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소녀시대
맛깔나는 영화여행/2004 건방떨기
2011-06-26 15:50:22
<2004년 3월 5일 개봉작 / 한국 / 18세관람가 / 95분>
<감독 : 김기덕 / 출연 : 이얼, 곽지민, 한여름, 권현민>
소녀가 울고 있다. 처음에는 흐느끼는 듯 하더니, 이내 소녀의 울음소리는 통곡으로 바뀌어 간다. 창 너머로 소녀를 쳐다보는 한 남자의 눈길이 쓸쓸하다. 소녀의 울음에 한번쯤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거나, 슬며시 어깨를 내어줄 수도 있을 텐데, 남자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창 너머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소녀의 울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소녀의 울음에 울컥. 내리쳐오는 슬픔. 그것은 어쩌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힘없는 자의 복받침일 수도 있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친구의 죽음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자책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어도, 소녀가 겪어나가야 할 세상은 슬픈 것이고, 평생 지고 가야 할 소녀의 상처는 소녀가 헤쳐나가야 할 험난한 물음이자 대답이다. 그리고, 영화 <사마리아>는 그 대답을 결코 제대로 ‘정의’해 놓지 않는다.
1. 바수밀다 “인도에 바수밀다 라는 창녀가 있었어. 그런데 그 창녀랑 잠만 자고 나면 남자들이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된데.. 날 바수밀다 라고 불러줄래? “ 재영의 말에 여진은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여진은 재영이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것도 말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이끄는 힘은 바로 ‘정의’하지 않는 데에 있다. ‘정의’하지 않음으로 인해, 영화는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끊임없이 갈등 속에 서 있게 만든다. 그 갈등은 ‘판타지’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진이 재영의 원조교제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재영은 여진의 가끔 던지는 걱정스런 물음에 시종일관 웃음으로 괜찮다며 달랠 뿐이다. 그 웃음의 끝에 죽음까지도 있다. 죽은 후에조차 웃음을 멈추지 않는 재영에게 “그만 웃어”라고 말하는 재영. 뭐가 그렇게 좋았길래 재영은 죽은 후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재영의 웃음은 어른들의 잘못된 성윤리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그럼에도, 재영이 웃고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재영의 웃음은 정말로 좋아서,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음 이외에는 다른 삶의 방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뒤에는 경찰이 있고 앞에는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허공에서 우리는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갑작스런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2. 사마리아 “돈 안 받을게요. 지난번 돈도 돌려줄게요. 그럼 편해지죠?” <사마리아>의 두 번째 에피소드, 사마리아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분명, 보상받아야 할 사람은 여진인데, 오히려 여진은 남자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있다. 여진이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만나는 이유? 참, 무책임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자아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사마리아는 아직까지 완전하게 성숙되지 못한 판단력으로 분명 누가 보아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환불’의 방식으로 남자를 용서, 혹은 정화하려는 여진을 통해서 또 한번 질문을 던진다. 누가 여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즈음 <사마리아>는 영기라는, 여진의 아버지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3. 소나타 “인간도 아닌 새끼. 그 어린 게 들어갈 구멍이 어디 있다고...” 사건 현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옆 모텔을 보게 된 형사 영기. 모텔에서 남자와 함께 나오는 여자는 자신의 딸 여진이다. 바수밀다에서는 죽음을, 사마리아에서는 용서를, 그러나 소나타에 와서 영화는 비로소 ‘응징’을 한다. 그러나, 그 응징의 방식조차 또다른 잘못된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사마리아>의 특징이다. 결국, 재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에게 영기가 택한 응징의 방식은 최종적으로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작 여진이 입은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었느냐? 오히려, 상처는 더욱 쌓일 뿐이고, 여진을 위한 아버지의 선택은 여진이 혼자서 길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비에 젖은 진흙길을 걸어서 오든, 차를 몰고 오든 그것은 재영이 헤쳐나가야 할 몫인 것이다. - 그러니까, 세상은 재영을 죽음으로 몰고갔고, 여진은 재영을 죽인 그들을 용서하고자 했지만, 또다른 세상에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또다른 해석도 있다. 재영인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여진은 재영의 흔적을 더듬고 싶어서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다시 만난 것이고, 영기는 여진이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분노를 표현해야만 했다. 해석이야 분분하겠지만, <사마리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함부로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느낌을 분명 한가지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는 없는, 가슴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감동이라는 것이다.