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성경은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영감이란? (여기 영감은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되는 성령의 조명, 혹은 내적영감과 구분됩니다.) 성경 기록의 원천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마치 하나님이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쓰기 하듯이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기적 영감이라 부릅니다. 유기적 영감은 성경의 각 저자의 유전, 환경, 양육, 교육, 은사, 재능, 문체, 흥미뿐 아니라 유전적 차이점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인간적인 요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탁월하게 전하실 수 있고 오류가 없도록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 저자의 개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무오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축자영감이라 말합니다. 축자의 단어적 의미는 글자 하나, 하나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계적 영감과 혼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유기적 축자 영감설을 따릅니다. 비록 인간 저자의 개성과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문학적 특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 단지 사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격적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대부분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 저자의 다양한 관점과 상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고 저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형식적으로 봐도 시편과 같은 시가 있고 역사서와 같은 서사적인 역사, 룻기와 같은 이야기들, 이뿐 아니라 그 내용을 봐도 문학적인 다양한 장치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비유, 은유, 상징, 과장, 그래서 성경을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 절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봐도 과장과 비유가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너무 메마른 일종의 종교적 가르침의 경전으로만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에 있어 전적으로 인격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습득하는 로봇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돌킨의 반지의 제왕이 성경에 대한 판타지적 해석이라는 걸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의 친구였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이스는 비록 신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상상력과 문학적 능력에서 나오는 변증은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쥐가 고양이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의 이 말은 얼마나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은 말씀묵상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묵상은 자기 고백적이며 기독교윤리의 실천적 성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문학적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기만의 일기가 될 수도 있고 한편의 시나 에세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묵상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말씀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묵상이 가르치기 위한 논문이나 강의안이 된다면 그건 더 부적절합니다. 그건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 자기 성찰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풍성한 문학적 장르로 가득하다는 그 사실 자체만을 바르게 알아도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우리 삶에 더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