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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mini와의 대화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1화: 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1화: 부탁드립니다
천계(天界)의 동부, 운무가 짙게 깔린 구룡산(九龍山)의 정상.
진천(秦塵)이 새롭게 세운 세력, ‘천무각(天武閣)’의 정문 앞에는 굵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내리는 폭우 속에서, 한 인영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빗물에 젖어 처연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등만은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 그는 명성 높은 은월가(銀月家)의 후계자, 주운(朱雲)이었다.
"돌아가십시오. 각주님께서는 현재 폐관 수련 중이십니다."
천무각의 호법을 맡고 있는 흑영(黑影)이 우산을 든 채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주운은 고개를 젓고는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진천 대인을 뵙기 전까지는, 결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빗물과 섞여 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흑영이 작게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찰나, 굳게 닫혀 있던 천무각의 거대한 청동문이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열렸다.
끼기기기긱-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짙은 진원(眞元)의 기운에 빗방울들마저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들어오게 하라."
낮지만 온 산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 진천이었다.
천무각 대전(大殿)
대전 안은 서늘하고 고요했다. 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진천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주위를 맴도는 뇌전(雷電)의 기운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전 전투에서 입었던 내상을 치료하고, 새로운 경지로 도약하기 위한 갈무리였다.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대전으로 들어선 주운은 진천의 압도적인 기세에 숨을 삼켰다. 과거 하계에서부터 기적을 일으키며 올라온 전설적인 인물. 지금 천계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
주운은 다시 한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은월가의 불초자 주운, 진천 대인을 뵙습니다!"
천천히 눈을 뜬 진천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뇌광이 번쩍였다. 그의 시선이 주운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은월가의 가주가 마비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허나, 내가 왜 굳이 은월가를 도와야 하는가?"
진천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은월가는 천계 동부에서 중립을 지켜온 명문가였지만, 과거 진천이 천마족(天魔族)과 혈투를 벌일 때 방관했던 세력 중 하나였다.
주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검은 천으로 겹겹이 싼 물건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희 가문이 대인께 크나큰 결례를 범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주님을 쓰러뜨린 자들은 평범한 자객이 아닙니다. 대인께서 반드시 보셔야 할 물건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검은 천이 벗겨지자, 그 안에서 기괴한 붉은빛을 뿜어내는 부러진 단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검의 표면에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마기(魔氣)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 진천의 눈빛이 무섭게 돌변했다. 그가 손을 뻗자 단검이 허공을 날아 그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이건... 암흑 세력(暗黑 勢力)의 기운이군."
"그렇습니다."
주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족의 잔당과 멸망한 줄 알았던 암흑 세력이 다시 결탁했습니다. 그들은 천계 동부의 혈맥을 장악하려 하고 있으며, 저희 은월가가 그 첫 번째 표적이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그들의 함정에 빠져 '절맥흑독(絶脈黑毒)'에 당하셨습니다."
진천의 뇌리 속에 과거 자신을 배신하고 상처 입혔던 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암흑의 기운. 그것은 진천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고,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대상이었다.
주운이 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조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전각 바닥에 미세한 금이 갔다.
"진천 대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懇切히 付託드립니다!)"
주운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처절했다.
"은월가의 모든 영지와 가문의 보물, 그리고 저 주운의 목숨까지 대인께 바치겠습니다. 부디 가주님을 해독해 주시고, 천계 동부에 마수를 뻗치는 저 암흑의 무리들을 베어 주십시오!"
대전 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진천은 손에 쥔 단검에서 피어오르는 마기를 자신의 뇌전 기운으로 가볍게 짓눌러 소멸시켰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 다만, 오늘 네가 한 약속은 천도(天道)가 지켜보았음을 명심해라."
진천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왕의 기세에 대전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길을 안내해라. 은월가로 간다."
주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희망이 끊어졌던 벼랑 끝에서, 마침내 구원의 빛이 내려온 순간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2화: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2화: 부탁드립니다 (2)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뇌광(雷光)과 함께, 진천(秦塵)과 주운(朱雲)은 단숨에 수만 리를 횡단하여 은월가(銀月家)의 본성에 도착했다.
