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를 짓이기다 / 배세복
처녀 출항, 콧대만큼 높은 돛대를 달고! 하지만 선장은 소년이 불편했다 무례하게 다가오는 너울처럼 소년은 불온했으므로, 지각 또 지각,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세상의 무심을 소년은 그렇게 하소연했다 수화기엔 부모 대신 할아버지 비틀어진 목소리뿐, 툭툭 끊기는 가정통신, 선장은 무얼 했던가, 수차례 상담 혹은 협박, 거친 두어 마디 전홧말로 아침잠 깨우기, 허나 소년은 콧대만 높은 선장을 받아주지 않았다 회초리-바다 저쪽 신기루처럼 아름답게 왜곡된 이름-그걸 휘둘렀던가 이게 최선의 방법이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 네 마음 헤아리는 건 나밖에 없어! 가까스로 배의 난간 잡고 있는 소년을 심해 저편으로 떨군 줄 모르고, 뭍에서 너무 멀리 와서 아예 대답조차 없던 무선통신, 이젠 결석 또 결석, 퇴학, 제적 그래서 그 해 바다는 고요해졌던가, 노여움 덜기 위해 바쳐지는 바다의 제물…… 꿈이었나, 십 년 훌쩍 지나 만난 소년, 왜 아직 교복 입고 있어? 선생님, 전 이 옷밖에 없어요! 소년의 발치에 파도 되어 엎드렸다 내 꿈에 왜 찾아오니, 나는 네 선장이 아니잖아 선생이 아니잖아! 불면의 해초 되어 어둠 속 머리만 흔들었다 콧대를 짓이겼다
<소금시-코> 수록, 2020. 시와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