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보다 좋은 것/민 혜
애연가들 설 자리가 날로 좁아지고 있다. 임어당은 인간의 문화와 행복이라는 점에 있어 담배 피우는 것, 술 마시는 것, 차 마시는 것을 발명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파트에 산다면 요즘은 제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제재 대상이 된다. 관리실에선 수시로 금연협조 방송을 내보내는데, 베란다도 안 되고 화장실도 안 되고 복도도 안 되고 어린이 놀이터도 안 된다는 식이다. 아무리 법 없이 살만한 사람이라도 만약 그가 애연가라면 그 한 가지 만으로 기피의 대상이 된다.
나 역시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만큼은 참아내기 힘들어 관리실로 전화를 걸게 되고 길을 가다 담배연기를 뿜고 있는 사람을 보면 무슨 전염병자라도 되는 듯 화급히 피해간다.
같은 담배 연기라도 비가 온다든지 하여 대기가 습할 적이면 그 냄새는 왜 그리도 고약한지 불쾌감이 곱절은 상승된다. 끽연자의 방안에서 풍겨나는 찌든 니코틴의 악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데 담배연기를 놓고 오두방정 떨듯 하고 나니 웃음이 터지려 한다.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나 해서다.
이실직고하자면 나도 한 때는 담배연기 풀풀 내뿜으며 공기를 오염시켰던 주범. 결혼 전후 세월에 국한된 거지만 하루에 반 갑 정도를 거의 줄담배로 피웠다. 나에겐 뭔가 당기는 음식이 있으면 물릴 때까지 그것만 먹어대는 기벽이 있는데 끽연도 이와 같아 한 두 개비로 끝내기엔 어딘가 성이 차질 않았다.
줄담배를 피울 때면 혓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남편과 음악을 들으며 맞담배를 즐겼다. 임신을 한 뒤론 당연히 끊었다가 아들이 댓살이 넘어서 나는 다시 애연가로 복귀했다. 몰래 피우다가 현장을 보게 되면 혼란을 주게 될 것 같아 어느 날 나는 어린 녀석 앞에 놓고 정식 신고까지 치렀다.
“엄마는 담배가 좋아. 대신 술은 별로야.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기호품으로 커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근데 애들에겐 안 좋으니까 엄마가 담배 피울 땐 근처에 오지 마라.”
말귀를 얼마나 알아들었을까만 아들은 그런 엄마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이듬해 겨울, 시어머님의 환갑이 찾아와 어머님의 많은 친지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인 적이 있었다. 나는 얌전한 며느리 모드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공손히 인사를 드렸고, 손님들은 며느리가 참 참하다고 이구동성 칭찬을 해주셨다.
어머님은 손님들이 권하는 술잔으로 상기된 표정이 되어 내게도 한 잔 받으라고 하셨다. 그 때 바로 옆에 있던 아들 녀석이 끼어들었다.
“할머니, 우리 엄만 술 싫어하고 담배를 좋아해요.”
그래놓곤 촐랑대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조신한 며느리의 체면이 구겨질 새라 얼른 위기 탈출을 시도했다.
“어린애들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어머니, 그게, 제가 애비 담배 피울 때 어쩌다 불 부쳐주느라 담배를 물었더니….”
굳어졌던 어머님 얼굴엔 다시 화색이 돌아왔고 나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 들고 정종 한잔을 가뿐히 받아 넘기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때만 해도 담배가 미치는 해악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암을 일으키고 수천가지의 유해 물질이 들어 있다는 세부적 상식은 전무하던 시절이다. 요즘엔 흡연자의 머리칼이나 옷들에 밴 유해물질만으로도 집안을 오염시킬 수 있다면서 담배의 위험성을 신경질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애연가들을 향한 경고는 수위를 높여 남성들의 급소를 건드리기도 한다. 흡연은 성 불능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비장의 카드를 들이밀어도 그들은 ‘오, 차라리 암을 유발한다고 해주세요.’ 하는 너스레로 비껴가려한다. 담배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 운운하는 건 이미 담배 유해론의 대세에 밀려 비틀거리는 중이다.
담배연기가 역하게 느껴지면서 흡연에서 멀어졌지만, 오십 초반 경 상도동의 터 너른 집에서 잠시 머물 적, 라일락 꽃 향기가 바람결에 스쳐오는 봄밤이면, 거실 앞 앞마당의 30년 된 개목련 꽃잎이 벚꽃 지듯 난분분히 흩날릴 때면, 나는 무슨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듯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고 지는 봄날의 서정을 달래곤 했다.
한참 만에 즐기는 담배의 맛과 연기가 폐부로 침투될 때 일시 핑그르르 도는 어지럼증 속에 누리는 정취는 술기운이 오른 듯한 몽환을 불러일으키며 봄밤의 황홀감을 배가시켜주었다.
이젠 1년에 한두 번 치르던 봄날의 연례행사마저 내던진 지 오래지만 간혹 담배를 물고 싶어 질 때가 있기는 하다. 담배란 홀로 피울 때가 더욱 그윽하고 깊은 맛이 나기 때문일까. 즐기는 방법이 술처럼 번잡하지 않아서 일까. 술이 주는 흥취를 어찌 담배에 비하랴만 사람을 들뜨게 하고 이성을 흐려놓기도 하는 술과 달리 담배는 사념을 정돈해주며 시름을 연기처럼 날려버리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담배는 여전히 유혹적이다. 사형수에게 한 잔 술은 몰라도 한 개비 담배는 요구하면 들어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줄로 안다. 다산 정약용 역시도 유배 생활을 하며 귀양살이 하는 자들에게 담배란 차보다도 술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고 예찬했다지 않는가.
아무려나 담배냄새가 내 비위를 건드린 걸 천만다행이라 여기련다. 그게 아니었다면 숱한 유해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담배의 마력을, 담배를 피워야 할 당위성을 끝없이 찾아내며 그것을 끊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는 일이 시들해지는 날이면 푸른 연기의 향연에 넋 놓고 빠져들며 담배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아요, 이만하면 살만큼 살았지요, 나는 나를 점차적이고도 행복하게 파괴할 권리가 있다니까요, 어쩌고저쩌고 주절대며 말이다.
2017년 <시와 문화>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