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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대경상록자원봉사단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7년 9월 14일(목)
장소 : 영광군 법성포. 백제불교최초도래지. 불갑사
대구반월당(07:00출발) - (257.2km.3시간36분) - 숲쟁이꽃동산 및 백제불교최초도래지(10시36분 도착. 관람 1시간30분. 12시06분 출발) - (1.2km.6분) - 법성포(12시12분 도착. 관람 및 영광굴비 시장 견학 40분. 점심 1시간. 1시52분 출발) - (24km.44분) - 불갑사(2시36분 도착. 관람 2시간30분.5시06분 출발) - (253.2km.3시간30분) - 대구 반월당(8시 36분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계획이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 회비 : 일인당 삼만원(30,000원)
* 선착순 40분을 모십니다.(관광버스 1대. 인원이 40분 넘으면 마감합니다.)
* 회비 : 삼만원
백제불교최초도래지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곳으로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뜻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부용루, 탑원, 간다라 유물전시관, 4면 대불상을 건립하였고 특히 부용루의 벽면에 석가모니의 출생에서 고행까지의 전 과정을 23개의 원석에 간다라 조각기법으로 음각 되어 있는 등 관광명소로 개발하였다.
불갑사(佛甲寺)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의 전법(傳法) 및 창건(創建)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 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미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신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는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 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
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년(526년)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과 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著)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폐쇠했었으리라 짐작된다.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384년에 동진으로부터 건너온 마라난타(摩羅難陀)대사이다. 그는 중국의 승려가 아닌 인도의 승려로서 중국을 거쳐 백제로 왔으며. 그가 올 당시 동진의 효무제(孝武帝)는 궁 안에 절을 지을 정도로 불교를 깊이 믿고 받들던 군주였다.
'해동고승전'에 백제의 왕이 교외에까지 나와서 마라난타대사를 맞아들인 것을 보면 그가 동진과의 공식적인 문화교류 사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불교가 그 당시 고구려가 수입한 도교(道敎)와 습합된 청담격의(淸淡格義) 중국식 불교가 아니라 인도불교가 직수입된 것이 특징인 것은 마라난타대사가 인도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제왕이 친히 나가 맞을 정도의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중국측 사서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가 중국에 장기간 채류하면서 활동한 인물이 아니라 그 곳을 경유해 곧바로 백제로 왔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전한 불교가 순수한 인도 불교 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의 현존하는 사찰인 선광사(善光寺)의 창사 연기설화에는 "생신인미타여래께서 천축(天竺)에 화도를 마치고 백제국으로 날아와서 왕궁의 내전 위에 매우 밝은 빛을 발하여 대궐 안을 환히 비추었다"고 하여 여래 광명이 인도에서 직접 백제의 궁중으로 비천해 온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해동고승전'에 마라난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그는 신통력을 가진자로서 그의 수행 정도는 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스님은 불교를 전파하는데 뜻을 두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으므로 결코 한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인도의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으며 향의 연기를 증거로 하여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지만 인연이 닿은 곳이면 그 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영광 불갑사 대웅전(靈光 佛甲寺 大雄殿.보물 제830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과 무왕 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법당인 대웅전은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 가운데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위부분에서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으며,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또한 가운데 칸에 달린 문은 연꽃과 국화 모양으로 꾸며 뛰어난 창살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화려한 무늬와 조각을 새긴 조선 후기 목조 불전 건축으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영광 불갑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靈光 佛甲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보물 제1377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불갑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세불좌상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하여 왼쪽에는 약사불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불로서 삼불 가운데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무릎이 넓어 안정되어 보인다. 육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머리에는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큼직하게 묘사하였으며 네모꼴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엿보인다. 두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약간 굵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형식으로 오른팔을 드러냈으며, 옷주름은 두 다리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양손 모두 마치 실제 인물의 손처럼 표현하여 사실성이 돋보인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불명확한 육계, 팽창된 얼굴, 분명한 이목구비, 부피감 있고 편안한 자세, 사실적으로 표현된 양 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에서 본존인 석가모니불과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다만, 석가모니불에 비하여 크기가 다소 작아지고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에 오른팔을 드러내지 않고 아미타인(阿彌陀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 조성기에 의하여 1635년 무염(無染)스님을 비롯한 승일·도우·성수 등 10인의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무염비구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전라도·충청도·강원도지역을 거쳐 폭 넓게 활약하던 무염일파의 작품과 경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 (靈光 佛甲寺 佛腹藏 典籍.보물 제1470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영광 불갑사의 명부전과 팔상전 그리고 사천왕상에서 나온 복장전적은 몇 권의 고려본을 포함하여 대부분 조선조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법화경, 금강경 등 당시 널리 유통된 대승경전들과 불교전문강원 중등과정인 사집과(四集科)의 교재를 비롯한 선종관련 이론서, 수륙재 관련 문헌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조선전기 한국불교신앙 형태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함께 나온 31건의 나한상과 시왕상 등의 조상 발원문, 중국에서 수입한 만력년간의 불교문헌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등 한국불교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다.
