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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솔바람 속에 추억을 속삭이고
구본황
<내비>를 조작할 줄 아는 ‘싸모님’으로
길 안내원이 교체되다
둘째 날 주요 일정지인 남산지구를 마음 놓고 돌아보기 위해서는, 경주시 맨 북쪽에 있는 안강읍지구를 먼저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이른 아침 시간인 6시에 기상하였다.
이번 가족여행이 평소 가보기 어려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이고, 안강읍지구를 찾아가는 길은 대장님이나 나나 모두 초행이라, 이번에는 기 사모님이 앞 자리에 앉아 집에서 떼어온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며 길을 인도하게 되었다.
7번 국도를 달리다가 안강읍에서 28번 국도로 갈아탄 다음 마을길을 달리다보니 시골 마을 이름이 옥산리이고, 수백년 된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회화나무가 마을길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어서, 옥산서원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은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李齊閔)이 안강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이언적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선생의 옛집인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호) 아래에 사당을 세웠으며, 사액(賜額, 정부가 주요문화유산임을 인정해달라는 것)을 요청하여, 1574년(선조 7)에 조정으로부터 <옥산>이라는 간판과 수많은 서적을 기증받고, 각종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건축 양식은 전면에 공부하는 장소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축을 따라서 문루 · 강당 · 사당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모습을 보여 준다.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펼쳐진다.
정면에는 구인당(求仁堂)이란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의 동 · 서재가 있다.
강당을 옆으로 돌아서서 뒤로 가면 이언적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체인묘(體仁廟)라는 사당이 나타나는데, 사당의 주변에는 장판각(藏板閣, 책을 찍어내던 목판<나무판>을 보관하던 곳) · 전사청(典祀廳, 제사 집기를 보관하던 곳) · 신도비(神道碑, 선생의 생애를 새긴 비석) 등이 있다.
송곳으로 철판을 뚫는 김정희와
노한 사자가 되어 돌을 부수는 한석봉
이 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보물로 지정된 것만,
(1)<정덕 계유 사마방목, 조선 중종 때의 과거 시험 자료>,
(2)<삼국사기, 고려와 조선시대의 목판 자료가 망라되어 있는 삼국시대 역사 책>,
(3)<해동명적,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놓은 자료>,
(4)<이언적 수필 고본 일괄, 선생의 글을 정리해놓은 자료> 등
4가지나 된다.
16세기 영남사림파의 선구가 되는 이언적 선생을 모신 만큼, 조선 후기까지 경상도 선비 모임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제외가 된 유서 깊은 곳이다.
이런 서원이기 때문에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는 ‘송곳으로 철판을 뚫는 것처럼’ 힘찬 기상이 쏟아져 나온다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고, <역락문> · <무변루> · <구인당>의 글씨는 ‘노한 사자가 돌을 부수고, 목마른 준마가 샘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생명력이 약동한다는 한석봉의 숨결이 담겨 있어서, 건물들만 돌아다녀보아도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원을 나와 담장을 따라 걷다보니, 용추폭포 건너편의 울창한 숲과 세심대(洗心臺)라 새겨져 있는(1000원 짜리 지폐의 주인공, 이황의 글씨이다) 너럭바위가 건물과 잘 조화되어 있어서,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어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적토마의 꼬리가 잘려나가다
정혜사지 13층 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은 옥산서원에서 길 건너편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적토마에서 내려서, 주인공을 빨리 만나고픈 욕망에 앞 다투어 달려가다 보니, 대장님 차를 안전하게 주차시키는 임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열심히 탑을 보며 자신의 의견들을 내놓고 있는데, 뒤편에서 <부지직>하는 파열음 소리가 들려서 모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아뿔싸, 적토마가 쇠줄에 걸려 범퍼가 부서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라,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대장님께 위로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옛 절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층 기단(基壇, 받침대) 위에 13층의 탑신(塔身, 몸체)을 올린 독특한 모습이다.
