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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소화의 씻김굿
굿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길닦음에 쓸 작은 꽃상여의 네 기둥에 노란 붕어를 매다는 것으로 소화는 굿 준비를 모두 끝냈다.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홀가분하면서도 뿌듯한 기분과 함께 아득하면서도 상그러운 피로감이 전신을 적셔들었다. 첫 고비의 큰짐을 부린 만족감과 안도감이 겹치면서 맛보게 되는 기쁨이었다. 굿을 잘 치르려면 준비물 마련부터 순조로와야 했다. 눈썰미 좋고 일손이 엽렵한 들몰댁 덕에 일을 쉽게 마무리 짓게 되자, 처음에 다소 내키지 않았던 기분도 말끔히 가시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몸을 편히 갖고 마음을 정리해 굿풀이 사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독하는 일이었다.
"들몰댁, 고상허시었소." 소화는 밝으면서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들몰댁을 바라보았다.
"아니구만이라, 지야 무신, 기자님이 다 애쓰셨제라." 색색의 종이조각들을 치우던 들몰댁은 쑥스러워하며 눈길을 피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길남이가 안직도 서운해헐란지 몰르겄소. 그 고마운 맘얼 그리 무질러뿌렀으니 미안허기도 허고 짠허기도 허고, 영 맘에 걸리요." 소화가 생각에 잠기며 나직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신 말씸이신게라. 다 지 전정 생각허시는 짚은 맘으로 허신 일인디라. 기자님이 그리 짚은 맘으로 지 자석덜 대혀주신께 지가 을매나 고마운지......" 들몰댁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손을 코로 가져갔다.
지전이며 지화 등속으로 준비물에는 한지를 가위질하는 일이 많았다. 무엇이든 만들기를 즐기는 손재주 좋은 길남이는 그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소화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사내아이에게 무당이나 굿이 너무 친숙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적에 예사롭게 넘긴 보배움이 장성한 다음에 잘못 될까봐 저어했던 것이다. "후제커서 장헌 일 해야 헐 남자넌 어려서부텀 요런 짜잔헌 일에 손대는 것이 아닌 법이다." 소화는 일부러 엄하게 꾸짖었다. 길남이가 퍽이나 무색해하며 입술이 실룩이고 코가 벌름거리도록 울음을 물었지만 달래거나 풀어주지 않았다. 평소에 꼭 살붙이처럼 따르는 그 아이의 정어린 눈이 가슴을 싸아하게 만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들몰댁, 곤허드라도 술도가집 잠 댕게오실라요. 여그 일이 다 막음 되었다고 알리고, 거그 일 단도리 영축웂이 허라고 새참으로 일러두는 것이 좋겄소. 큰 일 앞에 놓고 맘들만 바뻐 두세두세허다 보먼 빠치는 것이 더러 있는 법이오." 소화는 그 생김과 나이에 걸맞지않게 침착하고 무거웠다. 평소의 그녀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다. 큰굿을 앞두고 생긴 변화였다.
"야아, 핑허니 가서 말씸 전허겄구만이라. 무신 딴 말씸 웂으신게라?" "금메, 떡이나 잠푸지게 혀서 여그저그 널리 돌렸으먼 좋겄는디, 너무 실인심 혔응께요. 근디, 그 말얼 혀야좋을란지 어쩔란지 몰르겄소." "알겄구만이라. 지가 요령지게 그 말얼 전허겄구만이라. 댕게오겄구만이라." "찬찬허니 댕기씨요."소화는 사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한 화색이 맑은 살 속으로부터 돋아오르고 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그녀의 얼굴은 생생한 탄력과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담고 안온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은 항시 기다림으로 출렁이고 있었고, 마음은 지향없는 길을 헤매어 산을 굽이굽이 넘고 하늘 끝 그 멀리에 이르고 있었다. 마음은 수만 가닥이 되어 당신을 찾아 더듬고, 가닥가닥 나뉘고 쪼개지는 마음 하나로 묶으려 하나 내 뜻으로 이루어질 일 아니고, 당신 오시며 거두어오실 길잃은 마음입니다. 당신을 기다림이 턱없이 큰 욕심임을 아는 까닭에, 마음을 묶어 신당을 가두어 두어도, 마음은 어느새 바람이 되어, 당신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천리를 갑니다. 그녀가 가슴벽에 새기는 기다림이었다.
내키지 않았던 이번 굿을 받아들였던 것도 순전히 그분의 아버지였던 까닭이다. 처음에 낙안댁이 찾아왔을때는 말도 다 듣기 전에 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보소, 밤마동 그 양반이그 험헌 꼴로 찾어와서나 사람얼 괴롭히는디, 나럴 잠 살레주소. 그리 흉헌 죽음을 했이니 워찌 이승에 한이 웂겄는가. 그 한얼 풀어줘야 고이 저승으로 갈 것이 아니겄는가." 이 애원에도 소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흉사혀서 넘보담 많고 많은 한이 끌어댕게서 이승을 못뜨고 저리 발싸심허는 원혼의 씻김굿이 훨썩 에롭다는 것을 나 다 아네. 굿 모시는 택이야 원허는 대로 다 치룰 것잉께 나 잠 살레주소." 이 말에도 소화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지낸 일로 나럴 사람으로 안 보는 갑는디, 그때 나가 잠시 잠깐 맘 잘못 묵었든 거 신령님 전에 사죄허고, 자네허고 헌 약조도 어김웂이 지키지 안혔등가. 자네가 하섭이럴 보드라도 워찌 이럴 수가 있겄는가. 망자가 딴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섭이 아부지란 말이시, 하섭이 아부지." 이 말 앞에서 소화는 마음에 걸었던 빗장을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마음의 빗장을 흔드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그말까지 듣게 되자 더는 고개를 저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십구제에 씻김굿을 하기로한 것이다.
"소화씨, 계신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소화는 눈을 떴다. 자신을 '소화씨'라고 부르는 것은 이지숙뿐이었다. "이 선생님." 소화는 반갑게 문을 열었다. 다른 말은 몰라도 '선생님'만은 이지숙 앞에서 '선상님'이라고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신경써가며 고쳤던 것이다.
"계셨군요. 일이 바쁘지 않으세요?" 이지숙이 방에 눈길을 보내며 웃음지었다. 그녀가 굿을 한다는 걸 알고 있음을 소화는 직감했다. "다 끝냈구만요, 들어오시씨요." 소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소화는 이지숙을 대하면 인간적인 신뢰감과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감과 비애감도 느끼고 있었다. 아는 것이 너무나 많은 이지숙 앞에서 자기는 얼마나 무식한 못난이인가를 알았고, 남자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좌익을 이지숙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무당 노릇에 대하여 서글픔을 느꼈던 것이다. 그 서글픔은 정하섭이 자신의 무당 노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더 진해지고 커졌다. 사람은 다 제각기 맡아 하는 일이 다르다는 사실로 자신이 선 자리를 단단하게 해보려고도 했지만 그 열등감과 비애감을 없앨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좌익하는 일과 무당 노릇이 똑같은 무게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지숙이 가끔 찾아와 목소리 낮추어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지도 몰랐다.
"정현동씨네 굿을 하는 모양이지요?" 이지숙이 앉으며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흉사라서 굿을 허겄다능마요." "씻김굿이겠죠?" "워찌 고런 것꺼지 아신당가요?" 소화의 큰 눈이 더커졌다. "조선사람이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죠. 그래요, 너무 흉악한 꼴로 죽은 데다가 초상도 마당에서 치렀으니 유족들이야 당연히 굿을 하고 싶겠죠." "생전에 정 사장님도 굿을 좋아했구만요." 무심코 말을 해놓고 소화는 금방 실없는 소리를 한 자신을 나무랐다. 망자를 놓고 할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요,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이지숙은 검지손가락을 입술로 물며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소화는 등줄기가 꼿꼿해지는 긴장을 느꼈다. "굿 중에 망자의 혼을 불러 가족에게 망자의 소원인가 뜻을 전하는 대목이 있지요?" "예, 손대잡이라고 허능마요." "그래요, 손대잡이. 시누대가 막 떠릴지요. 그때 말예요, 당골은 자기 정신이 없이 망령이 시키는 말만 하는 건가요 아니면, 자기뜻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가요?" 이지숙은 신중을 기해 말해나갔다. "워째 그러시는디요?" 사르르 냉기가 도는 얼굴로 소화가 반문했다. 이지숙은 소화의 거부를 강하게 느꼈다.