영광 불갑사 참식나무 자생북한지(靈光 佛甲寺 참식나무 自生北限地.천연기념물 제112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참식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대만, 중국 등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와 남쪽의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영광 불갑면의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는 불갑사라는 절 뒤편 산 중턱쯤에 있다. 나무들의 높이는 대략 6m 내외이며 군데군데 모여서 자란다. 주변에는 동백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등이 자란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 절에 있던 정운이라는 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던 중 인도의 공주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인도의 국왕은 정운 스님을 인도에서 떠나게 했다. 정운 스님과의 이별을 슬퍼한 공주는 두 사람이 만나던 곳의 나무 열매를 따서 주었고, 스님이 그 열매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자생지의 나무들은 그 나무의 씨앗들이 퍼져 자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영광 불갑면의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는 참식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지역으로 식물분포학적 연구가치가 높고, 인도와 우리나라의 교류관계를 알려주는 문화적 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불갑사사천왕상(佛甲寺四天王像.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사에 있는 사천왕상이다. 이 사천왕상은 진흥왕 1년(540)부터 35년(574)까지 연기조사 만든 것으로, 조선 고종 7년(1870)에 설두대사가 나무배 4척을 동원하여 현재의 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사천왕문 좌우편에 각각 2구씩 4구가 배치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는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라 부른다. 지국천왕은 손에 4줄로 된 비파를 들고 있고, 증장천왕은 큰 칼을 가지고 있다.
광목천왕은 용과 구슬을 들고 있으며, 다문천왕은 창과 장식이 된 탑을 들고 있다. 들고 있는 물건이 다를 뿐 이들 사천왕상은 표정이나 기법이 모두 비슷하다. 사천왕상은 고대 인도의 신(神)이었으나 불교가 생겨나면서 불교에 흡수된 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회도(靈光 佛甲寺 大雄殿 三世佛會圖.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회도는 비단에 채색을 하여 그린 불화로 석가?아미타?약사의 삼부처를 한 폭에 그린 그림이다. 제작 시기는 필선의 사용이나 구도, 대상의 의습처리, 표현기법, 색상, 문양의 회화적 수법과 불갑사의 불사기록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18세기 중엽경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삼세불회도 가운데 제작시기가 이른 작품으로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
영광 불갑사 팔상전 영산회상도(靈光 佛甲寺 八相殿 靈山會上圖.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영광 불갑사 팔상전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행한 설법광경을 도설한 것이다. 화기의 기록으로 제작자와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작품으로 1777년에 비현 등 15인의 불화승에 의해 제작되었다. 영산회상도는 안정된 구도와 화면의 변화, 양록· 선홍· 양청과 같은 선명한 색조의 사용, 등장인물들의 상호의 표정묘사, 가늘고 섬세한 세필의 선묘 등 18세기 후반의 회화양식을 구사하고 있으며 회화적으로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비현, 복찬, 쾌윤 등으로 이들은 조계산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경상도 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던 불화승유파의 작가들이다.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회화작품으로서 예술적 가치도 클 뿐만 아니라 뛰어난 화승들의 작품으로 보존가치가 크다.