과거 천계 동부에서 영롱한 은빛을 자랑하던 은월가의 영지는, 현재 칙칙하고 기분 나쁜 검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가문을 수호하는 대진(大陣)이 쉴 새 없이 가동되고 있었으나, 암흑 세력의 끈질긴 마기(魔氣)는 이미 진법의 결계에 거미줄처럼 균열을 내고 있었다.
진천은 허공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결계의 중심축이 이미 오염되었군.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주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리가요! 수호 대진은 오직 대장로님과 가주님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설마 내부에 배신자가...!"
"가보면 알게 되겠지."
진천은 소매를 펄럭이며 은월가의 본성 안으로 강하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뇌전과 천화(天火)의 기운이 닿자,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던 검은 안개들이 비명을 지르듯 타들어가며 길을 열었다.
은월가 내당(內堂)
내당 안은 절망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침상에는 은월가의 가주, 주천명(朱天命)이 온몸이 검게 변사된 채 미약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혈맥 위로는 지렁이 같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며 심장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침상 주변을 둘러싼 장로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대장로님, 이대로 가다간 가주님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십니다! 차라리... 차라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해독약을 얻는 것이..."
은월가의 대장로, 백장(白丈)이 지팡이를 바닥에 쾅 내리찍었다.
"어리석은 소리! 암흑 세력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가문 전체를 마족의 노예로 바치겠다는 뜻이다. 차라리 옥쇄(玉碎)할지언정, 그런 치욕을 견딜 수는 없다!"
"하지만 가주님이 돌아가시면 은월가는 어차피 끝입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내당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주운이 뛰어들어왔다.
"대장로님! 제가 모셔왔습니다. 천무각(天武閣)의 각주, 진천 대인이십니다!"
주운의 뒤를 따라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진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젊고 수려한 외모, 그러나 그 안에 깃든 기백은 태산과도 같았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장로들의 눈에는 그저 어린 무성(武星)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장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주운, 네가 미친 것이냐! 지금 가주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저런 새파란 젊은이를 데려와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거냐! 천무각이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하나, 절맥흑독(絶脈黑毒)은 천계의 명의들도 포기한 맹독이다!"
"물러서십시오! 진천 대인께선 과거 마족을 몰아내신 분입니다!"
주운이 다급히 막아섰으나, 장로들의 불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진천은 장로들의 언쟁을 무시한 채, 곧장 침상으로 다가갔다. 대장로 백장이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진천의 눈빛 한 번에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 이 압도적인 기운은...!'
대장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진천은 침상에 누운 주천명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독이 심맥(心脈)까지 도달하기 직전이군. 반 시진만 늦었어도 영혼마저 오염되었을 것이다."
"당신이 진정... 가주를 살릴 수 있단 말이오?"
대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천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증명했다.
"파(破)!"
진천의 입에서 짧은 단전호흡이 터져 나오며, 그의 손바닥에서 찬란한 푸른색 천화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이 불꽃은 단순한 화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는 뇌겁(雷劫)의 불꽃이었다.
치이이이익—!
"크아아아악!"
의식을 잃었던 주천명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짙은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검은 피는 허공에 닿자마자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으나, 진천의 천화에 닿자 한 줌의 재로 변해 사라졌다.
불과 향 하나가 타들어 갈 시간.
주천명의 몸을 덮고 있던 흉측한 검은 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창백했던 안색에 미세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주천명의 고른 숨소리가 내당에 울려 퍼졌다.
"이... 이럴 수가!"
"절맥흑독이... 단숨에 정화되다니!"
장로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계의 내로라하는 단약사(丹藥師)들도 고개를 저었던 맹독을, 단지 손을 얹은 것만으로 몰아낸 것이다.
대장로 백장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았다. 방금 전 진천이 뿜어낸 기운은 그 옛날 천계를 호령하던 절대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백장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늙은 두 눈에서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이마를 바닥에 깊이 조아리며 외쳤다.
"은월가의 대장로 백장, 늙고 어리석어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내 나머지 장로들도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오만했던 명문가의 장로들이 일개 청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백장이 피를 토하는 듯한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은월가를 덮친 이 끔찍한 그림자를 거두어 주실 분은 오직 진 대인뿐이십니다! 제발... 제발 우리 가문을 구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진천은 무릎을 꿇은 장로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가문의 수호 대진을 손상시키고 독을 퍼뜨린 자는, 너희 장로들 중 하나다."
