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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조(南北朝) = 화북(華北)과 강남(江南)에 있었던 왕조(王朝)
* 왕조(王朝) = 왕이 다스리는 나라.
* 남북조 = 남조(한족 중심) + 북조(북방민족 중심)
* 남북조가 분열하여 대립하기도 했지만, 북조는 한화정책을 썼고, 남조는
북방민족의 문화에 자극을 받아, 중국문화가 전반적으로 역동성을 띔.
* <남북조시대>는 <유목민족의 화북>과 <한족의 강남>이 대립하던 시기.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유목민족 5종족이 세운, 16개의 나라를 말함
* 6조(六朝) = 양자강 이남에 국가를 세운 여섯 왕조 =
= 오 + 동진(東晋) + 송 · 제 · 양 · 진(陳)
* <9품 중정제>는 일종의 <천거>에 의한 <관리 선발 제도>로서, 정부는
지방에 中正官을 파견하여 관인을 천거하도록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호족
출신으로 그들끼리 호천(互薦)함으로써 <호족>이 <귀족화>하였으며,
그들은 배타적 특권을 누렸다.
* <9품 중정제>는 <위나라>에서 시작된 <관리 임용 방식>으로, 중앙정부는
각 주마다 중정관을 파견하여, 자기 지역의 인물을 능력에 따라서 9등급
으로 나누어 추천하도록 하고, 중앙정부(국가)는 이를 다시 ‘현량(賢良)’에
따라 관리로 임용하였던 제도였다. 대부분 <호족>의 자제들이 높은 등급을
받아서 호족에 의한 <문벌 귀족 사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 현량과(賢良科) : <어질고 착함>을 기준으로 인물을 평가하여 등급을
매기고 관리로 선발하던 제도. 조광조
* 균전제는 <토지국유>를 원칙으로 하고 丁男에게 일정 면적의 토지를 경작
하게 하여 조세를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 <북위>는 국가 소유 토지를 농민들에게 지급하고 세금을 거두는 <균전제>
를 실시합니다.
* 이는 소규모 자작농(自作農) 가정을 낳이 육성할 목적으로 실시했는데,
이 제도의 실시로 유랑민의 수는 줄어들고 세금과 군사력을 공급할
농가(農家) 숫자가 늘어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효과가 있었다.
* 그래서 이 제도는 <수나라>와 <당나라>로 이어져 시행되었다.
* <균전제>의 출발점은 <북위>였던 것이다.
* 북위는 선비족 고유의 풍습을 멀리하고,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하였다.
* 이러한 북위의 적극적 漢化政策은 반발을 불러서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북위에서는 국가적 필요에 따라 불교가 장려되었다. 이로써 불교가 크게
성행하였고, 불교관련 건축물이나 불경이 많이 번역되었다.
*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해진 것도 남북조시대였다.
* 북조의 <전진>에서 <순도>라는 승려가 고구려 장수왕 때(371)에 불교를
전하였고, 남조의 <동진>은 <마라난타>라는 승려를 파견하여 백제의
침류왕 때(384)에 불교를 전하였다.
* 신라는 진전 - 고구려 - 신라로 이어지는 연결을 통해서 불교가 전파
되었다. (눌지왕 무렵에, 420년 경)
* 한편 북방민족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지식인, 호족, 관리들은 남방의
토착호족세력을 누르고 주요한 관직을 독차지하게 됨으로써 황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 이들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가 컸으나, 남방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취해서 차츰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접고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 이렇듯 남방의 경제적 풍요와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화려한 귀족문화
가 발달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왕휘지의 서예>, <고개지의 시>
<도연명의 시>등이다.
* <오-동진-송-제-양-진>으로 이어지는 남방의 귀족문화를 <6조문화>라고
한다.
* <남북조>의 문화는 대체로 <귀족문화>였다.
* 중국 최초의 농업 서적인 <濟民要術>이 남북조 시대에 저술되었다.
* 강남 지역에서는 일부 모내기법이 실시되었다.
* 양쯔 강 유역의 강남은 습하고 강이 자주 범람하여 살기에 적합지 못했다.
* 그러나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이 멸망하면서 한족들이 강남으로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강남이 개발되었다.
