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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이름의 정의, 부담>의 줄거리:
예수 이름의 정의는 다 아시다시피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실천적인 의미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정의를 내리라면 부담입니다. 내가 육체로 이 땅을 사는 동안 내 사전에 기록될 단 하나의 부담이 예수님입니다. 교인이라는 자에게 예수님 말고 다른 부담감이 마음에 있다면 아직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의 정의, 부담
(마2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예수 이름의 정의, 부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그 의미에 있어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글자대로의 의미를 따지자면 ‘예수’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믿음의 실천적인 차원을 고려할 때, 신앙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뭐냐 하면 ‘부담’이라는 겁니다, 부담.
이 부담이라고 하는 단어는 즉, 우리 각자의 삶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사전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내 인생의 사전을 펼쳐서 부담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그 내용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적혀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말고, 다른 내 마음의 짐, 마음이 느끼는 부담감이 있어서는 안 되고,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직 내 인생의 유일한 부담은 예수님뿐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과정이 적혀있어요.
예루살렘이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에 예언된 대로 겸손한 왕, 평화의 왕으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이 입성의 모습을 그 옛날에 그렇게 사건이 전개되었다는 것으로 아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예루살렘 대신에 내 삶의 영역 안으로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하셔야 된다는 것에 오늘 본문의 참 메시지가 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또한 내 몸이 곧 살아있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사건이 예수님께서 내 삶에 입성하셨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자, 예수님께서 내 삶이라는 예루살렘에, 내 생활 영역 안으로의 입성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태어나서 아직 짐을 져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나귀새끼 위에 제자들이 겉옷을 얹어 안장으로 삼아서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겉옷을 길가에 깔고 나뭇가지를 깝니다.
이 두 가지, 겉옷을 깔고 나뭇가지를 까는 것과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고 짐을 져보지도 않은 나귀새끼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내 생활이라고 하는 예루살렘으로 왕으로서 입성하시기 위한 조건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한 번도 짐을 져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 새끼나귀를 타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것이 바로 왕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안으로 입성하실 때,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가장 올바른 모습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이 새끼나귀가 되어서 예수님을 태우고 있는 모습이라야 예수님께서 내 삶이라는 예루살렘으로 왕으로 입성을 하실 수가 있고,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내 마음이 나귀가 되어서 예수님을 태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마음이 나귀가 되어서 예수님을 태운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예수님을 태우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한 번도 짐을 져보지 않은 나귀,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않은 새끼나귀, 그것이 말하는 뜻은 우리 마음이 짐을 지고 있는 상태로는 예수님을 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의 짐이 무엇입니까?
책임감, 부담, 의무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태울 수 있는 마음이 되려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책임감도, 그 어떤 부담감도, 그 어떤 마음의 짐도 있어서는 안 되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무엇에 대해서, 누구에 대해서 짐이 있거나 부담을 느끼고 있으면 예수님은 내 마음에 올라타실 수가 없고, 왕이 되실 수 없고, 왕으로써 내 삶이라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집안에 대한 책임, 가족에 대한 책임, 아내 남편 부모에 대한 책임, 사업에 대한 책임의식, 직장에서의 부담감이나 책임의식, 의무감, 이 어떤 것도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태우는 마음의 부담감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내 바로 위의 상사가 부담이 되고, 부모가 자식이 부담되고, 마음이라는 나귀 위에 사람을 태우고 있잖아요?
그래서는 예수님을 태울 수 없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취직해야 된다, 결혼해야 된다, 입시시험에 합격해야 된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부담이나 마음의 짐을 가진 상태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태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에서 일체의 부담감이 사라져야 된다는 거예요.
오직 내 마음이 느끼는 부담은 예수님 한분일 수 있는 상태에서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올라탈 수 있고 왕으로써 내 삶이라는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오실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내 마음이라고 하는 나귀 위에 예수님께서 올라타고 계신 이 모습으로부터 책임과 부담에 대한 내용이 갈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책임을 다 벗는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올려놓고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다 깔고, 나뭇잎사귀를 잘라다가 깔아놓습니다.
이게 다 무슨 뜻일까요?