진천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내당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은월가를 돕는 것은 그 쥐새끼를 먼저 끄집어낸 후의 일이다."
진천의 눈동자 속에서 서늘한 살의가 번쩍였다.
[다음 화에 계속...]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3화: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3화: 부탁드립니다 (3)
"은월가를 돕는 것은 그 쥐새끼를 먼저 끄집어낸 후의 일이다."
진천(秦塵)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당에 울려 퍼지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장로들의 어깨가 일제히 굳어졌다. 대장로 백장(白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대,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문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장로들 중에 암흑 세력과 결탁한 배신자가 있다니요!"
진천은 차가운 시선으로 무릎 꿇은 장로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번쩍이는 푸른 뇌광(雷光) 앞에서는 그 어떤 거짓도 숨을 곳이 없어 보였다.
"수호 대진의 결계는 외부의 물리적인 타격에는 강하지만, 내부에서 진안(陣眼)의 흐름을 역각(逆刻)으로 비틀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오염된다. 더구나 가주가 당한 절맥흑독(絶脈黑毒)은 찻잔이나 음식 따위로 주입할 수 있는 맹독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주가 무방비 상태일 때 진원(眞元)을 섞어 찔러 넣어야만 가능하지."
진천이 손을 등 뒤로 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즉, 수호 대진의 진안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가주의 등 뒤를 잡을 수 있는 자."
진천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은월가의 이장로(二長老), 염무(炎武)였다. 염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가주의 심맥에서 뽑아낸 마기(魔氣)의 잔재가 누구의 영혼 파장과 공명하는지 확인해 볼까?"
진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억눌려 있던 한 줄기 검은 기운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더니 정확히 이장로 염무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지이이익!
"크아아아악!"
염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몸통에서 기괴한 검은 안개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명백한 암흑 세력의 마기였다.
"이, 이장로!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냐!"
대장로 백장이 피를 토할 듯 분노하며 소리쳤다. 다른 장로들도 경악하며 황급히 몸을 피했다.
바닥을 뒹굴던 염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기괴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크크큭... 하하하하! 과연 천계의 전설이라 불릴 만하군. 내 위장술을 이토록 단숨에 간파하다니!"
염무의 목소리는 두 개의 쇳덩이가 부딪히는 것처럼 소름 끼치게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진천! 이미 수호 대진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지금쯤 성 밖에는 암흑의 군세가 당도했을 것이다! 오늘 은월가는 피로 물들 것이고, 네놈 또한 무사하지 못할...!"
"시끄럽군."
염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진천의 눈에서 한 줄기 뇌전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갔다.
콰아아앙—!
"커으억...!"
거대한 벼락이 내당의 천장을 뚫고 내리꽂히며 염무의 전신을 강타했다. 암흑의 기운을 뿜어내며 기세를 올리던 염무는 단 한 번의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단전이 산산조각 나며 숯덩이처럼 변해 바닥에 처박혔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였다.
은월가의 위기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은월가의 본성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창밖의 하늘을 덮고 있던 은빛 결계가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흩어지고 있었고, 짙은 먹구름과 함께 수천의 흑의인(黑衣人)들이 메뚜기 떼처럼 성벽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적습(敵襲)! 적습이다!"
"암흑 세력의 군대가 몰려왔다!"
밖에서 은월가 무사들의 다급한 비명과 무기가 부딪히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내당 안의 장로들은 사색이 되었다. 수호 대진이 없는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암흑의 군세를 막아낼 힘은 현재의 은월가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침상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 주운아..."
"가주님!"
주운이 다급히 침상으로 달려갔다. 독이 해독되어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주천명(朱天命)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천명은 아직 초점 없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박살 난 천장, 숯덩이가 된 이장로,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참혹한 비명 소리. 그리고 자신의 심맥을 짓누르던 맹독을 걷어낸 압도적인 기운의 청년까지.
주천명은 주운의 부축을 뿌리치고 침상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그는 피 묻은 의복을 입은 채, 망설임 없이 진천의 발아래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아직 옥체가 상해 있으십니다!"
