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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구려 대왕 궁예 이야기
아들아, 영웅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뛰어난 능력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이었고, 세상에 뭔가 큰 획을 그을만한 그런 성과를 보인 사람들이 아닐까.
그들은 세상을 구하려는 높은 뜻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성공과 실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5천년 우리 역사 속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지기를 반복해왔는데..
세상 사람들은 성공한, 뭔가 큰 업적을 이룬 영웅들을 기억하고..
때를 만나지 못해서, 아니면 자신의 실책 또는 다른 요인으로..결정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고 실패한 영웅들은 많이들 잊고 살아.
하지만..실패는 했을지 몰라도 그들도 영웅인 것은 분명하고, 기억해야지.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우리는 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후고구려, 마진, 태봉의 궁예대왕
우리 역사 속에서 그런 비극적인 운명의 길을 걸었던 영웅이라 할만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겠으나 아빠는 후고구려와 태봉의 대왕 궁예와 후백제의 대왕
견훤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구나.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이들의 이야기는 전에 KBS대하드라마에서 다룬 '태조 왕건'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그래서 적어도 아빠 세대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아들 세대에서는 방영된지
오래되어서 접해보지 않았을테니, 또 낯설기도 할 것이다..
어두운 여명을 뚫고 떠오르는 해처럼 홀연히 등장해서 세상 사람들의 여망을 업고,
기대를 받아 역사에 등장해서 승승장구하며 크게 위세를 떨치고,
천하통일을 이룰만한 재목이었고, 또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또 그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건만..왜 그들은 실패했을까.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볼까 해.
궁예의 이야기는 고려조에 김부식이 편찬한 가장 오래된 정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궁예(弓裔)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며, 후궁의 소생이었다 한다.
5월 5일에 출생하였는데 그때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쳤고, 일관이 그것을 보고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아이니 키워서는 안된다고 예언하여 왕이 사람들을 시켜
아이를 죽일려고 처마 아래로 던졌다는데..
그 아래에서 유모인 여자 종이 그 아이를 받아 그대로 숨어들었다고 해.
그런데 유모가 아이를 받을 때 실수로 손이 아이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했지.
드라마 태조 왕건 속 궁예의 아버지, 경문왕 김응렴
다만, 일관(日官)의 예언 이야기가 있다만..
이것은 후대에 조작 또는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고,
궁예가 왕가의 피를 받았으나 후궁의 소생이라 정치적으로 약자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소생으로서 거의 없는 사내아이였지.
왕위를 이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음에도 출생 직후 바로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추론을 가능하게 하지.
후삼국시대
당시 신라는 왕위계승다툼으로 날을 지새며 왕권은 약하고 귀족의 힘이 강하며
귀족들은 부패하고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지는 형국이라, 나라는 이미 기울어져
되돌릴 길이 없었지.
이때의 신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망국(亡國)은 기정사실이고,
시간문제라 희망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
기울어져 되돌릴 길 없는 신라를 대체할 새로운 나라,
진골(眞骨)이 아닌 새로운 지배세력,
새로운 나라의 중심과 철학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곧, 영웅(英雄)이 아니었겠느냐.
수도하는 궁예 (안성 칠장사)
그렇게 숨어들어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궁예.
그런데 그 기질이 활달하였거나, 범상치 않아 말썽도 일으키고,
주목받을 일도 하며 조용히 살지 않았던 모양이니,
유모는 들키진 않을까, 제 명데로 살기나 할까 애가 타겠지.
결국은 성장해서 알만한 나이가 된 궁예에게 유모는 출생의 비밀을 전하게 되고
궁예는 울며, 키워준 유모에게 사례하고..
곧 길을 떠나 세달사로 가서 출가하며 불가에 귀의하였단다.
이때 받은 법명이 선종(善宗)이었어.
궁예는 승려생활 때도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고, 범상치 않았다고 해.
한번은 궁예가 길을 가는 중에 하늘을 날아가던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물건을
떨어뜨렸는데 보니까 이것이 왕(王)이란 글자가 선명한 표식었는지라..
궁예는 이를 하늘의 계시로 알고 기뻐했다는 구나.
왕이 될 야망을 품었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겠지.
아들아, 891년 궁예가 산문을 나와 죽주(竹州,현재 경기 안성)에서 세력을 떨치던
반란 수괴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당시 신라는 나라가 더 기울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호족이 난립하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다시 여러 나라와 세력으로 쪼개져 가는 과정에 있었어.
백성은 먹고 살기 어렵고, 전란으로 날을 지새는 한마디로 난세였지.
그런데 궁예가 의탁한 기훤이란 자는 그냥 포악하고, 싸움질만 아는 그냥 도적두목에
지나지 않는 자였고, 그는 또 궁예를 박대했던 모양이야.
