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과학가공원 위치도
부락산을 나오니 부락산 앞에는 중국 고대 4대 발명품을 소개하는 중국과학가공원(中國科學家公園)이 보인다.
▶ 중국 춘절 폭죽놀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화약 발명과정을 소개하는 조각상들이다. 화약하면 지난해 설날이 지나고 며칠 후 중국을 여행할 때 도심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폭죽 소리가 제일 먼저 내 머리를 스친다. 거리를 지나가다 갑자기 터지는 폭죽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밤잠까지 설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터뜨리기 시작한 폭죽은 이제 새해 분위기를 더해주는 일종의 놀이가 된 화약의 발명은 도가(道家)의 연단술(煉丹術)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위진(魏晉)시대의 연단술사들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화학약품으로 실험을 거듭했는데 이러한 연단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화약의 발명과 연관성이 있는 화법연단(火法煉丹)이다. 화법연단은 물 없이 가열을 하는 방법으로 우연히 연단술사들이 질산칼륨과 유황 그리고 숯이라는 세 가지 물질을 혼합하면 폭발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병을 치료하는 약물로 여겨 '불이 붙는 약'이라는 의미로 '화약(火藥)'이라 이름 붙였다.
▶ 초기 화약 무기
화약이 전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당과 송의 교체기로 최초의 화약무기는 주로 화약의 연소(燃燒)성이 이용되었는데 1044년에 편찬된 증공량(曾公亮)의 군사병법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따르면 북송(北宋) 시기의 화약은 질산칼륨의 함량이 매우 낮아서 주로 적진을 불태우거나 연막을 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화약이 전통 화공전술 중에서도 방화 병기 범주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약 무기의 출현이 군사 역사상 커다란 혁명으로 바뀐 것은 화약의 주요 기능이 연소성에서 폭발성으로 넘어갔을 때다. 화약의 성능이 날로 높아지면서 이를 이용한 무기들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병기로는 강력한 폭발성 화약 무기인 벽력포(霹靂炮), 무쇠로 덮개를 만든 진천뢰(震天雷) 등이 있다. 아울러 손에 들고 사용할 수 있는 화통(火筒)으로는 대나무 통에 화약을 장전해서 발사하는 돌화창(突火槍)이 있다.
▶ 서양에서 화약무기가 대량으로 사용된 나폴레옹 전쟁
화약이 아랍을 통해 서양으로 전파된 것은 화약무기가 전쟁에서 사용된 후로 1234년 몽고가 금(金)을 멸망시킨 후, 그들은 금의 화약무기를 가져갔고 장인들을 대거 몽고 군대에 편입시켰는데 그 후 화약은 천천히 서양으로 유입되어 아랍과 유럽 국가 간의 장기전이 진행될 당시 유럽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전쟁을 통해 화약과 화약무기를 접하게 되었고 제조기술을 익혀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인들의 유럽 국가 간의 전쟁에서 화약과 화약무기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 만호비천상
공원 한가운데는 만호비천상 조각이 있는데 만호라는 사람은 명나라 때 최초의 우주항공 실험가로 그는 47개의 토법으로 제조한 로켓을 의자에 고정시키고 두 손으로 큰 연을 하나씩 잡고 로켓을 점화시켜 로켓의 추진력과 연의 상승력을 이용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실패한 모험가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의 생각과 실행력이 대단하다. 그런 도전정신이 오늘날 비행기와 우주선 등으로 발전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제지술을 보여주는 조각들
조금 내려오면 우측에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명한 제지술을 보여 주는 조각들이 보인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가 종이(紙)의 발명일 것이다. 서기 105년 채륜(蔡倫)이 발명한 종이는 인류의 기록 작업에 대변혁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나 종이 위에 자신의 생각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를 자신의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종이가 없었다면 과거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오늘날만큼 잘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 채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거북이의 등껍질과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甲骨文)과 청동기에 글자를 새긴 종정문(鐘鼎文)이 있었고 춘추(春秋)시대에는 죽간(竹簡)이나 목판에다 글자를 기록하였으며 전한(前漢)시대에 귀족들은 비단이나 부드럽고 얇은 천에 글을 기록했다. 죽간이나 비단 위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갑골에 비해서는 수월했지만 죽간은 무겁기 때문에 운반이 불편했고, 비단은 비싼 가격 때문에 일반인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가볍고 실용적인 필기재료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리하여 초보적인 형태의 종이가 등장했는데, 전한(前漢) 시대에 대마(大麻)와 모시로 만든 파교지(灞橋紙)와 한대(漢代) 유적지에서 발굴된 종이 지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재질이 매우 좋지 않아 기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이에 궁정 기물을 제조 관리하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직책을 맡고 있던 채륜(蔡倫)이 이전 제지술(製紙術)의 제조 경험을 바탕으로 종이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함과 동시에 필사에 적합한 식물섬유의 종이를 제조해 냈다.
