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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11) - 2023 .07. 22(토) |
10차 순례는 북쪽으로 훌쩍 뛰어 수원교구다. 수원교구를 택하게 된 것은 한때 바오로회에서 활동을 함께 한 적이 있는 개인택시를 하는 김 라파엘 형제가 쉬는 날 하루를 성지순례를 겸해 차량 봉사를 해주겠다는 호의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계획은 7월 22-23일 1박 2일이었으나 23일 중부지방의 추가 집중호우가 예보되어 1일로 단축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수원교구의 천진암 성지, 양근 성지, 구산 성지, 남한산성 성지, 의정부 교구의 마재 성가정 성지였으나 하루로 단축된 이상 다 갈 수가 없었다.
08 : 10 성당 출발. 경부고속도로 영천-상주 고속도로, 중부 내륙고속도로 등을 통하여 12시 50분 천진암 성지에 도착. 오는 도중에 라파엘 형제가 10여 년간이나 살았던 곳을 가보고 싶어 하여 돌아오느라 예상보다 좀 늦었다.
천진암 성지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
성지의 주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500 (퇴촌면 천진암로 1203).
한국천주교회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1784년을 기점으로 잡는다. 그런데 약 5년 전인 1979년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인가? 1779년 이곳 천진암에서 강학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천진암 강학회 - 한국 천주교의 싹이 트다
1799년 겨울, 앵자봉에 있는 불교사찰 소속의 암자인 이곳 천진암(天眞菴)과 반대편 앵자봉 동쪽 기슭에 있는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의 주어사(走魚寺)에서 번갈아 한 무리의 학자들이 모여 강학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학문적 관점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차 신앙의 수준으로 승화되었다.
참여자는 권철신, 권일신, 이벽,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이가환,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10여명으로 학문적으로 볼 때 이들은 실학자 성호 이익의 분파의 하나였다. 대개 신분상으로는 양반들이었고 정치사상적으로는 근기(近畿, 경기도) 지역 남인 출신으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경신대출척 이후 노론 일색이었던 정계에서 소외되다가 정조 연간에 탕평책에 힘입어 다시 일부나마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청나라 학풍의 영향을 받아 육경(六經) 중심의 경학에 관심을 가졌고, 현실성과 실천성이 떨어져 버린 예학(禮學) 중심의 성리학적 학문 풍토에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경전 연구를 통해 선진 시대의 유학을 연구함과 동시에 성리학 이외의 여타 사상, 즉 양명학에 대해서도 탄력적 입장을 가졌고 이는 결국 서학(西學)을 수용하는데 까지 이르게 하였다.
오로지 유교만을 절대 규범으로 삼던 폐쇄적인 조선 시대에 어떻게 유학자가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감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유교적 사회질서가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을 넘어설 대안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말하나면 이들은 닫힌 시대를 열고자 했던 선각자들이었다.