불가침을 향한 어렵고 위험한 질문인 것을 다시 확인하며 이지숙은 다음 말을 서둘렀다. "제가 하는 말은 그 내용을 알자는 게 아니라 한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걸 물은 거예요.
그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만약 소화씨가 어느 한 대목이라도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정 사장이 이번에 바닷물을 채우려고 했던 논들을 그대로 뒀다가 농지개혁 때 작인들에게 넘겨주라는 내용의 말을 끼워넣어달라는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가족들이 망자의 말인데 안 들을 수가 없을 것이고, 그 논들이 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자그만치 이백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계문제가 해결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가족이 딴 사람 앞으로 명의 변경을 해버리거나, 사방으로 처분해버리면 지금 소작을 부치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되겠어요. 소화씨도 아다시피 그 논 때문에 지금 열두 사람이 잡혀들어가 있잖아요." 이지숙은 숨이 가쁠정도로 빠르게 말을 해댔다.
"진작에 그 말씸부텀 허실 일이제라. 지가 워칳게든지 혀보도록 허겄구만요." 소화는 쑥스러운 듯 부끄러운 듯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씨, 잘 좀 부탁드려요." 이지숙은 의미깊은 눈길로 소화를 쳐다보며 그 손등에 손을 포겠다. 그려라, 아배 그 일언 그분이허고 잡아 허는 일일 것잉께라. 소화는 정하섭의 채취를 물큰 냄새맡고 있었다.
십이월이 중순 고비를 넘기면서 해는 완연히 짧아지면서 조계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리고 거칠었다. 어둠살이 번지고 있는 정 사장네 마당에는 차일이 높게 쳐졌다. 그 안에는 임시로 내건 두 개의 알전구가 내쏘는 밝은 불빛 아래 굿판을 벌일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중간 높이의 여덟 폭 병풍이 집 쪽으로 돌렸고, 그 앞에 굿상이 기다랗게 차려져 있었다. 굿상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조부 내외. 증조부 내외. 조부 내외 순서로 차려졌고, 위치에 따라 병풍에는 지방이 붙어 있었다. 정현동의 굿상은 왼쪽 끝이었는데, 병풍에는 지방만 붙은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한지를 오려서 사람형상을 만든 넋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옥색 모본단으로 지은 남자 한복이 발목에 하얀 버선까지 매달고 병풍에 걸쳐져 있었다. 병풍에는 묵으로만 친 여러 가지 화초들이 폭마다 쌍을 이루고 있었다. 굿상 앞에는 액상. 향로. 손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잇대어 깔린 덕석 왼쪽 한옆으로는 무명두루마기에 갓까지 받쳐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북.장고.징.아쟁 같은 악기가 줄 맞춰 놓여있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대문이 활짝 열어젖혀져 사람들은 아무나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덕석 가장자리를 경계로 벌써 굿구경을 온 사람들이 서너 겹을 이루었고, 병풍 뒤로도 빼꼭하게 몰려 있었다. 그들은 끼리끼리 입을 맞추고 있었지만 머릿수에 비해 별로 소란스럽거나 시끄럽지는 않았다. 굿이란 원래 권하는 사람이 없어도 구경할 만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고도 굿판이 벌어지면 이웃이나 근동에서 마음써 보아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경사굿은 경사굿대로, 흉사굿은 흉사굿대로 서로 한 자리에 마음을 모아 축하를 하며 즐기고, 애도를 하며 즐겼다. 아무리 가슴아픈 흉사굿이라 하더라도 무당의 혼신을 다한 매듭매듭풀이를 따라 굿은 흥겨움으로 막음하게 마련이어서, 가슴 미어지는 슬픔이나 아픔으로 시작된 굿도 어깨숨 내쉬며 더덩실 춤추는 기쁨을 서로 나누고 즐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당의 신통력이었고, 사람들은 그 신통력을 믿었고, 의지했다. 한 바탕 흐드러진 굿판을 통해서 사람들은 평소의 미움도 삭이고 삶의 고단함도 위안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굿판에 모여들 때는 어떤 기대감으로 가슴이 흔들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건 오늘의 당곡네인 소화와 굿주인 낙안댁이었다.
"참말로 상다리 뿌러지게 채렜네잉." "워째 안 글컸는가. 재산 많이 냉게놓고 비명횡사헌 냄편 한 풀어줄라는 것인디 아까운 거이 머시가 있겄어." "그렇제, 재산이 지아무리 중혀도 목심만은 못헌 법잉께." "근디, 굿값얼 앞돈만도 엄칭이 줬담시로?" "잉, 나도 그 소문 듣기야 들었는디, 뒷돈이 또 건너갈 것잉께 고것이 을맨지 알 수가 있겄다고. 다 줄만 헌께 주겄제." "그려, 원체로 엄니 때부텀 뼉다구 실헌 물림잉께로. 그러다가 그 처녀무당 금세 부자되야 불겄네." "와따 별걱정 다 허네. 거그도 잽이덜에다가, 조무에다가, 딸린 입이 수십이여. 무당질혀서 부자 됐다는 말 들었는가, 자네?" "그러시, 우리야 옛말 이른 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묵으먼 그만이제." 소화는 안방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동도 동백기름 발라 빗은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옴 없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검은 머리는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고, 하얗게 곧은 가르마는 인중과 일직선을 이루면서 차가운 위엄이 서린 미모의 얼굴을 더욱 돋아올리고 있었다. 쪽진 머리에는 평소와는 달리 긴 은비녀가 꽂혀 있었다.
"들으씨요." 소화는 마주앉은 낙안댁을 향해 눈길을 모으고는, "굿은 나 혼자서 모시는 것이 아니요. 나허고 항꾼에 맘이 뫼져야 망자가 왕생극락을 이룰 수 있을 것이요. 딴 맘, 딴생각 묵지 말고 온 지성으로 나럴 따르씨요." 그녀는 냉정하고 엄하게 일렀다. "하먼, 하먼이라." 낙안댁은 합장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화도 낙안댁도 평소와는 판이한 모습이고 태도였다. 소화는 폭넓은 치마를 살짝 들고 일어섰다. 그녀의 몸 전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서려 있었다.
소화가 병풍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시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뚝 멎었고, 잽이네 남자가 앉음새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치마귀를 잡은 소화는 고개를 약간 수그린 자세로 굿상 앞으로 옮겨갔다. 길게 끌리는 치마로 발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가비얍은 움직임은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도 사르르 떠가는 듯싶었다. 낙안댁과 상주인 아들은 병풍 오른쪽으로 자리잡았다.
"참말로 이쁘시잉. 콰자럴 안 걸친께로 훨썩 이뿐 것 아니라고?" "쾌자 걸치먼 걸친 대로또 이쓰겄제, 동백꽃맨치로. 쪼깐 선무당맹키로 뵈서 탈이겄제만." "하먼, 지대로 된 당골네가 쾌자 걸치고 설레발 쳐서야 되간디. 굿맛 떨어지게." "참말이제 무당해묵기 아깝게 꽃맹키로 이쁘시. 작약이 저리 이뿔랑가?" "아니시, 작약이야 너무 야허고, 머시다냐, 저리 깨끔허고 복시럽게 생긴 꽃 안 았드라고? 잉, 대웅전 앞에 핀 수국이시." "와따, 용케도 찍어내네웨." 소화는 하얀 모본단 치마저고리 차림이었고, 저고리섶. 소매깃. 고름을 남색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얀 모본단의 우아한 색조 속에서 남색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며 소화의 얼굴을 떠받치고 있었다.
소화는 굿상을 행해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징을 왼손으로 받쳐잡고 징채를 오른손에 들었다. 굿의 시작을 아뢰는 안당이었다. 풍악의 전주가 울리면서 소화가 징을 가볍게 가볍게 두들기며 가락에 실은 주문이 시작되었다.