궁예는 기훤에게 실망하고 기훤 휘하에 있던 원회, 신훤과 더불어 기훤을 떠나,
북원(北原,현재의 강원 원주)에서 세력을 떨치며 중부지역을 지배하던 군웅
양길(梁吉)에게 의탁하게 되고 곧 그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
세력을 일으키는 궁예 (안성 칠장사)
궁예는 양길의 부장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명주(溟州, 현재의 강릉)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휘하 군사가 3천5백에 이르러
독자세력으로 독립하고 북원 양길과 결별하였단다.
궁예에게 있어 명주는 훌륭한 세력기반이 되어 주었어.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예, 김순식의 후원과 강원 험준한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천혜의 요새가 지켜주는 넓은 땅..명주에 와서야 비로소 궁예가 역사에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된 것이지.
이때가 894년 산문(山門)을 나온지 겨우 3년만에 이룬 업이었다.
궁예는 휘하 군사를 14개 부대로 나누어 백두대간을 넘어 진군하여 철원을 점령하고
본거지로 삼으면서 명주와 철원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를 석권하고,
그 기세에 눌린황해도와 경기 북부지역 패서(浿西) 지역 호족들이 앞다퉈 귀부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대왕을 칭하니,
901년의 일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패서지역 송악군의 호족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에게 귀부하여 또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아들아, 이때의 궁예는 어떠했던가.
삼국사기에 전하는 모습은 이러했단다.
사졸들과 더불어 즐겁고 괴로운 일, 고되고 편함을 함께 하고, 주고 빼앗는 것도
공평무사하여 백성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따르고 추대하였다고.
게다가 아마도 궁예는 이런 장수와 지도자의 모습에 더하여 승려 출신으로 불교,
특히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사상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나타나
그 자신을 미륵(彌勒), 백성을 위한 구원자로 자처했을 것이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옛 신라의 강역, 9주5소경 중 한주, 삭주, 명주 3개주와
북원경(원주)와 중원경(충주)을 석권하며 후삼국 중 가장 강하고 넓은 영토를
지배했지.
또 휘하의 왕건을 수군 장수로 삼아 나주를 공략하여 제해권을 쥔 것도 대단했지.
태봉도성 위치도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여 축조한 도성의 흔적이 지금..휴전선 내에 남아있다.
정확히 남과 북이 반을 가르고 있지.
토성과 석성이 혼축되었고, 외성의 둘레 12.7km, 내성 7.7km, 궁성 1.8km의
규모는 고구려의 왕도였던 국내성의 5배에 이른다고 하니..
그 위세가 대단했겠다.
그만큼 궁예의 후고구려, 마진, 태봉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궁예가 품은 야망의 크기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보다 훨씬 작은 영토와 백성의 수..나라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화찬란한 왕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이 왕성을 축조한 백성의
고초는 또 얼마나 혹독했을까.
그런 생각도 함께 하게 되는구나.
궁예의 세력 기반이 된 자들을 보면..
궁예의 출신이 그러하니 지방의 미륵신앙과 선종에 기반을 둔 불교세력,
패서지역 일대의 고구려계 호족세력,
태조 왕건을 비롯한 해상세력이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궁예가 새로운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한 것이 우연의 일이 아니란다.
궁예의 영토 대부분이 옛 고구려의 영토였고, 옛 고구려 백성이었던 사람이
대다수로 그의 세력 기반이기에 그들의 지지를 받는 이름과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지.
아들아, 그 훌륭한 대왕이 그런데 초심을 잃고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해.
그 변화는 궁예를 몰락의 길로 이끄는 길이었어.
변해버린 궁예와 위기의 고려 태조 왕건
먼저 왕권강화 목적이었겠지만..잦은 통치체제의 변화는 좋지 않은 일이었어.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에서 마진으로 또 태봉으로. 연호도 무태, 수덕만세로,
잦은 관제변경 그리고 송악(松嶽, 경기 개성)에서 철원으로의 천도.
천도 과정에서 나온 청주에서의 무리한 사민정책 등..
이것은 그만큼 나라 내부가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정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패서계 호족을 포용이 아니라 배제하여, 지지세력을
잃게 되고 또한 백성을 괴롭혀서 민심을 잃게 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또하나 심각한 문제는..
역시 왕권강화를 넘어서 무리하게 전제왕권을 추구하고 신정일치 정치를 펴게 되면서,
또 하나의 지지기반인 불교계의 반발을 사게된 것이다.
단순히 불교계의 지지만 잃은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지.
백성들 절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데
불교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고, 정치적으론 자살행위라고 봐야겠다.
궁예는 그 스스로를 미륵불의 현신으로 칭했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했으며..행차할 때마다 동남동녀에게 향을 피우고 비구 2백명은 뒤를 따르며 범패를
부르게 했다.
이것은 부처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정치를 했다는 증거이지.
뿐만이냐..
이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새로운 불경 20권을 쓰고 강론을 하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고 불경스러웠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불경의 내용이 기존의 불경 내용을 부정하고 궁예를 미륵불과 동일시하며
그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불교계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라 해야지.
