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설공찬전>의 내용.
예전에 순창에서 살던 설충란은 지극한 가문(1)의 사람이었다.
매우 부유하였는데 한 딸이 있어 서방을 맞았으나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2) 그녀의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찬이고 아이 때 이름은 숙동이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공부하기를 즐겨 한문과 문장 작법을 매우 즐겨서 읽고 글쓰기를 아주 잘하였다.
갑자년(1504)에 나이 스물(3)인데도 장가를 들지 않고 있더니 병이 들어서 죽었다.
공찬의 아버지는 불쌍히 여겨 신주(神主)를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매일 울면서 제사를 지내었다.
병인년(1506)에 삼년상이 마치자 아버지 설충란이 조카딸에게 이르되,
“죽은 아들이 장가도 들이지 않아서 죽었으므로, 그 신주에게 제삿밥 먹일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묻어야겠다.”
하고, 하루는 [신주를] 멀리 싸두었다가 공찬의 무덤 곁에 묻고 매우 슬퍼하면서 이레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서러워하였다.
설충란 동생의 이름은 설충수였다.
설충수 아들의 이름은 공침이고 아이 때 이름은 업동이었는데 서울(?)에서 업살고(?) 있었다.
그 동생의 이름은 업종이니 순창에서 살았다.
공침이는 젊었을 때부터 글을 힘써 배우되 동생의 반만도 못하고 글쓰기도 그만 못하였다.
정덕 무진년(4) 7월 27일 해가 질 무렵에 [공침이] 충수의 집으로 올 때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 나뭇가지 잎을 당기더니 고운 여자가 공중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에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화장실)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어졌다가 아주 오래 되어서야 사람 기운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더라.
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奴僕)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서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그지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뇨?
하고 공침이에게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쓰러져 울고 의심하기를, 요사스런 귀신에게 빌미될까 하여 도로 김석산이를 불렀는데, {석산이는 귀신 쫓는 사람이었다.}
김석산이 와서 복숭아 나무채찍으로 후려치고 방법을 행(行)하여 부적을 붙이니 그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여자이므로 이기지 못해 나가지만 내 남동생 공찬이를 데려오겠다.
하고는 갔다.
이윽고 공찬이가 오니 그 여자는 없어졌다.
공찬이가 와서 제 사촌아우 공침이에게 붙어 들어가 그 입을 빌어 이르기를,
숙부님이 백방으로 재앙을 물리치려 하시지만 오직 숙부님의 아들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저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내 몸이야 상할 줄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왼쪽 새끼를 꼬아 집문 밖으로 두르면 내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하거늘, 충수가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게 하자 공찬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숙부님이 하도 남의 말을 곧이들으시므로 이렇게 속여 보니 과연 내 술수에 빠졌습니다.
하고는 그로부터는 오며 가며 하기를 무상히(5)하였다.
공찬의 넋이 들어오면 공침의 마음과 기운이 빼앗기고, 물러나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가서 앉아 있더니,
그 넋이 밥을 하루 세 번씩 먹되 다 왼손으로 먹거늘 충수가 이르기를,
네가 전에 왔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더니 어찌 왼손으로 먹느냐?
하니, 공찬이 이르기를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느니라.
라고 대답하였다.
공찬의 넋이 나가면 공침의 마음이 본래대로 되어 도로 [집에] 들어와 앉았더니, 그러므로 많이 서러워 밥을 못 먹고 목을 놓아 우니 옷이 다 젖었다.
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나는 매일 공찬이에게 시달려서 고통스럽습니다.
하더니 그때부터는 공찬의 넋이 제 무덤으로 가서 되돌아갔다.
설충수가 아들의 병(病) 앓는 것을 서럽게 여겨 다시 김석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도록 하였다.
김석산이 이르기를
주사(朱砂) 한 냥(37.5g)을 사두고 나를 기다리라.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에도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 말을 크게 말하여 그 영혼에게 들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심부름 간 사람이 와서 그 말을 많이 이르자 공찬의 넋이 듣고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이렇듯이 나를 따라오시면 숙부님의 형용(形容)을 변화시키겠습니다.
하고는 공침의 사지(四肢)를 비틀고 눈을 찢으니 눈자위가 째어지고 또 혀도 파서 빼어내니, [빼어낸 혀가] 코 위에도 올라가며 귀의 뒷부분까지도 나갔는데, 늙은 종(奴僕)이 곁에서 병구완을 하다가 깨니 그 종도 까무러쳤다가 오래 되어서야 깨어났다.
공침의 아버지가 몹시 두려워 넋을 잃어 다시 공찬이를 향하여 빌기를
석산이를 다시는 부르지 않으마.
하고 매우 비니 오래 되어서야 형상이 본래 모습으로 되었다.
하루는 공찬이가 편지를 보내 사촌 동생 설원이와 윤자신이 둘을 함께 불렀다.
두 사람이 함께 와 보니 당시에는 공찬의 넋이 오지 않은 때였다.
공침이 그 사람들더러 이르기를,
나는 병들어 죽을 것이다.
하고는 이윽고 고개가 [쑥]빠져 눈물을 흘리고 베개에 누웠는데 보니 그 영혼이 당시에는 미처 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공침의 말이 아주 애절하거늘 제 아버지가 이르기를,
영혼이 또 온다.