1784년 강학회의 학문적 리더였던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가장 먼저 이벽은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가 입교했다. 또 그해 가을에는 서울 명례방에 살던 중인 출신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켜 그의 집을 신앙의 거점으로 삼았다.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오늘날 명동성당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강학회는 6-7년 동안 계속되다가 박해시대를 만나 중단되었는데 이때 이미 이벽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정약종은 “십계명가”(十誡命歌)를 지었다. 또한 주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 주일에 모든 노동을 하지 않는 파공(罷工)과, 도덕적·영적 향상을 위해 육식을 억제하는 소재(小齋) 등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 동안 노력을 기울였던 강학의 결실이었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사찰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다. 박해시대에는 사학 출현의 장소를 제공했던 불교계 역시 탄압을 받았다. 신유박해 때는 천진암 스님들도 박해를 당하고 천진암도 불태워졌다. 천주교의 순교자들은 이름이 남아 후세에 추앙을 받고 있으나 장소 제공으로 목숨을 잃은 스님들은 아무 기록조차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천진암 성역 개발 과정
불태워진 천진암 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농경지로 개발되어갔다. 1960년대에 와서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회장이 다산 정약용의 기록을 읽고 천진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불교사찰 주어사, 천진암 과 관련된 기록을 조사하고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마침내 천진암 터를 찾았다. 그 뒤 토지를 매입하여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급진전하였다. 1980년 6월 천진암 일대 12만 평의 땅을 매입하고 그 초입에 가르멜 수녀원이 문을 열었다. 그해 6월 24일에는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으로 제막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한 해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묘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창립 선조 5위 묘역을 이루어진 것이다. 1982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연구원이 설립되었고,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공사 시작되어 2000년까지 토목공사를 마치고 2020년까지 기초공사를, 2040년까지 골조공사를, 2070년까지 조적공사를, 2079년까지 마감공사를 통해 3만석 규모의 대성당이 위용을 드러낼 예정이다. 현재는 대성당 터에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1985년 2월 5일 이전의 천진암 공소에서 광암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변기영(卞基榮)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여 천진암의 성역화 작업이 촉진되었다. 1989년 임시 성당이 건립되었고 1994년광암 성당이 세워졌다. 1999년에는 성모 경당봉헌식을 가졌다. 1992년 박물관 건립 인준 후 1995년 기공식을 갖고시작한천진암 박물관은 2011년 건물 공사를 마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내부 전시장과 수장고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2013년 6월 23일에는 성모 경당과 대성당 터 중간에 좌대 포함 22m 높이의 세계평화의 성모상을 건립해축성식을 가졌다. 세계평화의 성모상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신앙의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청동을 이용해 파티마성모상 형태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2016년 10월 29일 기존의 성모 경당을 리모델링하여 새로 단장한 후 성모 성당으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수원교구에서 위탁 운영하는 경기도 청소년야영장이 있다. 입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실내체육관 옆으로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 묘역과 창립 선조 가족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천진암 입구 - 광암 광장
천진암 입구에는 커다란 천진암 성지 표지석이 기다린다. 이어서 수만 명이 운집할 수 있는 광암 광장(曠菴廣場, 광암은 이벽의 호) 이 펼쳐져 있다.
출입구에는 왼쪽에 안내소가 있고 오른쪽에는 안내 게시판이 5-6개나 이어져 있다. 그 중 첫째는 경내 안내도이고 나머지는 천진암 강학에 대한 기록적 근거, 그리고 주도자와 지도자, 강학회의 철폐와 성지 조성 과정 등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안내소 반대편, 광장 한쪽에 있는 광암 성당에 가서 성체 참배를 하고 천진암 경내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광암 성당
광암 성당은 안내소에 가기 전 광암 광장의 들머리에 있다. 1994년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지기 전에는 공소 수준의 가건물이었지만 천진암 성역화의 초석 구실을 하였다.
성당 안에 들어가니 중앙 벽면에는 십자고상이, 왼쪽에는 예수님 자비상이 액자에 담겨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는 파티마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제대 앞에는 두 개의 성광이 안치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 글자가 적혀 있음으로 보아 두 성인의 유해가 보관된 성광이라고 짐작이 된다.
벽면에는 창문과 커텐, 그리고 십사처가 부탁되어 있는데 조그만 십자가 형이다. 벽의 중앙 부분에는 자신이 지은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손에 들고 있는 천진암 강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이벽 세자요한의 상이 액자에 걸렸다. 그리고 앉는 자리성당 내부는 100명이 넘으면 앉기가 어려울 정도로 좁다.
광암 성당을 나와 다시 성지 안내소를 통과하니 앞에 커다란 모자이크 그림과 성모상이 나타난다.
모자이크 그림은 한국교회 창립 선조 5분(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위쪽에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하는 가시관과 비둘기 등이 그려지고 성령의 불빛이 다섯 분을 비추고 있다. 그런데 그 앞쪽에는 조그마한 오두막이 있어 문살을 통해 겨울 들여다 본 것은 성가정의 기도하는 모습인 듯했다.