"아! 인금아 공심은 젊어지고 남산은 본이로세. 조선은 국이옵고 발 많은 사두세경 세경두본 서울은 경성부 동불산 집터잡아 삼십삼천 내리굴러 이십팔숙 허궁천 비비천 삼화도리 천열시왕 이덕마련 하옵실쩍, 오십삼관 칠십칠골 충청도 오십오관 오십오골 돌아들어 관은 곽나주, 나주는 대모관, 승주는 군수구관, 낙안은 선지선관이요, 정중은 정씨 정중이요 정씨가문 정정중께서 정성이 지극하여 대궐같은 성주님을 모셔놓고 원근 선영님을 모셔놓고 이 잔치를 나서자 상책놓고 상날 가려 중책놓고 중날 가리고 생기복 덕일을 받어서 이 잔치를 나섰습니다. 찬독술 왼독술에 산해진미 장만하여 마당삼기 뜰삼기 염천도우 시우삼기 야력잔치 나서서 불쌍하신 망제님을 씻겨서나 천도하자 이 잔치를 나섰습니다......" 장구.피리.북.아쟁이 반주를 하는 가운데 징이 동동 동동동 울리며 소화의 주문이 가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소리가 심이 좋네." "하먼, 젊은디." "말도 멍청허니 받네. 젊다고 다 소리가 심지간디?" "와따 귀도 볽네. 소리 심 알라먼 당아 멀었어. 제석굿 짬에나 가야 지대로 알아지제. 씻김굿 열두거리 중에서 안당거리는 소리 듣고 심 좋다는 소리 나 생전 첨 듣는 소리시." "어허! 에지간히 넘어가제 워째 그리 찝어뜯고 그려." 두 남자가 시비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소화는 굿상을 향해 가볍게 읍하고 돌아섰다. 웃음기 없는 소화의 밝은 얼굴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감정이 깃을 세우기 시작한 증거였다. 소화는 정면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나갔다. 그 뒤를 잽이들이 악기를 들고 따랐다.
"질 잠 틔우씨요, 질." 어떤 여자가 대문 쪽으로 선 사람들을 헤치고 있었다. 손에 흰 고무신을 든 들몰댁이었다. "워째 쩔로 가까?" 젊은 여자가 말했고, "혼맞이 헐란 것이제." 좀더나이먹은 여자가 말했다. "혼맞이라?" "이 집 망자가 워찌 죽었는지 몰러? 집 밖에서 객사혔으니 혼이 공중에 떠돔스로 집으로 못 들어온께 당골이 질 틔워 맞어딜이야 굿이 될 거아니겄어. 오늘 굿에서 저것이 질로 중헌 대목 아닌갑네." "맞소, 인자 알아묵겄소." 대문밖에서 소화의 가락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흐름의 폭이 넓어지고 음색이 진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숙연한 얼굴들로 그 소리흐름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액상에 놓인 세 개의 쌀 주발에 꽂힌 세 개의 촛불이 타고, 향로에서는 긴 연기가 파르스름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화는 틔어져 있는 길을 따라 조용조용 걸어들어와 덕석으로 올라섰다. 뒤따르던 들몰댁이 흰 고무신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우르르 사태를 이루었다.
소화는 잽이들 쪽에 자리잡고, 조무가 굿상 앞으로 나섰다. 살이 오른 몸피에 얼굴이 펑퍼짐한 조무는 손대소쿠리에 담아두었던 지전을 들고 가벼운 몸짓을 시작했다. 하나하나에 정성들인 가위질을 해서 돈을 상징한 수십가닥의 지전묶음은 작은 움직임에도 긴 꼬리들을 제각기 예민하게 흔들고 떨었다. 그것은 마치도 흰빛의 커다란 꽃송이 같기도 했고, 부풀어오르는 하이얀 구름덩이 같기도 했다. 조무는 가벼운 춤사위로 흔들던 지전을 팔을 굽혀 어깨에 올린 듯한 모습으로 가락을 시작했다. 상을 차린 조상과 그 친구들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초가망석이었다.
".......굿을 불러 외야보고, 석을 불러 다녀보세. 굿은 한님에 굿이요, 석은 단님에 석이로세. 선영님네 오시라고 두대바지 챌을 치고, 화초병풍 둘러치고, 선영님께 축원하네......" 조무는 이음동작으로 손대소쿠리에서 혼대를 집어들어다. 한 자 정도 길이의 시누대 끝에는 네댓 개의 댓이파리가 붙어 있었고, 그 밑을 한지를 겹접어 홑묶음을 했는데, 망자의 넋은 그 대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조무는 혼대를 지전으로 감싸 춤사위와 함께 가락을 계속했다. 모신 넋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맘껏 흠향하게 하는 쳐올리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쳐올리기가 끝나자 상복을 입은 두 상제가 나가 절을 올렸다.
"으쩌끄나와, 정작 장자가 웂으니." 한 여자가 혀를 찼다. "장례때도 장자 배웅 못 받었는디 머. 고것이 다 정 사장 팔자제." 옆의 여자가 입을 삐죽했다.
장구가 세워져 덕석의 가운데 놓여졌다. 혼대가 장구의 숫바줄 부전에 끼워져 있었다. 소화가 나와 장구를 왼손으로 살짝 들고 징채로 가볍게 두들기며 가락을 시작했다. 잽이들의 반주가 없이 당골 혼자서 하는 손님굿이었다.
"손님네 본을 받고 대신에 안철을 받세. 손님네 나오실제 손님네 근본이 어디메가 근본인가. 강남나래...... 손님네 나오실제 청기 한쌍 홍기 한쌍 쌍쌍이 거느리고, 조선국 나오실제 선두거리 나오셔서, 궁아사공아......" 공포의 병이었던 마마를 두려워해 그 신을 손님처럼 후하게 대접하여 다시 바다건너로 물러가게 하는 굿이었다. "은제나 저 동드랑 동동, 동드랑 동동 허는 장단얼 들으먼 맴이 요상시러바잔당께. 자네넌 안 긍가?" 어느 남자가 물었다. "나도 귀가 있는디 워째 안 그렇겄어.
손님얼 고향으로 보내잔께 손님네 쪽 장단을 쳐야겄제. 자네 맴이 워떤디?" "잉, 저 귀선 소리만 들으먼 펄떡펄떡 뛰고도 잡고, 어깨가 들썩들썩 심쓰고도 잡고, 하여튼지 요상시러." "나도 그렁마. 저것을 보고 무장단이라고 허든디, 필시 우리 장단이 아닐껴. 우리 장단이야들으먼 덩실덩실, 두리둥실 춤추고 잡제 워디 그러간디." 소화는 장구를 놓고, 지전과 혼대를 들고 흐드러진 가락을 한동안 뽑았다. 그리고 지전을 두 손에 나눠들고 춤사위를 처음으로 펼쳐 보였다.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두 지전묶음이 허공에서 휘돌고 맴돌게 하며 몸은 느리게 앞뒤로 또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 단순한 듯한 몸놀림 속에서 지전다발만은 맘껏 꽃피움하듯 펼쳐지고, 비행하듯 수십 개의 꼬리를 파득러렸다. 두 팔을 벌린 조용한 춤동작은 마치 학이 흰 날개를 펼치고 느린 선회를 하듯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였다.
"와따, 너 이쁜 인물에 저 조신헌 춤솜씨 바라. 참말로 기맥히다." "지끔부텀 그리 탄복허덜 말어. 이따가 제석굿이 나오먼 워쩔라고 그려. 저것이야 맛뵈기제, 맛뵈기." "이 사람이 춤 볼지 멀 안당가. 저 눈 사르르 네레감은 인물보고 환장이제." "이눔아, 거저 뚫린 구녕이하고 막 내질르먼 다 말인지 알어? 이눔이 베락맞을라고 굿날 당골님 놓고 무신 잡소리여." 이지숙은 소화에게 눈길을 모은 채 남자들의 말에 웃음지었다. 여자의 눈으로도 소화는 탐나도록 신비롭고 고왔다. 이지숙은 물론 굿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었지만, 밥술깨나 뜨는사람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구에 의해 벌어지는 큰굿판에 꼭 손님굿이 끼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마마신을 위무하는 손님굿은 굿주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 누구에게닥칠지 모를 마마병을 예방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굿이었다.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면서도 이웃의 안위를 빌고 유대감을 가지려 한 삶의 슬기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었고, 굿판을 벌이자고 해도 경제적 능력이 없는 더 많은 사람들의 질시에 찬 감정을 해체시키려는 방편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소작인이 논두렁에 콩을 심고, 밭가장자리를 따라 고추를 심어도 지주들이 모르는 척하는 것과 동일한 성질의 문제로 그녀는 파악했다. 지주들의 그 행위는 퍽 관대한 것 같지만 실은 자기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소작인들의 숨통틔워주기의 교활이었던 것이다.