영광 불갑사 지장시왕도(靈光 佛甲寺 地藏十王圖.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8호.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영광 불갑사 지장시왕도는 지장을 본존으로 하여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 범천, 제석천, 사자, 판관, 사천왕 등을 배열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화기의 기록으로 1777년 영산회상도와 함께 제작되었다. 밝고 선명한 색조, 가늘고 섬세한 필법, 안정적이면서 원근감이 느껴지는 화면 구성, 다양한 모습의 시왕 및 권속들의 표현 등 우수한 회화적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또한 당시 조계산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불화승 비현, 복찬, 쾌윤 등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하단의 부분적 손상이 있으나 전반적인 바탕화면과 색상의 보존상태가 좋고, 불화의 가치도 높다.
영광 불갑사 동종(靈光 佛甲寺 銅鐘.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1호.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영광 불갑사 동종은 주종기에 따르면 ‘獅子山 鳳林寺 大鍾’으로 1702년(康熙四十一年壬午, 조선 숙종 28년)에 “金尙立子三 金水元 金成元 片手金成奉”에 의해 조성되었음 기록하였다. 불갑사의 동종은 주종기가 남아있어 제작연대와 제작 장인, 봉안처, 시주자가 확인되는 18세기 초의 종이다. 조선후기 동종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종장들의 내력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주종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불갑사만세루(佛甲寺萬歲樓.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불갑사는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과 각진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한다. 만세루는 교육을 위한 강당 건물이다. 대개 절의 중심 공간으로 들어갈 때 누(樓) 아래로 드나드는 문루인 경우가 많은데, 화엄사의 보제루와 이곳 만세루가 낮은 중층을 이루어 건물의 모서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절의 강당은 초기에는 대웅전 뒤에 있었으나 고려 이후부터는 대웅전 앞뜰에 설치하였는데 불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건축 수법이 기본 틀에서 벗어난 후기 양식을 보이고 있다.
영광불갑사고적급위시답병록(靈光佛甲寺古蹟及位施沓竝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불갑사 (모악리))
조선 영조 23년(1747) 불갑사의 주지였던 채은선사의 발원에 따라, 당시에 전해내려 오고 있던 불갑사의 사적과 양전에 관한 기록인 『기해양안』을 승원문에 의해서 필사(베껴 씀)해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시행되었던 일반 양안의 작성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양안의 작성에 참여했던 인물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끝부분에는 영광군수의 서명이 자필로 되어 있다. 또한 한 시기에 한 사람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작성되어 본문의 모든 내용이 같은 사람의 서체로 되어 있다. 불갑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 절의 사적과 재정상황 등을 알 수 있을 분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사원경제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제17회 영광 불갑산 상사화축제
개최장소 : 불갑사 관광지구
개최기간 : 2017. 9. 15 ~ 9.24(예정)
축제내용
가. 개요 : 전국 최대 규모인 50만평의 상사화 자생 군락지 불갑산 전체에 마치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장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천년고찰 불갑사와 아기자기한 꽃무릇 길을 따라 불갑산 등산을 즐길 수 있다.
나. 주요내용 : 기념행사(창무극.기념식.우도농악), 체험행사(불갑요도자기.다도체험.한지공예.꽃무릇탁본.꽃무릇압화공예).문화행사(백일장).공연행사.전시행사.경연대회 등
석산(石蒜.꽃무릇. 학명:Lycoris radiata)
수선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꽃무릇이라고도 부른다. 산기슭이나 습한 땅에서 무리지어 자라며, 절 근처에서 흔히 심는다.
특징 : 꽃줄기의 높이는 약 30~50cm 이다. 잎은 길이 30~40cm, 너비 1.5cm 정도로 길쭉하며 10월에 돋았다가 한 다발씩 뭉쳐져 겨울을 지내고, 다음해 5월이 되면 차차 시들어 사라진다. 8월 초에 잎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 희읍스름한 꽃대가 쑥 솟아나서 길이 1m 가량 자란다. 9월에 꽃대머리에 산형꽃차례로 4~5개의 붉은 꽃이 커다랗게 핀다. 여섯 개의 화피는 거꾸로 된 얇은 바소꼴이고 뒤로 말린다. 길이 7~8 센티미터의 수술이 여섯이고 암술이 하나인데 길게 꽃밖으로 나오며, 꽃과 같은 색으로 또한 아름답다. 원산지인 중국의 양쯔강 유역에서 자라는 것은 이배체로 결실이 잘 되나,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것은 삼배체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꽃이 쓰러진 뒤에 잎이 나온다. 비늘줄기(인경)로 번식한다.