그런데 천진암(天眞菴)이란 당시에는 불교 암자였지만, 고대에는 천진암이 토속 신앙과 관련된 당집이었다고 추정하는 설도 있다. 말하자면 신신제나 당산제 등을 올리던 작은 초가집이라는 것이다. 지금 보이는 작은 초가는 그런 형태를 나타내어 천주교가 전통사상에 접맥이 되어 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모자이크화 옆의 성모상은 아기 예수님을 안은 사진으로 소나무 밑에 높다랗게 조성되어 있다.
성모상 왼쪽 약간 오르막으로 십자가의 길이나 있다. 100년 대성당 터 등 천진암의 주된 시설로 갈려면 이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야 한다.
천진암 십자가의 길은 제법 경사가 있는 힘든 길이다. 십자가의 길 입구에는 또 하나의 천진암 성지 표지석이 있다.
십자가의 길
철제 십자가에 목각 수난상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은 십자가의 길 14처를 다 지나자 드디어 언덕길 꼭대기이다. 대형십자가는 숲에 가려 위만 보인다.
100년 건립 중인 대성당 터
십자가의 길이 다하고 언덕 위에 올라서니 대성당터가 펼쳐진다. 1978년 천주교 수원교구 변기영 베드로 몬시뇰이 이곳에 100년에 걸쳐 세계 10대 성당에 들어가는 대성당을 짓는다는 계획으로 부지 35만 평을 매입하고 1985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정초식은 1996년 6월 24일 거행되었다. 가로·세로 150m, 높이85 m의 초대형 건물로서 총 3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을 예정이며, 건립지는 1,500억 원으로 예상하는데, 철저히 일반 신자들의 성금으로 충당된다. 한국 가톨릭 전래 300주년인 207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1985년부터 시작된 공사가 아직도 기초 터를 단단히 다지는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천주교 신자 수가 급감하고 미사 참여율이 저조한 상활을 고려한다면 과연 2079년까지 얼마나 많은 신자가 교회에 남을지 의문이라는 비관적 지적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입장임에도 이런 계획은 권장할 만하다고 본다. 업적 제일주의에 빠져 무리하게 서두르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문화가 아닌가?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100년, 200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의 걸작을 이루려는 문화가 있어 왔다. 혹자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가 부실 공사로 야기되고 이것이 붕괴 사고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밤잠을 덜 자가면서 외국의 건설업체와 경쟁을 한 일시적 결과라고 보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조상들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 경주의 황룡사는 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에 시작하여 26대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구층탑을 마지막으로 완공을 했다. 공사를 시작한지 실로 93년 만이었다.
지금 대성당 기초 공사를 하는 사람은 완공된 성당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완공된 성당을 보는 사람은 기초 공사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못 볼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다. 나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성과 중심의 욕심에서 벗어나 후손에게 길을 내주어 완공하도록 배턴 터치를 해주는 모습은 아름다운 느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대성당 터는 우리 같은 풍수의 문외한의 눈으로도 대단한 명당으로 보인다.
세계평화의 성모상
대성당 터와 성모성당 사이에는 거대한 성모상이 있다. 세계평화의 성모상이다. 2013년 6월에 건립되어 축복식을 한 이 청동제 성모상은 높이 15m, 좌대 포함 22m이며 청동 25톤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파티마의 성모상 형태이다. 모든 국가와 민족의 신앙의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제작되었기에 성모님께서 우리 마음의 평화, 우리 가정의 평화, 우리나라의 평화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많은 축복을 내려주시리라 믿는다.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의 길이 시작된다. 성모상 앞에는 십자고상이 땅바닥에 놓여 있길래 왜인가 했더니 그것은 묵주의 십가가였다. 그 앞에 검은색 묵주알로부터 시작하여 흰색 알로 이어져 성모상 둘레를 에워싸고 있다. 공중에서 보면 커다란 묵주가 될 것이다.