소화는 어느새 치장을 달리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한지고깔을 쓰고, 반소매 얇은장삼을 입은 위에 금박의 부적이 줄줄이 찍힌 손바닥 넓이의 빨간 띠를 오른쪽 어깨로부터왼쪽 아래로 엇지게 두르고 있었다. 굿을 주관할 제석님을 인도하여 모시는 제석굿의 시작이었다. 서장이 끝나고 본굿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지전을 두 손에 든 소화는 잽이들의 반주를 받으며 전보다 더 고조된 가락을 뽑기 시작했다.
"오시드라 오시드라 천황지석 일월지석 불의지석이 나려를 왔네 에이야아 에헤에 지것이왔네 에이야. 지석님이 오실 적에 해가 돋아 일광지석 달이 돋아 월광지석 낙산관악 제불제천 원불지석이 오실 적에 명줌치 목에 걸고 자손줌치 품에 안고 복줌치는 팔에다 걸고 산중지석이 나려를 왔네 에이야아 에헤에 지석이 왔네 에이야아......" 온갖 판소리 장단에다가 굿장단까지 합한 소화의 가락은 지전다발의 흔들림을 타고 하늘로 끝없이 솟기며 나부끼다가 느닷없이 쏟아져내려 땅 속으로 스며들다가, 출렁이고 내닫고 자지러지고 자지러지고 속살거리며 제석님을 맞고 있었다.
"저 맑음시로도 틉지고, 살랑기림스로도 짚은 저 소리 보소." 여자 노인네가 고개 장단을 맞추며 그윽한 얼굴이었다. "그 인물에 그 소리, 제석님이 홀까닥 반해 걸음이 바쁘시겄소." 옆의 노인네가 받았다. "아서, 아서, 제석님 귀가 을매나 볽다고." 먼저 노인네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락을 마친 소화의 춤이 시작되었다. 손님굿에서보다 한결 다양해지고 폭넓고 빠른 동작이었다. 소화의 휘돌이에 따라 두 개의 지전다발은 무수히 나부끼는 깃발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듯 하다가 멈추듯 반회전하며 손목꺾어 쳐올리면 지전다발은 활짝 피어나는 흰 꽃송이였다. 지전다발을 놓고 소화의 춤은 새로운 고비를 넘고 있었다. 발을 빨리 움직이되 쿵덕쿵덕 뛰는 법이 없었고, 버선발이 치마 밖으로 벗어나도록 발을 치켜드는 법도 없었다. 춤은 오로지 윗몸과 두 팔로 추어지고 있었는데, 장삼 자락의 펄럭임과 붉은띠의 나부낌이 두 팔의 뿌리치고 감아돌리고 휘어져 감기는 움직임과 조화되어 야하거나 천박하지 않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을 꽃피워내고 있었다. '제석'이라는 굿이름이 그러하듯 복장이며 춤이 승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소화는 몸부림치듯 흐느끼듯 하는 절절한 몸놀림으로 앉은춤을 추다가 바라를 들고 일어섰다. 팔과 손목의 동작에 따라 바라는 제각기 엎어지며 땅을 굽어보고, 뒤집어지며 하늘을 받치다가, 챵앙챵 차장챵 맞울어 인간고를 쫓고 있었다. 바라를 든 채 잽이들과 마주앉은 소화는 중사설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이 중은 근본 있는 중으로서 가실동봄등 춘추양등으로 동냥 다니는 중도 아니요, 법당 앞에 준양허는 화기중도 아니니 이 중에 근본을 잠깐 들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려. 중에 근본을 찾자면......" 긴 사설을 또랑또랑하고 생기넘치는 목소리로 숨도 쉬지 않은 듯 빠르게 늘어놓고 있었다.
"아이고메 총기도 존 거." "맨날 허는 것잉께 총기야 뒷전치고 저 또록또록헌 소리 들은께 속이 씨언허시." 여자들의 말이었다.
중사설이 끝나고 소화가 춤동작을 하며 일어서자 한 여자가 쌀을 시주했고, 그 쌀을 받은 소화는 손대소쿠리에 담겨 있던 쌀을 한 주발 퍼서 그 여자가 벌린 치마폭에 부어주었다.
여자는 황송한 듯 깊은 절을 했다.
소화가 굿상에서 명태를 들고 춤사위와 함께 가락을 읊어나가며 병풍에 붙은 지방을 차례로 떼내 소지를 했다. 흠향 넉넉히 하셨으니 조상님들은 먼저 가시라는 대목이었다. 그 대목이 다 끝나자 병풍 뒤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긴 작대기 끝에 칼을 매달아 굿상의 과일이며 떡을 찍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일이나 떡은 그 무게 때문에 반쯤 올라가다가 떨어져내리기 일쑤였다. 성공을 해서 떡이나 과일을 갖게 된 사람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서로가 그것을 가지려고 다투었으므로 찍어올린 사람이 꼭 갖는다는 보장이 없는 흥겨운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조상상에 놓인 제물에 한해 허용되는일이었고, 제사지낸 음식은 널리 나눠먹는다는 풍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음굿이 시작되면 중지해야 되는 놀이였다.
소화는 액맥이상에서 놋쇠주발 두 개를 양손에 들었다. 굿주의 자손들에게 미칠 액을 막고, 살펴달라는 액맥이굿이었다. 쌀이 소복하게 담긴 주발 가운데 초가 꽂혔고, 초를 감싸고 아들들의 나이만큼 감긴 실타래와 돈이 끼워져 있었다. 실타래의 크기로 보아 소화의 오른손에 들린 것이 정하섭이었다. 소화는 겉으로는 막힘없이 굿을 해나가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정하섭의 액맥이를 따로 하고 있었다. 막으소사 막으소사 온갖 액을 막으소사. 구액일랑 털어내고 신액대액 막으소사. 정씨 장손 가는 길에 천중광휘 다 비치어 신액대액 막으소사. 소화는 목이 메어옴을 느꼈다.
차일의 높은 기둥에서부터 덕석까지 필로 드리워진 무명에 한 자정도 간격으로 이십여 개의 홑매듭이 지워져 있었다. 그 매듭들 탓인지 길게 드리워진 무명은 천 같지 않은 무게감을 묵직하게 담고 있었다. 마침내 정현동을 위한 씻김굿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참이었다.
제석굿으로 흥겨워졌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고 있었다. 고깔이며 장삼을 벗어버린 소화는 처음의 모습으로 무명 끝을 잡았다. 이승에서 맺힌 고로 왕생극락을 못한 망자의 한을 풀어내리는 고풀이였다. "......불쌍헌 망제님 천고에가 맺혔는가 만고에 맺혔는가. 천고만고에 맺혔으면 천고만고 풀 것이요......" 진양조로 시작된 가락은 기구한 사연을 애절한 떨림소리에 실어 찬바람 속에 파문을 일구며 흘림가락으로 넘어가고, 흐르듯 유연한 춤사위가 문득 허공을 쳐올리면 매듭 하나가 풀리고, 쓰다듬듯 부드러운 춤사위가 문득 허공을 헤집으면 또 하나 매듭이 풀려나갔다. 팔이 허공을 가르며 난해한 선을 그려낼 때마다 맺힌 매듭이 풀려나가는 무명폭은 한을 토하듯 바람을 품고 공중에 뜨고, 끝없는 창공에 한을 다 삭인 듯 무명폭이 서서히 날려내리는 사이 망자의 편안해진 넋을 거두듯 이미 풀린 쪽을 접어나가는 자연스러운 연속동작은 절절한 가락과 어우러진 슬프고도 아름다운 춤이었다. 차일의 기둥에 묶인 매듭까지 다 풀어낸 소화는 무명을 두 손에 받쳐올려 하늘을 우러렀다. 그녀의 큰 눈은 먼 하늘의 별빛을 담고, 고풀이가 시작될 때부터 손을 맞비비기 시작한 낙안댁은 매듭이 풀릴 때마다 점점 빨리 비비던 손을 이제 모으고 소화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끓어 앉은 그녀의 볼에는 줄줄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병풍에 걸쳐졌던 망자의 옷이 내려져 돗자리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돗자리가 둘둘 말렸다. 다시 돗자리가 일곱 매듭으로 묵여졌다. 돗자리를 세웠다. 그건 망자의 몸이었다. 그 위에 머리를 상징하는 누룩을 올렸다. 누룩 위에 병풍에서 떼낸 넋전과 저승노자인 돈을 넣은 놋쇠주발인 행기를 올렸다. 행기를 솥뚜껑으로 덮었다. 영돈말이 곧 이슬털기의 준비였다.
