보름달이 솟아 오르는 날에는 뗏목을 만들어 타고 갈대숲에서 만나 내일을
약속하며 오늘을 다지기도 하였습니다.
진눈깨비 쎄게 내리치던 그믐밤, 등이 붉은 이무기가 나타나 사랑의 뗏목을
삼켜버린 후 둘이는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강물줄기를 타고 흘러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버린 두 총각과
처녀는 변함없이 찾아주는 보름달만 바라보며 추억 속에 살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각자 마음씨가 비단결 같은 손자와 손녀가 그 때
그만큼 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움에 불타버린 마음밭에 깊히 심겨줄 가슴꽃 한 송이,
마지막 단 한번만의 안타까운 사연을 찾아 이른 봄 첫 새벽 희망산 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복사꽃이 피었다가 다시 지기도 몇 번 ,눈꽃송이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그 누구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먼 훗날 막다른 골목, 절망봉 아래에는 남녀가 부등켜 앉고 있는 모양의
큰 바위가 있다는 이야기만 전해올 뿐입니다.
바위틈 가슴 속에는 이름 모를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고 하여
나는 가슴꽃이라는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지리산 반순이
사람들 품에서 자라다가
지리산 숲 속으로 돌아간
애기 곰 반순이가 몇 달 후
뼈만 남은 死體로 돌아왔다
臨江의 사슴처럼이나
사람 때가 묻은 반순이는
순수한 자연에 낄 수 없다고
툇자를 맞은 生命일까
人家를 잃고 산 속에서
野生人間이 되어 살던 곰녀는
생식을 하며, 몸에 털도 나고
인간회복을 포기한 채 죽었다
사람이 생육한 반순이나
자연이 뽑아간 곰녀는 매한가지
산 짐승은 산에서 살아야하고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하고.
빛바랜 흑백 사진첩 속에는
한 대낮에도
꼬리가 열두 개 달린
불여우가 살짝 내려와
장닭을 물고 달아나던
유년의 흐릿한 기억
두메산골 내 고향
나즈막하게 흙벽돌로
쌓아올린 담머리엔
별빛 찾아와 내려앉은
하얀 박꽃과
숭숭 엮은 싸리나무 사립
반쯤은 허물어 내린 굴뚝이
보름달빛에 더욱 정겹고
아침 일찍 나가보면
저녁마다 알알이 알밤이
새벽별들과 함께 소복이
쏟아내려 고여 있던
달빛 가득 담긴 장독대.
떡갈잎 따다가
댓돌 위에 펼쳐놓고
찰흙으로 빚어 만든 송편
깨어진 사금파리는 숟갈
사나대 꺾어다 젓가락 만들어
나는 신랑, 순이는 내 각시.
한 가족에 끼지도 못한
지금쯤은 손자 손녀도
서넛쯤은 족히 보았을
코흘리개 내 친구 석구는
밥상을 발로 차버리며
심통을 자주 부려댔었지.
제4부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蘭( 난)
한 세상
욕심 채워 살려면
못할 일 뭔가
모래 섞인 물에
눈부신 빛 막아 줄
벽 하나 있으면 되지
짧은 생애
광내며 살려면
못 살 거 뭐 있나
곧은 줄기
있어서 흐뭇한 친구
꿈의 향기 찾아주면 고만이지
젊은 문지기가
아무도 모르게
공주님의 머리에
꽂아준 선물
난초꽃
연꽃
고향은 진흙탕 세상에
뿌리내려 자라왔을망정
파란 하늘이나
흐르는 개울물
통 굵은 넝쿨이나 가지도
넘나보지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아주 촌스럽지도 않게
텅 비워둔 속내
올곧은 양심의 줄기
잎을 흔들어 대는
솔바람 결 따라
수줍어 붉게 물든 볼
두릅나무의 한(恨)
유혹을 하려거든
온몸에 가시나 없던지
가시를 품었으면
유혹을 하지나 말든지
가시도, 향기도 탐내고서
전생에 무슨 지은 罪가 많아
새순, 미래마저 몽땅 털린 채
봄만 오면 오슬오슬 살추위.
승부시대(勝負時代)
자선을 베풉니다
원하는 분은 모이시오
소낙비 몰고 올 먹구름처럼 모이시오
받으려는 욕망은 베풀려는 의욕보다
한 발 치 앞에 서 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돌아보지 못하는 땅은 하나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전투에서 이긴 자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는 하나의 완벽한 몫을 부여 합니다
몫이 없는 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빼앗긴 이름은 꽃이 필 수 없습니다
이름이 붙여진 꽃은 청구서를 내시오
자선사업에 나타난 청구서의 위력을 아십니까
돌아서는 지성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왼쪽 날개에 붙은 불꽃은 비상이 될 수 없습니다
갈대밭에 파닥이는 날개를 찾으셨습니까
고정관념의 줄을 잡은 구원의 손에 갈증 품은
연대의 화살촉이 날라갑니다
양보는 패배보다 더 약한 권리입니다.