주천명은 피가 맺힌 입술을 깨물며 진천을 올려다보았다. 은월가의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렸다.
"천무각의 진 대인... 못난 가문의 수치를 씻어주시고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구천지하에 가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주천명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오나, 지금 밖으로 몰려온 저 사악한 무리들을 저희 은월가의 힘만으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염치없음을 알지만,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가 이마를 바닥에 강하게 찧었다.
"이 늙은이의 목숨과 은월가의 천년 기틀을 모두 내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가문의 어린 핏줄들만이라도... 저 암흑의 마수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십시오!"
죽음을 각오한 가주의 처절한 부탁. 장로들과 주운 역시 눈물을 흘리며 진천을 향해 엎드렸다.
그러나 진천은 바닥에 엎드린 이들을 향해 손을 뻗어 기운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당황함이나 조급함이 없었다. 그저 차갑게 벼려진 명검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도망칠 필요 없다."
진천이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내당의 부서진 문턱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내가 이곳에 있는 한, 저 버러지들 중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진천의 손끝에서 황금빛 신검(神劍)이 소환되며, 눈부신 검기(劍氣)가 은월가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다음 화에 계속...]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4화: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4화: 부탁드립니다 (4)
은월가(銀月家)의 상공은 이미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수천 명의 암흑 세력 무사들이 뿜어내는 마기(魔氣)가 하늘을 뒤덮어 대낮임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으아악!"
"결계가 깨졌다! 가문을 수호하라!"
성벽 곳곳에서 은월가의 무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장절한 비명 속에서, 검은 가마를 탄 한 사내가 허공을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의 전신에서는 공간마저 왜곡시키는 거대한 기압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암흑 세력의 동부 지부장, 암야명존(暗夜冥尊)이었다.
"크크크, 주천명이 결국 독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모양이구나. 은월가의 천년 역사도 오늘로 끝이다. 모두 죽여라! 단 한 명의 핏줄도 남기지 마라!"
암야명존의 잔인한 명령에 흑의인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던 그 순간.
쿠우우웅—!
내당의 지붕을 뚫고 솟구친 한 줄기 황금빛 검광(劍光)이 은월가 전체를 가득 채웠던 검은 안개를 단숨에 두 조각으로 갈라버렸다.
압도적인 무(武)
"뭐냐?!"
암야명존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금빛 광명 속에서 한 청년이 천천히 허공으로 걸어 올라왔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푸른 뇌전(雷電)이 꽃처럼 피어났다. 진천(秦塵)이었다. 그의 뒤로는 은월가의 가주 주천명과 장로들이 경외 가득한 눈빛으로 따르고 있었다.
"주천명? 네놈이 어떻게 멀쩡히 살아있는 거지?"
암야명존이 경악했다. 분명 자신의 절맥흑독에 당해 진원이 다 녹아내렸어야 할 자가 멀쩡한 기세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진천은 암야명존의 질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에 쥔 황금빛 신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암흑 세력의 사냥개치고는 제법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군."
"건방진 놈! 일개 애송이가 어디서 감히...!"
암야명존이 분노하며 손을 내뻗었다. 그의 소매에서 수만 마리의 독충 형상을 한 검은 마공(魔功)이 진천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공간을 부수고 영혼까지 부식시키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천뢰도멸(天雷道滅)."
낮게 읊조린 진천의 목소리와 함께, 은월가의 밤하늘에 거대한 황금색 벼락 구름이 형성되었다. 이윽고 수백 줄기의 신성한 뇌겁(雷劫)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쾅! 콰콰쾅—!
"끄아아아악!"
"이, 이 불꽃은 대체 뭐냐!"
암야명존이 펼친 마공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고, 성벽을 넘어오던 수천의 암흑 무사들은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단 한 번의 검질에 암흑 세력의 대군이 전멸한 것이다.
뒤바뀐 처지
"이... 이 말도 안 되는 힘은...!"
가마 위에서 군림하던 암야명존은 어느새 바닥으로 추락해 있었다. 그의 자랑이던 마기는 진천의 뇌전 기운에 묶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진천이 허공을 밟고 내려와 암야명존의 머리 위에 섰다. 차가운 살기가 암야명존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너희들의 본거지는 어디냐. 그리고 천계 동부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지?"
