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화두…고요함 시끄러움 상관 없다”
<52> 부추밀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③-2
[본문] 참선문중에는 초심자인 만학을 논하지 아니하며, 구참(久?)인 먼저 공부한 사람을 묻지 않습니다. 만약 참으로 고요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생사의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 옛 성인들이 말씀한 적정(寂靜)이라는 방편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말세의 삿된 스승 무리들이 옛 성인들의 방편의 말씀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강설] 불교는 세속의 일과 달라서 궁극적 경지를 깨달아 아는 데는 선후가 없다. 그것을 “불교의 문에 들어오는 데는 선후가 있으나 문을 나가는 데는, 즉 불교를 깨달아 아는 데는 결코 선후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배와 후배를 그렇게 심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절에서 50년, 60년을 지냈어도 불교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절에 들어오자마자 불교를 깨닫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부추밀의 참선공부는 고요함에 달려있다. 고요함이라는 말도 실은 방편이지만 진정으로 그 고요함을 터득하려면 생사의 마음을 깨트려야 한다.
그것은 곧 생사를 해탈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생사를 해탈해야 진정으로 고요함을 안다. 단순히 공부하는 환경이 고요하고 잠깐 동안 자신의 마음이 고요한 것은 진정으로 고요한 것이 아니다.
장애는 환경이 아니라 혼침과 망상
화두 드는 일 외에 다른 방법 없어
[본문] 그대가 만약 산승을 믿는다면 시험 삼아서 시끄러운 곳에서 “개가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지켜볼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함을 말하지 마십시오. 바로 마음이 답답하고 어지러울 때를 맞아서 천천히 화두를 제기하여 지켜보십시오.
고요함을 알게 됩니까? 또한 힘을 얻음을 알게 됩니까? 만약 힘을 얻음을 알게 되거든 곧 놓아버리지 말고 고요히 앉고 싶을 때는 다만 향을 하나 사루고 고요히 앉으십시오. 앉아 있을 때에는 혼침하게 하지도 말며, 또한 망상이 들고 일어나게도 하지 마십시오. 혼침이나 망상은 옛 성인들이 꾸짖은 바입니다.
[강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간화선의 요체는 환경이 시끄럽거나 고요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철저히 화두만을 드는 데 있다. 그리고 화두를 드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망상(掉擧)과 혼침이다. 선방과 같은 고요한 환경에서 좌선을 하노라면 오로지 두 가지 병이 전 시간을 다 지배하는 데 그것은 곧 혼침과 망상이다.
굳이 선방에서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아니하나 오히려 시끄러운 곳을 찾아서 화두에 몰두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참선이 된다고 가르친다. 옛 사람들은 시장에 나가서 참선공부를 한 사람도 있고, 하루 종일 도량을 돌아다니면서 참선을 한 사람도 있었다. 대혜선사가 “시험 삼아서 시끄러운 곳에서 ‘개가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지켜볼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함을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신 뜻이 그것이다.
[본문] 고요히 앉았을 때에 문득 이 두 가지 병이 나타남을 알게 되거든 다만 “개가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게 되면 이 두 가지 병은 애써서 물리치지 않아도 당장에 안정될 것입니다.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곧바로 힘이 덜 들게 되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곳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한 힘써서 고요한 데서 공부를 짓지 아니하더라도 다만 이것이 곧 공부입니다.
[강설] 간화선의 요체는 어떤 상황이든지 철두철미하게 화두만을 드는데 있다. 잠이 와도 화두를 들어 잠을 물리치고, 망상이 일어나도 화두를 들어 그 망상을 물리치는 것이다. 화두를 드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먹었는지 굶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잠을 잤는지 자지 않았는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죽은 상태인지 살아 있는 상태인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화두만을 참구하고 또 참구하는 것이 간화선 공부의 전부다. 그곳에 무슨 고요하고 시끄러움이 있겠는가.
[출처 : 불교신문 201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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