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내 한복판에 조선초기 세워진 전주객사를 보며 조선시대에도 산천을 유람하는 선비들이나 한량들이 전국을 유람하며 여행을 했을것인데, 그러면 이들은 어디서 잠자리를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근대사회 이전에는 전통 숙박시설 대부분이 전주객사 처럼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 사설숙박 업소인 주막보다 많은 것은 그만큼 개인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역사극에서 많이 나오는 역(驛)은 파발을 전달하는 사람에게 말을 바꿔주는것이 주기능이었고 아울러 숙박을 할수있게 한곳이라고 알고있으며 신라 소지왕9년 (487년)에 등장하는 역(驛)이 공공 숙박시설의 효시라고 한다.
공용여행자를 접대하던 숙박장소는 주로 객사였으며 17세기 후반 장사가 발달하면서 보부상을 비롯한 상인들의 활동이활발해지면서 객주(客主)와 여각이 생겼으며 이때 주막도 등장하게 된다.
시골길거리에서 술,밥을 팔고 나그네에게 잠자리도 제공한 집이 주막이였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그 밖에 조치원· 장호원(長湖院) ·원지(院旨) 등은 사용자의 제한으로 점차 퇴폐화하여 공용여행자의 접대는 각 주현(州縣)의 객사(客舍)인 관(館), 역, 그리고 민간업자들도 맡았다.
또한 임진왜란 뒤에는 참(站)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었으며, 이것은 뒤에 주점·주막으로 부른 거릿집으로 발전함에 따라 원은 점차 모습을 감추어, 전국 여러 곳에 ‘원’자가 붙은 지명만 남았다.
개항이 이루어지자 수많은 열강이 한국에 진출하여 외국인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방문객과 거류자 수가 많아지면서 새로운 업종들이 들어왔는데, 1883년(고종20)에서 90년 사이에 여관업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1880년대가 근대적 숙박업소인 여관이 시작된 때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근대식 여관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발달한 도시와 함께 번성하였다.
도시 인구의 증가, 상공업과 교통의 발달은 숙박시설의 발달을 함께 가져왔다. 처음 등장한 근대식 여관은 주로 일본식이었으나, 점차 서양식의 여관도 생기고 또한 일본에서 전해진 근대식 여관에 자극을 받아 온돌방으로 된 한국식 여관도 생겨났다. 60년 이후 공업화·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인구 이동이 심해짐에 따라 여관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수적인 팽창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발달이 거듭되었고, 2000년부터 여관이나 여인숙 등 모든 숙박업소가 '호텔'이라는 명칭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명나라와 통하는 지방에는 우리 사신을 비롯해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하여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축소되었다. 신주를 모셔두는 방인 감실에는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기도 하였고(망궐례),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전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만 남아있다. 동익헌은 현재 초석만 남아 있으며, 서익헌과 규모가 같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다. 또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행 정보 1> 위치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3가 1-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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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천의 바람흔적 원문보기 글쓴이: 바람흔적
첫댓글 바쁘신가봅니다. 좋은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