동물답게 살고 싶어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꽃피는 봄
황사가 하늘 덮은 춘 사월
서울 대공원에 같혀 살던
집채만한 아기 코끼리들이
제 발바닥만한 비둘기 떼에 놀라
정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했다
어린이와 어울려 춤을 추며
따르던 코돌이와 코순이도
팀장의 꽁무니를 따라나섰다
경찰차, 소방차가
사람 수보다 많이 출동했지만
조그마한 칼국수집을 덮쳤고
노부부가 사는 가정집에도 왔다
우리가 들꽃, 들풀을 좋아하듯
야생화가 봄꽃을 피운 도시의 정원
풀꽃 냄새를 맡고 고향이 그리워서
무단으로 침입 했나 봐요
코끼리도 가고 싶은 고향과
두고 온 이산가족이 있을 법 한데
오죽했으면 유리창을 코로
발로 마구 차며 행패를 부렸겠어요
밀림에서 뛰어놀던 놈들이
오죽이나 답답하였으면 저렇게
거리로 뛰쳐나와 농성을 하겠어요
아 넓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풀 뜯어 먹으며 뛰놀고 싶어라
사람은 사람답게
동물은 동물답게
인간 너네도 일하기 싫어하는데
코끼리라고 쉬지않고 서커스하기 좋겠나
코권을 보장하라
코끼리도 코끼리답게 살 권리가 있다
충분한 수면 시간을 달라
코끼리 보호특별법을 제정해 달라
은퇴 후 노후보장을 확실히 해달라
요구조건들이 충족될 때까지
쇼 공연은 물론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서울 대공원 탈출 코끼리 일동은.
도망친 암소
내가 무슨 큰 죽을죄를 지었나요
가해자를 들이받고 도주한 정당방위인데
가산 늘려주려고 아기 낳아 주었고요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온갖 힘든 논밭 쟁기질 혼자 다 하며
한평생을 주군에 충성을 다 바쳤는데
나이 들어 기력이 좀 떨어졌다고
돈벌이 아이도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형장으로 무작정 끌고 가 , 토사구팽
목숨 보전하기 위해 도주한 죄의 대가를
인간들의 맛 감으로 갚으려 하고 있어요
새소리와 물소리만이 내 친구인 숲속에서
인간 악마가 쏜 저주의 마취 총에 맞아
정신은 몽롱해지고, 푸른 하늘은 노랗고.
지구가족
반짝이는 호수 위, 은빛 바람
이름 모르는 들풀과 산나무들
안으로만 노래하는 생명체들
빛나는 솔잎, 피어나는 골안개
땅속의 벌레들, 하늘을 나는 새
매일 만나는 정겨운 이웃사촌
땅은 인간에 예속된 것이 아냐
인간이 지구에 편입된 것이지
지구는 한 가족으로 맺어 주는
핏줄과도 같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한 지구가족이다.
꽃의 향과 열매는 자매들이다
벌, 사슴, 고라니는 형제들이다
발밑에 흐르는 물은 대지의 핏줄
숲속 벌레, 도마뱀도 가족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이 땅을
괴롭히거나 더럽힐 수가 없다
인간은 땅의 ,땅은 인간의 살갗
땅이 겪는 아픔이 인간에겐 진통
땅에 뱉은 침은 가슴에 못을 친다
지구는 어머니의 품안이기 때문에.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천둥 번개 칠 수 있는 말
간지럼 타는 속삭임
시대 따라 사람 쫓아
구분해 쓸 줄 알고
머릿속은 하늘 끝까지
깃발 되어 펄럭여도
코밑부터는 마른 땅에
깃대로 꽂혀 있어야 한다
아귀다툼 해야 할 때에는
손과 발도 함께해야 하고
요란떨고 다닐만한 곳에
속속들이 종종걸음 쳐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
자네 머리에 쓰고 있는
빨강색 고깔 모자가
한 손에 끼고 있는 흰 장갑이
반쯤 벗어버린 고무신 축이
나와 세상과 친구의
숨바꼭질놀이를 어렵게 하며
담벼락으로 가로막고 있다네.