1층탑의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신라 말기인 9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다양한 형식의 탑이 등장하는 고려시대 탑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되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푸른 솔숲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을 만나다
다시 형산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68번 지방도로를 타고 꼬리에 상처를 입은 적토마를 타고 달리다가, 나원리 5층 석탑(羅原里五層石塔, 국보 제39호)를 찾았다.
현곡면 나원리의 좁은 농로 길로 찾아가야 하는데, 차 한 대 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산저루 시골 마을 모습이, 저절로 눈앞에서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이탑은 역시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감은사지 삼층 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 석탑(국보 제38호)에 버금가는 거대한 규모(높이 8.8m)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끼가 침범하지 못하여,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백탑>이라 불려진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 · 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부의 지붕돌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백제탑의 영향이 느껴졌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 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었다.
안정된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경주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5층 석탑이다. (역시 백제탑의 영향이 느껴진다.)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하얀 살결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상쾌한 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고, 푸른 소나무 숲 속에 우뚝 솟아 있어서,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을 이별하고 돌아서는 아픔이 느껴져서인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옷깃을 스치면서 몸무게를 체크하다
백마식당에 돌아오니 어느새 10시가 지나서, 일행 모두 아침 숙제를 마쳤다는 뿌듯함은 있었으나 뱃속 사정이 다급하여, 가장 빨리 나오는 된장찌개를 시켜서, 허겁지겁 조식 겸 중식 식사를 하였다.
대장님은 그릇 채 들이키려는 듯, 다급하게 식사하는 우리 팀을 보고는 건강이 염려스러운지, 자신의 이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이모님은 올해 83세인데, 무려 34년 동안 투석하고 있다고 한다.
투석하는 사람은 자신의 호르몬으로 피를 세척해주지 못하여 끊임없이 치료받아야 하므로, 식습관에 철저한 주의가 필요해서, 만일 자신도 모르게 감 5개만 먹어도 바로 사망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10년 이상 투석하며 살아가기도 힘든 실정이라, 이모님은 세계적인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가 생각하기로는 이모님이 이렇게 오래 연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철저한 자기 관리>라면서, 그 분은 투석치료를 받지 못하는 날은 절대로 식사를 하지 않으며, 살갗에 스치는 옷깃의 감촉만으로도 자신의 몸무게 변동을 느껴 즉시 식사를 조절하신다고 말씀하셔서, 새삼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경주장 여관으로 돌아온 다음, 어제 밤과 같은 값으로 다시 계약하였는데, 온돌방이 비어 있어서 숙소를 침대방에서 온돌방으로 교체하게 되니, 선생님들이 모두 만족해하는 것이었다.
일행들은 새 방에 들어와서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나서, 오늘의 목적지인 남산지구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내비>는 그대로 부착하고 보조기사만 교체하여 출발하였다.
남산의 솔바람 속에 추억을 속삭이고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신나게 달려가는데, 첨성대 ․ 계림 ․ 월성 ․ 경주박물관이 차례로 얼굴을 내밀면서 오래전 수학여행의 추억을 속삭여주는 것이었다.
곧이어 야트막한 낭산(해발 115m)이 나타나자, 대장님은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주인공이 저곳에 누워 계시다면서, 사천왕사와 선덕여왕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신문왕릉 앞에서 남천을 건너면 바로 2004년 한겨울에 (1월 24일~25일) 우리산악회가 종주하면서 추억을 쌓았던 남산(南山)에 오르게 된다.
남산은 경상북도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솟은 산인데, 금오산(金熬山)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불교 유적이 많기로 유명하여, 흔히 <살아 있는 야외박물관>이라고 일컬어진다.
일반적으로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하는데, 산에 가까이 올수록, 2004년 우리산악회원들이 칠불암에서부터 포석정까지 솔바람을 맞으며 종주하였던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것이었다.
