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頓悟頓修)’
깨닫는 순간 ‘도’가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단박에 깨친다는 거죠.
이에 반해 ‘돈오점수(頓悟漸修)’란
한 번 깨달음을 얻을지라도 계속 닦아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살면서 지은 업(業)과 습관(習慣)을 점차 극복하며
인격을 다져야 궁극의 해탈에 도달한다는 겁니다.
삶은 단번에 경지에 이르기보다 공부를 통해
차츰차츰 성취해가는 과정이지 싶습니다.
경비로 일하며 道도'를 구하다…“해탈의 길에 들었다”
도(道). 실질적인 수행은 4년 전 경비 생활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왜 하필 경비 일을 하며 도를 구하게 했을까? 의구심도 엄청 일었습니다.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어긋나고 빗나갔습니다. 앞을 가로 막는 그 어떤 힘이 작용했던 걸까. 여수국가산업단지 입주기업 세 곳에서 40여 개월간 경비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오만한 나를 내려놓게 됩니다. 자연이 되어 갑니다. 아마도 무극(無極)과 태극(太極),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을 가르치려 애썼지 싶습니다. 특히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겸손’을 배우라는 뜻이로구나 했습니다. 또한 낮은 곳에서 보고 배워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거지 여겼습니다.
경비. 첫 근무지는 ‘한화컴파운드’.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터덕거리는 나를 추슬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전국의 산과 절집 등을 다녔습니다. 마치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53 선 지식인을 만나러 다녔던 것처럼. 자연은 어리고 여린 한 인간을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스님들과 어울리며 배움을 구했습니다. 오전 수행은 변화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두 번째 근무지는 ‘KCC’. 이 때 큰 인연을 만났습니다. 장흥 보림사 일선스님. 스님은 제게 “해탈의 길에 들어섰다”며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주문했습니다. 허나, 무슨 소린지 했습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발심. 이후 불교 경전 등을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아래 금강경 구절은 특히 의지했던 구절입니다.
경비 생활 속 수행에서 참나 체험으로 ‘돈오’를 맛보다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요, 약견(若見),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닌 걸 알면 여래를 보리라)
'상이 아닌 걸 알면 여래가 보인다는데 도대체 여래는 어디 있는 거야?' 반발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염원이 깊어졌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돈오’를 맛보았습니다. 지눌스님의 수심결 강의를 듣던 중 ‘공적영지’ 혹은 ‘허령지각’ 등으로 불리는 ‘참(다운) 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참나'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생과 사도 없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자체였습니다. 아공(我空) 체험은 삶을 다른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세 번째 근무지는 ‘남해화학’입니다. 예서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됩니다. 무지(無知)와 아집(我執)을 벗고, 궁극의 목표인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법공(法空)과 구공(俱空)을 깨쳐야 했습니다. 수행방법은 돈오 이전과 달랐습니다. 전에는 무작정 도를 구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임하는, 천양지차였습니다.
전에는 우주 및 천지자연과 불통이었던, 자기만 아는 무소불위의 인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천지자연과 소통하는, 자연 속 본래 인간이 되어 갔습니다. 점차 만물이 하나임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육체에 많은 변화가 뒤따랐습니다.
수행 통해 겪게 된 작고 큰 세 가지 몸의 변화
첫째, ‘뇌’ 변화입니다. 뇌의 움직임이 자주 끊임없이 감지됩니다. 대뇌, 소뇌 등 각 부분 및 하나하나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살아났습니다. 급기야 뇌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돈오를 유발하는 뇌 기관 ‘송과체’를 알게 됩니다. 뇌의 활발한 움직임은 1, 2년간의 공부가 반백년을 넘게 배워 온 공부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많은 배움을 얻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둘째, ‘몸’ 변화입니다. 분명한 것은 알지 못했던 이상 현상이 제 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회음에서 백회까지 일사천리로 뚫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락까지 열렸습니다. 그래 설까. 자연스레 몸에 힘이 붙고 기운이 넘쳐 납니다. 주위에서 “얼굴 좋아졌다” 감탄입니다. 피부가 밝아지고 얼굴에 빛이 난다나. 몸이 알아서 작동한 결과입니다.
셋째, ‘호르몬’ 변화입니다. 어느 날 근무 중 갑자기 컴퓨터 글자가 흐릿흐릿 보였습니다. 안경에 물이 묻었을 때 보이는 투명한 젤리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러더니 뇌 전체가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맑고 밝고 투명한 하얀 빛이 보였습니다. 동시에 입 안에서 침이 나왔습니다. 이 새로운 호르몬은 달면서 영롱하고 신선한 맛이었습니다. 감로수라 해도 될까.
제 모습은 여전히 볼품없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허나 몸과 정신이 완전히 바뀐 상태. 저도 중간 중간 어째 이런 일이 하며 많이 놀랐습니다. 이제야 제 몸에 적응된 상태입니다. 도에 대해 일(一)도 몰랐던 저를 ‘도학(道學)의 길’로 안내하고, 혼신으로 자문하신 일선스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진정한 ‘나’를 찾는 ‘도’의 세계에 드시길 권합니다.
세상 속에서 인의예지신 펼쳐 홍익인간 구현할 터
일련의 변화를 아는 지인들이 한 마디씩 보탭디다. “산으로 들어갈까 걱정”이라나. 공부 과정에서 알았습니다. 불교에선 ‘출가(出家)’고, 유학에선 ‘출세(出世)’더군요. 출세는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 속으로 나갈 작정입니다. 그리하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혹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펼칠 예정입니다. 왜냐면 태어난 이유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니까.
불가의 원효, 의상, 지눌, 진묵, 김시습, 서산 등 큰 스님들만 득도하신 게 아니더군요. 유교, 도교, 기독교, 민족종교 등 여타 종교에서도 해탈 혹은 성령 받은 분들이 많더군요. 중국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주자 뿐 아니라, 조선의 서경덕, 조식, 이황, 이이, 최한기 등도 세상 속에서 홍익인간,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꿋꿋이 살았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걱정일랑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삶은 곧 수행입니다. 삶은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이지 싶습니다. 수행은 철없고 불완전한 인간이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한 밑바탕입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남을 위하는 게 곧 나를 위한 길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