망자가 왕생극락을 하려면 이승에 한을 남기지 않고 깨끗해야 하는데, 망자의 원한이 이승에 이슬이 되어 맺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그야말로 '씻김굿'이었다.
눈물을 훔치며 나온 낙안댁이 솥뚜껑을 잡았고, 다른 여자가 돗자리를 붙들었다.
"......불쌍한 금일망제 넋이 되야 오시고 혼이 돼 오셨으니 넋방에 모시고 혼방에 모시고 비린내도 가시고 단내도 가시게 씻겨서나 천도를 허옵시면......" 소화의 주문은 엄중머리가락을 타고 흐르며, 지전다발은 솥뚜껑을 쓰다듬다가 낙안댁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하며 춤사위를 그려냈다. 지전춤에 이어 지전다발과 함께 신칼을 들고 신칼춤이 한바탕 어우러졌다. 두개의 신칼은 서로 엇갈리며 허공을 가르다가 모아져 솥뚜껑을 다드락 두들기고는 했다. 놋쇠와 무쇠가 맞부딪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춤과 가락이 끝나고 씻김이 시작되었다. 쑥을 담근 쑥물을 빗자루로 찍어 솥뚜껑부터 몸체까지 씻어내렸다. 다음에 향을 담근 향물로 씨어내렸다. 끝으로 청계수로 씻어내렸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은 다음 지전다발로 솥뚜껑을 감싸 들었다. 그것을 하늘로 받쳐올리고 춤을 추었다. 행기를 내려 다시 청계수로 씻어 닦은 다음 뚜껑을 열어 넋전을 꺼내어 춤을 추었다. 주룩이 내려지고, 소화는 몸체를 받쳐들고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
줄기차게 노랫가락으로 주문을 외고, 쉼없이 춤을 춰가며 그 긴 예식을 지치는 기색 하나없이 치러내고 있는 소화를 지켜보며 이지숙은 오히려 자기가 지칠 지경이 이르고 있었다.
쌀이 수북하게 쌓인 소쿠리 가운데 혼대가 꽂혀 있었다. 혼대를 낙안댁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망자의 혼이 혼대를 타고내리면 혼대를 잡은 사람의 손이 떨리고, 망자는 무당의 입을 빌어 소원을 말하는 손대잡이였다.
지전다발이 혼대를 감싸돌고, 낙안댁을 휩싸고 돌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을 타고 주문이 흘렀다. 낙안댁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전다발은 더욱 격렬하게 바람을 일으켰고, 낙안댁의 팔도 따라서 심하게 떨려댔다.
"임자임자 나가 왔네, 임자 보러 나가 왔네. 엄동설한 설한풍에 오도가도 못험스로 망망창공 떠도는디 임자가 불러 요리 왔네. 이승 이별 하였으먼 저승길로 가야는디 내가 워째 막막창공 울고울고 떠도는지 그 연유사 임자 알제. 그 연유를 못 풀으먼 이내몸은 영겁토록 불망귀신 못 면허니 임자가 풀어주소." "말씸허시씨요, 말씸허시씨요. 무신 말이든 다 들을팅께 싸게싸게 말씸허시씨요." 팔을 무섭게 떨어대는 낙안댁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타게말했다.
"워메 용허기도 용헌 거. 저 눈 깜짝헐 새에 신내리게허는 것 잠 보소." "아니시, 고것보담도 저 목청 잠 들어보소. 영축웂이 정 사장 아니라고." 여자들은 끼리끼리 속달거렸다.
"듣소듣소 내 말 듣소, 이내몸이 죽어서도 저승길이 맥혀서나 암흑천지 망망창공 끝도 없이 떠도는 건 낫에 찍힌 비명횡사 그 까닭이 아니라네. 임자임자 내 말 드소, 듣고 나서 명심허고, 명심혀서 실행해야 이내 몸이 죄 면혀서 옥황상제 알현허고 왕생극락 원푼다네." "싸게싸게 말씸허씨요, 싸게싸게." "나가 죽은 그 연고가 나가 지은 죄업인디, 그 죄업을 안 풀먼은 왕생극락 못 이루네. 임자임자 내 말 듣소, 염전헐란 그 논배미 처분말고 두었다가 농지개혁 허거들랑 작인헌테 넘게주소. 그 죄업을 풀어야만 왕생극락 이루는디, 임자 맘은 워쩌는가. 나 소원 들을랑가." "하먼이라, 열 분도 약조허제라." "고맙고도 또 고맙네. 그 약조가 지켜지먼 이내몸은 죄업씻고 왕생극락 헐 것이네. 왕생극락 성취허먼 두루두루 집안살림 알뜰살뜰 자식사랑 저승에서 살필거니 걱정말고 평안하소. 가네가네 나는 가네, 임자믿고 나는 가네." "여엉가암!" 낙안댁은 벌떡 일어서며 두 팔을 뻗쳐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고, "여엉가암......" 흐느끼며 허물어지듯 덕석위에 쓰러졌다.
이지숙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꼼짝을 하지 않고 망자의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술렁거림에는 아랑곳없이 소화는 다음굿으로 넘어갔다. 낙안댁은 주체할 수 없이 터져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어금니로 물며 소화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서러움에 앞서 남편을 왕생극락부터 시켜야 했던 것이다. 망자의 모습을 한지로 오린 넋전이 낙안댁의 머리 위에 올려졌다. 지전다발로 그것을 달아올리면 망자의 왕생극락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손대잡이의 신내림과 함께 무당의 신통력을 판가름하는 굿이기도 한 넋풀이였다. 소화의 춤사위는 어느 때 없이 짧고 힘찼으며, 따라서 지전다발도 격렬한 몸부림으로 가닥가닥이 서로 엉키듯 쥐어뜯듯 하며 허공을 어지럽혔다. 그러기를 이십여 차례, 소화는 지전다발을 낙안댁의 머리 위로 가만히 내려놓고서, 잠시 머물러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화하! 하는 감탄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낙안댁의 머리 위에 놓였던 넋전은 간 곳이 없었고, 그것은 소화가 지전다발을 살랑살랑 흔들자 그 속에서 떨어져내렸다. 그 넋전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햐아! 하는 탄성이 다시 일어났다. 소화가 지전다발을 낙안댁의 머리로 내릴 때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이지숙은 이제 편안해져 있었다. 그건 전기의 원리였던 것이다. 지전다발을 세게 흔들어대 전기를 일으켰고, 그 힘에 동질의 가벼운 넋전은 끌어올려지게 되어 있었다. 손대잡이 신내림이 심리 최면인 것처럼. 그러나, 이지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식의 분석을 하고 있는 스스로의 어줍잖은 이성에 경멸을 느꼈다. 그건 자신의 부탁을 어김없이 들어준 소화의 노력마저 모독하는 행위 같았기 때문이다.
영돈말이 때의 돗자리를 펼쳐놓고, 망자의 옷 위에 넋전을 올려놓은 다음 당골 혼자서 그 옆에 앉아 장구를 동동 치며 회심곡 가락으로 굿을 꾸몄다. 왕생극락한 넋을 저승에 고하고,이승육갑과 저승육갑을 맞춰 넋의 거처를 정하는 희설이었다.
무명베를 두 사람이 큰방 쪽에서 대문 쪽으로 팽팽하게 잡고 섰다. 그 질배 위에 작은 꽃상여가 올려졌다. 남색 포장과 노란 몸띠, 포장 네 귀퉁이에 달린 흰 꽃술과 빨간 댕기, 빨간 실에 매달린 노랑 붕어-작은 꽃상여는 흰 무명 위에서 더욱 앙징스러웠다. 영돈말이 때쓴 행기를 써도 그만이었지만 소화는 일부러 정성들여 그 꽃상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성실은 어머니의 물림이었다. 망자가 극락으로 천도해가는 길닦음이었다. 낙안댁을 선두로 친척들이 줄지어 질배 위에 저승노자를 놓았다. 소화는 꽃상여를 나지막하게 들고 질배 위를 느리게느리게 움직이며 가락을 시작했다. 꽃상여가 질배 위를 왕복할수록 가락은 경쾌해져가고 있었다. 저승노자를 놓는 사람마다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구경하는 여자들도 춤을 추었다. 왕생극락해서 떠나는 망자에게 모두가 보내는 축하였다. 굿이 끝나가고 있었다. 꽃상여가 내려지고, 돈이 모아졌다. 질배 위에 망자의 옷을 올리고, 그 위에 꽃상여를 올려 질배가 접어졌다.