"크, 크윽...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우리 조직의 상층부가 움직이면 너 같은 놈은 흔적도 없이..."
서걱—!
"아아악!"
진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암야명존의 오른팔이 어깨죽지째로 날아갔다. 단전이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고통에 암야명존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선택권을 준 적 없다. 말해라."
진천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올라온 염라대왕의 그것보다 차가웠다.
암야명존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과거 천계를 피로 물들였던 그 어떤 괴물보다도 더 압도적이고 잔혹한 절대자라는 것을.
조금 전까지 은월가를 멸문시키려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그의 영혼을 지배했다.
암야명존은 잘려 나간 어깨를 움켜쥔 채,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부, 부탁드립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겠습니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은월가의 가주와 장로들을 무릎 꿇리고 비참하게 만들었던 '부탁드립니다'라는 대사가, 이제는 거꾸로 그들을 핍박하던 암흑 세력의 거물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천은 머리를 조아리는 암야명존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하늘을 뒤덮었던 마기가 걷히고, 은월가에는 마침내 순수한 은빛 달빛이 다시금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 계속...]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5화: 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5화: 부탁드립니다 (5)
암야명존(暗夜冥尊)의 처절한 비명이 은월가의 박살 난 대지 위로 흩어졌다. 천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암흑 세력의 거물이, 이제는 목숨을 구걸하며 진천(秦塵)의 발치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황금빛 신검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너희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냐. 은월가를 무너뜨리고 이 땅에서 무엇을 찾으려 한 거지?"
암야명존은 전신을 뒤흔드는 진천의 뇌전 기운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그것은... 천계 동부의 지하 혈맥 깊은 곳에 봉인된 '상고 마존의 심장(Heart of the Ancient Demon Venerable)'을 깨우기 위함이다...! 은월가의 영지는 그 봉인을 누르고 있는 거대한 축 중 하나였기에 먼저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상고 마존의 심장이라..."
진천의 미간이 가늘어졌다. 과거 천계의 거대한 대전쟁 시절,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봉인된 고대 마족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배후는 누구냐? 일개 지부장인 네놈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은 아닐 텐데."
진천의 추궁에 암야명존의 얼굴이 순식간에 공포로 질려갔다. 그는 감히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운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 그분은... 천계 중앙의 최고위 세력과도 연결되어 있는... 암흑 세력의 총수, '무영마황(無影魔皇)' 님이시다...! 그분이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셨다.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총수님이 움직이시면 천계는 다시 암흑으로..."
그 순간이었다.
암야명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이마 중앙에 새겨져 있던 기괴한 검은 낙인이 불길하게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크아아악! 이, 이 금제(禁制)가 왜...!"
암야명존이 머리를 감싸 쥐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암흑 세력의 상층부가 기밀 유지를 위해 심어둔 '영혼 금제'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의 칠공(七孔)에서 검은 피와 함께 영혼이 불타오르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금제가 발동하면 영혼이 갈가리 찢겨 나가며, 그 잔재는 본산의 마천루로 끌려가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 불길의 땔감이 되는 잔혹한 저주였다.
"살려... 제발..."
암야명존은 검게 타들어 가는 손을 뻗어 진천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살아남겠다는 욕망이 아니었다. 그저 이 끔찍한 영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처절한 애원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짜내어 진천을 향해 울부짖었다.
"진 대인...! 제발... 제발 제 영혼을 온전히 소멸시켜 주십시오! 저들의 손에 영혼이 붙잡혀 영원히 고통받느니, 차라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듯, 악인의 마지막 기도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진천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신검을 가볍게 내리쳤다.
"천화정화(天火淨化)."
푸른색의 순수한 천화(天火)가 암야명존의 전신을 감쌌다. 마족의 사악한 금제 기운이 천화에 닿자 비명을 지르며 정화되었고, 암야명존의 몸과 영혼 역시 고통 없는 빛 속에서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천지에 암흑의 기운은 단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새로운 맹세
상공을 메웠던 암흑의 군세가 완벽히 소멸하고, 은월가에는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전투를 지켜보던 은월가의 가주 주천명과 주운, 그리고 장로들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천계를 뒤흔들 수 있는 대군을, 그리고 그 악명 높은 암야명존을 손가락 하나로 요리하듯 지워버린 진천의 무력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해 있었다.
