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기적의 하루, 스리랑카 Galle 마리나 2일차
아침 일찍부터 부모님과 통화하고, 팔을 걷어 부치고 엔진을 점검한다.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한게 안전한 마리나에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난바다에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면?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세일요트는 세일이 있어서 괜찮은 게 아니다. 무풍지대도 있고, 마리나 입출항 시엔 세일을 쓸 수 없다. 결국 엔진 고장은 생명이 걸린 문제다.
연료 필터를 빼니, 기름이 쏟아지지 않는다. 보통 연료 필터를 빼면 약간의 기름이 흘러 나오는데. 조짐이 안 좋다. 일단 새 연료 필터에 기름을 채우고 잠근다. 시동을 켠다. 잘 켜진다. 그러나 다시 꺼진다. 문제가 연료 필터 이전에 있다는 거다. 엔진 자체는 문제없다. 연료 계통이다. 이렇든 저렇든 엔지니어를 불러야 한다,
포기하고 아침이나 먹으려는데, 조깅하던 백인이 와서 인사한다. ‘존’ 이라고 터그보트 선장으로 여기 왔다고 한다. 자기도 세일 보트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지금 제네시스의 문제를 말하니, 자기에게 엔지니어가 있다고 한다. 내가 머뭇거리자, 무료로 점검해 준다고 한다. 오 마이 갓! 들어오라고 하니, 와서 엔진을 들여다보고, 배 구경도 한다.
‘에이전트에게 요청해서 기술자 부르면 돈 들잖아. 내 엔지니어에게 봐달라고 할게. 잠깐만 기다려’ 하고 존이 다시 조깅한다. 만약 이렇게 도움을 받는다면 정말 기적이다. 기도의 힘이다.
오전 8시 30분. 존이 자기 동양인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함께 엔진을 들여다본다. 연료 필터에 디젤을 가득 채우고 시동을 걸면 걸린다. 그러나 그 연료를 다 쓰면 바로 시동이 꺼진다. 유수 분리기를 열어보고, 유수 분리기 이후에서 직접 페트병에 연료를 담아 연료 공급 호스를 끼워 시동을 걸어본다. 똑 같다. 그럼 연료 펌프에 이상이 있는 거란다. 상황이 안 좋다. 그러나 나는 계속 속으로 안심이다. 홍해에서, 인도양에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어휴 식은땀 난다. 어찌 됐건 여기서 확실하게 고쳐서 가면 된다. 연료탱크 청소를 해야 할 상황 같다.
오전 9시 40분. 존과 엔지니어는 회사 일로 잠깐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한다. 다시 오겠지. 원인은 밝혀지고 있지만, 연료 탱크가 영 찜찜하다. 어제 기름 넣지 말고 테스트부터 해볼걸. 원 참. 탱크 청소 하려면 연료를 다 빼야 할 텐데. 매일 매일 사건의 연속이다 스펙타클한 항해의 나날.
일단 정리하면, 연료 필터부터는 엔진이 걸린다. 연료 필터 이전에서 연료 공급이 안 된다. 유수 분리기부터 호스를 빼서 디젤을 담은 페트병 호스를 넣고 임시 연료 라인을 만들어 시험해 본다. 똑같다. 그러면 연료 펌프나 수동 기포제거 펌프 부분이 문제다. 거기서부터 연료 필터 위까지가 문제인거다.
오전 11시 혼자 연료 탱크 라인을 보다가 탱크아래 물이 고여 있다, 찍어 먹어 보니 민물이다. 어? 라인을 따라가 보니 온수 보일러다. 커버를 여니 물이 분사 되고 있다. 입수 라인에 바늘 같은 구멍이 생겨 물이 뿜어져 나온다. 즉시 잘라내고 다시 연결한다. 당연히 물이 새지 않는다.
실은 이탈리아에서 배 바닥이 물 한 방울 없이 깨끗했는데, 우리가 배에서 생활 하면서부터 물이 조금씩 고였다.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두 달을 항해한 거다. 물탱크의 수돗물만 조금 새는 것이라 물 사용 안할 때는 수도 펌프 스위치를 꺼두었다. 혹시 깜빡하고 안 끄면 아무도 물을 사용하지 않는데, 가끔 20~30 초 동안 펌프가 돌곤 했다. 어딘가에서 물이 약간씩 새고 있군. 그러던 걸 오늘 그 원인을 발견하고 수리한 거다. 엔진 탱크를 살피다 우연히 발견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다. 계속 주시하는데 수도모터가 안 돌고 있다. 물이 새지 않는다는 증거다.
정오. 존은 아직 연락이 없다. 혼자 이것저것 시험해 보고 있다. 연료 펌프와 수동 펌프를 연결하면 수동 펌프가 한 번 눌리면 올라오지 않는다. 연료가 안 빨려온다는 거다. 수동 펌프 앞에서부터 파이프로 연료를 직접 주입해 본다. 그건 시동이 잘 걸린다. 그럼 연료 펌프 근방이라는 건데. 일단 여기까지 하고 기다리자.
오후 1시에 존이 왔다. 또 같이 엔진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내가 해 논 상황을 보더니 그럼 연료 펌프 문제라고 단언한다. 난감하다. 연료 펌프는 처음 뜯어본다. 존이 뜯어볼까? 하는 표정이다. 그래 뜯자. 어차피 못 고치면 못 간다.