성모 성당
천진암에는 두 개의 성당이 있다. 그 하나가 성지 입구의 광암 성당이고 이곳 성모성당이 다른 하나이다. 광암 성당은 100명 이하의 인원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성당이고, 성모 성당은 큰 성당이다. 성모 성당은 1988년 터를 닦기 시작해 1999년 축성식을 가진 성모성당은 1,000여 명의 신자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규모(793㎡)다. 이 성당을 다시 리모델링을 하여 2016 10월 29일에 봉헌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겉으로 보아도 엄청나게 크다. 아쉽게도 성당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미사가 있을 때만 문을 연다고 출입문 유리창에 안내문이 붙었다.
아래층 바깥 벽에 성모님 모자이크화가 있다. 모자이크화는 남용우 마리아 화백의 작품인데 그녀는 남종삼 성인 증손녀로 대학 재학 시절 장발 선생의 권유로 스테인드 글라스화를 공부했다.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신앙과 영성을 바탕으로 힘 있는 화풍으로 전국 성지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제18회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가까이 마치 북유럽의 흑색 목조건물인 스타브 교회를 연상하게 하는 건물이 하나 나오는데 가까이 가보니 고해소였다.
성모성당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박물관이 나온다. 아직 개관 준비 중이라 시간 관계상 가보지는 않았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역화를 계기로, 신앙 선조들의 여러 묘소 발견, 발굴, 이장, 각종 유물과 친필, 관계 고문서 수집 및 103위 시성 추진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지어졌다. 2011년 건물 공사는 완료했으나 건축 용도 및 허가와 관련하여 법적 문제가 발생하여 더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박물관 문제뿐만 아니라 천진암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불교계 및 지역 주민과의 갈등, 토지 소유자와의 소송, 성역화 반대론자들의 주장 등 많은 문제가 유발되어 법적 소송으로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루 빨리 제반 문제를 교구 차원에서 말끔히 끝내고 성역화가 차질 없이 수행되기를 기도한다.
길은 다시 계곡으로 이어진다. 아늑한 숲길도 있지만 장마비로 인해 골짜기에 생채기가 난 곳도 더러 보인다. 안내 표지판을 보면 강학로(講學路)와 직암로(稷庵路)로 갈라진다. 직암은 권일신의 호다. 강학로로 가면 200주년 기념비, 창립선조 5위 모자이크화, 강학당 터, 창립선조 5위 묘역이고, 직암로를 택하면 조선교구 설립자 정하상, 정철상, 유진길 묘와, 순교자 가족묘가 나온다.
일단 강학로를 택하여 조금만 가면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나타난다. 유교식 일반비석 형태인데 앞면 제액에는 韓國天主敎創立 二百週年, 韓國天主敎 創立聖祖 李檗(이벽),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址, 이렇게 삼행으로 새겨졌다. 그리고 가까이 서 있는 게시판에는 1981년 한국천주교성역화위원회에서 만든 한국천주교 창립사 개요라는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연대와 기간 - 1779년(정조3)부터 1784(정조8) 5년간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 광암 이벽, 녹암 권철신, 직암 권일신, 만천 이승훈,
선암 정약종
참여한 관계인물 - 손암 정약전, 다산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주요업적 - 1.실학연구와 강의((녹암)
2.천주학연구와 강의, 천주교 신앙 주도(광암)
3.공동 신앙생활 실천(공동)
4.음력주일 제정 엄수(공동)
5.천주공경가 저술(광암)
6.십계명가 저술(선암)
7.성교요지 서술(광암)
8.한국천교회 창립 주도(광암)
9.이승훈 북경 파견천주교회로 파견 주도(광암)
10,서울 수표동 광암 자택으로 교회 이전, 그후 명례방으로 이전(광암)
위의 내용을 보면 한국천주교 창립 주역이 광암 이벽이란 사실에 수긍이 간다.
창립선조의 모자이크화와 강학당터
강학당으로 가기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창립선조 5위의 모자이크 화가 이어져 있다. 이 역시 스테인드글라스 화가 남용우 마리아 화백이 제작한 것이다.