주천명은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진천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나 절박함 때문이 아니었다. 진정한 군주를 향한 경외와 충성의 표시였다.
"진 대인."
주천명이 고개를 숙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오늘 대인께서 보여주신 은혜는 저희 은월가가 평생을 바쳐도 갚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암흑 세력의 총수, 무영마황이 살아있는 한 저희 가문은 물론 천계 동부 전체가 다시 도탄에 빠질 것입니다."
주천명은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가문의 핵심 보인, '은월인(銀月印)'을 꺼내어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은월가의 모든 권력과 영지, 그리고 혈맥의 진법을 통제할 수 있는 가문의 심장이었다.
"저희 은월가 천년의 핏줄과 모든 힘을 천무각(天武閣)에 바치겠습니다. 대인을 은월가의 상주(上主)로 모시고자 하니..."
주천명의 눈빛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부디 저희를 대인의 검으로 받아주십시오. 천무각의 기치 아래, 저 사악한 암흑 세력을 뿌리 뽑는 길에 은월가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뒤이어 주운과 모든 장로들 역시 일제히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각주님!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처절한 '부탁'은, 이제 천계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동맹이자 복종의 맹세로 승화되고 있었다.
진천은 주천명이 바친 은월인을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의 눈은 이미 은월가를 넘어, 천계 중앙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암흑의 배후를 향하고 있었다.
" 좋다. 그 맹세, 거두어들이지."
천무각의 거대한 진격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6화: 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6화: 부탁드립니다 (6)
암야명존(暗夜冥尊)이 이끌던 암흑 세력의 대군이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는 소식은 천계 동부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수많은 명문 가문과 종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월가(銀月家)를 구원하고 암흑 세력을 단숨에 처단한 존재가 다름 아닌 최근 급부상한 천무각(天武閣)의 각주, 진천(秦塵)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부 천계의 세력 판도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은월가의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이변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부 천계의 격변
우우우웅—
은월가 본성의 연무장 중심부. 진천은 가부좌를 튼 채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는 미세한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암야명존이 죽기 직전 언급했던 '상고 마존의 심장(Heart of the Ancient Demon Venerable)'. 그 사악한 유산이 봉인된 지하 혈맥의 결계가 정화된 마기 속에서도 여전히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암흑 세력이 남긴 오염의 흔적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각주님, 성문 밖에 동부 천계의 주요 종파 대표들이 모여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은월가의 영지에서 천무각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주운(朱雲)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진천이 천천히 눈을 뜨자, 푸른 뇌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이 왜 왔지? 과거 은월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아니더냐."
"그것이... 가주님께서 가문의 보인까지 바치며 천무각에 귀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암흑 세력의 다음 표적이 될까 두려워 가호(加護)를 청하려는 듯합니다."
진천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강자 앞에 머리를 숙이는 자들의 생리는 하계에서부터 수없이 보아온 것이었다.
"들여보내라."
몰려드는 군웅들
은월가 대전 안으로 동부 천계를 주름잡던 강력한 종파의 수장들이 연이어 걸어 들어왔다. 자양종(紫陽宗)의 종주 대염무(大炎武), 풍운각(風雲閣)의 각주 풍만천(風滿天) 등, 하나같이 무성(武星) 경지의 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대전 상석에 앉아 있는 진천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삼켰다.
진천의 몸 주변을 흐르는 천화(天火)와 뇌전의 잔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천도(天道)와 같았다. 20대의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수천 년을 살아온 태고의 거인보다 압도적이었다.
"천무각주 대인을 뵙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던 종주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진천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본 좌는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용건만 말해라."
자양종의 종주 대염무가 침을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대인... 암야명존이 쓰러졌으나, 암흑 세력의 총수 무영마황(無影魔皇)이 이끄는 본대가 조만간 동부 천계를 피로 물들일 것이라는 첩보가 돌고 있습니다. 저희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수를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풍운각주 역시 간절한 어조로 거들었다.