겉옷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살면서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 사회 속에서 내가 갖게 되는 신분을 말해요.
그래서 군인들이 퇴역할 때 옷 벗는다고 얘기하지요, 신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아버지라는 신분을 벗어버리고(아버지라는 신분을 벗는다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벗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로서의 겉옷을 벗는 것이고, 그리고 직장인으로서의 겉옷, 장관으로서의, 국무총리로서의, 교수로서의 신분의 겉옷을 벗어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겉옷을 깔고 앉으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겉옷을 깔아놓고 그 위를 나귀를 타고 지나가십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어 아버지라고 하는 신분이 해야 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로서의 길을 가야 되고, 어머니로서의 길을 가야 되고, 교수로서의 길을 가야 되고, 직장인으로서 길을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길을 누가 가느냐 하면 내 마음에 올라타신 주님이 가신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하면 내 부담은 예수님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을 부담으로 안으면서 예수님 가계신 천국이 내 유일한 부담이 되고, 그곳에 계신 하늘아버지가 내 부담이 됩니다.
내가 아버지로서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식에게 느꼈던 부담, 아내에게 느꼈던 부담, 직장인으로서 느꼈던 부담, 이 모든 부담이 예수님께 집중되고 하나님아버지께 집중되고 천국으로 집중돼서 어떻게 천국을 느낄 것인가의 부담만 안고 살아가면 되고, 어떻게 천국을 많이 가지면 될 건가 하는 부담만 가지면 된다 이겁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천국을 내가 만지고 보고 듣느냐 이것에만 관심을 갖고 부담을 느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에 내가 그러느라 겉옷을 다 벗어던지고 아버지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직장인으로서의 길도 가지 않을 때, 내가 벗어놓은 겉옷들을 밟고 주님께서 아버지로서의, 어머니로서의 길을 가시고 직장인으로서의 길을 가시고 관직을 가진 자로서의 길을 가시고 사업하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가시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내가 사회에서부터 부여받은 신분으로서 해야 될 길들을 걸어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고 한 번도 짐을 져보지 않은 새끼나귀를 타고 있는 모습의 의미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앞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집,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 이 모든 것들이 신분을 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토, 사업을 말해요, 직장을 말하는 것이죠.
주님을 따르려면 신분을 다 벗어버리라는 거예요,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면 내 마음이 나귀가 되어야 되는데, 그 어떤 부담감도 책임의식도 마음에 남아있으면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자, 이렇게 부담을 느낄 때 내 인생의 사전에 있어서 부담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내 부담은 예수님이 계신 천국이요,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늘아버지가 내 부담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마음에 짐을 져서는 안 되고, 그래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일 수가 없고 믿는 게 아닌 거예요.
그런데, 돈 벌기도 힘들었고 자식을 부양하는 부담도 무거웠어요, 세상에서 어떤 여자의 남편노릇을 하고 산다는 것도 짐이고, 어떤 남자의 아내노릇 하고 산다는 것도 짐이에요.
직장생활하며 승진의 부담을 느끼고, 성과의 부담이 있습니다.
부담이 없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 세상 것도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과 하나님을 부담으로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느냐?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이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아십니까?
이 세상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해서 모든 무게를 다 끌어들여서 악한 상태로 마음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최고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찍어 누르고 압박해서 죽음까지 밀어 넣습니다.