* 제방(堤防,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고, 물길을 내고, 농사를 지으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 이제 강남은 중국 경제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 잦은 전쟁으로 인한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 정신적(마음의) 안정(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불교, 도교> 등을 믿기 시작하였다.
* 원래 <불교>는 <한나라> 초기에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한나라
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 <불교>는 <한나라>때에 <비단길>을 통하여 중국에 들어왔다.
* 5호의 여러 나라에서는 불교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이용한 <민생안정>이 가능하다고 보아 왕실에서 신봉하기 시작했다.
* 이 때 <불도등, 구마라습 등>의 <서역승>이 중국에 들어와 왕실의 지원
아래 포교에 힘썼다.
* 북조의 숭불정책을 편 왕들은 <운강, 룽먼, 툰황> 등에 석굴사원을 지었다
<석굴사>가 대표적인 석굴사원이다.
* 남북조 시대의 왕들은(정치적 지도자) <불교>를 통하여 국민의 정신을
통일하고 <부처의 힘>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자 불교를 장려하였다.
* 국왕중심의 권력 강화와 집중을 위하여 <불교>를 이용한 측면이 있다.
* 승려들도 국왕의 이러한 의도에 편승하여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 당시 왕즉불(王卽佛) = ‘왕이 곧 부처다.’는 입장에서 거대한 불상을 만듦
* 한반도의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 <유학>은 노장사상에 밀려서 남조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북조>에서는 <훈고학>이 존중되었다.
* <도교>는 <북위의 구겸지>가 교리를 체계화함으로써, 종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 <위진남북조시대>의 지식층은 <불교, 유교>보다 도교적인 취향이 강했다.
* <도교> = 도가 사상 + 민간신앙(民間信仰) + 신선사상(神仙思想) 결합
* 정신적 안식처를 찾는 농민들은 <現實 속에서의 幸福 + 不老長生>을
추구하던 도교를 널리 믿고 받아들였다.
*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300여 년 동안 더 지속되다가, 서기 220
년에 멸망하였다.
* 한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370여 년 동안 분열되었다가 다시 수나라에
의해서 통일(589)되었다.
* 양쯔 강(양자강, 長江) 이북에는 여러 북방 민족이 침입하여 나라를 세워
5호 16국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 양쯔 강 이남의 강남지역에는 한족들이 북쪽에서 피난하여 세운 <동진>
이후로 <송, 제, 양, 진>이 교체되었다.
화북 | 위 촉 오 | ▶진▶5호16국(북방민족) | 북위, 동위, 북제, 서위, 북주 | 수의 중국 통일(589) |
강남 | ▶동진(한족) | 송, 제, 양, 진(陳) |
북조 | 북방(유목)민족 | 불교와 유교장려 | 국왕중심 | |
5호 16국 | ||||
남조 | 한족 | 노장, 청담사상 | 귀족중심 | |
동진 ▶ 송, 제, 양, 진 |
수 | 문제 | * 과거제도(관리선발)▶능력위주의 관리선발(귀족) * 균전제도(조세제도)▶토지지급(백성) = 납세+국방의무 부담 |
양제 | * 대운하 건설(황허와 장강 연결) |
* 수나라 양제의 대운하 건설은 <황하와 양자강>을 잇는 토목공사였다.
* 중국에는 전체적으로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이 많다. 따라서
예로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수운이 발달하였고, 운하는 남북을 연결하는 것
* 운하는 정치적 중심지인 화복과 물자가 풍부했던 강남을 연결하고, 화북
화중, 화남을 정치적으로 결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운하 = 통제거(605), 영제거(608), 강남하(610)
* 통제거는 황하~화이허강을 연결
대운하(大運河) |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허베이[河北]·산둥[山東]·장쑤[江蘇]·저장[浙江] 등 4개 성(省)을 남북으로 흐르는 운하로 길이 1,515km이다. 중국에는 전체적으로 동서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이 많아 예로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수운이 발달한 반면, 남북방향으로는 하이허강 수계의 웨이허강[衛河]이나 화이허강의 지류인 워허강·잉허강 등이 국지적으로 남서∼북동 또는 북서∼남동 방향의 수로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운하는 오랫동안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華北)과 물자가 풍부했던 강남(江南)을 연결하고, 아울러 화북과 화중(華中) ·화남(華南)을 정치적으로 결합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해왔다. 대운하의 역사는 일찍이 진(秦)·한(漢)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 장강(長江) = 양쯔 강
* 강북(江北) = 양쯔 강 이북, 강남(江南) = 양쯔 강 이남
* 화북 = 화이허 강(淮水, 淮河) 북쪽 지역을 말한다.