정상의 높이는 해발 494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km, 동서의 너비는 약 4km이어서 만만하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데,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나간 타원형이면서도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누어진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 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km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이 1.5km 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는데, 이 계곡들에 석탑 · 마애불 · 석불 · 절터 등이 무수히 흩어져 있고,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 · 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 쪽보다 월등히 많다.
또한, 남산은 소금강산과 마찬 가지로 신라 사령지(四靈地, 신라를 지켜주던 신들이 살던 신성한 곳,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화백회의가 이곳에서 열림) 가운데 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하며, 남산에 얽힌 전설도 다양한데, 그 중 하나의 예를 든다면, 헌강왕 때에 남산의 산신이 현신하여,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고 한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며,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은 호국의 보루로서 존중되었고, 불교가 공인된 528년 이후에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음을, 많은 유물 ․ 유적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전체가 사적지(사적 311호)로 보존되고 있고, 2000년 12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부부는 목적지도 모르며 걸어가는 동행자
동남산 쪽 마을길로 접어들자 화랑교육원, 통일전, 서출지(쥐가 소지왕의 목숨을 건져준 곳)가 차례로 나타나고, 남산동 탑말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입구에 남산리 3층 석탑(南山里三層石塔, 보물 제124호)이 의좋은 자매처럼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형식이 다른 쌍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연상케 하는데, 쌍탑가람(두 탑이 나란히 서 있는 절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라고 한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반하여, 서탑은 전형적인 3층 석탑의 양식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서탑의 기단부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 불교를 지켜주는 천신, 용신 등 8대 신)을 새겼는데,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전성기)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표현이라고 한다.
쌍탑의 배웅을 받으며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칠불암을 찾아 나섰는데, 소나무 숲이 우거진 장장 1,890m의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의 이런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77세 할머니>교장 선생님은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꿋꿋이 돌길을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대장님은 우리 산악회의 옛 추억을 속삭여주는 솔바람 소리를 듣자 감회가 깊은지 기 선생님 선친께서 지은 시를 암송하셨다.
‘부부는 목적지도 모르면서 걸어가는 동행자이다. ……’
요즈음 아내와 갈등을 겪다보니 새삼 실감이 나는 구절이 아닐 수 없었다.
부부는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소중한 추억을 함께하며 자라온 것도 아니고, 서로의 성장에 디딤돌 노릇을 하면서 은혜를 주고받아 온 것도 아니다.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가정을 이루며, 자식을 키우고 가계를 힘겹게 꾸려나가면서 아등바등 살아왔으니, 살가운 정이 항상 느껴지기 어려운 사이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 고충을 서로 나누고, 공부나 운동, 취미생활, 종교 생활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아낄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나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초승달처럼 가녀린 미소를 띠고 있는 시골 처녀를 만나다
칠불암(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 국보 제312호)은 봉화골 정상부근에 위치하여 있는데, 뒷산 봉우리가 바로 남산 가운데 가장 높은 고위봉(해발 494m)이어서 시원스런 전망이 일품이다.
대장님의 권유로 기 선생님과 앞서 올라갔는데, 샘물터를 지나 대나무 숲을 구불구불 올라가니 마애삼존불과 사방불의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우리를 반겨 맞아주시는 것이었다.
달음질하듯 올라가서, 교장 선생님 일행이 올라오는 시간 알아맞히기 내기를 하였는데(일행은 마을에서 11시 50분에 출발하여 12시 51분에 올라왔다), 결과적으로 기 선생님이 훨씬 정확하여, 함께 한 경험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기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과 10여 년 전 영등포여고 시절부터 많은 경험을 함께 나누어왔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가파른 산비탈을 깎고, 높이 4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만든,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들이다.