▶ 종이를 만드는 과정
그의 제지술(製紙術)은 기본적으로 원료를 분리하고 세척하여 펄프 형태로 빻아 편편한 판에 고르게 펴서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현재 종이 제조법의 원시형태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지술은 끊임없이 개선되어 대나무 발을 이용해 펄프를 채취하는 방법으로까지 발전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종이는 이렇듯 오랜 연구 끝에 탄생한 위대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대한 종이도 문명의 발전에 밀려 뒷전으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20세기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과거 종이에 기록하던 수많은 정보들은 모두 디지털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미래학자는 머지않아 종이가 사라질 것이라고도 말했다. 과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종이가 사라질까? 서점에서 산 책 한 권과 인터넷에서 구매한 전자책의 느낌은 같을 수 없다. 아직까지 독서라는 행위는 책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책에서 나는 냄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할 때 더 온전하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독서를 독서로서 온전히 즐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종이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 활자 인쇄술을 소개하는 조각들
좌측에는 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모습을 소개하는 조각들이 있다. 종이와 먹의 발명에 기초해 수당 시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는 조판 인쇄술은 고대 돌이나 도장에 글을 새기는 석각(石刻) 방식으로 목판에 좌우가 뒤바뀐 문자를 양각(陽刻)하여 그 위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덮어 탁본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조판 인쇄술은 보통 수백에서 수 천 권까지 인쇄가 가능하여 문화 전파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책을 인쇄하는 데 수년씩을 걸리고, 인쇄판은 보관 공간을 많이 차지했으며 쉽게 형태가 변하고 부식되어 꾸준한 관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쇄할 양이 적고 중요한 책이 아닌 인쇄판은 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판 인쇄술의 여러 불편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발명된 것이 바로 활자 인쇄술이다.
▶ 활자인쇄술을 발명한 필승
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평민 출신인 필승(畢昇)이 발명한 활자 인쇄술은 조판 인쇄술의 불편함을 개선하고 보완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인쇄술이다. 그가 발명한 활자 인쇄술의 원리는 먼저 점토 위에 활자를 반대로 새긴 후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다음 활자판을 만들어 그 위에 배열하고, 활자판 위로 접착 성분의 밀랍을 발라 고정해 인쇄하는 것이다. 활자 인쇄술은 조판의 결점을 정확히 보완해 주었다. 충분한 낱개의 활자만 준비되어 있다면, 쉽게 활자를 조합하여 언제나 빠르게 인쇄판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다른 내용을 인쇄할 때는 기존 활자판의 활자를 떼어내고 재배치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어서 실용적이고, 보관도 용이했다. 이후 활자 인쇄술은 계속 발전하여 목판 활자가 발명되었다. 원나라 때 왕정(王禎)은 운(韻)에 따라 목판 활자를 체계적으로 배열해 필요한 활자를 아주 편리하게 찾아낼 수 있게 한 '회전자판법'을 발명함으로써 인쇄 속도를 더욱 배가시켰다. 활자 인쇄술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또 실크로드를 거쳐 이란과 이집트를 비롯한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중국의 인쇄술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현대 과학기술에 밀려 인쇄술이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인쇄술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다.
▶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 직지
우리나라의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 최고의 불경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지만, 그 원본이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 나침반 발명에 관한 조각들
마지막으로 공원 끝에는 나침반(指南針)을 발명한 것에 대한 조각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일 것이다. 이 시기 서양은 돛과 나침반의 힘을 빌려서 거친 바다를 항해하며 원거리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해 내며 서양의 경제를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서양 경제의 풍요로움은 중국의 나침반에서 비롯되어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사남이란 지남침
지남침(指南針, 나침반)이 정확히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대 중국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탁록(涿鹿) 벌판에서 전쟁을 벌일 당시, 안개 속에서도 사방을 분별할 수 있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치우를 무찔렀다는 고사(故事)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남침의 ‘지남(指南)’이라는 단어는 후한(後漢)의 저명한 과학자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赋)에서 처음 사용되어 지남차를 제작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제작방법은 전해지지 않고 송나라 때 이르러서야 당시 유명한 과학자인 심괄(沈括)이 그의 저서인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나침반의 발전과정, 유형과 원리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기록을 살펴보면 생산과 과학실험의 발전, 특히 항해와 무역이 발달하면서 나침반이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나침반이 전적으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음도 밝혀냈다. 이것이 바로 자편각(磁偏角)인데, 이로 인해 나침반의 방향을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 정화의 7차에 걸친 항해도
나침반의 발명은 군사, 일상생활, 지형 측량뿐만 아니라 항해에도 응용되어 주욱(朱彧)의 평주가담(萍州可談)에서는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고, 흐린 날에는 나침반으로 항해하였다(夜则观星, 昼则观日, 隐晦观指南针)”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것이 나침반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원나라 때에 들어 비로소 나침반은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초(初), 항해사 정화(鄭和)는 1492년 콜럼버스(Columbus)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1497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의 서해안에 도착한 것보다 반세기 앞서 서양을 항해했는데 그는 7차례나 원거리 항해를 하여 이를 칠하서양(七下西洋)이라고도 한다. 그 조직과 인원이 28,000여 명에 달해, 선박의 건조와 항해 기술은 매우 선진적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의 항해는 중국의 대외무역량을 증가시켰고 동서양의 경제와 문화교류를 촉진시켜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드높였으며 세계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는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나침반
나침반은 약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아랍을 통해서 서양으로 전해졌다. 아랍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나침반은 유럽에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의 나침반으로 발전하여 일본을 통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서양으로 전해진 나침반은 서양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마젤란의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 항해에 이르기까지 나침반은 세계 경제무역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간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여장을 챙겨 백마관으로 방통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