모자이크화가 끝난 지점에 널찍한 공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천진암 강학터이다. 조그만 방형 표지석이 있고 뒷면에는 이곳이 천주교 강학당 터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벽이 1770-1783년경까지 종종 머물며 독서한 곳이며, 1978- 1979 양년 간은 아주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수도(修道) 및 문도(門徒) 교육에 집중했다. 당시 정씨 형제 등 현우현사(賢友賢士)들이 참여하는 천진암 강학회가 1785년까지 7년간 종종 개최되었던 곳이다. ”
이는 정약용의 저서에도 나타나 있다고 해며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강론하는 모습을 나타낸 또 하나의 큼직함 모자이크화가 게시되어 있다.
이제 이 길의 마지막 목적지인 창립선조 5위 묘역만 남았다. 다시 계곡 안으로 더 들어간다. 계곡은 더 이상 숨긴 부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좀처럼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 더 오르니 바위에 구멍이 뚫려 물줄기가 새어나오는 신기한 샘이 있다. 자세히 보니 氷泉水(빙천수)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내력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커다랗게 서 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이 강학당을 오르내리며 목을 축였던 샘물이라는 것이다. 이 빙천수는 계곡 상류에서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는 물인데 영하 20도를 내려가는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미지근하며 무더운 한여름에는 손을 담그면 시릴 정도로 차겁다고 한다. 정약용 선생의 시문에 빙천, 암천(巖泉), 암천(暗泉)이라고 한 그 샘물이다.
묘역으로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마지막 저항은 돌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이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보니 이런 좁은 계곡 안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명당이 나타난다.
한국천주교 창립선조 5위 묘역
이곳 묘역은 1979년에 가장 먼저 광암 이벽의 묘가 이장되었고,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에는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묘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창립 선조 5위 묘역을 이루었다.
이벽(李檗, 1754 - 1787)
조선후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요한세자. 경기도 포천출신.
정약용(丁若鏞)의 맏형 정약현은 이벽의 누이와 혼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일찍부터 주자학의 모순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서 세례를 받고 오자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배교(背敎)하지 않으면 목을 매어 죽겠다는 아버지의 천주교신앙에 대한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고민하다가 열병을 얻어 1785년 봄에 33세로 요절하였다.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전한다.
권철신(權哲身, 1736-180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庵), 세례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 실세한 남인 가문에 태어나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였다.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한 최연장자로 김원성(金源星)·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이벽(李蘗)·이윤하(李潤夏) 등 남인계 학자들과 강학회를 열어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1801년 체포되어 정약종·홍낙민(洪樂敏)·이승훈·홍교만(洪敎萬)·최필공(崔必恭)·최관천(崔冠泉) 등과 같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에 앞서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권일신(權日身, 1741-179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 갈산 출신. 권철신의 아우이며 안정복의 사위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1782년(정조 6) 이벽(李檗)의 권유로 천주교 입교, 이승훈(李承薰)에게 를 받았다.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內浦)의 이존창(李存倉, 혹은 李端源)을 입교시키고, 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켰다.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 주교(主敎)가 되어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해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제주도 유배령을 받았다가 근거리인 예산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80노모로 인해 교회에 대한 소신을 약간 굽힌 것으로 추정되며 유배지로 가는 도중 장독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세례명은 베드로.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교회 최초의 영세자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정약종(丁若鍾, 1760-1801)
본관은 나주(羅州).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신. 진주목사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약현(若鉉)·약전(若銓)·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이다. 정하상이 그의 아들이다.
1786년경 중형인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하는 성품을 지녀, 서학서(西學書)를 접하게 되자 이에 심취하여 가톨릭 교리를 연구함으로써 당대에서 가장 교리지식이 뛰어났다. 1791년(정조 15) 천주교박해로 형제와 친척,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멀리 하여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801년 2월에 체포되었고,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2월 26일 이승훈(李承薰)·최창현(崔昌顯)·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부인 유선임, 아들 철상, 하상, 딸 정혜 등 가족 모두 순교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다.