의원님의 자격 요건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 나가
격투하실 의원님을 찾습니다
발은 빠르지 않아도
손과 간은 될 수 있는 대로 커
거두어 잡수실 것 챙기시고
잡아당긴 넥타이 놓치지 말아야 하며
허리 껴안아 업어 칠 수 있는
유도도 좀 배워두었어야 합니다
삿대 잘 젓는 분
목소리 유난히 크신 분
방망이 날렵하게 잘 치시는 분
한 번 응모해 보시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격요건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던지기 잘 하시는 분 중에서
명패 정확히 던져
목표물에 적중하실 수만 있다면
훨씬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금뺏지 차실만한 애국자는
곳곳에서 다 뽑혀 들어가셔서
새로운 인물 찾기가 어려우니
여의도 광장의 진기록 갱신은
세금을 조금 더 올려 세비나 내드리고
기다려봐야 할려나 봅니다.
꽃신 사오셨네
시골 장날 고추 팔러 갔다가
꼬까신 사가지고 오신다던
자상한 삼십 초반 우리 아빠
한 많은 세월 65년 전의 약속
가슴에 묻어둔 채 꿈꾸시다가
백 살이 다 된 할아버지 되어
꿈길 따라 휠체어 타고 오셨네
오른쪽 신에는 그리움 가득
다른 한쪽에는 눈물겨운 사연
세월 섞어 꽃신 가득 담아 들고
일곱 살 꼬마가 칠십을 꺾은 딸과
가슴으로 나눈 정, 불과 이틀 뒤
남과 북으로 세월의 벽을 넘어
민들레 홀씨 되어 흩어져 버렸나
진눈개비 쌔려 날리던 봄날
복사꽃, 살구꽃, 진달래 꽃몽올에
진눈깨비 마구 내리던 이른 봄날
조용한 마을로 내려온 들고양이는
굴뚝 속에서 찾아낸 생쥐를 어르듯
여자라는 존재의 풀꽃을 뭉개버렸다
도망치다 목검에 찔려 죽은 순덕이
젖먹이를 빼앗기고 끌려간 최씨 댁
상품성 있는 꽃은 군용트럭에 실렸다
애원하던 애 엄마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따라오는 애기마저 군화발로 내리쳤다
헌 짐짝 속에 묶여진 조선의 풀꽃들은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배급품으로 실려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 진지에 보급되었다
일상엔 황군병사들의 개 껌이 되어 놀다가
먹이로 바뀌어 짐승무리의 밥상에 올렸다
병영 안에서는 소모품으로 마모되어가다
그리던 가족의 품에는 안겨보지도 못하고
일장기가 내려지자 폐품으로 내팽개쳤다
고향의 친지들에게도 온갖 수모를 당하며
줄기를 갉아먹는 기억의 벌레들과 싸웠다
역사는 아물지 못한 큰 상처를 봉합해 놓고
수술할 부위에 양심의 칼을 대려하지 않는다
나는 이승 다하기 전에 과거를 간증할 수 있다
당시의 직함은 노무보국회 동원부장 요시다
황군의 맹견, 이빨 갈던 노예 사냥꾼 이었다.
마누라 미투
쌍방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잖아요
엊그제도 그렇고
오십 년 전은 물론이고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망정이지
일방적으로 넘어트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생기고
반백 년을 참으며 살아왔어요
좋았을 때는 나도 잘 몰랐어요
위력에 의한 반복 행위란 것을
하지만 젊음도 해마다 시들어가
황혼빛이 스멀대니 이젠 억울해요
꽃다운 내 청춘 무참히
짓밟아 엉망으로 망가트려놓고
전혀 책임질 생각도 않는 가해자
남편을 오는 세월에 미투 합니다.
어떤 고해성사
신부님 제가 주중 대낮에
눈이 먼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눈 똑바로 뜨고 몰래 들어가서
말린 고추를 들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양심이 널을 뛰어
잘못했음을 고해하러 왔습니다
당장 회개 하십시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 했지요
도둑질은 형제님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는 일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요
깊이 반성하며 흔적을 지우겠어요
할머니가 볼 수 없을 거라 믿고
고추를 지고 나오며 남긴 발자국을
성사 끝내고 가서 지워야겠어요
오점을 닦아야 겠어요
아멘
물구나무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돌아버린 사회에서 맨정신을 가진 사람은 어쨌든 간에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정상인으로 취급받을 수 있지. 암.수 돌쩌기가 하나같이 제 정신이 아닌 듯 돌아갈 때 저 혼자만 정신 똑바로 차리며 하늘처럼 높게 살려면 왕자도 왕따가 되어야만 하고 외톨이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사뭉치는 톱니 틀을 오늘에 맞추며 미친 세상에 물들어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살 수 있지.