"은월가가 천무각의 기치 아래 안전을 보장받았듯, 저희 종파들 역시 천무각의 영도 아래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부디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두 번째 애원, 그리고 결의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지 깊은 곳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궁—!
대전의 기둥들이 격렬하게 흔들렸고, 바닥의 틈새로 불길한 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봉인된 상고 마존의 심장이 외부의 암흑 기운과 공명하며 마침내 깨어나려 하는 징조였다.
"이, 이 기운은 대체...!"
"벌써 암흑 세력의 저주가 시작된 것인가!"
종주들은 혼비백산하여 방어 기운을 끌어올렸으나,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 마공의 압박에 질식할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자신들이 자랑하던 무성 경지의 힘이 이 거대한 어둠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극도의 공포가 대전을 지배했다.
오직 진천만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오른발로 대전 바닥을 가볍게 구르자, 찬란한 황금빛 뇌전의 결계가 펼쳐지며 피어오르던 마기를 단숨에 찍어 눌러 소멸시켰다.
콰르릉—!
순식간에 찾아온 고요함.
종주들은 진천의 발끝에서 일어난 기적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음을 직감했다. 진천이 없다면, 다가올 암흑의 해일 앞에 자신들은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갈 투명한 존재들이었다.
자존심과 체면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대염무와 풍만천을 비롯한 동부 천계의 거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댔다.
"천무각주 대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懇切히 付託드립니다!)"
대전 가득 그들의 처절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저희의 재물과 무사, 종파의 모든 명운을 대인께 바치겠습니다! 무영마황의 마수에서 동부 천계의 수억만 창생을 구원해 주십시오. 부디 저희를 천무각의 하위 세력으로 받아주실 것을... 무릎 꿇어 부탁드립니다!"
과거 은월가의 비극을 방관했던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진천의 발치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가문에서 종파로, 그리고 이제는 동부 천계 전체의 명운이 진천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진천은 무릎 꿇은 군웅들을 내려다보며 황금빛 신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들의 충성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게 될 것이다."
진천의 검끝이 지면을 향했다.
"지금 즉시 전 무사를 소집해라. 지하 혈맥으로 들어가 마존의 심장을 완전히 파괴하고, 무영마황의 목을 베러 간다."
동부 천계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성전(聖戰)의 서막이 마침내 올랐다.
[다음 화에 계속...]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7화: 부탁드립니다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7화: 부탁드립니다 (7)
지하 혈맥의 지옥도
동부 천계의 수많은 종파에서 소집된 천여 명의 정예 무사들이 진천(秦塵)의 뒤를 따라 은월가(銀月家)의 대지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수만 장(丈) 아래에 위치한 고대 혈맥은 그 자체로 거대한 미궁이자 지옥이었다. 깊이 내려갈수록 사방의 암벽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상고 마기(魔氣)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무사들의 진원(眞元)을 갉아먹었다.
"으윽... 이 무슨 흉포한 기운이란 말인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마음에 틈이 생기는 순간 영혼을 잠식당한다!"
각 종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방어 결계를 펼쳤으나, 사방을 메운 탁한 공기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오직 대오의 선두에 선 진천만이 양손을 등 뒤로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평지를 걷듯 유유히 나아갈 뿐이었다. 그의 몸 주변에서 미세하게 불타오르는 푸른 천화(天火)는 다가오는 모든 마기를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고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마침내 천여 명의 무사들 앞에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지하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존의 심장과 어둠의 사도
"저... 저게 대체 무엇이냐...!"
누군가의 비명 섞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광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핏빛 제단 위에 묶여 있는, 산만 한 크기의 거대한 검은 심장이 있었다. 심장은 마치 살아있는 괴수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고동치고 있었다.
쿠웅—! 쿠웅—!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광장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고, 무사들의 명혼(命魂)이 뒤흔들렸다. 심장 표면에는 굵은 혈관처럼 얽힌 검은 사슬들이 칭칭 감겨 있었으나, 이미 사슬 곳곳이 붉은 마기에 부식되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는 한 사내가 가부좌를 튼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에 기괴한 마紋(마크)이 새겨진 노인, 암흑 세력 총수의 직속 호법이자 무영마황의 오른팔인 칠살마존(七殺魔尊)이었다.
