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작품해설
1959년 2월 『사상계』에 발표한 박재삼의 시.
이 시에 등장하는 ‘울음’, ‘눈물’, ‘가을’ 등의 이미지는 박재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뛰어나다.
또한 이 시는 전체적으로 성숙과 소멸의 이미지로 덮여 있는데, ‘가을 햇볕’, ‘등성이’, ‘제삿날’, ‘해질녘’, ‘가을 강’ 등이 그것이다.
시인은 이런 비유들을 통해 사랑의 성숙을 죽음과 소멸의 이미지로 채색함으로써, 통념적인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새삼스러운 체험으로 바꿔놓는다.
서러운 사랑의 귀결은 소멸이지만 그 사랑은 강렬한 시적 이미지를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리하여 소멸과 재생의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된다.
시인은 노을이 붉게 타는 가을 강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서러움을 하나의 정화된 의미로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러운 사랑의 이야기는 한낱 소멸의 이미지에만 묶여 있지 않고,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매개로 하여 삶의 근원에 대한 깊은 성찰과 새로운 자각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게 된다.
박재삼은 이처럼, 평범한 삶의 체험을 생생하고 강렬한 정서로 부각시키는데, 그러한 과정에는 구어체의 생동감 있는 어조의 변주라는 특유의 시적 장치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저자 권영민 대학교수, 문학평론가
1948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버클리에서 한국문학 초빙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현대문학평론상, 1992년 김환태평론상, 2006년 만해대상 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외에도 서울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문학사』, 『우리문장강의』, 『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한국 계급문학 운동사』,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 정신』, 『월북 문인 연구』, 『한국문학 50년』, 『윤동주 연구』, 『작은 기쁨』 『문학의 이해』등이 있다.
첫댓글
산골 물소리 잊혀 진다며
노을 바라보던 언덕 바람도
흐르는 소리 해설퍼 함께 흐르나
은은한 달빛 향기로 잊힘되어 노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