* 화이허(淮河)는 중국의 3대강 가운데 하나이다.
* 화이허는 황하와 장강(長江, 양쯔 강, 창 강)의 사이를 동서로 흐르고 있다. * 물길이 복잡하기 때문에 홍수를 일으키기 쉽고 치수가 매우 어렵다.
* 화이허를 기준으로 <화북, 화베이>와 <화남, 화난>으로 구분한다.
* 화이허와 친링산맥을 연결하는 친닝 · 화이허 선을 경계로 하여 중국의 남북으로 지리나 기상 조건 등이 달라 전통적으로 화베이와 화난의 경계선으로 여겨졌다. 친링 · 화이허선은 연간 강수량 1000mm의 선과 거의 일치해, 북쪽은 밀 중심의 밭농사 농사지대로, 남쪽은 쌀 중심의 논지대가 형성되고 있다. 또 화이허의 북쪽은 육로 중심의 교통이고, 남쪽은 하천 교통중심으로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 옛날 제나라의 안자가 비유를 들어 인용했던 귤화위지(橘化爲枳)나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은 귤이 회남에서 나면 귤이되지만, 회수를 넘어 회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의미로 그 지리적 중심지인 회수가 등장함을 알 수 있다.(橘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爲枳) 이러한 농업 생산물이나 교통의 차이는 정책의 차이나 군사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중국이 남북으로 분열하고 있었던 시대는 화이허가 경계선이 되었던 것이 많았다.
* 양쯔 강 = 양자강(揚子江) = 長江(장강, 창 강)
* 양쯔 강은 중국의 대륙을 횡단하는 가장 긴 강이다.
* 황하(황허) + 회수(화이허) + 양자강(양쯔) = 중국의 3대강
* 창장[長江]의 남쪽을 강남(江南)이라고 부르고, 남부의 동해안 지역을 강동(江東)이라고 불렀다.
* 선비족 혈통의 <양견>은 북조의 마지막 왕조인, ‘북주(北周)’의 귀족이자
황제의 외척이었다.
* 양견은 자신의 딸을 화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잡은 뒤, 나이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반대파를 제거하고 ‘선양(宣揚)’의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아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었다.
* 그리고 나라 이름을 ‘수(隋)’라고 하였다.
* 이로써 370년 만에 <위진남북조시대>는 끝이 나도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 수(隋)나라는 양견이 건국(581).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통일(589)
* <수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주>의 외척(外戚) <양견>이
<북주>의 왕위를 찬탈(簒奪)하고 세운 나라이다.
* <양견>이 수나라의 첫 번째 임금인 <문제>이다.
* <문제>의 둘째 아들<양제>는 아버지 양견을 도와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을 멸망(589)시켰다.
* 이로써 256년 만에 분열되었던 중국은 다시 <수나라>를 중심으로 통일
되었다.
* 북조의 마지막 왕조 <북주>가 수나라에 멸망하였다.
*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이 수나라에 멸망하였다.
* 이로써 중국은 <북주, 북방민족이 세운나라>에 뿌리를 둔 <수나라>에
의해서 다시 통일이 되었다.(581 또는 589)
* 그러나 <이연>이 세운 <당나라>에 29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618)
* 290년간 지속 되던 <당나라>는 군벌들에 의해서 분열되었고, 결국
907년에 멸망되었다. 당나라가 멸망되고, 중국은 군벌들이 할거하는
5대 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든다.
* 한편 수나라는 <북위>가 시작한 소규모 자작농 제도인, <균전제>를
이어 받았고, 율령(행정법+형법 = 국가 기본법)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인
<3성6부제>를 정부조직으로 편성하였다.
* 아울러 관리 선발에 과거제를 도입하여 문벌귀족들의 관직 독점을 막고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 수나라는 총 5개의 운하(運河)를 건설하는데, 이로써 황하와 양쯔 강이
이어져, 남중국의 풍부한 농산물이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운송되었다.