지전이 불붙어 타고, 넋전이 타고, 망자의 옷이 타고, 꽃상여가 타고, 그 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별빛들이 멀고 먼 어두운 하늘을 우러르고 홀로 선 소화는 징징 징을 울려대고 있었다. 굿을 막음하는 종천맥이었다.
떡을 나눠 받느라고 사람들이 일으키는 소란의 한구석에서 이지숙은 먼발치로 소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고운 여자가 간직하고 있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무엇일까. 내가 혁명에 쏟는 열정과 어떻게 다를까. 혁명이 성취된 땅에서 혁명은 저 여자가 담당하고 있는 몫까지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가. 스스로의 질문에 이지숙은 멋적게 웃었다. 무슨 까닭인지 소화를 아는 체할 수가 없었다. 이지숙은 소화가 일을 끝내고 돌아서는 것을 기다려 그 집 대문을 바삐 벗어났다.
굿을 치른 이틀 뒤였다. 소화는 이지숙과 마주앉았다가 의외의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즈그덜언 쩌그 삼구에 사는 사람덜인디라, 요분참에 굿풀이럴 잘혀주신 덕분에 살아나게 된, 그 논 부치고 있는 작인덜이구만이라." 소화와 이지숙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어지께 저녁참에 그 소문이 마실에 퍼졌는디, 하도 요상시럽고 얄궂어서 니나 나나 믿덜못허는디, 쌩쌩헌 논얼 염전 맹글겄다고 나선 그 독허고 징헌 인종이 아무리 불지옥 못 면허게 헹펜이 똥줄타게 급해졌다 혀도 그리 손바닥 뒤집대끼 회개헌 거이 요상시럽고, 설혹 이승에서 욕심 많던 그 인종이 저승에 가서도 왕생극락헐 욕심으로 그리 사설얼 깠다 혀도그 예편네가 그 말얼 그대로 지키겄다고 약조혔다는 거이 아무리 생각혀도 얄궂드라 그것이구만이라. 그리혀서, 헛소문이라도 존께 알아나보자, 허고 뜻이 뫼져 멫멫이 읍내로 나가 알아봉께, 워따 고것이 참말 아니드랑가요. 살판난 작인덜이 한바탕 얼씨구야럴 허고 나서 지정신덜 채레갖고 고것이 대체 워찌 된 연고인지럴 되작되작 생각혀봉께로, 고것이 바로 신통력 씨기로 소문 짜아헌 우리 당골님이 그 씬 신통력으로 그런 인종도 회개허게 맹그시고, 그 마누래도 개심허게 굿풀이럴 자알 혀주신 덕분이란 것을 알게 되얐구만이라. 우리덜 살레주신 그 음덕 갚을 질언 막연허고, 글타고 모른칙끼 입딲아뿌는 것도 사람도리가 아니라서 즈그덜찌기 쪼깐썩 쌀추렴혀서 떡 한 시루 해갖고 요리 찾아뵙구만요." 앞으로 나선 남자가 연습이라도 하고 온 듯 줄줄이 엮어댔다. 그 남자의 뒤로는 네 남자가 하나같이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서 있었고, 그 옆에 받쳐진 지게에는 커다란 시루가 올려져 있었다.
"멀라고 떡꺼정......" 얼굴이 붉어진 소화는 민망해하며 이지숙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기분좋은 얼굴인 이지숙은 소화를 빤히 쳐다보며 그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소화는 바로 얼마전에 이지숙에게 치하를 받은 데다 또 이런 일이 겹쳐서 마음이 흐뭇하면서도 쑥쓰러움을 이기기가 어려웠다.
"저어, 서로가 마음이먼 되는 것이제 살림살기 에로운 헹편에 떡은 멀라고 해오시고 그러신당가요. 지야 묵을 입도 많잖고 헌께 그냥 가지가서 아그덜헌테 갈라믹이씨요. 지야 묵은것이나 매일반잉께요." 소화가 조용히 말했다.
"아이고메 고것이 무신 당치않은 말씸이당가요? 절집허고 당골네집서 부지깨이 하나락도 입어내서는 십년 재수에 흉 낀다는 것 몰르시지는 않겄제라. 당골집 울안에 들어온 물건이야 응당 당골집 것잉께, 즈그덜이야 십년 재수 생각혀서라도 그리 못허겄구만이라." 남자는 능란하게 말을 받아내고는, "아, 멋덜 허고 섰냐! 싸게 떡시루 쩌그 말래다 안 내레놓고." 뒤에다 대고 버럭 소리쳤다. 뒤에 섰던 남자들이 황급히 지게를 잡는다, 떡시루를 내린다, 부산하게 움직였다. 소화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이지숙을 쳐다보았다.
"받아두는 수밖에 웂구만요. 들몰댁 아그덜 믹일 만치 냉게놓고 선생님이 가지가셔서 야학 학생들헌티 믹이먼 어쩌겄는가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까지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이지숙은 반가움을 표하고는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저는 야학선생 이지숙이라고 합니다. 아저씨들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아니구만이라, 지는 알어뵙구만요. 지 자석눔얼 갤차주시는디, 진작에 인사 못 여쭙고 여그서 불시에 뵌께 면목이 웂어서 그냥 몰른 칙끼 허고 있었구만요. 용서허시씨요." 한 남자가 허리를 구부렸다. "아, 그러세요. 학생 이름이 뭔가요?" " 야아, 지가 지점동이 애비구만요." "네에, 점동이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합니다." "아이구메, 그 멍청헌 자석얼 그리 말씸해주시니, 황송시럽구만요." 그 남자는 금방 얼굴이 환해지는 웃음을 담으며 또 허리를 굽혔다.
"선상님, 무신 허실 말씸이 있으신 것 아니었는가요?" 처음의 남자가 눈치빠르게 말했다.
"네에, 한 가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혹시 정 사장 문제로 잡혀들어간 분들 어떻게되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 해서요." "야아, 집집마동 면회럴 왔다갔다헌께 소식이야 듣는디,사람이 죽어뿌러논께 법얼 피헐 방도도 웂고, 옆에만 섰든 사람덜꺼지 싹 다 살인죄인으로몰린 것은 복통해 죽을 일이고, 재판만 기둘리고 있는디 고것이 깝깝헌 일이제라. 돈이 있으니 변호사럴 대겄는가요, 배운 것이 있으니 손수 나서 법얼 따지겄는가요. 옆에서 보기만 허자도 짠뜩 심이 들고 한숨만 나온다니께요." "혹시 그 일을 해결해보려고 오늘 떡을 해오는것처럼 서로 의견을 모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글씨요...... 그러덜 못혔구만요." 남자는 기가죽으며 말을 어물거렸다.
"제 생각으론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소작을 잃을 염려 없이 농지개혁을 받게 된 건 여기 당골님 덕이 큰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당골님이 그런 좋은 굿풀이를 할 수 있게 된건 정 사장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잡혀들어간 열두 분이 없었으면 여러분들께 오늘과 같이 기쁜 날이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열두 분은 정 사장을 그냥 죽인 살인자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논을 지켜주기 위해서 여러분들 대신 싸우다가 감옥에 갇힌 여러분들의 은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찌 여기에 떡을 해오는 것처럼 은인들을 구해낼 힘은 합치지 않는 겁니까. 여러분들이 그분들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굿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네들만 좋아하면서 여러분들의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때 여러분들의 가족들 심정은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하고 억울하고 낙담되어 세상 살맛이 나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쌀을 추렴해서 오늘 떡을 해왔듯이 모두 그분들을 수해내자고 굳게 마음을 모아 변호사 댈 비용을 장만하십시오. 농지개혁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형편에서 농지개혁을 틀림없이 받도록 되었는데, 쌀 한 가마니가 아깝습니까? 아니, 쌀 두가마니가 아깝습니까? 제 생각으로 쌀 한두 가마니씩만 모으면 첫 번째 재판의 변호사를 댈 수 있습니다. 재판은 첫 번째가 중요합니다.
