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 그 날 밤은 유난히 어둡고 차가웠다. 빛깔로 치자면 검정빛보다 훨씬 깊은 빛이었으리라. 그러나 한없이 맑은 바람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밤벌레들의 낮고 가벼운 소리는 내가 기억 속에 기대기 충분했다. 우리의 여름은 뜨겁고, 잔잔했다. 하늘이 높게 뜬 날엔 잠시 누워 빛을 세며 미래를 그렸고, 나뭇잎이 ᄄᅠᆯ어지는 일보다 훨씬 사소한 일에도 달빛보다 맑은 웃음을 지었다. 초콜릿을 좋아했던 너와 달리 딸기를 좋아했던 나라 가끔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떠 보이며 다투기는 했지만, (O) 우린 서로를 잘 알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금방 화해할 수 있었다. (호)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바람은 차갑지만 시원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너가 누누이 해왔던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겨울은 어떨까, 하야디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던 날, 너도 마치 눈처럼 차갑고 창백한 말을 건넸다. 잎이 다 져버린 나무에 쌓인 눈을 뭉쳐 너의 검정 코트를 맞췄을 때 나는 그만 너의 눈을 보고 말았다. 여름이 왔고 겨울도 왔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었다. 하지만 막차버스는 이미 떠나가고 잡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봄은 오지 않았고 우리의 마음도 따사롭게 녹을 줄을 몰랐다.
[호 – 히 – 쩜]
(호) 모두가 잠이 들고 나서인 한밤중, 그제서야 나는 생기 없는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차갑게 식은 믹스커피와 어제 먹다 남은 비스킷 부스러기들을 모아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골목길에는 술에 취한 젊은이 셋이 동네방네 떠나가라 술주정을 부리고 다녔다. 순간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곧바로 나는 커피잔에 비친 생기없는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아니, 나는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아무도 나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았으면 조헧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이 곳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자 시커먼 때가 낀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히) 한참 거울을 바라보다 문득 머리가 긴 것 같아 가위를 찾으러 돌았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아” 하며 신음이 나왔고 발밑에는 어디서 떨어진지도 모르는 압정이 나뒹굴고 있었다. 기분이 나쁜 채로 가위를 집어 들고 거울 앞에 서자 공교롭게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짜증이 났다. ‘되는 일이 없군.’ 하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숨죽이며 나의 어두운, 깊은 방으로 나를 또 숨겼다. 초인종은 몇 번 더 울리다 제풀에 지쳤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제서야 나는 다시 나의 깨끗하지 못한 거울 앞에 섰다. 어두웠다. 나의 세계는 내가 갈망했던, 끝없이 바랐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침울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머리자르기를 포기하고, 생기 없는 꽃처럼, 마치 다리가 꺾여버린 듯 쓰러지듯 의자에 기대었다.
(쩜) 이전에는 내가 뭐하고 시간을 보냈을까, 나는 직장이나 알아보려 컴퓨터를 켰지만 바탕화면에 바로가기가 다섯 개나 연속으로 있어 안 보일 수가 없는 일명 ‘그리고 오브 레전드’를 보았다.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을 것 같아 바로 컴퓨터를 꺼버렸다. 회사 잘리고난 다음 날 아침이라.... 나는 그동안 많은 돈을 모아뒀기 때문에 회사에선 있을 수 없는 휴가를 즐기로 나오기 위해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뒤에 눈에 안 띄게 구멍이 나 있는 바지를 입고 있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앗다. 그리곤 깨끗할 거 없는 거울 앞으로 갔다. 아까 밟은 압정을 밟을 뻔하였지만 순발력으로 피한 나는 압정을 재빨리 쓰레기통에 버렸다. 거울을 보니 좀 변한 부분이 생긴 것 같았다. 아니, 길어진 머리카락 말고.
[아코비아토 – 비밀의 정원]
(아코비아토) 산은 그 높이에 걸맞은 그림자를 가져야 하건만 그런 적이 거의 없다. 나무들 밑으로 감추었을까. 그 많은 구름의 그림자들은 다 받아주면서 정작 자신은 드리울 데를 찾지 못했는지 한 낮을 보내는 동안 서성이기만 한다.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도 드물게 산들은 그림자를 밖으로 드리우지 않고 안으로 품고 있다. 해가 하늘에 오르면 아침 잠깐 내놓았던 그림자를 주섬주섬 거둬들이고 해가 내려앉으면 그 아래 어디에선가에서 틈이 생기고 그 사이로 물이 새듯 그림자가 새어 나와 밤으로 스며든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산도 예전에는 세상의 여느 사물들처럼 제 나름의 그림자를 보기 좋게 늘여 놓으며 한나절을 보냈다.
(비밀의 정원) 산은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에는 있지만 기억을 함부로 꺼내면 안됐다. 산은 커다란 나라를 다스리는 불행한 왕비였기에... 왕비는 아침마다 커다란 식탁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코르셋이 숨통을 조여 죽기 바로 전까지 조여진 길고 무거운 옷을 입는다. 그리고 그녀의 나라를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녀를 위해, 나를 위해가 아닌, 나라를 위하여. 그녀의 나라. 산이 모든 그림자들을 받아주지만, 정작 본이니 드리울 곳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잃어가며 나라를 보살피는 불행한 왕비가 있었다.
