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빛 노을이 지다
-김여정 선생님을 추모하며
주경림 시인
선생님, 지금 청옥빛 하늘에
구름 문양과 별꽃 스팽글들이 영롱한 시를 쓰고 계시지요
언어의 거울로 지상에서의 고통과 슬픔을 걸러내고
남겨진 숙제 하시느라 여전히 바쁘시지요
“시인은 죽을 때까지 현역이어야 한다”
고 하셨던 선생님,
네 자녀의 어머니, 30년 동안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시며
치열하게 시를 쓰셨지요
열다섯 권이 넘는 시집과 시선집, 수필집들을 발간하셨지요
“시인은 죽어서도 현역이어야 한다”며
‘시인의 말’을 바꾸셨겠지요
1969년, 사인해 주신 시집 『화음』을 받고
단발머리 여중생은 얼마나 기뻤던지요
“그건 꽃망울 버는 소리
그건 연잎자락에 물방울 구르는 소리---”
밤새워 읽은 첫 시집, 첫 문학 수업으로
시의 씨앗을 심어 주셨어요
세상의 흐름대로 떠밀려 살던 제가
이십 년 만에 첫 시집을 들고 찾아뵈었지요
늦깎이 등단을 축하해 주시리라 잔뜩 기대했는데
웬걸, 대뜸 큰 목소리로 나무라셨어요
“제대로 공부도 안 하고 가정주부가 이제야 시를 쓰냐,
이 땅에는 시인이 너무 많아.”
저는 귀까지 빨개져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어요
그날, 막국수를 사주시며 『해연사』를 건네주셨어요
「새벽 바다」에서 「아득한 하늘」까지 날아보다
「눈물의 우주 ―해연사 예순 여덟」까지 보고 말았어요
“너는 커다란 눈물 방울/ 가슴의 작은 문 하나만 열어도
넘치는 바다가/ 엎어져/ 퍼렇게 갈라진 등을 보이는
눈물의 우주이다./ 너 눈물새는.”
거칠 것 없는 화술과 호탕한 웃음으로
늘 좌중을 압도하셨던 선생님이신데
겉모습과는 다른 속내, ‘눈물의 우주’를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어요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2003년) 인터뷰를 위해
하남시 창우동 동부아파트를 방문했지요
정년퇴직한 후 ‘하남문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활동 중이셨어요
보랏빛 벌개미취꽃 향기가 코를 간질이는
잘팍잘팍한 둑길을 선생님과 걸었지요
늦가을이지만 푸르게 우뚝 서 있는 검단산,
제게는 선생님이 바로 검단산이었어요
버스를 태워주고 내리는 곳도 다시 일러주며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어요
선생님에게 저는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지요
<김여정 팔순 기념 시선집 출판기념회>(2012년)때
「이제는 섭섭한 것도 아름다워라」를 낭송했어요
그 이후에는 차차 청력을 잃고 보행이 불편해지셔
문학 모임에서는 뵙기 어려워졌어요
팔순 출판 기념회가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큰따님 유한나 시인이 어머니의 구순을 기념해
모녀 시선집 『풀꽃 목걸이』(2022년)를 엮었어요
감히 축사를 쓰게 된 저는 이렇게 축하드렸지요
“나에게 있어 문학은 ‘올레길’이요 ‘차마고도’라고 말씀하신대로
쉬지 않고 걸어오신 삶과 문학의 길을 계속 가시어 우리의 마음을
보듬어 주시고 건강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작년 8월(2023년), 편도선암으로 투병 중인 선생님께서
특별히 제게만 방문을 허락하셨어요
저를 보자마자 하신 첫 말씀,
“야, 늙은이가 죽고 싶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나는 더 살고 싶어”
수척해졌지만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여전하셨어요
지난 3월(2024년), 한 번 더 찾아뵈려 했는데
멀다 하시며 따님을 만나보라 하셨어요
대학로에서 만난 따님, 유한나 시인 손에는
본인 시집 『바람개비 도는 꽃길 언덕에 서 있네』 와
한국여성시인 시선집 『너를 위한 노래』가 들려 있었어요
김여정 김후란 신달자 유안진 최금녀 허영자 선생님들의 시를
따님이 엮었으니 대단하지요
선생님께서 꼭 밥 사주라고 점심값을 주셨데요
그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회덮밥을 먹었어요
5월15일(2024년) 스승의 날,
무심한 제자가 선생님의 병세가 위중해진 줄 모르고
카톡으로 한가한 소리만 늘어놓았아요
하트 세 개와 함께 보내온 메시지에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병원인데 우편물이 쌓일 것을 걱정하셨어요
문학단체 몇 군데에 우편물 거절을 부탁하셨어요
김여정 선생님과의 마지막 교신이 될 줄 이야,
6월 3일(2024년) 김여정 선생님 카톡,
임종실로 옮겼고 근일 내 영면에 드실 것 같다는
며느님 메시지였어요
6월 4일(2024년) 선생님을 배웅하러
강동 경희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어요
여전히 고운 모습의 영정사진이 웃으며 맞아주셨어요
담임반 중학생으로의 인연이 훗날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며 선생님의 시 「인연」을 떠올렸어요
사랑의 햇풀 무성한 선생님 가슴에
천년을 시들지 않을 「풀꽃 목걸이」를 걸어 드렸지요
능소화 꽃이 피고
능소화 꽃이 지고
계속 또 지고 피는
그 그칠 줄 모르는 절절한 그리움
그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기다림
능소화 빛 노을 앞에 선
내가?
하늘 저 멀리 외기러기 한 마리
아득히 사라지고 있다.
선생님의 시 「능소화」로 작별 인사를 드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