같이 연료펌프를 분해하며 수다 떤다. 이름은 존 왔슨(John Watson)이다. (존 왔어? 하하하). 존은 내 세일링이 궁금한가 보다. 내 상황을 설명하고 존에게 질문한다. 존은 스코틀랜드 사람이고 영국에 산다. 터그보트(Tug Boat - 배를 끌어주는 트레일러 배) 선장이며 스리랑카에는 한 달 더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간단다. 56살이고 이미 손주들이 있는 할아버지다. 내 나이를 물어 알아 맞춰 보라니, 48세? 란다. 너무 고맙지. 그러나 60살이다. 내가 4 살 더 위다.
연료 펌프는 직경 5센티 정도? 아주 작은 펌프다. 뜯어보니 안에 찐득찐득한 타르들이 있고, 모래 알갱이 같은 것도 있다. 존이 입에 물고 불어 본다. 바람이 안 나간다. 그런 뭔가 막혔다는 거다. 그러니 연료가 통과를 못하지.
면봉으로 닦아내니, 콜타르와 모래가 나온다.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할 정도다. 무지하게 떡 진 것은 아니다. 어쨌든 면봉으로 잘 닦고 경유를 부어 다시 닦아낸다. 존이 다시 입에 물고 바람을 불어 본다. 바람이 잘 통한다. 막힌 것들이 뚫린 거다. 한 번 더 경유에 담가 잘 닦고 작은 필터는 칫솔로 소제한다. 이제 다시 조립하고, 수동 펌프로 에어를 뺀다. 거품이 나오다가 곧 경유가 뿜어져 나온다. 공기가 다 빠진 거다. 시동을 걸어본다. 존이 나더러 크로스핑거 하랜다. 당연하지.
시동이 잘 걸리는 듯 하더니 역시 푸르륵! 꺼진다. 절망감이 몰려온다. 존은 그럴 리 없는데 하는 표정이다. 수동 펌프를 눌러 에어를 다시 뺀다. 그러다 생각난 듯 연료 펌프 나사를 빼고, 뚜껑을 다시 잘 조립한다. 수동 펌프를 누르니 에어가 빠지고 곧 연료가 뿜어져 나온다. 다시 시동을 건다.
성공이다. 엔진이 안정적으로 잘 동작한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 작은 연료 펌프에서 콜탈과 모래 몇 조각 빼내니 공기가 통하고, 수동 펌프가 작동해서 에어를 빼고 연료를 채우고 시동이 걸린다. 30분 정도 그대로 둔다. 엔진 아이들 Rpm도 안정적이다. 엔진 음이 좋다. 어떤 음악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존이 손을 닦는다. 내가 묻는다. 존 저녁에 뭐해? 바쁘단다. 그러지 말고 저녁이나 같이하자. 하니, 그런 건 괜찮단다. 엔진 같이 고쳐줬다고 생색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 내일은? 하니까, 오늘 저녁에 몇 명이 모이는데, 맥주나 한 잔 할래? 한다. 이걸 어떻게 거절하나? Okay 좋다. 하니 오후 5시에 배로 온단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엔진 고장으로 고민 중에, 조깅하던 존 왓슨이 때 맞춰 왔다. 자기 일처럼 도와서 엔진트러블을 해결하고 덤으로 수도관까지 고쳤다. 전화위복 비슷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산적했던 문제점들이 전혀 내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한방에 해결되어 간다. 모르겠다. 나는 가톨릭 신자니, 기도의 힘이라고 밖엔 설명 불가다.
오후 3시에 혼자 유수분리기 필터를 주문하러 에이전트 GAC 사무실로 간다. 거기 수리센터도 같이 있다. 혼자 스리랑카 Galle 거리를 걷는다. 세상 참 별일이 다 많다. 나 혼자 스리랑카까지 와서 거리를 활보하다니. GAC 사무실이 상당히 멀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갑자기 APRICO 슈퍼마켓이 나온다. 뭐야? 여긴 더 먼덴데. GAC 사무실은 생각보다는 가까운 곳이었다. APRICO 슈퍼마켓에서 오이와 양파 통조림베이컨 등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산다. 출항 직전에 여러 가지를 사자. 시간 날 때 물을 좀 사 놓던가.
오후 3시 30분. GAC 수리센터로 가서 유수분리기 필터를 보여주고 3개를 주문한다. 엔진 벨트는 어떻게 됐냐 물으니 사이즈를 다시 묻는다. 이것들이! 어쨌든 콜롬보에 주문하면 하루 이틀 만에 온다니 2~3일이면 내게 전해 준단다. 매일 쪼아야겠다. 넋 놓고 기다리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오후 4시에 배로 돌아와 뒷정리를 한다. 유수분리기 필터는 일부러 엔진 옆에 둔다. 만약 못 구하면 다시 사용해야 한다. 랑카위 가서 구해야지. 일단 임대균 선장에게도 한국서 구해 보라고 부탁한다.
오후 5시 그의 필리핀 크루 세 명과 함께 존 선장이 왔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해변의 바에도 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제까지는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을 오늘 아침에 만나 같이 배를 고치고 저녁에 식사하고. 한국, 스코틀랜드, 필리핀에서 온 바다 사나이들이 우의를 다진다. 내일 저녁식사도 초대 받았다.
오후 11시 30분. 배에 들어오니 많이 늦었다. 어서 자자. 오늘 진짜 신의 축복이 내린 기적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