"크크크... 미련한 천계의 버러지들이 제 발로 제단을 찾아왔구나."
칠살마존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광기와 살기가 가득했다.
"진천, 네놈이 암야명존을 죽이고 동부 천계의 세력들을 규합해 이곳으로 올 것까지 이미 총수님의 계산 안에 있었다. 상고 마존의 심장을 완전히 부활시키기 위해선 강력한 무사들의 영혼과 신선한 혈액이 대량으로 필요했거든! 네놈들이 가져온 그 정예 무사들이 바로 가장 완벽한 제물이다!"
절체절명의 제단
칠살마존이 허공으로 손을 뻗어 거대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암야혈해대진(暗夜血海大陣), 기(起)!"
화아아악—!
광장 바닥 전체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암흑의 진법이 가동되었다. 천여 명의 무사들이 발을 딛고 있던 대지가 순식간에 핏빛 늪처럼 변하더니, 그들의 다리를 단단히 결박했다.
"내, 내 진원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에서 피가... 혈액이 빠져나가고 있어!"
동부 천계의 고수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진법의 강력한 흡인력은 그들의 단전을 봉인하고, 온몸의 생명력과 혈기를 강제로 뽑아내어 중앙의 검은 심장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흡수해라! 깨어나라, 상고의 군주여!"
칠살마존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이미 가문의 독기로 몸이 약해져 있던 은월가의 가주 주천명은 가장 먼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아들 주운(朱雲) 역시 전신의 혈관이 터져 나가며 피를 토했다. 자양종주와 풍운각주를 비롯한 거물들도 바닥을 구르며 절망했다. 자신들이 가져온 힘이 오히려 마족의 부활을 돕는 촉진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극도의 무력감을 느꼈다.
주운은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진법의 중심에서도 홀로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채 서 있는 진천을 바라보았다. 오직 저 청년만이 이 지옥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주운은 터져 나가는 혈맥의 고통을 악물고, 기어가듯 진천의 발치로 다가가 피 묻은 손으로 대지를 짚었다.
"각, 각주 대인...! 부탁드립니다...! (각주 대인...! 付託드립니다...!)"
주운의 목소리는 이미 찢어져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희의 목숨은...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저 괴물이 부활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부디, 동부 천계의 마지막 희망이신 대인께서... 저 사악한 무리를 멸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생사보다 천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처절한 애원. 주운의 눈에서 흐른 피눈물이 핏빛 진법 위로 떨어졌다. 뒤이어 의식이 남아있던 종파의 수장들도 피를 토하며 일제히 울부짖었다.
"천무각주 대인! 부탁드립니다! 동부 천계를 구해 주십시오!"
패왕의 역습
진천은 주운의 피 묻은 어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비로소 서늘한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네 약속과 간절함, 내 똑똑히 들었다."
진천이 마침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쿵—!
그가 발을 내딛는 순간, 천여 명의 무사들을 결박하고 있던 거대한 암야혈해대진의 핏빛 결계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진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뇌정지력(雷霆之力)이 지하 광장 전체를 대낮처럼 밝히며 대진의 마기를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뭐, 뭐냐?! 어떻게 내 진법의 압박을 버티고 움직이는 거지?!"
제단 위의 칠살마존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진천은 대답 대신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천계의 온갖 영특한 불꽃들이 융합된 '천화정화(天火淨化)'의 불길이 태양처럼 거대하게 솟구쳤다.
"고작 이따위 조잡한 진법으로 내 사람들을 제물로 삼으려 했다니."
진천의 눈동자가 황금빛 뇌전으로 가득 찼다.
"무영마황의 오른팔이라 했나? 오늘 네놈의 피로 저 심장을 먼저 장사 지내주마."
진천의 신검이 허공을 가르자, 마족의 지옥도를 찢어발길 거대한 신벌(神罰)의 빛이 폭발했다.
[다음 화에 계속...]
삽화 부탁드립니다
요청하신 [무신주재 후속 가상 스토리] 제27화의 삽화입니다.
지하 혈맥의 핏빛 제단과 거대한 검은 심장, 그리고 절망 속에서 마지막 희망을 갈구하는 주운의 애절한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이 삽화와 함께 이야기를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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