약효 : 비늘줄기의 한약명이 석산(石蒜)이다. 해독 작용이 있다고 한다. 둥근뿌리에는 유독한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으며, 그 때문에 지방에 따라서는 사인화(死人花), 장례화(葬禮花) 또는 유령화(幽靈花)라고도 한다.
상사화와 꽃무릇 차이 : 많은 분들이 상사화와 꽃무릇(석산이라 불림)과 구분을 잘못 하시는데요 상사화나 꽃무릇은 구근으로 있다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조금씩있겠지만 상사화가 7~8월경에 꽃무릇보다 조금 일찍 피구요. 꽃무릇은 조금뒤에 8~9월경에 핍니다~!, 두 꽃 모두 잎이나 꽃받침 같은것이 없이 신기하게도 군더더기 없이 땅에서 불쑥 꽃대만 쭉 올라와서 꽃을 피웁니다~!
상사화
수선화과(水仙花科 Amarylid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 키는 60㎝ 정도 자라며 비늘줄기는 지름 4~5㎝, 길이 30㎝이다. 너비가 2.5㎝ 정도인 잎이 비늘줄기에 모여나지만 여름에 꽃이 나오기 전에 말라 죽는다. 홍자색의 꽃은 8월에 비늘줄기에서 나온 꽃자루 위에 4~8송이씩 무리져 핀다. 꽃은 길이가 약 8㎝이며, 꽃 덮이조각[花被片] 6장, 수술 6개, 암술 1개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이 원산지이나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정원이나 화분에 심고 있으며 양지 바르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서 잘 자 란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달려 있을 때에는 꽃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 다는 의미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상사화와 비슷한 식물로, 백양꽃(L. koreana)은 전라남도 백양산, 흰상사화(L. albiflora)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쪽 지방의 바닷가, 개상사화(L. aurea)는 남쪽 섬에서 자라고 있으며, 석산(L. radiata)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영광 굴비
굴비의 최대 생산지인 법성포 영광굴비는 법성포의 특수한 자연환경, 지리적 기상요인과 서해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의 영향으로 건조 건이 월등하여 담백하고 밥 좋은 영광굴비를 생산 해 냅니다. 타 지역의 굴비는 소금물에 조기를 담갔다 말리는 방법에 비해 법성포 영광굴비는 1년 넘게 보관하여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재는 독특한 염장법 때문에 영광굴비가 맛있는 까닭입니다.
(굴비는 순수 우리말이 아니고 한문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고 한다. 고려 인종 때, 왕의 사돈인 이자겸이 이 씨가 왕이 된다는 참위설을 믿고서 반란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역적으로 몰려 영광으로 귀양을 갔다. 그 곳에서 소금에 저린 조기의 진미를 터득한 다음 조기를 왕께 진상하면서, “이는 아부가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표하는 진상품"이라 설명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리면서 그 생선 명을 비굴하지 않은 충성이란 뜻으로 屈非라 칭했다고 한다.)
영광 법성포 굴비와 시중 굴비 무엇이 다른가?
구 분 | 영광굴비 | 시중굴비 |
재 료 | 양질의 참 조기만 사용 | 세조기, 백조기, 반어, 유사생선 |
염 도 | 기호에 맞는 섶간(염장) | 물간(물에 소금을 타서 절임) |
건 조 방 법 | 해풍,습도,일조량의 최적지에서 자연건조 | 대부분 인공으로 건조 |
영 양 | 섶간으로 영양손실이 없어 단백질 우수 | 물간으로 인한 영양 손실 |
보 관 | 장기간 보관 가능 | 장기간 보관이 불가 (속이 물러 변질) |
오∼래 맛있게 굴비를 드시는 방법
공기가 잘 통하는 그늘진 곳에 걸어두면 변질되지 않으나 상온에서 15일 이상 오래 두면 배에서 누런기름기가 배어 나와 맛이 변하므로 적당한 시기에 가정용 냉장고에 보관하면 변질되지 않고, 굴비 본래의 맛을 계속 느낄 수 있다.
< 참고 자료 : 문화재청. 영광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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