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7. 호탄과 라왁사원
사막에 외롭게 서있는 라왁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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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사막의 라왁사원> |
사진설명: 호탄시 동북쪽 70km 지점의 타클라마칸 사막 내에 있는 라왁사원은 서역불교의 흥망성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사막을 1시간 정도 걸어들어가야만 볼 수 있다. |
‘곤륜(崑崙) 연옥(軟玉)의 고향’ 호탄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서역남도를 대표하는 도시다웠다. 거리엔 사람들이 넘쳤고, 곧게 뻗은 도로는 계획도시적인 면모마저 보여주었다. 그 옛날 인도에서 당나라로 돌아가던 현장스님이 7~8개월 정도 머물렀던 곳 호탄. 호탄시는 백옥강과 흑옥강 사이에 있다.
곤륜산에서 발원한 동쪽의 백옥강(白玉江)과 서쪽의 흑옥강(黑玉江) 가운데 호탄 오아시스가 형성됐고, 호탄 오아시스를 만들어낸 두 강은 다시 북으로 흘러, 타림강에 합류된다. 타림강은 계속 흘러 타클라마칸 북쪽에 있는 놉노르 호수까지 다다른다. 호탄 지역은 옛날에도 대단히 풍요로웠던 곳이다.
〈대당서역기〉에 “구살단나국(호탄)의 둘레는 4,000여 리이며, 모래와 자갈이 태반을 이루고 있고 땅은 좁다. 농사가 잘 되며, 온갖 과일이 많이 난다. 양탄자와 가는 털을 생산하는 데 가늘게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 백옥(白玉)과 예옥을 생산하고 있다. 기후가 온화하고 화창하며 먼지가 날아다닌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인심(人心)도 좋았다. “풍속은 예의를 알며 사람들의 성품도 온화하고, 공손하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능을 익히며 여러 기술에 널리 통달해 있다. 사람들은 부유하고 집집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대당서역기).”
이처럼 현장스님은 야르칸드·카르가릭과 달리 이곳 인심(人心)을 우호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머물렀을까.
현장스님은 두 가지 이유에서 호탄에 7~8개월 정도 체류했다. 하나는 당태종 이세민의 입국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629년 장안에서 천축으로 갈 때,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不法)으로 출국했다. 여러 번 출국 신청을 했지만 허가가 나지 않자 그대로 가버렸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국법(國法)을 어긴 셈. 18년(629~645 인도 순례)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니깐 ‘공소시효’(?)는 지났겠지만, 그래도 황제의 칙허는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장스님은 호탄에서 장안(현재의 시안)으로 가는 대상(隊商) 중에 있던, 고창(투르판) 출신의 마현지(馬玄智)라는 청년에게 상표문(上表文)을 줘 황제에게 올리게 했다.
현장스님 호탄에 7~8개월 체류
또 다른 이유는 잃어버린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파미르고원을 넘을 때 도적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경전의 일부를 싣고 있던 코끼리가 도망치다 강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다. 이 때 경전도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결락된 경전을 보충해야만 했다. 현장스님은 사람을 쿠차나 카슈가르에 보내 구해오도록 했다. 쿠차나 카슈가르는 불교권이었지만, 쉽게 경전을 구할 위치에 있던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마현지를 통해 상표문을 받은 당태종은 “환희무량(歡喜無量.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쁨)”이라며 빨리 올 것을 독촉했다. 마현지가 다시 호탄에 돌아와 이 소식을 전했을 때도 결락된 경전은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즉시 짐을 꾸려 장안으로 출발했다. 체르첸(且末)·돈황 등을 거쳐 645년 2월 마침내 장안에 도착해 당태종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현장스님이 머물 당시 호탄엔 불교가 성했다.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가람은 100여 곳 있으며, 승도는 5,000여 명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왕은 매우 굳세고 용감하며 부처님의 법을 깊이 받들고 있으며, 스스로를 가리켜 비사문천(毘沙門天.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중 한 명. 수미산 북방을 수호하며 사천왕 중 가장 중심 되는 신)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대당서역기).”
현장스님 이전에 호탄을 방문한 법현스님도〈불국기〉에서 호탄불교를 기록해 놓았다. “이 나라는 토지가 기름져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하고, 모두 불법(佛法)을 받들고 불교가 생활화 돼 있다. 스님은 수만이나 되는데, 모두대승을 배우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 앞에 작은 탑을 세워놓았는데, 그 중 제일 작은 것의 높이는 약 이장(二丈)가량 돼 보였다. 이 나라 왕은 법현 등을 한 사원에 편안히 있도록 해주었는데, 사원의 이름은 구마제(瞿摩帝)다. 이 사찰은 대승에 속하고 3000명의 스님들은 건퇴(종이나 목탁 소리)소리에 따라 공양을 하로 모여든다.”
법헌스님이 갔을 당시엔 수만 명이었던 승도(僧徒)가 현장스님 당시엔 5000명으로 줄어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교가 점차 쇠퇴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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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
사진설명: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라왁사원으로 가고 있는 취재팀. 오른쪽부터 조병활 기자, 김형주 기자, 안내인 윤청록씨. |
신라 혜초스님의〈왕오천축국전〉에도 호탄이 나온다. “호탄에도 한 중국 사찰이 있는데, 용흥사(龍興寺)다. 한 중국인 스님이 있는데 이름은 □□다. 그는 사찰이 주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스님이다. 황하 북쪽 기주사람이다.”