병풍바위에 새긴 삼존불과 사각 돌기둥에 새긴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으로, 모두 칠불(七佛)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래좌상(앉은 모습)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는데, 본존인 여래상은 석굴암 본존불처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로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앉아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양쪽 협시보살은 입상(서 있는 모습)인데, 오른쪽 협시보살은 오른손에 보병(寶甁, 감로수가 들어있는 병)을 들었고, 왼쪽 협시보살은 왼손에 연꽃을 어깨까지 들어 올리고 있는 독특한 모습인데, 초승달처럼 가녀린 미소를 띠고 있어서 시골 처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삼존불상을 새긴 바위 앞에 있는 사각 돌기둥에는 각 면에 사방불을 새겼는데 각각의 불상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의 보살상은 본존불을 향하고 있고, 손 모양이 제각기 다를 뿐 아니라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은 모습이라, 신라 중대(전성기)인 8세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우리 일행이 어제 십일면 관음상 보물찾기 게임을 하였던 굴불사지 석불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불상들이 반듯한 축대 위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기와 조각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원래 이 자리에는 법당이 있었으리라.
우리 일행은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跏像: 보물 제199호)을 찾았다.
전망이 워낙 좋아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칠불암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여성 사진동호회원들이,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머리에 삼면보관(3면을 장식한 보석으로 장식한 모자)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는데, 오른손에 꽃가지를 들고 유희좌(반가, 한쪽만 책상다리하고 앉은 모습)한 독특한 모습을 하는,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기 사모님이, 마치 수미산 부처님 세계 같은 칠불암에 올라 많은 감명을 받으신 듯, 기와불사 시주(절에 기부금을 내면, 절에서는 기와에 기부자 이름을 새겨 행복을 기원해주는 일)를 하시자, 주지스님도 다과를 권하면서, 우리 일행에게 멋진 그림엽서를 선물하는 것이었다.
“무릎이 쉬고 싶다고 조르니, 달래 주어야지.”
칠불암에서 오래 머물다보니, 다시 산을 내려가서 역시 동남산 쪽 통일전 옆에 있는 정강왕릉(사적 제186호)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기우는 3시 30분이나 되어, 일행의 마음속에는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정강왕은 신라 하대(쇠퇴기)에 <당나귀 귀>의 전설이 있는 경문왕의 둘째 아들인데, 유명한 궁예의 이복형제이고, 진성여왕의 오빠로 알려져 있다.
정강왕릉은 혼란한 시기를 반영해주는 듯, 2단 호석으로 봉토 주위를 간략히 두른 모습이라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강왕릉에 인접한 헌강왕릉(사적 제187호)은, 대장님의 충고대로 적토마를 타지 않고, 소나무 숲길을 걸어 찾아갔다.
칠불암 산길을 다녀오시느라고 사실상 탈진 상태에 빠진 교장 선생님은,
‘칠불암에 다녀온 뒤, 무릎이 쉬고 싶다고 조른다.’
라고 유머 넘치는 말씀을 남기고 적토마로 돌아가셨는데, 대낮 산길에서 <험한 칠불암 산길을 기어코 오르고 말겠다.>고 다짐하였을, 선생님의 불꽃같은 의지력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헌강왕릉은 4단 호석(무덤 둘레 돌)의 굴식 돌방무덤(굴처럼 입구가 나 있고, 내부에 방이 있는 무덤)이라고 적혀 있어서 입구를 찾아보려고 우리 일행들은 뱅글뱅글 돌았으나 물론 찾을 수가 없었다.(굴식 돌방무덤은, 입구만 찾으면 도굴꾼이 일사천리로 무덤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구 표시를 해놓았을 리가 없겠지요)
칠불암을 내려와서는 동남산 쪽 유적들을 마을길을 따라 북쪽으로 죽 훑으면서 탐방하기로 하였는데, 화랑교육원 ․ 산림환경연구원을 지나 갯마을 마을길을 숨바꼭질하며 찾아가니, 최신 사찰인 보리사가 있었다.
이곳에 보물 제136호인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慶州南山彌勒谷石佛坐像)이 있다.
