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은 옛날 국민학교시절에 소풍으로 가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학창시절에 놀이겸 가 보기도 했지만 그 때는 자세히 본 적이 없다.
좀 자세히 보려고 큰 맘먹고 다녀온 때가 2017년 11월이였다.
하지만 그때도 능침에 올라가는 것은 어려웠다.
더우기 "건원릉"의 능침은 절대 불가였다.
며칠 전.
우연히 "건원릉" 능침 개방을 한다는 뉴스를 듣고 두번 째 날로 예약을 했다.
억새도 억새지만 조선의 첫번째 능침이므로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은 이곳을 본 후에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곧장 "건원릉"으로 왔다.
"건원릉"은 모든 조선 왕릉은 물론, 고려 왕릉을 포함해도 유일하게 능호가 2字(건원:健元)로 된 능이다.
여기에 씌어진 이야기는 "태조 이성계"가 무덤에 고향의 억새를 심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도 있다.
우선 "이성계"의 조상이며 왕으로 추존된 "태조"의 조상들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릉은 "함흥"에 있다.
그렇다면 이성계 자신도 조상의 옆에 묻히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이성계"가 죽으면서 고향 함흥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개국 시조"(開國 始祖)인 부왕을 멀고 먼 함흥에 안장(安葬)하면
나라의 위신과 제사 지낼 때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곳에 모셔야만 자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으니 도성 근처에 모시고,
유언에 부합하고자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건원릉"을 단장하는 꼼수를 썼다는 말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성계"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있는 "정릉"에 같이 묻히길 원했단다.
"정릉"은 지금의 정릉이 아니고, 덕수궁 옆 "정동"에 있었 때 이야기하는 것이다.
계모인 "신덕왕후"를 굉장히 미워하던 태종은 유언을 무시하고 새로 묏자리를 알아봐 묘를 썼고,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어 대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올 때, 그냥 파서 가져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억새가 다 말라죽으므로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짜낸 지혜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서
함흥에서 한양까지 억새를 릴레이 형식으로 운반해 와 심었다는 설화도 있다.
결국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만 잠들어 있는 단릉(單陵)이다.
부인이 두 명인데 어찌 된 것일까?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죽었다.
이북(以北)개성(開城)의 해풍군(海豐郡) 치속촌(治粟村)에 장사지냈고 " 제릉"(齊陵)이라 했다.
두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는 덕수궁옆 "정릉"에 묻혔지만 태종의 노여움에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되었다.
당시는 왕릉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왕비로서의 자격도 상실되었다.
『古宮과 王陵』의 "신덕왕후 강씨이야기" 참조.
그후 270여년 후인 "현종"10년(1669년)에 복권되어 지금의 "정릉"(貞陵)이 만들어 졌다.
정자각(丁字閣)앞에서 보는 "건원릉"의 억새.
정자각(丁字閣)안에서 본 건원릉의 모습.
건원릉 참관 신청자에게는 "능침 특별 개방" 표식을 붙여 준다.
우선 먼저 "비각"(碑閣)을 둘러 본다.
신도비(神道碑)
"비각" 안에는 능상(陵上)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그 우측으로 "능표"(陵表)가 있다.
비(碑)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추었는데 당대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평가된다.
숙종 17년(1691)에 비석의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겼고 글씨가 마모되어 비각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비각이 없이 "신도비"(神道碑)가 비바람을 맞고 있었단 말인지,,,,,,
왕릉의 신도비(神道碑)는 건원릉의 태조 신도비(神道碑)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神道碑)뿐이다.
世祖때 정인지(鄭麟趾)등이 王의 功德은 실록(實錄)에 있으므로 神道碑를
따로 세울 必要가 없다고 주청(奏請)해서 그 이후로 王陵에 神道碑를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이수(螭首)
비문 상부의 전액(篆額)은 문신 "정구"(鄭矩)가 쓰고,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권근"(權近)이 짓고, 음기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글씨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서예가 "성석린"(成石璘)이 썼다.
신도비(神道碑)앞에는 조선 개국의 업적과 치적을 새기고, 뒤에는 "개국 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능표(陵表)는 500년 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종(高宗)이 친히 썼다.
이제 능침(陵寢)으로 올라간다.
"능침"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왼쪽으로 올라가는 다른 길이 있다.
"능침"에 다 올라왔다.
그런데 능 앞으로 가지 않고 능 뒤로 올라가란다.
능 위에서 보는 능과 앞의 전망.
지금은 산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검암산"(儉岩山)을 등지고 있는 곳이다.
"검암산"(儉岩山)이 흘러 내리다 이곳에서 한번 솟구친다.
이런 곳을 "잉"(孕)이라고 한단다.
이 "잉" 넘어 언덕이 "명당"이라고 한다.
"건원릉"이 바로 그런 자리에 만들어진 것이다.
왼쪽의 석양(石羊)을 보면 다리 사이가 투각(透刻)되어 막히지 않았다.
석마(石馬)도 마찬가지다.
"건원릉"에는 다른 "능"에서는 볼 수없는 물건이 있다.
바로 "능"앞에 있는 네모난 석판이다.