분명히 정 사장이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변호사만 대면, 한 분은 어떨지 몰라도 다른 열한분은 틀림없이 살려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당장 변호사 비용을 모으세요. 그걸 모아가지고 야학을 운영하시는 서민영 선생님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세요. 그분은 발벗고 도와주실 겁니다. 저도 말씀드리겠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쌀 한두 가마니가 아까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멀쩡한 논에다가 바닷물을 끌어댄 정 사장보다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제가 진작부터 몇 분을 만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만나게 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이지숙은 팽팽한 눈길로 처음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말씸 듣고 봉께 즈그덜이 사람이 아니구만요. 즈그덜이 소견이 짧어 미처 생각허지 못헌것을 말씸해주셔서 고맙고, 그 말씸이 가심얼 찡허니 찔르는구만이라. 선상님 말씸대로 당장 일얼 꾸밀 것잉께 선상님께서도 뒤럴 잠 봐주시먼 좋겄구만요." 남자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네에, 아주 잘 생각하셨어요. 저는 얼마든지 돕겠어요." 이지숙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고맙구만이라. 글먼 즈그넌 이만 물러가겄구만요." 그들은 고개를 꾸벅거리고 돌아섰다.
이지숙은 또 하나의 성취감을 맛보며 남자들의 뒷모습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또 존 일하나 더 보태셨구만요. 선생님 맘언 워찌 그리 넘 위허는 디로만 열렸는지 몰르겄구만요." 소화의 조용한 말이었다. "남을 위하긴요,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생각하고, 틀린 것을 바르게 잡으며 사는 것이 사람으로 제대로 사는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작은 일일뿐인걸요." "워째 고것이 작은 일이당가요. 시상에서 질로 허기 심든 일이겄지요." "소화씨는 저보다 훨씬 더 남을 위해 사는지도 몰라요. 그 날 굿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무신그런 말씸얼...... 지는 선생님을 가차이험서부텀 요런저런 생각얼 많이 되작이게 됐구만요.
워찌 넘만 위허는 일에 저리 열성일끄나, 워쩌머 저런 맘이 묵어지는고, 나가 원제 저래본 일이 있는다, 나가 헛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얼 허다 보먼 선생님은 관음보살 현신맹키로 높아 뵈고, 지는 지 혼자만 배불리고 사는 벌거지맹키로 천해 뵈고 그렁마요. 워찌고런 귀헌 맘이 묵어지는 것인지, 좌익을 허먼 그리 되는가요?" 이번 굿을 치르고 나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하게 된 소화는 숨김없이 마음을 털어놓았다.
"소화씨와 저는 조금치도 차이가 나지 않게 똑같은 입장에 있는 겁니다. 이번 굿에서 제부탁을 들어준 게 바로 그 증겁니다. 저는 굿을 전혀 모르니까 그 일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지에 대해서도 또한 모릅니다. 그러나 소화씨가 한 일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건 제가 칠팔 년 동안 한 일보다 더 큰 성과입니다. 세상에 어느 당골이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겠어요. 그런 부탁을 선뜻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긴 소화씨는 이미 우리의 동지입니다. 그런 행동의 실천은, 억압받는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 그래서 억울하고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편이 되려는 자각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화씨는 앞으로도 계속 그 마음을 키워나가고 넓혀나가면 저와도 더 친한 동무가 될수 있습니다." 이지숙을 어느새 소화의 손을 꼭 잡고 말하고 있었다.
"저겉은 무당이 워찌......" "소화씨, 스스로를 자꾸 그렇게 낮춰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사람의 직업을 차별하거나 가리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린 기본출을 더 필요로합니다. 지금 전사들 중에 당골의 아들이나 백정의 아들이 얼마나 많고 그들이 또 얼마나 당당하게 투쟁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천대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열성으로 일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소화씨는 자각에 따라 벌써 그 일을 해냈고, 앞으로도 더둑 열심히 하면 됩니다. 소화씨의 그런 자각적 행동을 알면 정하섭씨도 아주 반가와하고 기뻐할 겁니다." 이지숙은 일부러 정하섭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아직 익숙하지 못할 소화의 감정을 생각해서 '동지'나 '동무'라는 호칭을 피했다. 소화의 얼굴은 금방 발갛게 물들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화가 정하섭을 얼마나 마음에 깊이 담고 있는지를 이지숙은 여자로서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안창민을 놓고 저럴 수 있는가. 이지숙은 고개를 저었다. 소화가 품은 농도에는 비교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소화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강해 자신이 마치 상처라도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이지숙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들몰댁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친정에 갔나요?" 이지숙은 일부러 화제를 바꾸었다. "친정에 우환이 생겼는디, 들몰댁 심으로야 워쩔 방도가 웂는 일이기넌 해도, 굿이 끝나고 해서 댕게오라고 혔구만요." "무슨 우환인가요?" 말이 이어져 다행이라고 이지숙은 생각했다.
"긍께, 두어달 전에 지주덜이 논 뒤로 빼돌리는 것 막자고 들몰 작인 수백 명이 들고일어난 것, 선생님도 아시제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소화는 그때서야 이지숙을 쳐다보았다.
"예, 알지요." "그 일에 친정동상이 주동헌 죄럴 쓰고 순천으로 넘어갔구만요." "그렇군요,그 사람들 속에 들몰댁 동생도 끼어 있었군요." 이지숙으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사우가 그런 디다가, 아덜꺼정 그리 되고 봉께 친정엄니 애태우는 것이 예사가 아닌 모양이드만요. 그 일이 워찌 될란지, 선생님은 멀 잠 아시고 기신가요?" 정하섭에 대한 감정이다 사그라진 소화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걱정들 안 해도 괜찮을 거예요. 좌익을 한 것도 아니고 소작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한 일이니까, 아마 얼마 안 가 풀려나게 될 겁니다. 큰 벌을 줄 수 없는, 억지로 만들어낸 죄니까요." 이지숙은 자신있게 말했다. "어서 그리 됐으먼 좋겄구만요. 갇힌 사람이나 기둘리는 사람이나 하로가 천 날일 것인디. 일정때나 지끔이나 말자리나 허고, 똑똑헌 사람언 죽기 아니먼 감옥살이니 원." 소화는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런 잘못된 세상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모두가 공평하게 사람대접을 받으며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예요. 이번에 소작인들을 돕게 되어 소화씨가 그렇게 기뻐했는데, 우리가 하는 일로 온 세상 소작인들이 전부 골고루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의 기쁨은 천 배, 만 배가 될 거예요." 이지숙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진득거렸다. 소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뭐가 어쩌고 어째!" 전화기를 잡은 백남식은 구둣발로 마룻장을 굴러대며 목을찢어내고 있었다. "요런 병신 같은 새끼야, 한 놈도 아니고 세 놈씩이나 행방불명이라니, 너 이새끼 그게 말이라고 아가리 놀려대는 거야! 당장 찾아내, 당장." "다섯 시간 이상 수색을했지만 못 찾아서 이렇게," "이새끼야, 아가리 닥치라니까! 너 마빡에 바람구멍 뚫리고 싶지않으면 그 새끼들을 꼭 찾아내. 그렇지 않으면 넌 당장 총살이야, 총살! 계엄하에서 부하를 세 놈씩이나 잃어먹는 너같은 새낀 직결처분이다, 직결처분! 내일 아침까지 다시 보고해." 백남식은 전화통이 깨져라 하고 수화기를 난폭하게 걸고는 숨을 헐떡거렸다. 이거야말로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기껏 병력보충을 받아놓고 작전개시를 하기도 전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재수없다는 생각과 함께 중사가 앞에 있다면 당장 쏴죽이고 말 것만 같았다. 말이 행방불명이지 다섯 시간 동안이나 그 좁은 바닥을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다면 그건 분명 계획적인 탈영이었다. 탈영이라면 그놈들이 어디로 갔을까. 백남식은 이 대목에서 암담해졌다. 그것들이 집으로 갔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직감은 불길한 쪽으로 쏠렸고, 아무리 반대쪽으로 돌리려 해도 돌려지지 않았다. 직감대로 그놈들이 적진으로 도주했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병력 잃고, 화력 잃고, 사기 잃고, 군기 잃고...... 잃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책임문제까지 뒤따르고 있었다. 여순반란 이후 일년 동안 장교와 하사관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숙군을 단행해 장교와 하사관의 기근현상이 벌어질 정도로 군부 안의 좌익을 뿌리뽑으려 했지만 사병들까지 그렇게 철저한 조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미 좌익의식을 가진 자, 좌익성향을 가진 자를 골라내기 위한 사병들의 동태파악과 좌익세력침투를 막아야 하는 건 작전에 앞서서 상하급 지휘관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런데 세명이 무기를 가진 채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적에게로 넘어가 이쪽을 공격하게 된다면, 병력보충을 받지 못할 경우 이쪽의 손실은 여섯 명 거의 일개분대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 이런 계산을 할수록 백남식은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또 무슨 사곱니까?" 권 서장이 백남식의 눈치를 살피며 들어섰다. "이거 참 골치아픈 일이 생겼소. 조성에서 세 놈이 탈영을 한 모양이오." "세 명씩이나요?" 권 서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섯 시간을 뒤져도 못 찾았다는데, 어찌 됐을 것 같소?" "글쎄요, 집단행동인걸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군요." 권 서장은 신경써서 자극적인 말은 피했다. "서장님 생각도 그렇다면 틀림이 없습니다. 이새끼들이 여태까지 숨죽이고 박혀 있다가 본격적인 작전이 개시될 눈칠 채고 적진으로 내뺀 겁니다. 요런 찢어죽일 새끼들!" 백남식은 두 눈에 세모진 각을 세우며 빠드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권 서장은 이 끝도 한도 없는 진흙구덩이같은 현실에 현기증을 느끼며 돌아섰다.