미륵곡 석불좌상은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데, 연꽃 모양의 8각형 대좌(불상이 앉아 있는 돌)에 앉아 있는 석가여래좌상 뒤 광배(불상 뒤에 있는 돌)에는 약사여래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그런데 그윽한 미소는 살아있으나, 가슴의 볼륨감이 줄어들어 있고, 하체도 딱딱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법의(부처님이 입은 옷)도 힘없이 늘어진 모습이라, 8세기 신라의 영광이 기울고 9세기의 황혼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여, 쓸쓸함이 느껴졌다.
대나무 터널을 지나가서 선덕여왕을 만나다
다시 미륵곡 마을 북쪽에 위치한 탑골 마을로 적토마를 달려가서 마을 옆길로 들어서자 길이 끊기고, 옥룡암이란 사찰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찰을 지나 조금 산길을 올라가니 언덕 위 큰 바위에 무려 34구의 부처, 보살, 인왕상(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는 이 골짜기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 보물 제201호, 별명 부처바위)인데, 9m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曼陀羅, 여러 부처와 보살을 그린 그림)그림처럼 조각한 특이한 마애석불들로, 신인종(神印宗) 계통의 사찰에 딸린 유적으로 추측된다.
신인종은 밀교 계통의 종파로서 7세기 중엽 삼국통일기에 성행하였는데, 이 유적이 신인종의 영향을 받은 증거로는,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고, 불상이 천진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눈가에 웃음이 어려 있는 점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8세기 이후에는 입가에만 웃음이 있다)
탑곡 마애조상군의 조각을 보면, 북쪽(정면)에 황룡사9층탑으로 추정되는 목탑(건물 모양으로 세운 거대한 탑, 원래 삼국은 이런 식으로 탑을 세웠으나 모두 불타서 오늘 날 전해지지 않음)과 7층 목탑이 석가여래좌상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서 있고, 동쪽에는 부처를 에워싼 보살들이 늘어서 있으며, 남쪽(후면)에는 인왕상이 버티고 있는데, 소박해 보이는 3층 석탑이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어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유적이다.
탑 골짜기를 지나 동남산 쪽 가장 북쪽에 위치한(경주 시내에서 남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처님 골짜기를 찾아가니, 이미 땅거미가 지는 것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드리우는 이곳에, 또 하나의 보물 <할매 부처>님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면 대나무 터널을 지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허리를 따라 펼쳐진 자연암반 아래에서 할머니를 뵙게 된다.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 보물 제198호)은 자연암반을 파서 감실(부처님을 모신 방)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등신대(사람 크기만 한 부처님)에 가까운 좌불상을 안치한 유적이다.
보살상인지 여래상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다소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보통의 남성부처님상과는 전혀 다르게, 자연스러운 한국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 점에 주목하며 불상 조성을 명령한 선덕여왕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불상은 장창골 애기부처, 배리 삼존불과 함께 남산에 남아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7세기 전반(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여왕의 얼굴>이라는 의견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두건을 쓰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여성의 모습인데, 기 선생님은 눈을 감고 있다고 우겨서 일행들은 모두 웃었다.
할매 부처를 보고나니 어둠이 밀려들고 있어서 더 이상 유적을 탐방하기 어려웠다.
꽃 목도리를 두른 보살의 환영을 받으며
애기 부처를 만나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으로 경주 배리 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을 뵙고 오늘 숙제를 마치기로 하였다.