라고 하였다.
공침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아 머리를 긁고 그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이별한 지 다섯 해인데 멀리(저승까지) 쫓겨났으니 매우 슬픈 뜻(마음)이 있다.
라고 하였다.
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매우 기이하고 특별하게 여겨 저승 기별을 물어보았다.
저승에 대한 말을 이르되,
저승은 바닷가로되 하도 멀어서 여기서 거기 가는 것이 40 리(里) 인데, 우리 다님은 매우 빨라 여기에서 술시(戌時)에 나서서 자시(子時)에 들어가 축시(丑時)에 성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檀越國)이라고 한다.
중국과 모든 나라 죽은 사람이 다 이 땅에 모이니 하도 많아 수효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육지의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이승 생활에 대해 묻는데 ‘네 부모, 동기간, 족친들을 말해보라’며 쇠 채찍으로 때리는데, 맞기가 매우 고통스러워 말을 하면 책을 자세히 살펴서 명(命)이 다하지 않았으면 그냥 두고 다하였으면 즉시 연좌(연화대)로 잡아간다.
나도 죽어 어김없이 잡혀가니 쇠 채찍으로 때리며 묻기에 맞기가 하도 고통스러워 먼저 죽은 어머니와 누님(6)의 이름을 대니 또 때리려고 하길래 증조부 설위(薛緯)께 가서 편지를 받아다가 주관하는 관원한테 전하니 놓아주었다.
설위도 이승에서 대사성 벼슬을 하였다시피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라고 하였다.
예전에 [들었던] 말을 여기에 하기를,
이승에서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하여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세금이 줄어들고 잘 지낼 수 있다.
이승에서 비록 끔찍스럽게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고 신의를 지키면서 간(諫)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는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朱全忠)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7){주전충 임금은 당나라 사람이다.}
적선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승에서는 비록 천하게 다니다가도 [저승에서는] 가장 품계 높이 다닌다.
서럽게 살지 않고 여기에서는 비록 존귀하게 다니다가도 악(惡)을 쌓으면 저승에 가서도 수고롭고 불쌍하게 다닌다.
이승에서 존귀하게 다니고 남의 원한 살만한 일을 하지 않고 악덕이 없으면 저승에 가서도 귀하게 다니고, 이승에서 사납게(보잘것없게) 다니고 각별히 공덕 쌓은 게 없으면 저승에 가서도 그 가지(자손?)도 사납게 다니게 된다.
민휘가 비록 이승에서는 특별한 행실은 없었어도 청렴하다 하여 거기 가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염라왕(閻羅王)이 있는 궁궐이 장대하고 위엄이 아주 성하니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염라왕이 시키면 [관원이] 모든 나라 임금이나 어진 사람이나 [막론하고] 나란히 앉히고 예악(禮樂)을 썼다.
또 거기에 앉은 사람들을 보니 설위도 앉아 있고 민휘는 아래에서 두어째쯤에 앉아 있었다.
라고 하였다.
하루는 성화(成化) 황제가 신하 애박이를 염라왕께 보내
아무개는 내가 가장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한 해만 잡아오지 마소서.
하고 청하자, 염라왕이 이르기를
이는 천자의 말씀이라 거스르지 못하고 부득이 들을 것이지만 한해는 너무 많으니 한 달만 주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애박이가 다시
한 해만 주소서
하고 아뢰자 염라왕이 대로(大怒)하여 이르기를
황제가 비록 천자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모두 내 권한에 다 속하였는데 어찌 거듭 빌어 내게 청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듣지 않는 것이었다.
성화 황제가 들으시고는 즉시 위의(威儀)를 갖추시고 친히 가신대 염라왕이 자신은 북벽(北壁)에 주홍사 금교의(金交椅)를 놓고 앉고, 황제는 남벽(南壁)의 교상(交床)에 앉히고, 황제가 청하였던 사람을 즉시 잡아오라 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죄가 중하고 말을 내니 그 손을 빨리 삶아지리라.
하니 성화 황제가~
~ 이후 낙질(落帙) ~
<패관잡기>에 저승이야기가 적힌 부분이 “마지막(末云)”이라 하였고, 또 어숙권의 언급이 <설공찬이>의 내용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으므로, 비록 낙질이 있어 전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족한 부분이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각주 ----------------------
(1) 설충란은 효령대군의 손자 평성군(坪城君) 이위(李偉)의 딸과 혼인하였다.
(2) 사실과 어긋나는 곳으로 채수가 이야기 전개 목적상 그렇게 지어 낸 것 같다. 통덕랑공배는 유복자 부장공을 낳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3) 1485년 출생으로 통덕랑공배보다 나이가 5세 적다.
(4) 원문에는 무신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덕연간(1506~1521)에는 무신년(戊申年)이 없고 무진년이 있으므로 무진년(1508, 戊辰年)의 오류이다.
(5) 無常히. 특별히 정해진 것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였다.
(6) 통덕랑공배는 1504년에 죽은 설공찬 보다 5년 먼저 1499년 말에 죽었다.
(7) 채수가 중종반정 반정공신 이지만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채수의 행장>에 적혀 있으므로, 반정 후 은퇴하여 상주(함창)에서 살면서 중종반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기 위하여 <설공찬전>을 지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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