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년 5월, 고구려 연남생의 장남 연헌성이 장안에 갔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군대를 당에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 태종의 3차례에 걸친 공격을 막아낸 연개소문이 죽은(664년10월) 지 1년7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연헌성이 장안에 가고 7개월 흐른 666년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원산 12개성을 갖고 신라에 투항했다. 668년 9월21일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됐다.
수, 당과 맞짱을 뜨며 동북아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 700년 사직은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다. 연남생이 평양을 비운 사이, 그의 동생 남건과 남산이 반기를 들고 중앙을 차지하자 세가 불리했던 남생이 당군을 끌어들였다. 연개소문이 죽으며 세 아들에게 남긴 “너희 형제들은 물과 고기처럼 화목하여 벼슬자리를 다투지 말라”는 遺言은 流言이 되고 말았다. 내가(남생 남건 남산 연정토) 살기 위해 백성을 헌신짝처럼 버린 滅公奉私(멸공봉사)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춘추의 滅公奉私와 경순왕의 滅私奉公
신라 김춘추는 648년 12월7일, 장안에서 당 태종을 만났다. 당군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그의 무능한 사위 품석(대야성주)이 642년 7월(음력)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그의 딸, 古陀炤娘(고타소랑)과 함께 죽임을 당한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품석은 지휘관 능력이 없던 데다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인 黔日(검일)의 아내를 빼앗는 등의 만행으로 민심을 잃어 패배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사랑하던 딸(과 사위)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했다. 신라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목숨을 걸고 고구려로 군사를 구하러 갔다. 별다른 소득 없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뒤에는 왜에게도 갔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곳이 당이었다. 김춘추는 태종에게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기에 앞서 백제를 치는 것이 어떠하냐”고 건의한 뒤 “신라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당의 것으로 바꾸겠으며 그의 아들인 문왕을 태종의 숙위로 임명해달라고 청했다.” 훗날 단재 신채호는 “김춘추는 조선에 사대주의 병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며 “다른 민족을 들여와 동족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김춘추의 청병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마의태자와 문무백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받친 것과 크게 대조적이다. 신라의 天命(천명)이 다 됐다는 것을 깨닫고, 무력 저항 대신 평화 항복을 선택한 것은 나(신라왕실과 경순왕 자신 및 지배기득권층)보다 백성을 더 생각한 멸사봉공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보다 나를 더 중시했던 선조와 김일성
김춘추의 멸공봉사의 나쁜 사례는 선조와 김일성에서도 되풀이됐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明에 원군을 요청했다. 비록 豊臣秀吉(풍신수길)의 불법침략인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지만, 선조는 명군에 지나치게 저자세였다. 심지어 자기 혼자만 살기 위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압록강을 넘어 명에 歸附(귀부) 하려고까지 했다. 명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선조는 죽음을 불사하고 백성과 함께 싸우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대신, 오로지 자기 왕 자리만을 유지하기 위해, 연전연승으로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켜내고 있는 이순신마저 ‘명령불복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고까지 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군을 끌어들여 6.25전쟁을 일으켰다. ‘무력으로 남한을 공격해 공산혁명을 마무리하겠다’는 그의 망상으로 배달겨레와 한반도는 3년1개월 동안 죽고 부상당하고 철저히 파괴됐다. 일어나서는 안 될 그 전쟁으로 외세로 잘린 허리엔 무시무시한 철조망 멍에가 덧씌워졌고, 아들과 아버지는 원수가 됐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한국 중국 베트남 등을 침략한 범죄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서, 오히려 미국의 대대적인 도움으로 부활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불법적으로 무력합병한 책임을 지지 않고, 강점기 동안 무수히 동원한 징용과 성피해여성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며,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억지 쓰는 遠人은 김일성의 남침이었다. 6.25전쟁이 없었으면 일본의 부활을 쏘아올린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그렇게 부실하게 체결되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은 더 떳떳하고 강력하게 일본의 책임을 물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꾼들의 사기
27년 전 하늘로 소풍 떠난 先妣(선비)가 지병인 천식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약 △△기기를 드리겠읍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마워 어쩔 줄을 몰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몇 분 지난 뒤 원무과에서 진료 및 약값을 낼 때 억울했다. ‘…드리겠읍니다’라는 의사의 말을 ‘공짜로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의 촌놈의식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긴 듯하다. 주식 투자를 하거나 집을 사고 팔 때, ‘이건 고객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비밀정보입니다’라는 말은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정보가 정말 있다면 자기가 스스로 투자해서 돈을 벌 일이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정치인들이 말끝마다 ‘국민을 위해서’라고 되풀이할 때마다 ‘당신이 말하는 국민이 어떤 국민이냐’를 물어봤다(물론 직접 만날 일이 없으니 속으로 자문자답했지만…).
공자는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요즘엔 남을 위해 배운다”고 지적했다. 자신을 위한 배움(爲己之學)은 자신의 덕을 쌓고 지혜를 늘리는 데 힘써 그 배움을 결과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편안함을 이루는 것이다. 반면 남을 위한 학문(爲人之學)은 그런 내적 수양 없이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하는 배움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 형을 내친 연남건과 연남산, 그런 동생에 밀려 저만 살자고 당에게 구원요청한 연남생,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뭇 백성들을 전쟁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김춘추, 백성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비겁을 보여준 선조, 딸과 아들이 엄마와 아버지 가슴을 겨누게 하는 천인공노할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그들은 백성을 위한다는 말을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결국엔 자기 개인의 私慾을 위해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것이었다.
국민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위민정치를 하는 정치가가 누구인지, 국민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정치꾼이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민주주의 주권자인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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