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의 독립운동가 ‘이연형’ 아시나요
부평의 숨은이야기- 조국 광복의 씨앗뿌린 의인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큰 아이가 유치원에서 배웠다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흥얼거리더니 얼마 전부터는 위인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을 제일 처음 골라 집더니 최무선과 장영실을 거쳐 지금은 유관순을 읽고 있다.
유관순을 읽기 시작한 후에는 아이의 질문도 부쩍 늘었다.
일본은 왜 우리나라를 강점하였는지.
유관순은 왜 만세를 불렀는지.
만세를 부른 일이 왜 일본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할 일인지.
여덟 살 아이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어려운 모양이다.
“엄마 유관순은 혼자서 이렇게 만세를 부른 게 아니라 엄청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한 거죠?”
“그럼, 유관순 누나가 만세운동을 부르고 난 다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아마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을 걸?”
▲히로나카상공부평공장 내부모습
이연형은 이곳에서 감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일본경찰에 끌려가 젓가락 고문당해
2016년 정도로 기억을 한다.
필자가 속해 있는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삼릉마을에 대한 연구조사를 한창 진행 할 때였다.(삼릉마을에 대한 내용은 ‘숨어있는 부평이야기’ 2편에서 이야기 하였으니 생략한다.)
더운 여름날 삼릉 마을 현장을 둘러보고 조사원들끼리 둘러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분명 미쓰비시 공장에 잠입해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있었을 법 한데…” 라는 이야기를 던졌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부평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찾아본 것이.
국가보훈처에서 여러 자료를 검색하다 드디어 ‘정재철’, ‘이연형’ 두 사람의 기록을 찾게 되었다. 국가보훈처의 기록에 따르면 정재철과 이연형 모두 히로나카상공(미쓰비시 제강의 전신)에서 일을 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옥고를 치룬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고인이 된 지 오래였다. 이 중 이연형의 유족과 만남이 성사되어 짧게나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감시 대상 인물카드속에서 故 이연형의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술이 취하셔서 마중 나온 저에게 본인이 젊었을 적 일본 경찰한테 끌려가서 대나무 젓가락으로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근데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씀인가 했죠. 그냥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실언을 하신 거라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가족들은 언제 알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유족들도 정확하게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2007년 국가보훈처에서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따른 재판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고 하니, 당사자는 그 일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긴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마저도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닐뿐더러 포상을 받을 만큼 큰 일을 한 것도 아니니 시끄러울 필요 없다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식들의 설득으로 국가보훈처에 관련 서류를 제출하였고, 2008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을 받으면서 지난 날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인지라 가족들 모두 아버지의 건강이 우선 순위였을 뿐 포상을 받은 것에 대한 기쁨을 느껴 볼 틈도, 아버지가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 볼 여유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세월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당신의 이야기를 짧게 꺼내셨다고 한다.
이야기인즉슨 고인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부평에 있는 히로나카상공에서 직공으로 일을 하였는데, 그 때 윤석균과 송치호의 권유로 조선독립당에 가입을 한 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모은 돈을 성냥갑에 잘 넣어 약속된 시간에 부평 어느 장소로 나가면 넝마주이가 다가와 “담뱃불 좀 빌립시다”라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만의 암호였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성냥갑을 건네는 것이 이연형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렇게 자금을 건네기를 여러 차례. 안타깝게도 이 일이 발각되어 194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유족이 기억하는 가장 구체적인 이야기였다.
고인은 건국포장을 받은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9년 끝내 세상과 이별을 하고 말았다. 그가 전달한 독립자금이 얼마인지, 전달 한 자금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당신과 같은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은 주변에 몇 이나 있었는지에 대해 이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유족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박물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평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연형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해 특별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영상을 만들어 전시장 한 면을 채웠다. 영상을 본 관람객들은 꽤나 흥미로움을 느끼는 듯 했고 그렇게 부평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 이야기는 제법 알려질 수 있었다.
독립자금 전달 실패로 역사에 알려지게 된 그의 삶
그리고 지난 해 여름. 고인의 이야기를 모델로 한 ‘강제징용노동자상’이 부평공원에 세워졌다. 동상을 가리고 있던 천이 제막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나오고 큰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세상에 영원히 묻힐 뻔한 이야기는 국가보훈처에서 발견 된 재판기록 한 장이 홑씨가 되어 싹을 틔었고, 스토리가 더해져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일본 기업인 히로나카상공(미쓰비시 제강의 전신)의 공장이 있었던 부평공원 중심에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에서 사람들은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 했다.
사실 고인의 경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자금을 전달하라는 임무에 실패(?)하였기에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게 된 역설적인 상황이다. 반대로 본인의 임무를 너무나 완벽하게 수행하여 그 어떤 기록과 흔적을 남기지 않아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나간 시간 저 깊숙한 곳에 묻혀버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의 의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할까?
▲ 부평공원에 세워진 강제징용노동자상
▲‘나는 일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올바름이 아님을 깨닫고 대한민국만을 생각하고조국을 위한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1942년 1월 이연형’ 고인의 묘비문에서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유관순 책을 읽던 아이가 삽화를 가리키며 이야기 한다.
“엄마! 이 사람들도 다 같이 만세를 불렀는데 왜 똑같이 위인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도 다 똑같이 어려운 일을 한 건데…“
“위인전은 없지만 대신에 우리가 기억해주면 되지! 유관순 말고도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 많았구나 라고.”
세상을 바꾸는 건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명이 아닌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힘을 합하였을 때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배웠고, 최근의 촛불혁명을 통해서도 경험하였다.
70여 년 전 온 민족이 그토록 바랐던 해방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연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명량’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손에는 땀과 피로 범벅이 된 무명의 수병(水兵)들이 상처에서 오는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알아줄까?”
“몰라주면 호로 자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