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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아름다운 예배는 순간 순간의 삶이 모아진 것이라야 합니다. 창4:3-5a절은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받아들여지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받기도 하시고, 거부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되,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사람 가운데, 사람을 먼저 받으시고, 후에 그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시간만 낭비하고 있습니까? 사실 예배의 성공과 실패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 분위기도 중요하고, 드려지는 찬양도 중요하고, 목사의 설교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드릴 때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고려하곤 했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주어진 몫인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과 분위기와 설교가 좋아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예배가 있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아무리 인위적인 준비가 잘되었다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예배는 분위기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형식과 의식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는 우리 스스로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쁨과 감사와 감격과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과 시험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윌터 윌슨은 어느 날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 내내 당신을 잘못 대해 왔습니다. 당신을 종처럼 취급했습니다. 저는 필요할 때만 당신에게 손짓해서 제 일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종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저 혼자 결정하고 선택한 일에서, 기꺼이 저를 도와주는 종으로만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당신에게 제 몸을 드립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당신에게 드립니다. 제 손과 사지와 눈과 입, 두뇌를 드립니다. 제 안에 있는 것과 제 밖에 있는 것 모두를 당신에게 넘겨 드립니다. 당신이 제 몸 안에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이 몸을 아프리카로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암에 걸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눈을 멀게 하실 수도 있으며, 메시지를 주어 티벳으로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이 순간부터 이 몸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제물로 드려진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모아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삶이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성공과 실패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성공과 실패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어떻게 예배드리는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른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배에 실패한 사람들과 예배에 성공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님은 여러 차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지혜와 권위는 높아진 반면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트집을 잡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이 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장본인들”이라고 정죄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과 대립 각을 세우고 있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 정죄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려야할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그들이 누리고 있던 부와 명예와 권세와 기득권을 공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끊임없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의식해 공개적으로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실제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유월절 인파 속에 섞여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고 있는 무수한 지지자들, 특히 충동적인 갈릴리 사람들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절 동안에는 체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유다의 방문으로 변경되고 말았습니다. 10-11절입니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눅22:6절은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말씀합니다. 대제사장들을 찾아간 유다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한 방법은 대제사장들과 의논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이 없는 때를 이용해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그에게는 물질적인 탐욕이 있었습니다. ② 또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꿈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기대는 사라져 갔습니다. ③ 급기야 그는 예수님은 자신이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④ 더욱이 그때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민감한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만에 하나 산헤드린의 결정대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게된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자신에게도 어떤 불똥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단이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요11:57)는 산헤드린의 명령대로 대 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법을 의논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정욕에 사로잡혔던 그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볼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 섬겼어야할 메시아를 파는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원래 유월절을 피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어린양이신 주님은 유월절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종교 지도자들과 유다를 통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음모를 이용해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가장 잘 예배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졌던 종교 지도자들과 유다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정욕이 그들의 메시아를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고, 하나님은 제물이나 예배를 받으시기 전에, 먼저 저와 여러분을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를 받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마가 요한은 그것을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종교 지도자들과 유다의 음모 사이에 한 여인이 드린 아름다운 예배를 끼워 넣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두 사건을 통해, 이기적인 정욕으로 인해 예배에 실패한 사람들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린 여인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께서 성전에 입성하시기 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베다니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휴식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는 줄곧 이 베다니에 머무셨습니다. 주님은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대접받으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향유가 담긴 옥합을 들고 예수님의 뒤로 갔습니다. 그리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와 더불어 감사한 마음을 예수님에게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4-5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 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낭비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말의 핵심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마리아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심심해서 그냥 부어봤겠습니까? 그렇지만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1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그렇게 많은 가치가 있는 향유를 부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고맙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쏟아 버리는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해 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쏟아 버리는 물질과 시간과 정열이 얼마나 자신을 들뜨게 하고, 기쁘게 하는지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아무리 목이 터져라 설명해도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향유를 붓는 일은 유일하게 마리아만 드릴 수 있는, 마리아만의 예배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지만, 쓸데없는 짓이라고, 허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대가를 요구했습니까? 아닙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냥 드렸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좋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된 예배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 최고의 것을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마리아의 감격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들뜸이 있습니까? 혹시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 역시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에게 있었던 기쁨과 감격과 들뜸이 없겠습니까?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쏟아 부어버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낭비해 버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을 위해 아낌없이 낭비하는 것인데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쓰다 남은 시간, 쓰다 남은 물질, 쓰다 남은 마음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가장 귀한 시간, 가장 귀한 물질, 가장 귀한 마음을 드릴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낭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진 것 중에 낭비란 없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들어보십시오. 6-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님은 마리아가 좋은 일을 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좋은 일”이란 “아름다운 일”(a beautiful thing)입니다. 또 “좋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kalos)는 “도덕적으로 선할 뿐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선할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만큼 아름다운 일이라고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그렇게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① 힘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첫 번째 계명을 묻는 서기관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12: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가장 큰 계명 중 첫 번 째 계명을 실천한 것이라고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 밑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되실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불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향유를 준비했다가 부었는데, 그것이 누구도 하지 못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마리아를 축복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행한 일도 기념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딱 두 번 “기념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찬과 마리아가 행한 일입니다. 제자들까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유일한 예배를 드렸던 마리아는, 복음과 함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신앙생활에서 예배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예배를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성공과 실패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와 같습니다.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가 미국의 제20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백악관 생활을 시작한 첫 주에 한 각료가 찾아와 “이번 주일에 중요한 각료회의가 있으니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회의는 당시 위기에 처한 미국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각료회의였습니다. 그러나 가필드는 “중요한 선약이 있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고 냉정히 거절했습니다. 깜짝 놀란 각료는 “대통령으로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가필드는 “주일은 교회에서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뵙는 날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하겠다고 벌써 오래 전부터 주님과 약속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가필드는 주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얼마나 인식하고,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즉 예배의 성공과 실패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물질도, 명예도, 세상 권세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던 감사와 헌신과 사랑, 곧 예배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억하실 만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마리아처럼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들뜬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