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아가다 묘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간월은 부산, 경남의 첫 공소로 알려진 간월 공소(1815-1860)가 있던 자리이다. 간월은 이 지역 첫 신자 김교희(프란치스코, 김 아가다의 조부) 일가로부터 전교가 시작되었고, 을해, 기해박해를 거치면서 충청도와 영남 각처에서 피신한 사람들로 큰 교우촌을 이루었다.
1837-38년에는 샤스탕 정 신부의 방문을 받았고, 기해박해 후에는 다블뤼 안 주교와 최양업 신부의 전교 대상지였다. 1859년 경에는 한 외교인의 도움으로 훌륭한 강당까지 갖춘 공소로 발전하였으나, 1860년 경신박해로 해체되고 말았다.
죽림굴에서 선종한 동정녀 김 아가다의 묘소가 간월골에 있다. 죽림굴은 박해를 피해 교우들의 피신 하였던 곳으로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이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가) 등 3인의 순교자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다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재권(프란치스코)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당시 '장하순교'(杖下殉敎)한 김영제(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김영제가 잡혀가던 병인박해 때 붙잡혀갔다가 다시 풀려 나온 아가다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 친 아가다는 집안이 풍비 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든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눕는다. 그녀는 죽기 전 몇 달간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김 아가다는 잡혀 갔던 후유증으로 여러날 앓다가 최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선종하였다(1860년). 최 신부는 시신에다 솔가지를 덮고 묘비인 패장을 세워 주었다. 며칠 후 교우들이 이것을 알고 간월골로 옮겨와 매장 하였다. 1991년 4월 17일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축성하였다.
경신박해(1860)의 언양지역 상황에 대해 최양업 신부님이 쓰신 서한중 김 아가다에 대한 내용이다.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분 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중략)
24세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 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