[담쟁이 – 쩜 – O]
(담쟁이)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컴퓨터를 정리하는데 우연히 스크랩 해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폴더에도 내 성격이 드러난다. 찾기 어렵게 겹겹이 더해지는 폴더들. 정리하다가 그 안에 무수한 파일들 중 하나여서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어릴 때 집밖으로 들고 다니는 전하기가 생길 줄 몰랐던 것처럼, 이 당시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때는 바야흐로 28년 전 2016년 3월 13일, 난 그 때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다.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3패를 하다가 1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과 우와를 연발했고, 나는 바로 이세돌과 알파고를 검색해 보았다. 바둑에는 관심도 없었고 더더욱이 인공지능에 관해서는 기사들이 떠돌아도 클릭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파일을 클릭했는데, (쩜) ‘누구지? 맙소사! 전 남자친구 사진들이다. 왜 안 지운거지...’ 갑자기 슬퍼졌다. 나는 빨리 뒤로가기를 눌렀다. 그 후로 몇 개의 파일들은 옛날 사진들이라서 추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파이릉ㄴ 달랐다. 무수히 많은 사진들이 있었고 신기한 프로그램이 실행됐다. 뭐지 하였지만 2043년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사진이 없던 것이다. 나는 15년 뒤인 ‘2058’이라는 파일에 접속을 하였다. “이게 나라니!” 맙소사 너무 늙었다. 그 후로 여러 사진들을 보며 깔깔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미래인 것이었다. 집중력이 부족한 나는 옆 동네 아줌마인 줄 알고 잠시 동안 깔깔댔던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2065년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사진들 주으이 마지막 장면을 보았다. ‘그 때쯤 죽으면 잘 산 거지.’ 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 나를 친 차주인이 전과 13범이라는 아주 고약한 녀석이라고 프로그램이 알려주고 나니 나는 미래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나는 프로그램에 ‘어떡하면 오래 살 수 있어?’ 라고 치니 프로그램은 ‘지금부터 미션이 주어집니다.’ 라는 문자를 띄었다. 3. 2. 1 ‘클릭하시오’ 라는 문구가 쓰여진 박스가 나타났다. 나는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클릭하였다.
첫 번째 미션 : (O) ‘광주교도소에 있는 전심삼을 찾아가시오’ 라고 안내창이 떴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일단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끝도 없는 생각에 잠겼다. ‘저 컴퓨터만 믿고 광주까지 그 먼 곳을 가야할지... 누군가 장난치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만약 가서 전심삼이라는 범죄자가 있더라도 나를 만나줄까.’
[히루 알배소 - 형제여!]
(히루 알배소) 어떤 할배가 문 열려있는 집에 들어가려 했다. 문에는 누구든 들어오지 마시오 라 되어 있었고 문 앞 전등 같은 감시카메라가 있었다. 주인은 방에서 감시카메라를 보며 저 할배가 뭐하지 보고 있었다. 할배가 집에 들어오자 문이 닫히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 주인이 말했다. 또, 왔, 는, 가! 할배는 술 마시고 매일 이 집을 찾았다. 할배는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할배는 신용카드다. 하고 술을 달라고 했다. 그는 알콜 95도 짜리를 주고 안에 있는 돈은 다 꺼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주었다. 돈을 얼마 줬는지 보았다. 100이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100은 곧 (형제여!) 100원이라는 것을 알고 주인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돈 따위는 종이쪼가리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돈에 많은 신경을 쏟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자꾸자꾸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은 하루종일 3400원짜리 술을 100원에 판 것이 생각났고 다음 날에도 다다음날에도 게속계속 생각하며 상심해하다가 다다음날하고 다음날이 되는 날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읽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춤을 춰야 한다. 안개꽃과 이야기 나누어야 한다. 새벽하늘과 느낌을 공유해야 한다. 내가 하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래, 그것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알아가려한다. 그것을 오히려 가까운데 있을 수도 있다. 그것. 그것은 무엇일까.
[노땅 – 비밀의 정원]
(노땅) 안녕, 나는 천사야. 아니 악마야. 암튼 둘 중 하나야. 아니면 둘 다 아니야. 인간들 눈에는 내가 안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인간들을 다 지켜보고 있어.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너도 보고 있지. 그리고 난 인간의 속마음도 읽을 수 있는데 이 능력은 좋을 때도 있지만 내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해. 너희 인간들은 서로의 속마음을 모르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해. 만약 너희가 나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너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시끄러울 거야. 서로 싸우고, 아 어쩌면 전쟁이 끊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왔군. 그래, 본론은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인간들을 위해... (비밀의 정원) “야, 우리 학교 게시판에 올라온 글 봤어?” “뭐야... 완전 웃겨” 우리 학교 아이들의 오늘 이슈는 내가 게시판에 올린 글이었다. 나는 가만히 엎드려 있다 아이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이내 곧 머리를 긴 나무에 기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너무나도 맑아 검정 물감을 뿌려버리고 싶을 만큼의 하늘을 쭉 잡아당겼다.
내가 엄마아빠에게서 명을 받아 인간세계로 내려온지 자그마치 삼백일째이다. 삼백일동안 느낀 점은 인간들은 정말 피곤한 생물이라는 것이다. 끝없는 욕심과 거짓으로 짓는 한없이 맑은 웃음.
이런 가식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전날 밤에 온 메시지들에 웃음표시와 귀여운 이모티콘을 적절히 섞어가며 답하거나,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이들에게 같은 웃음으로 답하는 행위들은 점점 익숙해져 가지만, 그런 이들과 꾸준한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우리 별 사람들이 삶은 당근을 먹는 것과도 같이 끔찍하고 끔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