아주 먼 옛날 하늘신이 천둥과 벼락에 부탁하기를 저 하늘 아래 인간 세상에서 제일 탐욕스럽고 흉악무도한 딱 한 사람만을 본때로 골라 쳐죽여 위엄을 보이라 명하였는데 하늘 아래 이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왕따 한 사람만 빼놓고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날벼락을 맞아야 할 판이라서 시절 같은 한 사람만을 솎아내 벼락을 쳐 죽인 후 이 세상은 물레방아 핑핑 돌아가듯 아주 잘 흘러간다는 얘기.
물구나무로 서 바라본 세상에서 제정신을 찾은 사람은 어쨌든 간에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정상인으로 인정받는다. 암.수 돌쩌기가 하나같이 정신을 잃고 홀로 돌아갈 때 저 혼자만 정신 똑바로 차리며 하늘처럼 높게 살려면 왕자도 왕따가 되어야만 하고 외톨이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사뭉치는 톱니 틀을 오늘의 궤도에 맞추며 미친 세상에 물들어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 하는 거짓 자정운동을 한다.
비무장지대(DMZ)
6월의 산하에는 멧돼지와 산양, 고라니 가족들과 기러기떼만 날고
산 능선 따라 동의나물. 산딸기와 평야의 초지엔 크고 작은 야생초
돼지풀, 개망초 ,양지꽃. 원추리, 양지 언덕엔 할미꽃, 노랑 제비꽃
계곡습지에는 무당개구리 알알이, 산 복판엔 싱싱한 습지 식물들과
땅과 물 사이에 작은 생명체들이 6월의 사연을 담아 꽃으로 피어난.
갈까마기 몇 마리만 자유롭게 날고, 연어는 남북을 지나 태평양으로
음지가 된 민통선 이남에 핀 양지꽃, 꼬리 조팝나무. 벚꽃, 복사나무
늪지, 건습초원 ,관목습지, 산림습지, 유월의 총탄에 유린당한 국부엔
자궁을 지켜온 토종 생명체는 숨고 외도로 유입된 외국산 동.식물들이
외아들 바친 할머니, 새신랑 보낸 새새댁 가슴밭을 글로벌화 해 가고.
애기봉에서
아, 저기가 어딘가
텃밭에서 김매다
막걸리 통 물에 띄워
두 팔 뻗어 헤엄쳐 나르던
강 건너 이웃마을
저기가 여기 아닌가
쪽배 타고 동네 마실갔다
남이 되었고 , 적이 되었고
가슴에 총을 겨누다
이승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혹시, 살아 있다면
호호백발 할멈
복실이 엄마는?
어리어리한 실안개 지나
역력히 눈에 들어오는
북녘땅, 오싹하는 6월 하늘
풀벌레소리, 산새 울음에다
냉랭하게 찢어지는 스피커 소리
눈도, 귀도 정신마저
안개 속에 휩싸이는데
산새들은 산에서 강으로
물새들은 강에서 산으로
남에서 북, 북에서 남으로
똘강물 흘러 개울물
개울물 모여 임진강, 한강
말없이 흐르는 서해바다
천 길 깊은 바다속 마음
우리가 여직것 풀지 못한
삼십 몇 년 굳은 응얼인가?
스님은 행복도시로 내려갔지
시장에서 만난 불자가 스님에 물었다
스님의 바랑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
개고기 좀 삶아 먹으려고 사서 넣었지
아니, 스님께서도 개고기를 드시나요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네 절에 술이 있어
술안주로 좀 하려고 조금만 샀다네
그럼 스님께서는 술도 드시나요
중이야 술을 안 먹지만 손님 대접은 해야지
어떤 손님이신지 귀한 분이 오셨나 보군요
귀하다마다. 오랜만에 장인이 오셨다네
아니, 스님의 장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장인뿐인 줄 아나 장모도 함께 와 있다네
스님의 장인과 장모가 오신 게 정말입니까
절에 좀 시끄러운 일이 있어 찾아오셨지
산중의 절에도 시끄러운 일이 있나요
마누라하고 첩하고 싸움이 붙었지 뭔가
장인 장모가 담판을 내겠다고 찾아 왔지
개고기, 술, 장인 장모, 마누라, 첩이라고요
이 사람아, 누가 첫째 첩 가지고 그러는가
얼마 전에 얻은 둘째 첩이 또 말썽 부리네
지금도 대판으로 싸우고 있을지 모르니
나는 세종, 행복도시로 내려 가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