배리석불입상은, 고등학교 국사 책에도 나오는,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문천 주변에 있는 마을길로 남산 건너편(서남산 쪽)으로 찾아가는데, 박혁거세의 전설이 살아 있는 나정, 경애왕이 비극이 숨어 있는 포석정 이정표가 차례로 나타났지만, 어둠 속에서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배리석불 표지가 보이지 않아서,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뒤에 계신 기 사모님께서 삼불사 이정표를 발견하고는, 119신고를 하듯, 벼락같이 지적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배리석불은 선방골 삼불사 근처에 있었는데, 조명장치까지 갖춘 전각 속에 보존되어 있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둠 속이라 전각 안팎을 아무리 서성거리어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어서 모두들 탄식하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불이 들어와서, 우리 일행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배리 석불은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는데,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 세분의 부처, 보살님을 나란히 모신 불상)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아미타불(기독교의 천당에 해당하는, 극락을 다스리는 부처님으로, 이 부처님을 생각하며 착한 일을 하면, 모두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함)인데, 어린아이 표정의 풍만한 네모난 얼굴이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보여주고 있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불균형인 체구 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어서, 친근한 <애기 부처>라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천주교와 비교하면 성모 마리아에 해당하는, <사랑>의 화신 같은 분)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서, 입체감이 두드러져 보였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는 작은 부처님이 새겨져 있어서, 신기하였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잔잔한 미소를 풍기며 꽃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 우리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듯하여, 반가운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것이었다.
배리석불은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담겨 있어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데, 대장님은 이 문화재가 곧 국보로 지정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애기 부처>까지 탐방하게 되니 모두들 만족하여 또 다시 <숙제 끝!>을 외치며 환호하였는데, 교장 선생님은 따끈한 커피와 크래커를 하나하나 챙겨주셔서 모두들 불끈불끈 힘이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김치찌개 하나 더 주세요.” 속에 저물어간 둘째 날 여행
어둠을 헤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숙소가 가까워오자 은근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호주머니를 뒤져도 209호실 숙소 열쇠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일행들에게 <열쇠 분실의 고민>을 자백(?)하였더니, 기 사모님이 카운터에 놓고 나온 것이 아니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한 방 먹은 어색한 표정 짓는 것을 흘깃 훔쳐본 대장님이, <치매 초기>라고 핀잔을 주시자, 모든 일행이 까르르 웃었다.
백마식당에 7시 경, 이번 여행 중 거듭 세 번이나 들어서자, 식당 아주머니들이 웃으며 반겨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끈질기게(?) 한 집을 연달아 방문하는 여행팀도 드물었으리라!
우리 일행은 그간 이 집에서 먹은 경험을 살려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동태찌개를 시켰다.
그런데 기 선생님이 혼자 늦게 도착하자, 장난기가 발동한 대장님은, 평소에 기 선생님이 돼지고기를 좋아하여 김치찌개를 자주 주문하였던 것을 생각해내고는, 조용조용,
“기 선생, 우리는 모두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뭘 시킬까?”
하고 물어보니, 기 선생님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떠나갈 듯,
“김치찌개 하나 더 주세요.”
하고 큰 소리쳐서,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2010년 4월 22일 적음)
첫댓글 친구의 유적 답사기를 읽다보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내가 한참 역사공부를 할때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하고 고민을 했었는데 친구가 연재하는 글을 보니 의문점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찬란한 문화유산을 직접찾아 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느끼며 체험을 통해 배웠어야 했는데 이를 단순히 암기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역사공부가 어려웠다는 것을 깨닭게 되는군요. 이언적의 <독락당>하면, 이런곳이라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책을 벗삼아 홀로 즐길 수 있겠구나 하고 느끼면서 역사공부를 했으면 쉬웠을텐데 하고 그런 느낌도 드는군요.
좋은 말씀입니다^^* 억지로 암기 공부로 역사를 살펴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직접 좋아서 찾아가 살펴보고,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가꾸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에서 친구혼자만 가니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 보군요? 지금 까지 한번도 가정사에 대하여 얘기 한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처음으로 털어 놓은 것 같습니다. 부부가 갈등을 겪지 않고 산다는 것 참 어려운것 같습니다. 부부는 서로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서로가 이해를 하지 않으면 항상 평행선을 긋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운동이나 취미생활이 같고 여행도 항상 동행할 수 있다면 동질감도 느끼고 좋을텐데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부부간에 겪는 갈등 서로가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여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여행이나 등산을 다니다가, 아내는 체력이 유지되지 않고, 가정사에 매이다 보니, <동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갈등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제가 좀더 배려하고 노력해야 할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