묘소 안쪽 계곡으로 오솔길이 나 있기에 따라가 보았더니 이벽 성조 독서처 터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벽이 천진암에 독서처를 가졌다는 근거는 정약용이 형 약전과 이곳에 와서 지은 시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단오날 둘째 형과 천진암에 오니, 이벽의 독서처가 아직 그대로 있는데 공의 흔적은 아득하여 다시 찾기 어렵다. 풍류와 문채는 마땅히 신령한 경지라야 하리니 한 나절은 술 마시고 한 나절은 시를 짓노라.”
벌써 시간은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더운 날씨에 배도 허전한데 차에서 기다리는 일행으로부터 전화는 온다. 여기서 600-700m 정도만 가면 정하상과 유진길, 정철상의 묘역이 있고, 정약전을 위시한 조선교회 창립자 가족묘소가 있으나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이 정도에서 천진암 순례를 접기로 한다. 대신 근래에 찍은 몇 장의 사진을 검색하여 인적 자료에 덧붙인다.
유진길 정철상과 정하상 성인묘역
◆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그는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聖品)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유방제(劉方濟) 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7월 모친 유선임(柳仙任)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재상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護敎文)이다.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1791∼1839)
순교 당시 정3품 당상 역관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유진길은 북경 교회와 연락을 담당하며 8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조신철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였고 그 결과 네 분의 외국인 신부들이 입국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복자 정철상(丁喆祥) 카롤로(? -1801)
아버지는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 세례명은 카롤로이다.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선임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이복 동생들이다. 신유박해시 2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014년 시복되어 그해 정하상의 묘 옆에 의묘(擬墓)가 조성되었다. 의묘(擬墓)는 가묘, 허묘라고도 하는데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묘다.
이곳에 잠든 분은 한국교회 창설자의 가족묘인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정지해(1712-1756) 정약용의 조부
▲풍산홍씨 정약용의 조모. 홍유한의 친척 홍길보의 딸
▲정재원(1730-1792) 정약용의 아버지. 이부만의 사돈
▲의령남씨(1729-1753) 정재원의 전부인. 정약현의 어머니
▲해남윤씨(1728-1770) 정재원의 후처. 정약전, 약종, 약용의 어머니. 이승훈의 장모
▲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둘째형, 흑산도 유배 《자산어보》지음 우이도에서 선종
▲풍산김씨(1758-1825) 정약전의 부인, 을사박해(1785)와 신유박해(1801)로 수난
▲이부만(1727-1817) 이벽의 아버지
▲청주한씨(1724-1809)이벽의 어머니
▲이석(1727-1817) 이벽의 동생
▲양천허씨(1757-1821)이석의 부인
▲경주이씨(1750-1780) 이벽의 누이이며, 정약현의 부인이고 황사영의 장모
점심시간이 늦었으나 다음 순례지인 구산 성지로 가는 도중 팔당 호반에 있는 강마을 다람쥐라는 도토리 음식 전문점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오후 3시가 넘어 식사 시간이 지났는데도 혼잡하여 번호표를 타고 기다릴 정도였다. 기다리는 사이에 식당정원을 산책했는데 꽃밭도 아름답고 무엇보다 팔당호의 경치가 시원했다.
배가 고픈 김에 성지도 식후경이라 변명하며 도토리묵사발, 도토리들깨 칼국수, 도토리 전병에 찹쌀 동동주를 곁들여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식사 후 한강변을 따라 풍광을 즐기며 구산 성지를 향했다. 입간판을 보니 강하면, 강상면 등이 나타나고 마을 부근에는 근래 이슈가 되고 있는 하남 - 양평 고속도로를 정치적 논리에서 떠나 하루 빨리 착공하라는 현수막이 빽빽하게 걸렸다. 미사리 조정 경기장에 접어들자 구산 성지 안내판이 나타난다. 4시 반이 거의 돼서야 구산성지에 도착했다.
천진암 성지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