* 아울러 운하의 건설로 남북과 동서 간의 문화와 경제 교류가 활발해져
중국을 말 그대로 하나로 묶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운하의 개통은 중국의 남북 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 그러나 무리한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운하의 건설은
수나라의 수명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 수나라가 건국됨으로써 <고구려>와 <수나라>는 동북아시아에 대한 패권
다툼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나라의 문제는 고구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내치(內治)에 주로 전념하였다.
* 그러나 아버지 <문제>와 형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양제(煬帝)는
<고구려>와 <돌궐>의 연합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신라>와 연합하고
113만 대군(大軍)을 동원하여 육군과 수군(해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원정(遠征)에 나섰다.
* 양제(煬帝)는 문제의 둘째 아들로, 수나라의 두 번째 황제이다.
* 양제의 ‘양(煬)’은 ‘악랄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 3차례나 걸쳐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612>에서 실패하였다.
*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 유역이다.
* 그러나 원정의 실패, 무리한 대규모 토목공사, 과다한 세금 부과, 사치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그 과정에 <양현감의 반란, 613>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친위대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
에게 살해되었다.
* 친위대는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에 해당한다.
수나라 589~618(29년) | 업적 |
문제(文帝) 581~604 | * 율령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인 <3성6부제>의 정부조직 편성 * 균전제 실시(토지를 지급 받은 백성은 전세, 부역, 공납의무 짐) * 부병제 실시(농민에게 병역 부과) * 과거제 실시 (9품중정제 폐지, 학과 시험에 의한 관리 등용) → 호족 세력 약화시키려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 대운하 건설 시작 |
양제(煬帝) 604~618 | * 대운하 건설(화북과 강남 연결 : 정치와 경제 중심지 연결) * 동돌궐 토벌, 복속 인도차이나(안남) 정벌 * 만리장성 일부 축조 * 고구려 침략, 패배(611~614년, 살수대첩. 612) |
* <양제>의 대규모의 토목(대운하와 만리장성의 일부구간 건설 및 축조)과
무리한 원정(遠征, 고구려 침략 등)으로 국력 소모, 민생 피폐 등으로
민중저항(농민저항) 발생하였다.
* 무리한 토목공사와 원정에 반발하여, 산둥지방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613년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 그러나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과 도량형 통일은 <물자유통>과 <사회통합>
에 기여하였다.
* 617년 산서성 유수였던 ‘이연’이 군사을 일으켜 장안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를 옹립함. 그가 ‘공제’이다.
* 문제 - 양제 - 공제(양제의 손자)
* 618년 양제는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었다.
* ‘공제’의 양위를 받아 당나라를 이연이 건국함
* <이연> 역시 수나라의 창업자였던 <문제>처럼 선비족 출신이었다.
* <선비족>은 고대 남만주에서 몽골지방에 걸쳐 산 <유목민족>이다.
* 선비족 계통의, 모용(慕容) · 걸복(乞伏) · 독발(禿髮) · 탁발(拓跋) 등은
부족집단을 단위로 내몽골 각지에 할거하면서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점차
그 중심지를, 화북(華北)으로 옮겨갔다.
* 선비족 계통으로,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 연의 모용씨, 秦의 걸복씨
양의 독발씨 등이 화북에서 각각 나라를 세웠고, 북위(北魏)의 탁발씨는
화북 전체를 통일하여 이른바 북조(北朝)의 기초를 열었다.
* 민중저항세력 가운데서, <이연과 아들 이세민> 부자(父子)에 의해
수나라는 61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공 통 점 | |
진시황(秦始皇)의 진나라 | * 분열된 중국을 통일함(춘추전국, 위진남북조시대) * 대규모의 토목사업과 대대적인 원정 * 정책의 상당 부분이, 백성들의 원성을 초래 * 국가의 수명이 오래가지 못했음(진은 15년 수는 29년) |
수양제(隋煬帝)의 수나라 |
공 통 점 | |
수의 양제 | * 아버지(문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름 * 건국에 공로가 많음 * 수나라의 두 번째 임금 |
당의 태종 | * 당 고조(이연)의 둘째 아들 *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즉위함 * 건국에 공로가 많음 (남조의 陳 멸망의 주역) * 당나라의 두 번째 임금 |
조선 태종 | *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 동생(방번,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오름 * 건국에 공로가 많음(이성계의 정치적 라이벌, 정몽주를 죽임) * 조선의 세 번째 임금(세종의 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