주지하다시피 호탄 불교는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사행(朱士行)·기다라(祇多羅)·지법령(支法領)·실차난다(實叉難陀) 등 호탄 스님들이 대거 중국에 대승경전을 가져가 번역했고,〈화엄경〉〈정법화경〉〈대반열반경〉 등도 중국에 갖고 가 종파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게다가〈60화엄〉과〈80화엄〉이 모두 호탄에서 편집됐고, 화엄사상이 이곳에서 완성되는 등 호탄은 ‘화엄불교의 본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호탄 거리엔 불교의 ‘ㅂ’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승불교 화엄사상의 본 고장이었던 이곳이 왜 이슬람 일색으로 변했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이슬람은 ‘칼’로 불교를 밀어냈을까. 수 백 년 간 이어온 종교가 단지 칼 하나에 밀려버렸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역사를 파고들어가야 한다.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전투(751년)에서 패한 뒤 중앙아시아 일대는 완전히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 버렸다. 탈라스전투가 끝난 지 200년이 지난 940년경, 카라한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투르크계 세력이 발라사군(현재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 부근의 고대 지명)을 점령하고 권력을 잡았다. 카라한은 계속 남하하여 카슈가르를 장악하고, 960년경에는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카라한의 뒤를 이은 제4대 황제 이리크 칸(汗)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999년 사만왕조를 무너뜨리고, 동쪽으로 칼을 돌려 현장스님이 지나간지 400년 뒤 호탄(和田)을 점령하고 이슬람화시켰다.
‘화엄불교의 본고장’이 이슬람고장으로
그러나 이들도 처음부터 광신적으로 전교한 것은 아니었다. 실크로드는 특성상 공존의 문화가 숨쉬는 곳이었고, 때문에 일방적으로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카라한 세력이 장악한 실크로드를 따라 진행된 이슬람화는 향후 첫 몇 십 년 동안은 평화롭게 이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정책이 이슬람의 패권에 대한 위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슬람 내부에서 나왔다. 특히 이슬람교의 순수성에 의문이 자꾸 제기됐다. 정복 후에도 이슬람 안착정책에 따라 예전의 관직을 그대로 갖게 된 지방의 영주들과 관료들은 이슬람 율법을 따르기 보다는 불교 등을 비호했다.
게다가 이질문화와 다른 종교적 요소가 이슬람 내부에 파고들면서 이슬람의 순수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불교적 요소가 이슬람의 순수성을 해치는 가장 큰 위협으로 나타났다. 칼리프(이슬람 사회 제정일치 우두머리)들은 마침내 이러한 침윤(浸潤)현상을 막을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이슬람에 대한 믿음이 약한 지방 영주들은 멀리 외지로 보내졌다. 이로써 현지 주민들을 통합하고 이민족 지배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이끌 수 있는 세력들이 점차 제거돼 갔다. 동시에 불교도 점차 생활 속에서 뿌리 뽑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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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불교사원 유적지> |
사진설명: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라왁사원으로 가던 중 만난 고대 불교사원 유적지. 지금은 아무 것도 없고, 잔해 위엔 모래만 가득했다. |
불교도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불교도들은 이슬람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이슬람은 불교도들의 공개적인 저항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불교로 개종한 중국과 티베트도 신장 지역 불교도들의 투쟁을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불교는 고사(枯死)되고, 실크로드 주변은 이슬람 일색으로 변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호탄에 도착한 다음날(지난해 9월16일). 호탄 시 동북쪽 70km 지점에 있는 라왁사원지를 찾았다. 사막 속에 있었기에 그나마 보존된 불교유물. 스벤 헤딘과 오렐 스타인이 파헤친 곳. 이슬람의 파괴를 피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적을 보고 싶었다.
아침 일찍 차를 타고 출발했다. 목초지가 끝나고 사막이 나왔다. 목초지가 끝나는 부근에 관리사무소가 있고, 거기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이 시작됐다. 차를 세워두고, 걸었다. 1시간 정도 걸으니 모래 언덕 너머로 탑이 보였다. 모래 속에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탑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 갈수록 거대해보였다. 한편으론 숨이 멎었다. 사막 속에 있는 보석 마냥 신비롭기까지 했다.
당나라로 돌아가던 현장스님도 아마 이곳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현장스님 당시 까지만 해도 이곳은 사막이 아니었는데, 그 후 진전된 사막화로 라왁사원지 주변은 모래 투성이로 변해 버린 것이리라.
흙으로 만든 거대한 탑만 남아
라왁사원지에 도착하니 오직 흙으로 만든 거대한 탑만이 남아있었다. “탑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벽에는 불상과 불화가 남아 있지만, 보존을 위해 모래로 덮어두었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황량한 사막 가운데 외로이 남아있는 라왁사원지의 탑은 중앙아시아 불교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한때 성(盛)의 극(極)을 달렸던 불교, 이제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불교. “이것이 중앙아시아 불교의 끝은 아닐 텐 데”라고 생각했지만, 불교를 되살릴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오기 싫어 탑 옆에 40분씩이나 서성거렸다. 혼자 남을 탑이 외롭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야할 사람. 마음 속에 탑을 가득 간직한 채, 사막을 걸어오며 돌아보고 또 보았다. 그 결과 라왁사원지의 탑은 지금 두 곳에 - 하나는 내 마음 속에, 다른 하나는 타클라마칸 사막 속에 - 서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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