이는 뭍혀있는 왕에게 배례(拜禮)하는 곳인데 "현왕"(現王)만이 설 수있는 곳이다.
그러나 왕은 이곳에 올라 오지 않는다.
정자각(丁字閣)까지만 올라 올수 있기 때문이다.
"태종"의 묘인 "헌릉"(獻陵)과 이곳에만 있는 물건이다.
능 위에서 내려다 보면 다른 곳과 또 다른 모습을 볼 수있다.
즉 비각이 정자각보다 능침쪽으로 상당히 가까이 있고, 비각이 훨씬 크다.
"건원릉"
건원릉 "병풍석"(屛風石)의 "면병풍석"(面屛風石)
"면병풍석"(面屛風石)에는 사람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문양(文樣)은 조선 초기의 왕릉에서 볼 수있다고 하지만
왕릉에 함부로 올라가지 못하므로 자세히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본다고 해도 오래되어 풍화가 돼서 자세히는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문양(文樣)을 쉽게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청계천 3가의 "광통교"(廣通橋)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광통교 다리를 받치고 있는 돌에 아주 자세히 조각되어 있다.
이 돌은 원래 덕수궁 옆 정동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묘에서 나온 돌이다.
그런데 "태종"이 그를 미워하여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면서 석물을 모두 폐기 시켰다.
그러던 중 한양에 큰 홍수가 나서 광통교가 유실되어 큰 보수공사를 하게 된다.
"태종"은 폐기됐던 정릉의 석물을 이용하여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들게 하였다.
그 결과 정릉의 "병풍석"이 광통교의 교각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만일 정릉에 그대로 있었다면 저리 정교한 무늬의 병풍석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청계천의 물속에 잠기어 감추어져 있었기에 풍화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건원릉의 "우병풍석"(隅屛風石)
광통교 아래의 "우병풍석"(隅屛風石)
병풍석과 병풍석을 잇는 "우병풍석"(隅屛風石)의 "영탁"(靈鐸)모습도 확연히 볼 수있다.
조선 초기의 "장명등"(長明燈) 모습
"장명등"(長明燈)갓 아래쪽에도 빗물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하기 위해 정밀하게 파 놓았다.
건원릉의 망주석(望柱石)
특이한 것은 보통 "망주석"기둥에는 오르내리는 다람쥐를 조각해 놓는다.
그런데 건원릉의 망주석에는 그냥 네모난 귀를 만들고 가운데 양쪽으로 통하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모양은 해설사도 잘 모른다고 한다.
뒷면 석호(石虎)의 모습.
건원릉의 "혼유석"(魂遊石)
일반 묘의 앞에 있는 석물은 "상석"(床石)이라고 하여 그 위에 제물(祭物)을 올려 놓는다.
하지만 왕릉에서는 "정자각"에 제물을 올려 놓으므로 이 돌은 필요가 없는 돌이다.
그래서인지 이름을 "혼유석"이라고 한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돌을 "고석"(鼓石 : 敲石)이라고 한다.
마치 작은 북과 같은 형태로 4~5개가 설치되어 있다.
"고석"에는 특이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나어두"(羅魚頭)라고 한단다.
그런데 건원릉의 "고석"에는 문양이 자세히 보여지지 않는다.
보통 다른 능의 "고석"에는 이런 귀면(鬼面)이 조각 되어 있다.
건원릉의 "정자각".
어계(御階)를 올라가면 다른 곳에서는 볼 수없는 네모난 "석판"이 있다.
어느 설명서에는
"이를 "배위"(拜位)라고 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 옆에 있지 않고 정자각 동계(東階)의 어도 위에 있다.
이는 조선의 왕릉 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라고 써 있다.
그러나 잘못된 설명이다.
"건원릉"의 홍살문 오른쪽에 "배위"(拜位)가 존재한다.
또한 동구릉의 "경릉"(景陵)에도 있다.
건원릉 정자각 지붕위의 잡상(雜像)들.
건원릉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가 있다.
현재의 "소전대"(燒錢臺)
2017년 가을에 본 "소전대"(燒錢臺)
몇년 사이에도 윗 면이 마모된 모습이 보인다.
현재 "소전대(燒錢臺)"는 "건원릉", "정릉", "헌릉"등 세곳에만 있다.
"소전대(燒錢臺)"는 태종의 헌릉까지만 있고 이후에는 "예감"(瘞坎)으로 대치되었다.
정자각 동쪽 어계(御階)반대편인 서쪽에도 석판이 있다.
서쪽에 석판이 있는 곳은 이곳뿐일듯하다.
해설사의 의견으로는 이곳에서 "소전대(燒錢臺)"에서 "소지"(燒紙)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닐까 한단다.
이제 완전하지는 않지만 "건원릉"을 다 둘러 보았다.
"건원릉"의 "금천교"(禁川橋)를 지나 "목릉"(穆陵)으로 향한다.
첫댓글 예전에 동구릉을 다녀 왔었지만,
이 사진과 글을 보니 내가 본 눈보다 수 십배,
해설사의 설명보다 수 백배,
내가 아는 지식보다는 수 천배의 자료를 보여 주셔서 감사 해유~~~~
덕분에 동구릉을 둘러 보게 되었고, 건원릉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너무 고맙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