그들 두 사람의 예측대로 부대를 이탈한 세 명은 조성책 오판돌의 선을 따라 주월산을 넘었다. 세 사람 중에 둘은 작년 십이월에 염상진이 율어를 장악하고 첫 번째 조성을 공격했을 때 염상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염상진의 명령에 따라 다시 부대안에 잠적했고, 그 선은 오판돌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년 동안 오판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다가 노출 위험에 직면해 긴급조처를 요구했고, 오판돌은 부대탈출을 지시했다.
"위원장동무, 새 동지 한동일럴 소개드리겄습니다." "아, 한동일 동무, 어서 오씨요. 선얼 통해 보고받고 기둘리고 있었소." 오판돌이 힘차게 손을 내밀었다. 앳된 얼굴의 한동일이 왼손으로 팔을 받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한 동무넌 집이 워디고, 멫 살 묵었소?" 오판돌은 기운차게 팔을 흔들어대며 물었다. "집은 해남이고, 시물두 살이구만요." "장개는 갔소?" "안직......" "집안어런언 멀 허시오?" "농새꾼인디요." "아, 전사로서 아조 찍어낸 절편이오. 앞으로 항꾼에 피나는 투쟁얼 혀봅씨다, 한 동무." "열성으로 허겄구만요." 그때서야 오판돌은 한동일의 손을 놓았다.
오판돌의 힘이 넘치는 악수는 이미 부대 안에서 유명했다. 손아귀의 힘이 유난히 센 그는 상대방의 손을 우악스러울 정도로 힘껏 잡는데다가, 마구 팔을 흔들어대면서 한 매듭의 말을 하는 습관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손아귀에서 손이 구겨지는 꼴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악수를 제일 질색하는 사람이 안창민이었다. 그렇다고 악수를 마다할 수도 없는 일이라서 안창민은 그의 얼굴만 보면 미리 심호흡을 하며 손과 팔에 힘을 모았다. 그러나 손이 작은 안창민으로서는 매번 손이 구겨지는 기분을 떼칠 수가 없었다.
"오 동무 투쟁할 기운을 악수할 때 다 써버리는 것 아뇨?" 이해룡의 가시박힌 말에도 오판돌은 전혀 그 버릇을 고칠 눈치가 아니었다. "악수야 반가운 정 나누자고 허는 것인디, 그리 짱짱허니 잡고 짤짤 흔들어야 씨언허제, 헐렁허니 잡고 손바닥이 닿는지 안 닿는지도 몰르게 허고 마는 악수가 무신 악숩디여? 그럴라먼 허덜 말아야제." 오판돌의 말에 찬동하는것은 하대치였고, 염상진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하는 악수는 바로 '독립군 악수'였던 것이다. 생사를 걸고 싸우다가 다시 만나게 된 독립군들은 서로 반가움을 이기지 못해 그런 식으로 열렬한 악수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간도살이를 한 그의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거창한 이름의 악수는 차츰차츰 '빨치산 악수'로 부대 안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생사를 걸기는 독립군이나 마찬가지인 그들 사이에서 싱거운 악수보다는 그런 기운찬 악수가 더 동지애를 실감시켰던 것이다.
"여그, 총도 두 자리 더 갖고 왔구만이라." 오판돌 앞으로 총 두 자루가 불쑥 내밀어졌다.
"잉, 요것 에무왕 아니라고?" 오판돌은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하고는, "와따, 두 동무넌 더볼 것 웂이 영웅이요. 일 년 동안 적진 속에서 암약헌 디다가, 새 동지럴 포섭허고, 거그다가 요 존 에무와꺼지 두 자리썩이나 더 갖고 오는 공얼 세왔응께 말이오. 참말이제 장허요,장해. 총 한 자리가 사람 하나 택인 판에 두 자리나 더 챙게왔시니." 그는 M1 두 자루를 껴안다시피 하고 쓰다듬으며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셋에, 총이 다섯 자루나 생겼으니 그럴만도 했다.
"근디, 그짝 기운이 더 달라진 것 웂었소?" 오판돌이 총을 옆구리에 낀 채 물었다. "판이아조 급허게 돌아가고 있구만이라. 그 날짜가 원젠지는 몰르겄는디, 을매 안 있어 율어를 밀어붙인다는 소리가 뿌쩍 심해지고, 웃 사람덜이 부하 닥달허는 것도 달라진 것 봉께로 무신일얼 한바탕 벌리기는 벌릴 눈치드만이라." "알겄소. 애썼는디 푹 쉬씨요." 오판돌은 세 사람을 내보낸 다음 담배를 피워물었다. 안창민에게 보낸 선요원이 돌아올 때가 가까워져있었다. 지리산 일대에서는 벌써 새로운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지난번 회의때 들었다. 그 회의에서 군경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가 모아졌고, 그 결과 군경이 율어를 칠 계획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현재의 병력으로 군경을 막아낼 수 있느냐가그 다음 토의 사항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지구사령부 결성을 거친 군당 병력은 이미 그 전의 병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기를 주저하는 그 침묵이 바로 정확한 대답입니다. 현재 우리의 병력으로는 군경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군경의 작전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는 저 혼자서도, 이 자리에서도 결정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젭니다. 적들은 벌써 지리산일대에서 전투를 개시했고, 이제 지방별로 전투를 개시할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순병란의 주력은 주력대로, 각 지방당 야산대는 야산대대로 공격하겠다는, 왈 동계대토벌작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지리산 일대의 지방당 야산대들은 등뒤로 적을, 눈 앞으로 적을 두게 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해야 할 기본전략이 곧 당에서 하달될 것입니다. 그 전략을 바탕으로 우린 세부작전을 상황에 따라 세우게 될 겁니다. 우리 군당의 전체상황을 긴급보고하고, 당의 지시를 기다립시다." 안창민의 말로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회의소집이나 당의 지시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쯤은 무슨 소식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오판돌은 세 사람을 맞이하고 나자 마음이 더 급해지고 있었다. 날로 추위가 심해져가는데 지금까지 유지해온 공격상황이 수비상황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수비상황이 꼭 불리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의 상세에 따른 여건의 변화인 것만은 분명했다.
"긴급회의 소집인디요, 당장 뜨셔야 되겄구만요." 서너 시간이 지나 도착한 선요원의 보고였다. 오판돌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두 부하와 함께 어둠살이 내리는 산굽이를 타기 시작했다.
"도당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율어를 포기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안창민의 첫마디에세 사람은 긴장했고, "이는 앞으로의 투쟁방법이 전면적으로 달라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는 당분간 생산력이 중단된 해방구를 지키기보다는 적이 유발시킨 긴급상황에 대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라 당이 결정한 바는, 첫째 군당 전지역의 사수, 둘째 효과적 투쟁을 위한 읍.면당 단위의 독립투쟁입니다. 이 원칙 아래 지금부터 우리 군당의 투쟁조직을 의논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대치.이해룡.오판돌을 차례로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