또 불경에 반발해서 부당함을 지적했다고 죽인 석총과 형미대사에 대해 말하자면
당시 불교계와 백성의 존경을 받는 불교계의 큰 어른이었는데,
그런 그들을 그렇게나 잔혹하게 죽였으니 그 파장을 잠재우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아들아,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백성을 적으로 맞게 될 것이다.
또 궁예의 패륜과 잔인한 철권통치는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하고,
신료들의 반정을 촉발하는 명분이 되었단다.
아들아, 기록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에 대한 반감으로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죽였으며, 간언하는 왕후 강씨를 간통했다고 몰아
잔인하게 죽이고, 또 말리는 두 아들도 때려 죽였다고 했어.
물론 궁예의 의도를 생각해 보자면 왕후 강씨가 패서계 호족의 딸으로
왕권강화에 주력하는 궁예가 아니라 그의 반대편 호족의 입장을 대변하니
그녀도 그녀의 소생인 아들들도 정적으로 봤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궁예의 처사는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패륜이 되고,
일반적인 사람으로선 생각하기 힘든 도가 지나치고 잔혹하여 용서받기 힘든 일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는 당연히 흔들리게 되고,
백성과 신료들이 그런 나라와 임금을 지키기 위해 나설 이유는 없는 것이야.
반대로 그런 왕을 몰아내려고 하는게 자연스러운 일이지.
또 궁예는 의심이 많아 일명..관심법(觀心法)이라 해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며,
갖은 이유를 대어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니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했지.
이런 궁예의 통치방식은 백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반항할 생각을 못하게
하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가장 최악의 정치이고, 오래갈 수 없는 몰락으로 향하는 길이란다.
심지어 특별한 신임을 받고 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자 신료의 으뜸인 위치에 있는
태조 왕건도 반역모의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을뻔했던 일이 있었어.
이런 상황이 되니..궁예의 왕권을 뒷받침하고 지켜야 할 신료들, 호족들부터
살기 위해서라도 궁예를 몰아내려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이 된 것 같아.
민심을 잃은 상황에서 또 군사력을 가진 무장과 호족들이 반감을 품게 되면..
아무리 감시를 하고, 억압한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지 않을까?
태조 왕건 속 4기장 신숭겸
태조 왕건 속 4기장 배현경, 복지겸, 홍유
궁예의 천하는 918년, 태봉 군부의 핵심을 이루는 4명의 기장(騎將)이던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가 주도하여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반정을 일으키면서 끝이 났다.
삼국사기 궁예열전의 기록에서 전하는 바로는 궁예가 급히 도주하였다가
부양(강원도 평강)에서 굶주려 보리이삭을 베어 먹다가 백성들에게 잡혀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명성산의 억새밭
또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포천의 경계지역에 솟은 명성산(鳴聲山)이 있는데
이 산에는 궁예의 전설이 전해져 와.
명성산이란 이름을 풀어보면 울음산인데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여 쫓겨나 이 산에
이르러 통곡했다고 하는데서 유래했다고 하지.
그리고 궁예가 왕건의 군대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맞서 싸웠다는 전설도 있고
그 현장이라는 산성도 있다는 것을 보면..
과연 궁예의 최후에 얽힌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도 있다.
옛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승자가 승자의 시선에서 그의 정당성을 위해 패자의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 많기 때문인데..
궁예란 사람에 대한 기록도 이런 시선을 생각하고 감안해서 볼 필요도 있겠다.
드라마 태조 왕건 中 궁예의 최후
아들아, 궁예는 삼국사기 권50, 열전10에 수록되었는데 여기서는 역신(逆臣)을
다루고 있지. 그런데 과연 이것이 옳은 평가인가?
궁예가 누구의 신하였고, 또 누구를 반역했다는 것이냐.
신라인가, 고려인가.
일단, 이렇게 분류한 김부식의 시각은 부당한 면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궁예는 후고구려의 대왕이 아니더냐.
그리고 그가 폭군이고, 실패한 임금이며..
그가 추구한 전제적 왕권, 신정일치 그리고 폭력에 의한 공포정치는
분명 옳은 모습이 아니며, 정당화 될 수 있는게 아니지.
태봉국 도성의 폐허와 석등
그가 산문을 나와 몸을 일으켜 나라를 세울 때까지..
궁예는 분명 백성을 위하고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싸운 영웅의 모습이었는데..
그는 왜 초심을 잃고, 그렇게 변했으며..몰락의 길을 갔던 것일까.
궁예의 성공과 실패를 곱씹어 생각할 거리가 많을 것이다.
아무리 품은 뜻이 원대하고 옳더라도..
주위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그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성급하게 밀어붙이면
반드시 역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특히 사람을 잃고 천하의 대의를 얻었다는 얘기를 아빠는 들어보지 못했다.
사람을 잃은 자에게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처음 마음 먹은 순수한 그 마음을 변치 말고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
사람을 잃지 않고, 사람을 얻는 것은 무엇에 달린 것인가.
수단과 방법,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가치와 대의..
또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아들아, 너는 궁예의 실패를 보며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 봐야지.
우리는 선인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다.
늘 강조하지만 이게 역사를 배우는 이유란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