죽음의 음부의 구렁텅이까지 예수님을 찍어 누르고 압박하고 밀어 넣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렇게 강력하게 모든 힘을 집중해서 모든 악의를 모아서 찍어 누르고 압박했지만 그 힘을 뚫고 가볍게 올라와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하면 풍선에 입김을 불어넣으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수소를 넣으면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듯이 예수님 안에는 이 세상의 어떤 악의에 찬 무게가 눌러도 눌려지지 않는 하늘의 수소, 하늘의 기운, 천국의 힘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부담으로 내 등에 짊어진다는 것은 수소풍선을 매다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수소풍선을 내 등에 짊어진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수소풍선을 등에 짊어질 때, 그분을 크게 짊어지면 크게 짊어질수록 마음이 그분을 큰 부담으로 느끼면 느낄수록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내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는 거예요.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나를 찍어 누를 수가 없을 만큼 강렬한 천국의 힘에 의해서 그분을 등에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내 마음이 뜬다는 겁니다, 세상에 가라앉지 않고.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매 맞고 피를 흘리며 깊은 감옥에 갇혀서 차꼬에 채워져 있는 그 세상의 무게가 내리눌러도 그 가운데서도 묶여있는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고 사도바울과 실라는 오직 예수님만을 책임으로 느끼고 예수님만을 부담으로 안고 나귀새끼가 되어서 예수님만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 자기 몸이 어떻게 될 건가, 몸에 대한 책임과 부담 아무것도 안 느끼고 예수님만을 부담으로 느낄 때, 그 내리누르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감옥의 현실 속에서도 걱정하고 분노하지 아니하고 천국의 찬양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자식을 부담으로 안게 되면 무겁습니다, 아내를 부담으로 안게 되면 무겁습니다, 직장을 부담으로 안고, 결혼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으면 무겁습니다.
다 걱정을 안기고, 우울함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담으로 안게 될 때는 이상하게 그분을 부담으로 안으면 안을수록 천국을 부담으로 안으면 안을수록 ‘천국을 더 많이 가져야 될 텐데, 천국을 더 크게 느껴야 될 텐데, 천국을 더 깊이 알아야 될 텐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천국을 느끼기 위해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될 텐데’ 이 부담감은 우리를 이 세상의 무게가 내리누를 수 없을 만큼 가볍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태우는 나귀새끼가 됩니까? 새끼나귀가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책임의식을 발동시키려는 대상들에 대해서 죽어야 됩니다.
자꾸 이 세상에서 마귀에 의해 습득된 죄적 유전자는 우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사회적인 신분인 겉옷을 내가 입은 채로 그 겉옷의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려하고 책임의식을 발동하려 하고 의무감을 가지라고 얘기합니다.
본래 그게 내 일이 아니에요, 본래 내 부담은 하나님 한분이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 한분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무언가에 대해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려고 할 때마다 죽어야 됩니다, 짐을 지지 않은 새끼나귀로 남아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귀새끼에게 의견이 생깁니다.
나귀새끼에게 이 세상일에 대해서 책임감과 부담감이 느껴지면 이 세상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대해서 자꾸 나귀로써 의견이 생기게 돼요.
그러면 결국 예수님이 이끌어 가실 이 세상이 마음에 안 맞게 됩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이끌어 가시고 통치해 가시는 내 자식의 문제, 가정문제, 재정문제, 건강의 문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다 보면 예수님을 떨궈 낸 다음 다시 예수님을 끌어당겨 가지고 자기가 예수님 위로 올라타게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나귀삼아 버리고 마는 거예요.
이 세상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한, 작은 책임감이든 큰 책임감이든 무엇이든 간에 내가 마음에 짐을 지고 있는 한, 예수님이 내 나귀가 돼야 되고, 내가 예수님 위에 올라타는 격이 돼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책임감의 대상, 의무감의 대상, 짐의 대상에 대해서 죽은 다음에라야 예수님께서 올라타실 수 있고, 나는 오직 세상 책임감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 책임에 대해서만 살아서, 예수님을 태우고 하나님을 태우고 천국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살아갈 때에, 예수님이 내 삶이라는 예루살렘에 왕으로써 입성하시고, 나를 타셔서 이 몸이 사회적으로 입고 있는 신분의 길을 따라서 주님께서 그 모든 신분을 깔고 앉고 그 신분으로 마땅히 가야 될 길을 걸어가시면서 수행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내 인생의 사전에 부담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거기에 예수 오직 한분만이 기록되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인생의 사전에 예수님 한분만이 내 마음에 부담이 되어 내 마음의 나귀가 태우는 유일한 왕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이 몸을 입고 있어서 사회 속에서 덧입혀진 신분의 겉옷들은 주님이 깔고 앉으셔서 그 자리에 있으시며, 주님이 그 신분에 맞는 일들을 해나가시는 것을 단지 보고 감사할 수 있게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종일 새끼나귀가 되어서 예수님만을 태운 행로를 걷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